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이른바 '도파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빠르게 자극적인 부분이 나와야 하고, 10초 안에 영상의 핵심이 없으면 가차 없이 스크롤을 넘겨버리는 세상입니다. 자극적이고 빠른 시대에, '드래곤 퀘스트7 리이매진'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 시대가 바라는 것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긴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게임을 두고 "현대 옷을 입은 낡은 유물"이라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빠르게 도파민을 채워주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입에 맞지 않을테니까요.
드래곤 퀘스트의 아버지 '호리이 유지'는 자신의 게임 철학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싶을 때는 패스트푸드를 찾지만, 가끔은 긴 시간을 들여 '풀코스'를 즐기고 싶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JRPG는 바로 그 풀코스입니다. 다음 접시에 무엇이 담겨 나올지 설레며 기다리는 시간, 그 과정 자체가 요리의 맛이니까요."
'드래곤 퀘스트7 리이매진'을 제대로 즐기고 싶은 분이라면 이런 마음가짐으로 게임을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들이고,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주는 이야기들을 맛보고 완결을 지으면, 이 게임은 인생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남게 될 겁니다. 하지만, 빠르고 자극적인 맛을 바란 분에게는 긴 고역처럼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
이 게임에 대한 평가는 시스템의 완성도를 넘어, 식탁 앞에 앉은 당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40주년을 맞아 다시 차려진 풀코스 요리. 과연 2026년의 당신에게는 어떤 맛으로 다가올까요?
'돌 룩'으로 빚어낸 잔혹동화, 그 위를 수놓는 아름다운 선율

게임의 막이 오르고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는 것은 단연 일취월장한 그래픽입니다. 프롤로그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기존의 게임들과는 확연히 다른, 독창적인 화풍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이는 이번 작품을 위해 개발사가 새롭게 고안한 이른바 ‘돌 룩(Doll Look)’ 기법 덕분입니다. 실제 인형을 먼저 제작하고 이를 토대로 3D 캐릭터를 디자인했다는 개발 비화처럼, 화면 속 등장인물들은 마치 정교한 피규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아기자기함을 뽐냅니다.
인물뿐만 아니라 배경과 각종 오브제 역시 놀라운 퀄리티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비록 원작을 경험해보지 못해 과거의 설정이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시각적인 측면에서는 '고전 게임'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낡은 느낌은 완전히 지워졌고, 그 자리는 현대적인 세련미가 빈틈없이 채우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이 게임의 서사와 만나 독특한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드래곤 퀘스트 7> 특유의 무거운 스토리가, 마치 동화 속 인형 같은 캐릭터들을 통해 펼쳐지면서 한 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인형극'을 관람하는 듯한 묘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시각적 만족감 못지않게 청각을 파고드는 음악 또한 일품입니다. 처음에는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인지하지 못하다가도, 어느 순간 귓가를 맴도는 수려한 선율에 "아, 음악 정말 좋다"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서 게임 중간에 드래곤 퀘스트의 BGM에 대한 정보, 작곡가 등을 를 따로 찾아보기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운드트랙이 훌륭해 기억에 남는 '인생 게임'들이 몇 있는데, 이번 작품 역시 그 목록의 한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눈과 귀를 동시에 사로잡는 이러한 요소들은 플레이어를 게임 속 세상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3시간의 악몽'은 없다, 쾌속으로 질주하는 모험

이번 리뷰를 위해 자료를 조사하며 가장 우려했던 부분은 원작의 악명 높은 초반부였습니다.
"첫 슬라임을 만나기 위해 3시간 동안 퍼즐만 풀어야 했다" 같은 이야기는 시작 전부터 겁을 주기에 충분했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 작품에서 그 '통곡의 벽'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딱 "이제 슬슬 전투 좀 해보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 찰나, 기다렸다는 듯 첫 슬라임이 등장했으니까요.
게임의 전반적인 속도감 역시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인의 정서에 딱 맞는 '빨리빨리'에 가까웠습니다. 불필요한 동선을 쳐내고 명확한 목적을 향해 '다음, 다음'으로 직관적으로 내달렸습니다. 달리기 기능까지 준비되어 있어 게임을 켜는 순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높아진 편의성은 '모험의 맛'을 흐릿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게임이 철저하게 선형 구조로 이루어진 데다, 화면에 떠 있는 퀘스트 마커가 친절하게 갈 길을 안내합니다. 목적지가 명확하다 보니 굳이 마을 구석구석을 탐험하거나, NPC와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들이 마치 불필요한 행동처럼 느껴집니다.
광활한 오픈 월드였다면 "어디든 가보자"라는 모험심이 앞섰겠지만, 매 퀘스트마다 번쩍이는 느낌표는 '관광버스'에 타고 있는 내가 들려야 할 이정표 같이 보였습니다. 창밖의 풍경을 음미할 새도 없이 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바쁜 관광객이 된 기분이랄까요. 만약 이 게임이 차려놓은 세계를 온전히 즐기고 싶은 분이라면, 친절한 이정표를 무시하고 여유롭게 둘러보면서 게임을 진행하는 걸 추천하고 싶습니다.



개선된 전투 시스템,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손맛'
이번 작품의 전투 시스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단연 '숫자'입니다. 기존 4인 체제였던 파티 인원이 5명으로 늘어났는데, 턴제 JRPG에서 가용 인원이 한 명 늘어난다는 것은 단순한 화력 증강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전술적 선택지가 대폭 늘어난 덕분에 딜러와 힐러, 버퍼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한층 유연하고 과감한 시도가 가능해졌습니다.
보는 맛 또한 놓치지 않았습니다. 검을 휘두르거나 주문을 외울 때의 연출은 화려하면서도 경쾌하며, 특히 회심의 일격(크리티컬)이 터질 때의 화면 이펙트와 타격감은 턴제 전투의 정적인 분위기를 환기해 줍니다. 여기에 전투 속도를 높여주는 '배속 모드'와 피로도를 낮춰주는 '자동 전투' 시스템은 현대 게이머를 위한 필수적인 배려로 다가옵니다.

특히 칭찬하고 싶은 것은 자동 전투 AI의 놀라운 지능입니다. 멍청하게 일반 공격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군의 상태 이상을 칼같이 해제하고, 체력이 낮은 몬스터를 점사(일점사)해 확실하게 끊어내는 등 매 순간 최선의 판단을 내립니다. "내가 직접 조작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똑똑한 AI 덕분에, 턴제 전투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반복 플레이의 피로감을 획기적으로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아무리 편의성을 높여도 '지루함'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시스템의 근간이 90년대 식 정통 커맨드 배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수백 번 마주치는 몬스터들을 매번 같은 방식으로, 그것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과정은 결국 '고역'으로 변해갑니다.
플레이하는 내내 "아, 여기서 적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눌러 패링을 하거나, 공격 시 QTE(버튼 액션)로 추가 피해를 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습니다. 이미 다양한 현대 명작들이 증명했듯, 턴제에도 긴박감을 불어넣을 방법은 충분히 존재합니다. 위기감도, 손끝의 짜릿함도 없는 전투. 도파민을 좇는 2026년의 게이머들에게 이 '슴슴한 맛'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군살을 뺀 다이어트?’ 원작 팬이라면 아쉬울 요소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이번 작품의 방향성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작품은 ‘더하기’보다는 철저한 ‘빼기’를 선택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직업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편입니다. 원작의 직업 테크트리가 개편되어 직업들의 숙련도를 올리고 이를 조합하여 상위직과 마스터직을 해금하는 직관적인 방식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덕분에 육성의 피로도는 줄었지만, 수많은 직업을 파고들던 깊이감은 다소 얕아졌습니다.
서브 콘텐츠도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카지노', '이민자의 마을', '몬스터 파크'와 같은 즐길 거리들이 이번 작품에서는 대거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개발사의 의도는 명확하게 '메인 스토리'로의 집중에 맞춰져 있습니다. 불필요한 노가다 요소를 줄여, 누구나 엔딩이라는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진입 장벽을 낮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게임을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원작의 향수를 그대로 느끼고 싶었을 팬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소식입니다. 원작 팬들에게는 달라진 모습에 '내가 알던 네가 아닌데?'라며 실망할만한 요소일수도 있을 겁니다.
슴슴하게 다음 입을 당기는 '평냉' 드래곤 퀘스트7 리이매진

이 질문에 저는 "그렇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비록 시스템은 낡았고 콘텐츠는 줄었지만, 이 게임이 가진 가치는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드래곤 퀘스트7 리이매진’은 아기자기한 인형극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가장 적나라한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여운을 남깁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스토리가 가진 힘입니다.
이 진국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을 견딜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자극적인 조미료에 익숙한 혀로는 처음에 "이게 무슨 맛이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석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추듯 이야기의 레이어(Layer)를 천천히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이 투박한 그릇에 담긴 깊은 육수 맛에 매료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