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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그곳에 있는 것.

아이콘 olli
댓글: 4 개
조회: 360
추천: 3
2006-12-06 10:48:28

포루토벨로에서 받을 수 있는 '꽃에 취하여' 퀘스트를 해보셔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잡문입니다.
뭐...그래도 보기 힘드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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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의상. 검은 피부.
짙고 뻣뻣한 머리. 깊은 눈.

스스로 세비야 태생이라고 밝히지 않았다면 절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내가 한때는 같은 땅을 딛고 서서, 저무는 태양을
사모했다는 사실을. 어쩌면...어쩌면 우리는 같은 배에
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함께 대양을 누비고, 해적과
싸우고, 미지를 찾아 험난한 길을 자처하는. 역사에 남을 동료로...

그러나 현실에서의 그는 신대륙에 정착해버린 주점점원이고,
나는 아직도 찾지 못한 꿈을 찾아 쉴세없이 모험가 조합의
문을 두드리는 뜨내기 모험가에 불과하다.

우리는 밤새워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술을 마신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

떠나온 곳, 도착한 장소. 이루지 못한 꿈, 앞으로의 희망.
또 과거의 편린. 추억이라고 말하는 것.

라울은 고국에 아주 예쁜 여자친구를 두고 왔다고 했다.
한순간 반짝하고 피었다 사라진 꽃처럼, 그렇게 짧았던
그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차라리 울었다면 좋았을까.

라울은 가만히 은화가든 주머니를 탁자위로 밀었다.
한번 더 그 추억을 사겠노라고.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풍경이 그녀의 망상은 아닐거라고,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보수가 많은 것도, 큰 명예가 걸린 일도 아니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움직인 것은 램프에 비친 라울의 조용한
미소였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실날같은 단서를 추적해,
지루한 항해가 이어졌다.


포루토벨로에서 산토도밍고, 다시 런던으로.
몇 달에 걸친 항해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런던의 주점 마스터였다.

그는 라울이 묘사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장소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곳이 라울이 찾던 곳일까. 머나먼 북해의 명소가
평생 세비야를 벗어나지 못한 소녀의 귀에도 들어갈만큼 유명한
곳이었을까. 이제는 내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런던을 돌아, 잉글랜드 본토를 또 며칠이나 항해해 알려준 좌표의
만에 상륙하고 얼마 들어가지 않아...마스터가 말했던 장소와
맞닥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벚나무였다.
너무 늦은, 혹은 이른 계절에 아무것도 없이 거미줄같이
뻗은 앙상한 가지를 드리우고.
마녀의 주름진 손과 같은 껍질에 감싸인 두툼한 줄기는 금방이라도
등을 돌려 달아나고 싶게 만들었다. 아름답기는 커녕 을씨년스러운
광경에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였다. 절대 들릴리 없는 목소리가 옷자락을 끌었다.
놀라 뒤돌아 보는 순간, 산을 넘어가던 마지막 햇살이 나무 아래
묻혀 있던 돌을 불태웠다.

태양의 색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노랑? 빨강? 그것도 아니면 백색?
햇살을 머금은 돌이 그 모든 색을 난반사시켰다. 앙상한 가지 가득
빛의 꽃이 피었다. 화사하게 만개한 벚나무. 그 속에 떨어지는 꽃잎과
같이 미소짓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저무는 해와 반짝이는 돌이 보여준 환상은 해가 저 산을 넘어간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주위는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황량해졌다.

그 길로 런던으로 돌아와 쉬어빠진 맥주를 마시며, 다음 정기선편에
부칠 보고서를 썼다. 그 옛날 소녀가 보고 싶어 한 광경은 사실로 존재했다.
거대한 벚나무와 빛을 반사하는 바위. 분명 꽃이 피는 계절에는 훨씬
더 아름다울 것이다. 결정적인 제보자인 주점 마스터는 이렇게도 말했다.
벚꽃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돌도 돌이지만, 그 아래...

순간 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을 쓰려는 것일까. 시체? 추억을 괴담으로 바꿀 셈인가?
하지만 내가 본 광경은 유령의 장난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물론 세비야에서 오래전 죽은 그녀가 잉글랜드의, 그것도 외진 곳에
묻혔을 리는 없다. 모든 것이 라울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인 나의
상상력 탓이다.

잠시 펜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거의 다 썼던 보고서를 구기고
처음과 똑같은 것을 새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약 마지막 문장을
제외하고.

그 꽃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던 것은, 라울.
당신의 그리움이 거기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런던에서.
포루토벨로의 라울에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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