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마리안트 씨! 이렇게 마중 나오실 필요는 없으시잖아요!”
“헉! 헉! 마... 마스터! 큰일 났어요! 닷새 전부터 왕궁에서 사람이 와서 마스터를 찾는 거에요! 안계시다고 거듭 말하는데도 길사 앞에서 고집을 부리는데, 그 사람 말로는 즉시 왕궁으로 가자는데요?”
“네?!”
마리안트의 말을 들은 루시오는 즉시 교역품 정리는 부관들에게 맡기고 아파트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고, 길사 앞에서 버티고 있는 궁정의 하인과 같이 왕궁으로 향했다. 상단의 일원이 된 후 루시오의 호위를 자처한 르담리아도 같이 말이다.
“혹시 안토 상단의 새 마스터인 루시오 양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브라간사 공작님. 저 무슨 일이신지? 무슨 부탁이라도...”
“아, 그게... 폐하께서 루시오 양을 만나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같이 따라오신 분은 잠시 여기서 대기하시고 절 따라오시지요.”
“전, 마스터의 보디가드에요! 같이 가게...”
“폐하께서 단독으로 루시오 양과 알현하시겠답니다. 저 조차도 이런데...”
“르담리아 언니. 걱정 말아요. 살아서 돌아올께요.”
르담리아의 걱정을 뒤로 하고, 루시오는 브라간사 공작과 함께 알현실로 들어오게 되었다.
“폐하! ‘안토’상단의 새 마스터인 루시오 양을 데리고 왔습니다!”
“고맙소. 공작. 그보다... 루시오 양을 제외하고 잠시만 나가주시면 안 되겠소? 루시오 양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브라간사 공작과 시녀들이 모두 물러나간 후, 알현실에는 국왕과 루시오만 남게 되었다.
“폐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실은... 다름이 아니라... 5년 전의 대사건 때, 그 당시 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왕실의 법도만 배우던 철 없는 왕세자였어요. 모든 권력은 ‘반역자’ 카리쿨라와 그 수하들, 그에게 결탁한 유력 귀족들에게 독점을 한 탓에 부왕은 제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소이다.(슬쩍 주변을 돌아본 후) 잠시 짐을 좀 따라와 주겠소?”
국왕의 말에 다소 어리둥절한 루시오. 그저 국왕을 따라 가니 정원까지 다다랐다. 왕궁 내에서도 거의 외진 곳이라 숨어서 엿듣거나 엿보는 사람도 없는 곳인데...
“폐하. 대체 여긴...!”
순간 다음 말을 말하지 못한 루시오. 앞장 가면서 이상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국왕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루시오의 정면에서 손을 잡고 눈물까지 보이면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바람이나 쐴까하고 리스본 거리를 변장하고 지나가던 중, 카리쿨라를 향해 정면으로 비판한 그대를 보고 나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고, ‘즉위하면서 이 왕국을 개혁해 대 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이런 생각만 하고 있었소이다.”
국왕의 말에 놀란 루시오. 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얼른 손을 치우고 싶어도 오히려 더 굳게 들어간 손과 그리고 이어진 국왕의 말에 더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내 현실이란 큰 바위 앞에 멈추기 마련이외다. 카리쿨라는 마데이라를 자신의 땅 처럼 경영하고, 그의 수하들과 그에게 빌붙은 유력 귀족들은 우리 왕국 전역을 제 집 마냥 드나들고, 이웃에 에스파니아란 후광을 등에 업고, 안하무인마냥 늘어놓고 있소이다! 더 이상 참기 어려워도 어덯게 할 수 가 없는 현실 자체가 나 자신이 나약하기만 하오. 허나, 난 예전부터 그대를 보고 있었소. 그대처럼 강인한 정신과 진실어린 용기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저 매국노, 악당들을 몰아내고 우리 포르투갈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혹시, 여기에 대해서 생각해 둔 이야기가 있으시오?”
“폐... 폐하...?” / “(무릎까지 꿇으면서)어서 말해 보시오. 날 꾸짖어도 좋으니.”
20대 초반의 국왕과 루시오. 그렇게 시작된 둘의 대화는 거의 해가 지고 밤하늘의 달이 중간까지 갈 무렵가지 계속되었다. 그것도 두 사람이 줄곧 서 있던 정원에서. 알현을 마치고 나온 루시오는 옆에 있던 르담리아를 마주 보았다.
“왜 그러니? 내가 뭐 묻었니?” / “언니.” / “응, 말해봐.”
“언니도 베네치아 나왔을 때, 이런 상황이었나요? 네?” / “...”
표정이 약간 굳은 채 주점을 향해 이상한 얘기만 되풀이 하고 있는 루시오를 바라보던 르담리아. 이내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아까 궁궐에서 무슨 일이 난 건가? 아덴, 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짐을 준 거니?’
●
그로부터 한달이나 지나서, 마르코는 오랜만(?)에 교역소를 찾아갔다. 전 같으면 크리스티나 아니면 루시오에세 심부름으로 갔다오라고 하지만, 크리스티난 이미 수녀가 된 상태이고, 루시오도 알현한 직후, 주점에서 럼주만 마신 채 들어간 후, 소식이 없는지 어쩔 수 없이 혼자 교역소로 온 것이다.
“안녕하신가?” / “아! 어서옵쇼! 마르코씨. 여긴 뭔 일로...”
“하도 답답해서 바람 쐴 겸 겸사겸사해서 왔네만, 햄하고 브랜디, 닭 좀 사겠네.”
“아, 뭐, 기본이지. 자~ 단골이니 20% 싸게 준거요.” / “고맙네. 그나저나... 응?”
“엉? 왜.... 엥? 저... 저게 누구야? 브라간사 공작 다음의 서열을 지닌 페드로 공작이 아닌가? 그리고 그 옆엔 아른 장군과 은행상 토르까지??? 옛날 카리쿨라하고 관계 맺은 자들이 아닌가?”
“이봐요! 주인 양반! 헉! 헉! 소... 소식 들어셨어요? 지... 지금 광장에...”
“광장에? 뭐가... ?! 설... 설마?!”
그랬다. 지금 리스본을 비롯한 포르투갈 전역은 국왕의 전격 발표한 개혁 소식으로 시끌벅적하였다.
첫 알현 이후 국왕은 하루에도 몇 번 씩 루시오를 데리고 오라고 계속 사람을 보내고, 루시오가 없으면 상빈이나 로저, 심지어 왕국에서 상단서열 20위권 안에 드는 길드의 마스터들까지 궁궐로 가는 걸 마르코도 자주 봤건만 이런 결과가 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 동안 카리쿨라에 빌붙어 숱한 권력을 맛 본 유력 귀족들은 개혁으로 하루아침에 관직과 재산을 전부 잃고, 감옥에 아님 유배나 추방, 파문까지 감수해야 했고, 카리쿨라가 포르투갈 대부분의 지역에 두었던 영지들과 리스본 거리의 그들 일당의 상점들과 식당은 몰수당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건, 카리쿨라를 비롯한 ‘쿨라 함대’ 전체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더불어 마데이라와 섬을 기준으로 10리 안팍의 해역을 봉쇄하고 왕국의 주 교역루트를 마데이라에서 아조레스로, 그리고 아조레스 해적단을 사략해적으로 인정함과 함께 해적단 전원을 리스본으로 오라는 칙명까지 내린 것. 이에 따라, 일주일이 안 돼서 아조레스 해적단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리스본으로 그리고 왕궁으로 들어섰다.
이들을 보자 국왕은 크게 기뻐하며, 큰 연회를 베풀고, 루시오와 마리안트, 상빈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왕궁으로 초대했다.
와인이 몇 통이나 돌아갔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먹고 마시는 와중에 국왕은 넌지시 스피아진을 향해 말하였다.
“이렇게 보니, 참 든든해 보입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이런 환대에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는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하는 걸요. 그리고 사실... 사실대로 말하자면.” / “?”
“이런 자리에서 말하기가 그렇지만, 잘 아시다시피 우리 포르투갈의 해군력은 에스파니아보다 현격히 낮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과인이 사비까지 끌어 부왕 때 보다 더 강하고 힘 있는 해군을 육성하려고 안간힘을 쓰긴 하지만, 어찌된 건지 병력과 선박은 확충하는데, 인재가 없습니다. 뜻있는 자들은 이미 프랑스나 잉글랜드로 간 상태이고, 해서, 가능하신다면 해군사관으로 임명하고 싶은데...”
순간 연회장은 잠시 경직되기 시작하였다. 사략해적으로 인정한다는 글이 내린지 일주일 만에 해군 사관이라니! 이 분위기를 이미 안 건지 스피아진은 방긋 웃으면서,
“폐하, 죄송하지만 전 사략해적으로도 너무 과합니다. 아직 제 가족들과 이 나라의 국민들을 죽이고 노예로 부린 철천지원수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 언제든 이곳을 노리고 있는데, 해군사관이라니요? 더군다나 제가 타국 출신이라서, 원수를 토벌하기도 전에 자칫 주위 사람들의 원망을 받아 원수를 갚지 못하고 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 스피아진 선장, 우리 해군은 너무 빈약합니다. 제발...”
국왕의 애원에 한참 생각하고 고민하던 스피아진, 주위의 시선이 그녀를 향한 상태에서 분위기를 깨고 말을 한 사람은 루시오의 옆 자리에 있던 마샤.
“저... 폐하,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저희가 상의를 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겟습니다.”
“그런가? 그럼... 내 사흘간의 시간을 주겠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 “네. 폐하.”
그리고 사흘 후, 루시오와 함께 왕궁으로 간 스피아진과 마샤는 국왕을 알현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그 내용은, 해적단은 사략해적으로 유지하되, 마샤와 데미안, 이드, 안드와 부장급 30여명, 병사의 7~8할이 해군에 편입된 것이고, 특히 마샤는 국왕의 명령으로 해군 대위에 사관으로, 덩달아 르담리아와 데미안도 각각 해군 중위와 소위에 임명되었다.
나머지 인원 중 베니스는 이전에 르담리아가 베네치아의 상황을 전해들은 터라 베네치아에 남은 것을 가지고 오는 한편, 해적단을 탈퇴하고 ‘안토’ 상단의 일원으로 들어왔으며, 스피아진을 비롯해 일부만 사략해적이 되어 이후부터 한참동안 에스파니아와 마데이라, 아조레스의 해적들을 잡으면서 힘을 키우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편, 마데이라에서는 그야말로 난리다. 카리쿨라에게 빌붙은 리스본의 유력 귀족들과 카리쿨라의 부하들은 대부분이 숙청당했고, 그 동안 쌓아 온 육지의 기반들은 완전 사라졌으며, 교역 루트가 마데이라에서 아조레스로 옮긴 탓에 수입은 적어졌고, 지출은 많은 탓에 적자가 엄청나게 나오고 있었다. 또한 주변 해상은 포르투갈 해군에 의해 막혀 밖으로 나갈 수도,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다.
여기에 ‘반역자’로 낙인 찍힌 카리쿨라에게 현상금이 무려 5천만 두캇이 붙었고, ‘쿨라 함대’는 더 이상 포르투갈과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베네치아의 본거지 및 영지와 주변 항구에 정박할 수 없고, 그 함대를 발견해서 섬멸한 유저 해적들은 사면한다는 교황의 칙명까지 떨어져 이건 뭐, ‘너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아직 리스본에 미련이 남아 있던 카리쿨라는 섬을 탈출하려는 주민들을 가두고, 포르투갈 함대의 포위망을 뚫고 전 해역에서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다음의 전령을 보냈다.
-알바 공이 있는 에스파니아의 발렌시아로 갈 테니, 즉시 마데이라 앞으로 모두 모여라! 가는 도중에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무조건! 무조건! 파괴하고 약탈하라!!! -
그렇게 카리쿨라의 편지를 받고 각 지역에서 약탈하고 있던 ‘쿨라 함대’들이 마데이라 근해로 모여들기 시작, 전운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