아래 글 중 두산우1승님이 쓰신 댓글을 인용합니다
"사울팽이 대족장이 되면 호드가 멸망하게 되겠죠. 볼진에 의해 실바나스가 대족장이 된 이유가 곧 사울팽이 대족장이 될 수 없는 이유기도 합니다. 만약 사울팽이 부서진 해변 전투를 실바나스 대신 이끌었다면 그곳에서 후퇴하지 않았겠죠. 명예롭게 싸우다 죽는 것이 사울팽이 중시하는 가치고, 실제로 사울팽이 참여할 로데론 공성전에서 정확히 그렇게 행동하는 모습이 괜히 나온 게 아니겠죠. 그리고 호드는 전멸하고 뒤이어 얼라이언스도 전멸하게 됐을 테니.."
사울팽은 쓰랄의 "명예와 긍지"를 알고 이를 실천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 중 하나입니다. 그의 명예에 대한 집착과 신념은 안퀴라즈 전쟁 당시의 활약으로 얼라이언스 유저에게도 호감을 샀고 가로쉬 헬스크림의 조언자로서도 활동했고 또 가로쉬 헬스크림을 대족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때도 뛰어든 인물입니다. 여러모로 호드의 귀감이지요.
그동안 사울팽이 대족장의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의견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어쩌면 타당하기도 하고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는 부분인 것이, 우리 인간이 실제 살아온 역사 속에서는 나이가 연로하면 그 후세에게 권력이나 왕위를 이양하는 경우가 지배적이었지만 워크래프트 세계관은 실제 인간사에서 영감을 따왔을지 몰라도 명백한 가상의 세계관이고 나이가 들어도 더 노련해지는 종족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울팽은 죽음의 힘을 다루던 리치왕의 졸개 상태의 아들에게 밀렸을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서도 밀리거나 나약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저는 글의 서두에 언급한 두산우1승님의 댓글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호드가 명예롭게 싸우고 명예롭게 싸우다가 죽는 건 쓰랄의 은혜를 입은 종족들에게는 정말로 거대한 가치일지 모르지만 가로쉬 헬스크림이나 실바나스 윈드러너는 이러한 명예보다는 같은 종족의 생존을 더 추구했습니다. 가로쉬 헬스크림이 처음 먼지진흙 습지대에 당도했을 때 했던 말이 이렇습니다. "이 곳에는 물과 나무가 많아 우리 백성들이 살기 적합하다. 이곳을 취해야 한다(코믹스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원본과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쓰랄이 황무지에 호드의 도읍을 세운 것은 어버이 세대가 아제로스 행성에 저지른 것에 대한 과오를 반성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듀로타와 오그리마에 거주하는 오크들에게는 큰 불만사항일 수 있지요. 그래서 쓰랄은 노스렌드 원정을 거치면서 계속 같은 오크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노스렌드 원정의 개선장군인 가로쉬 헬스크림에게 오크의 지지가 몰리는 것을 신경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대격변의 전조> 소설에서 제이나가 잿빛골짜기에서 산 채로 온 몸의 가죽이 벗겨져 나무에 걸려 죽은 나이트엘프 파수대의 진상조사를 요청하자 쓰랄이 이를 거절하는 장면도 나오지요.
볼진은 현명한 인물입니다. 볼진은 쓰랄과 함께 명예와 긍지를 알지만 한편으로 쓰랄보다는 더 융통성있게 대처하며 제이나가 테라모어 사태로 시련을 겪자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생존에 주안점을 두며 그쪽에 집중하는 실바나스 윈드러너도 크게 평가한 인물이 볼진입니다. 그런데 볼진은 브원삼디의 곁으로 가면서 실바나스를 대족장으로 선택했고, 그 선택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대족장 등극이 그리 좋은 모습만 보여주진 않았습니다. 볼진이 사울팽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었을겁니다. 아시다시피, 사울팽은 부서진 해변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쓰랄은 센티낙스 함선의 지옥광선에 집중 포격당해서 반쯤 실신 상태, 볼진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고 바인과 다른 인물들은 악마와 싸우기 바쁜 이때 호드의 생존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건 실바나스입니다. 이때 실바나스 대신 사울팽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사울팽은 죽음이 두려워 후퇴할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요. 말하자면 사울팽은 전사거나 군대의 지휘관으로서는 최고의 인물이지만 모든 종족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자리에는 다소 어울리진 않겠다라는 것입니다.
실바나스의 모든 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호드의 생존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부분입니다. 사울팽이 실바나스가 추구하는 가치에 반감이 있어 호드로 복귀하지 않고 스톰윈드의 볼모 신세에 만족한다고 해도 다른 호드의 인물들이 사울팽과 같이 실바나스에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트리그는 실바나스의 명으로 아라시 고원에 나가 얼라이언스의 장군인 다나스와 대립하며 전쟁에도 참여합니다. 그 밖에 많은 인물들이 실바나스를 대족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리자드가 실바나스를 레이드보스로 일찌감치 정해놓고 숙청하는 전개가 아니라면 실바나스의 생존방식에 대해서도 긍정해볼만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