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야. 잠이 덜 깼어?"
"아. 응. 응."
"친구 앞에서 쪽팔리게 이러지 말자?"
"응. 응."
누스밤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난 멀록을 계속 힐끔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누스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내 귀에 들리는 건 없었다. 멀록만이 보였고, 멀록만이 전부처럼 느껴졌다. 면바지에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을 뿐인데 내 눈에는 드라마 속 명대사처럼 김태희였고, 전지현이었다.
"멀록. 점심 먹을래?"
"응. 먹어야지. 배고프다."
"제가 살게요."
"너도 같이 갈려고?"
"응? 아. 좀 그런가?"
"아니. 뭐 그럴 건 없는데. 멀록이가 민망할까봐."
"아냐. 괜찮아."
"그럼 가자."
누스밤과 멀록이 앞장을 섰고, 난 그 뒤를 주인 따라다니는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누스밤은 자신의 옆에 와서 서서 같이 가자고 손짓 했지만 난 그저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뒤에서 보는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 날 전혀 의식하지 않고 누스밤과 대화를 나누며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왠지 날 가끔씩 괴롭히는 두통마저 이 순간은 잠시 나의 첫사랑을 축복하듯 씻은 듯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멀록. 뭐 먹고 싶어?"
"음. 순댓국 맛있다고 그러지 않았어?."
"응?"
"너 그런 것도 먹을 줄 알아?"
"응. 그럼 안 되나?"
"어릴 때의 네 모습만 기억나서. 완전 공주님이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같나. 히히."
멀록은 생각보다 털털한 성격이었다.
"아. 화중씨도 순댓국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좋아해요."
난 순댓국을 좋아한다고 말한 건데도, 왠지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며 부끄러워졌다. 누스밤은 멀록과 이야기를 하다가 날 바라보며 내 이마에 손을 댔다.
"너 혹시 열 있어? 또 머리 아픈거 아냐?"
"아. 아니야."
난 황급히 누스밤의 손을 밀어냈다.
"자주 머리가 아프신가 봐요?"
"응. 밤마다 뭘 하는지 학교 와서도 머리 아프다고 징징대곤 해."
"하하. 아니에요. 누스밤이 괜히 오바하는거에요."
"응? 뭐가 또 아니야?"
난 조용히 누스밤의 다리를 발가락으로 꼬집었다. 누스밤은 순간 소리를 지르려다가 내 표정을 보더니 가만히 있었다. 멀록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웃으면서 말했다.
"나랑 가끔씩 전화 통화나 편지 하면서 화중씨 얘기를 참 많이 하더니 정말 둘이 친한가보네. 히히."
"야. 뭘 그런 얘기를."
누스밤은 왠지 모르게 엄마한테 숨겨 놓은 사탕을 걸린 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누스밤이 제 얘기를 많이 했나봐요?"
"네."
"야."
"뭐라고 그러던가요?"
"아.. 뭐.. 맨 입으로 말씀 드리기는 좀 그런데.."
"제가 점심값 낼게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니기에.."
"너희 둘다 그럴래?"
"난 단순히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야."
"난 그리고 점심을 얻어먹고 싶을 뿐이고."
"죽이 잘 맞는구먼.. 내가 왜 멀록이를 불렀을까.."
"큭큭."
"히히."
"너희 그리고 웬만하면 말 놔라. 어차피 다 동갑이고 둘다 내 친구인데."
"얘는. 남자랑 어떻게 맨 정신에 말을 놓냐?"
남자. 남자. 남자. 난 남자란 두 글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분명 날 남자로 보고 있었다.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헉. 화중씨 술 잘 드세요?"
"뭐 잘 먹는 건 아닌데 분위기가 왠지 소주 한 병 시켜야 할 거 같아서요."
"히히."
멀록과 난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누스밤은 황당하다는 듯 우리를 바라봤지만 금새 한숨을 쉬고는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으.."
"화중. 너 귀엽다. 나랑 친구 할래?"
"친구?"
"응. 친구."
"그래. 친구 좋지. 처음에는 다 그렇게 하는 거라더라."
"응? 뭔 소리야?"
"아. 아니야. 술 취했나. 헛소리를 다 하네."
"히히. 그럼 오늘부터 나랑 말 놓는 거다?"
"그래. 아. 대낮부터 누가 술 먹자고 한거야.."
"니가 그랬자 나. 히히."
"그래? 큭큭큭. 어우."
누스밤은 묵묵히 술을 마시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은 기분 탓이려니 생각 했다.
"작작 마셔라. 술들도 얼마 먹지도 못하네."
"잔소리 쟁이."
"대학 생활의 로망을 모르는구나."
"얼씨구. 이것들이 이제 쌍쌍이 날 갖고 놀려고 드네?"
"쌍쌍.. 하니까 쌍쌍바 먹고 싶다."
"친구! 밥값은 자네가 내니까 내가 쌍쌍바 사줄게!"
"콜!"
그렇게 우리 셋은 친구가 되었다.
「그날 우리는 소주 몇 병에 취해서 친구가 되었어요. 잔뜩 술에 취해서 당신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그런 우리를 누스밤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죠. 당신을 알게 된 것은 고작 몇 시간 전이었는데, 그렇게 우린 너무나 급속도로 가까워졌죠.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비록 친구 이상의 이름을 가질 수는 없던 시간이었지만,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있었고, 당신을 웃게 해 줄 수 있었으니까요. 정말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화중의 편지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