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다.
음악만이 나의 친구라 여기며,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 울부짖을 때. 나 때 사람들은 보통 미니홈피 어드메에 염세적인 가사를 적어두고 세상은 다 썩었다며 우울해하거나, 교실이 떠나가라 샤우팅을 질러대며 득음을 노리곤 했다. 그리고 다섯 명 중 한 명은, 건즈 앤 로지스나 키스의 노래를 들으며 자기들은 대중가요를 듣는 남들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다들 애아빠가 되어버린 지금 와서 그 때 얘길 꺼내면 죽일듯이 노려보긴 하지만 말이다.
싸이월드가 한 번 사라졌음이 고마워지는 다크한 역사들이긴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시대를 불문하고 음악은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 출퇴근길에 듣는 대중 가요도,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터져나오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긴장 넘치는 협주도, 양말을 신으며 흥얼대는 양말송도 죄다 음악이다.
그리고, 당연히 미디어믹스의 끝판왕인 '게임'에도 음악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다. 한 해가 다 끝나갈 때, '올해의 게임 음악'이란 상이 시상되는 이유는 별게 아니다. 그만큼 게임에서 음악이 중요하니까. 요즘은 게임 음악만 따로 떼서 오케스트라 연주도 자주 하지 않나.
하지만, 게임에서 음악은 결국 게임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장치다. 점프슛의 왼손처럼, 음악은 그냥 게임을 거들 뿐이다.
그러나, 때로는 음악 그 자체가 게임이 되기도 한다. 리듬 게임처럼, 그리고 '피플 오브 노트' 처럼.
리듬 게임 아니라 RPG라니까요?
직역하면 음표 인간.
'피플 오브 노트'는 스토리 중심의 RPG 게임이지만, 게임의 모든 요소가 음악과 얽혀 있는 게임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케이던스(Cadence, 종지)'. 팝의 도시인 '코디아'에서 벌어지는 음악 배틀인 '음계대전'에 출전하기 위해 오디션을 봤지만, 혹평을 듣고 득음을 위해 세계 곳곳을 떠도는 소리꾼이다. 음계대전의 우승을 위해 세계 곳곳의 다양한 음악을 만나고 동료들을 모아 밴드를 만들어가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가 '피플 오브 노트'의 주된 흐름이다.

물론, 이 서사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방식은 앞서 말한 'RPG'다. 전투, 그리고 성장 요소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피플 오브 노트의 세계에는 놀랍게도 음악의 자연적 조화를 깨기 위한 어둠의 음악가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케이던스와 동료들은 자연스럽게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전투의 방식은 턴제 RPG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리듬 게임의 요소를 일부 접목한 형태다. 33원정대의 공격 판정 QTE와 비슷하면서도, 박자감을 살려야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박자를 잘 맞추고 못 맞추고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질 전투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차이는 있다.

장비나 스킬 시스템 또한 죄다 음악과 엮여 있다. 가령 '케이던스'는 따로 악기를 다루지 않는 보컬리스트이기에 악기 대신 마이크를 무기 칸에 장착한다. 반면 기타리스트인 '프렛'은 역할대로 기타를 장착해 줘야 한다.
피플 오브 노트의 전투 중 특징적 부분은 공격을 받을 때마다 모이는 '메시드 업'포인트를 활용한 협주 공격이다. 게이지가 모두 찬 캐릭터들이 복수일때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공격으로, 케이던스가 기본적으로 목소리로, 프렛이 기타 리프로 공격을 가한다면 메시드 업에서는 기타 반주에 어우러진 보컬로 상대를 공격한다. 이 메시드 업이야말로, '피플 오브 노트'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가장 압축한 형태인 셈이다.

"너는 록 스피릿이 부족해, 꺼져" (게임 속 대사)

하지만, 이런 RPG적 요소들은 아무리 변조한다 해도 기존 RPG의 틀을 크게 깰 수는 없다. 냉정하게 놓고 보면 그냥 저냥 할 만한 RPG 게임이란 뜻인데, 여기에 매력을 더하는 부분이 바로 '음악' 그 자체다.
피플 오브 노트의 모든 세계는 음악을 형상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모 버전에서 플레이하게 되는 락의 도시 '듀란디스'는 진입하자마자 여러 구획으로 박살나 있는 형태를 볼 수 있는데, 한 때는 다들 아마추어 밴드로서 음악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펑크 락과 그런지 락을 듣는 이들이 나뉘면서 서로를 배척하게 되어버렸다는 기묘하게 현실적인 배경 서사가 있다.
듀란디스에서 만나게 되는 동료인 '프렛'은 이미 도시에서 클래식이나 듣는 꼰대 영감탱이 취급을 받고 있는 상황. 여기에 '홈스테드'라는 요상한 집단이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침공해 컨트리 음악을 강요하고 있는 혼돈스러운 시점에, 케이던스는 프렛을 영입하기 위해 프렛과 함께 프렛의 이전 동료이자, 이제는 악의 베이시스트(?)가 되어 버린 '퀸시'를 설득하는 길에 나선다. 이 와중에, 진짜 강철 대가리로 등장하는 메탈헤드와 고집불통 락커들을 상대하는 건 덤이다.

말만 듣고 보면 뭐 이런 요상한 세계가 있을까 싶지만, 바로 이 점이 '피플 오브 노트'의 매력이자, 시스템적 차원에서 만들어내지 못한 다른 RPG와의 극명한 차별점을 불러오는 요소다. 데모 버전에서는 듀란디스의 이야기만 그리고 있기 때문에 '루미나'에서 겪게 될 EDM의 이야기나, 이어질 힙합 배경의 서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마 이 모든 구역들 또한 음악적 풍자와 유머로 가득 차 있으리란 건 안 봐도 알 수 있다.
세계관을 관통하는 음악이라는 주제가, '피플 오브 노트'의 가장 큰 차별화 요소인 셈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귀는 확실히 즐거운 게임
다시 객관화 모드로 시선을 변경하면, 피플 오브 노트는 RPG 게임으로서 굉장히 대단한 게임은 아니다. 33원정대처럼 빠져드는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며, 발더스 게이트처럼 캐릭터에 몰입할 만한 자유로운 진행이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미니맵의 부재나, 레벨 디자인, 시인성 등에서는 다소 아쉬운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듣게 되는 고퀄리티의 BGM, 그리고 메인 메뉴부터 게임 내 모든 요소에 얽혀 있는 '음악'이라는 대주제가 흐트러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게임은 충분히 재밌다. 간혹 등장하는 뮤지컬적 요소가 돋보이는 컷씬만 본다 해도, 이 게임을 플레이할 가치가 느껴질 정도다.
물론, 음악이라는 주제가 게임을 지배하는 컨셉 때문에, 음악에 별 흥미가 없는 게이머라면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딱히 음악에 미치지도, 특정 음악을 애호하지도 않는 그냥 대중적 누렁이 입맛의 나로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재미는 충분했다.

정 궁금하면, 한 번 해보면 된다. 현 시점에서는 1시간 30분 정도 분량의 데모 버전을 무료로 플레이할 수 있으니까. '피플 오브 노트'는 오는 4월 7일 출시될 예정이다. 본격적인 게임에 들어가기 앞서, 내면을 리드미컬하게 꾸며 두기에는 데모 버전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