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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시 쓰는 마영전]별의 불꽃. 7

그락란라우
조회: 1208
추천: 1
2015-07-26 03:44:35

 

 

  하얀 로브가 마치 뱀처럼 움직인다. 움직이는 로브의 끝자락에 튀어나와있는 잿빛 비늘로 뒤덮인 꼬리는 로브의 주인이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의 시선은 무너져 내리는 낡은 종탑을 향하고 있다. 

 

  종탑에서 새하얀 털을 가진 거대한 거미가 날뛰고 있다. 그는 온순했던 거미가 미친 것처럼 날뛰는 이유를 알고 있다.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늘을 부딪쳤다. 로브가 비늘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맞춰 펄럭인다. 비늘 덮인 손을 움켜쥔다. 

 

  아직 완성 된 기술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거짓을 말한 건 아니다. 로브를 입은 자가 고개를 돌렸다.

 

  비늘로 뒤덮인 도마뱀의 얼굴이 나무로 우거진 숲속을 노려보았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감추는 데 능숙한 자다. 인간이라면, 마족이라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죽어버린 기척을 사내는 어렵사리 느낄 수 있다. 기척을 죽이며 다가오는 자는 가까이 있다. 그 증거로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샛노란 눈동자가 게슴츠레 감겼다. 곧 숲속에서 털털한 걸음걸이로 인간 여자가 걸어 나왔다. 리자드맨의 눈이 여자를 노려보았다.

 

  인간 여자치고는 제법 큰 키와 살아있는 불꽃처럼 뜨거울 것만 같은 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여자는 활동하는데 지장이 되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지만 퇴폐적인 가슴골과 매력적인 복근을 시원하게 드러내는 짧은 가죽 상의와, 상의처럼 몸에 딱 달라붙으며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날 정도로 짧은 가죽 반바지를 입고 있다. 

 

  태양빛에 그을려 건강한 구릿빛을 띌 것만 같은 옷차림이지만, 여자의 피부는 백반 가루를 뿌린 듯 하얗다. 그녀의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가 하얀 로브의 리자드맨을 쳐다보았다. 리자드맨의 샛노란 눈동자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라지쿰 같은 리자드맨이네? 그런데……, 느낌은 많이 다른 걸? 당신, 불길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네요.”

 

  리자드맨은 말없이 여자를 훑어보았다. 위협이 될만한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무기는 가죽바지에 잘 동여매어진, 과일을 깎을 때 사용하면 좋을 법한 단검 한 자루뿐이다. 리자드맨은 서슴없이 다가오는 여자를 경계했다.  

 

  리자드맨에게 다가가는 듯하던 여자는 리자드맨처럼 절벽 바로 앞에 섰다. 제법 높은 굽을 가진 가죽샌들을 신은 채로는 퍽 위험한 행동이었다. 여자는 허리에 손을 얹은 뒤 절벽 앞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힌 채 리자드맨이 지켜보던 낡은 종탑을 주시했다. 

 

  “어머, 저 거미가 왜 저럴까? 엄청 순한 녀석이었는데? ……처음 보는 마족의 문장을 찍고 말이지.”

 

  여자가 리자드맨을 돌아보았다. 리자드맨은 불길한 기분에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

 

  리자드맨은 발목을 휘감고 있는 붉은 쇠사슬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왼손에 칭칭 감겨있는 붉은 쇠사슬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녀는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딜 가시려고? 잠깐 얘기나 하죠.”

 

  “인간과 할 말은 없다.”

 

  리자드맨이 입을 열었다. 갈라지는 듯하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 여자는 신기하다는 투로 말했다.

 

  “말할 줄 아네? 난 라지쿰이 특별한 건줄 알았는데……. 그건 그렇고, 내가 이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아서 그러는데, 좀 도와줘야겠어.”

 

  “거절하지.”

 

  리자드맨은 여자가 붉은 쇠사슬을 세게 잡아당기는 순간 오른손을 아래로 던지듯 내렸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에 1미터를 가볍게 넘는 하얀 막대기가 쥐어졌다. 

 

  뜬금없이 등장한 막대기를 보면서도 여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한쪽 입매를 말아 올리며 오른손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오른손에서는 왼손에 감겨있던 똑같은 쇠사슬이 채찍처럼 뻗어나갔다.

 

  쇠사슬은 살아있는 뱀과 같이 유동적으로 리자드맨의 손에 쥐어진 하얀 막대기를 낚아챌 것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쇠사슬이 막대기에 닿는 일은 없었다.

 

  쇠사슬이 막대기에 닿는 순간 리자드맨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자는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녀는 뱀처럼 길게 늘어난 붉은 쇠사슬을 손에서 놓았다. 손을 떠난 쇠사슬은 처음부터 없던 물건인 듯 사라졌다. 

 

  여자는 허탈함이 느껴지는 투로 말했다. 

 

  “……이건, ‘공간이탈’이 아니라 ‘도약’에 가까운 힘. 공간과 시간은 신들의 전유물이라고 하던데, 그런 걸…… 저렇게 아무나 써도 되는 거야?”

 

  종탑 쪽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계속된다.

 

  여자는 단정하게 뒤로 묵었던 머리카락을 앞으로 돌렸다. 긴 머리카락은 가죽 옷의 목깃을 스치며 가슴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가죽 옷의 가슴 끈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습기가 많은 날씨다. 여자는 종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거미의 몸에 발리스타의 화살이 여럿 박혀있었다. 여자는 발리스타의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리스타의 사격은 주기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아홉 대밖에 없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무척이나 빠른 연사속도였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연사하면서도 사격은 목표물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정확했다. 결벽증에 걸린 것 같은 정확한 사격. 여자는 사격 지휘자가 누구인지 찾아보려 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뾰로통한 표정을 해보였다.

 

  “여전히…… 자비가 없네요. 솔라리온.”

 

  거미의 몸을 꿰뚫는 발리스타의 화살을 마지막으로 여자는 종탑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던 리자드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생각하던 여자는 문득 눈앞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발견했다.

 

  “겨울이 코앞인데, 가을의 마지막 몸부림이려나? 요새 비가 자주 오네.”

 

  여자는 빗물이 거세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하얀 로브를 입고, 잿빛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의 정체에 대해 곱씹으며 여자는 콜헨 여관의 자신의 방을 향했다. 

 

 

 

 

 

 

 

  티이는 눈을 떴다. 잿빛 하늘이 보인다. 티이는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프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져보니 딱딱한 각질 같은 것이 만져진다. 티이는 머리를 만졌던 손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손에는 붉은 가루가 잔뜩 묻어있었다. 피가 굳어 생긴 가루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티이는 고개를 들었다. 

 

  피오나가 보였다. 

 

  그리고 거대한 거미의 모습도 보인다. 

 

  티이는 거미의 이름을 부르짖으려 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온 발리스타의 화살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자 입을 떼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거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티이는 새파랗게 질려버린 얼굴로 거미를 쳐다보았다. 몸에 수많은 발리스타 화살이 처박힌 거미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피오나가 움직였다.

 

  서두르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발리스타의 화살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도, 거미의 몸을 뚫고 날아오는 발리스타의 화살이 로브자락을 스칠 때도 피오나의 모습에서는 일절 동요나 두려움도 찾을 수 없다. 마치 잔잔한 호숫가를 산책하는 사람처럼 평온했다. 

 

  피오나는 구슬처럼 박힌 거미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거미는 금방이라도 피오나의 몸을 물어뜯을 기세로 그녀를 노려본다. 피오나는 푸른 바다를 담은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로 거미의 시선을 마주한다. 구슬 같은 붉은 눈동자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심지어 콜헨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인 여관보다도 더 큰 몸집을 가진 거미를 마주하는 피오나의 눈에서는 고요함 이외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잿빛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르며 또 다시 발리스타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이번 사격을 맞으면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거미가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동시에 피오나는 거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거미는 머리 아래쪽으로 파고 든 피오나의 모습에 흠칫 떨었다. 

 

  거미의 머리 아래로 파고든 피오나는 거미가 도약하려 몸을 웅크리는 순간 오른손을 주먹 쥐었다. 

 

  거대한 거미의 몸은 한껏 움츠려도 피오나의 긴 다리로는 닿지 않는 높이에 있었다. 피오나의 오른팔이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검은 불길이 거미의 몸을 땔감삼아 피어올랐다. 

 

  멀리서 종탑의 거미를 향해 발리스타 사격을 지시하던 셀브림과 함께 있던 병사들은 갑자기 거미를 불태우기 시작한 검은 불길을 주시했다. 셀브림은 사격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언제든지 다음 사격을 가능하게 준비한 채 셀브림은 불길에 휩싸여 몸을 들썩이는 거미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검은 불이 거미를 태우는 모습에서 셀브림은 경외감에 이를 악물었다. 

 

  ‘이비의 마법인가……? 평소랑은 느낌이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여전히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인걸.’

 

  하지만 셀브림의 칭찬을 받은 이비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종탑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불길을 쏘아보았다. 이비는 놀의 화살에 맞아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에게 먹여주던 포션 병을 떨어뜨렸다. 

 

  “말도 안 돼……. 저건 ‘마나 번’도, ‘마나 이터’ 같은 것도 아니잖아!”

 

  이비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넋을 놓고 검은 불길을 바라보던 용병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이비는 겁에 질린 얼굴로 검은 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소멸하는 별의 심장이 만들어내는……, 검은 불꽃. 저건……, '별의 불꽃'.”

 

  용병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종탑, 그곳에서 피어오른 불길의 중심에 피오나가 있었다. 

 

  피오나는 검은 불이 몸에 달라붙는 걸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검은 불이 그녀의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뒤덮었을 때 피오나는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여 종탑의 바닥과 하나가 된 거미의 모든 다리를 쳐다봤다. 

 

  종탑의 옥상 바닥은 거미의 배 아랫부분을 제외하고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조화롭지 않은 광경이었다. 검게 타오르는 불길아래 깔린 얼음의 모습. 

 

  피오나는 얼음기둥이 마치 조화롭지 못한 종기처럼 솟아있는 거미의 몸통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흐뭇함도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다. 파도가 없는 바다처럼 넓고 깊은 고요함뿐이었다.

 

  거미를 불태우던 검은 불이 사그라졌다. 귀족을 보는 듯 유려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걷던 피오나는 불길이 사라진 거미를 돌아보았다. 

 

  거미는 불에 타지 않았다. 거미의 다리를 속박하던 얼음도 사라지고, 종탑을 뒤덮었던 서리도 자취를 감춘다. 그러자마자 거미는 침대에 누워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노인처럼 힘없이 축 늘어졌다. 피오나는 거미에게 다가갔다. 거미의 눈앞가지 다가간 피오나는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던 손에 쥐어진 긴 칼을 늘어뜨렸다.

 

  칼끝에서 손잡이 끝까지의 길이가 못해도 1미터는 가볍게 넘는다. 그리고 큰 장식은 없지만 아주 세련된 디자인의 검이었다. 검은색을 제외하면 어떤 색깔도 찾아볼 수 없는 단조로운 색감을 가진 칼. 심지어 그 흔한 빛의 반사광마저 찾아볼 수 없어 어디까지가 날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늘어뜨렸던 칼을 피오나는 칼날을 위로 향하게 한 채 쳐올렸다. 얼마나 빠르게 휘둘렀는지 늘어져 있던 칼이 다음 순간에는 높게 들려있는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검의 궤적을 따라 거미의 몸에서 검은 빛이 일순 솟아오른다. 그리고 거미의 몸뚱이는 빛이 반짝였던 머리부터 몸통 끝까지 깨끗하게 반으로 잘렸다. 

 

  거미의 몸체는 한순간에 둘로 쪼개졌다. 절단면은 불에 그을린 것처럼 새까맣다. 단백질 덩어리를 불에 태우는 고약한 남새가 촉각을 자극한다. 속을 뒤집어엎는 악치에 인상이 찌푸려질만 했지만 피오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을 찾아볼 수 없다. 피오나가 텅 빈 손을 내렸다. 아직 숨통이 끊어지지 않은 거미의 반쪽짜리 몸통이 꿈틀거린다. 

 

  종탑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진동한다. 피오나는 반으로 잘려나간 거미의 몸뚱이를 붙잡고 오열하는 여자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던 그녀는 잿빛 하늘을 쳐다봤다. 

 

  옥상보다 더 높은 곳에 커다란 종이 달려있다. 피오나는 종의 위치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종탑의 한가운데 있어야할 종은 살짝 기울어있다. 거미가 날뛴 덕분에 지지대가 기운 것이다.

 

  아슬아슬하다.

 

  지금 저 커다란 종을 받치고 있는 지지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면 종은 반드시 떨어진다. 그것도 거미의 사체와 사체를 붙잡고 오열하는 티이의 머리위로 정확하게. 피오나는 티이를 위험지역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는 생각에 티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종의 지지대가 부러졌다. 피오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커다란 종을 힘으로 받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받아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당황할 이유가 없다. 피오나는 티이를 가슴 앞으로 끌어당기며 꽉 끌어안았다. 피오나는 왼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눈에 보이는 종과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충분히 티이에게 위해가 가지 않도록 받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피오나의 왼팔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던 종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리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을 때 피오나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가 생겼다. 큰 변화는 아니었다. 그저 평소보다 눈이 더 커졌을 뿐이다. 

 

  서 있던 발판이 무너진 순간 피오나의 눈은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눈은 평소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커다란 종과 함께 종탑은 완전히 주저앉았다.

 

  제법 귀를 아프게하는 굉음이었다. 이비를 비롯해 종탑 지근거리에 포위망을 펼치고 있던 병사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미처 귀를 막지 못한 병사들은 한동안 머리를 울리는 이명에 고초를 겪어야했다. 

 

  멀리서 종탑이 내려앉는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의 상황은 포위망을 구성하던 자들 보다는 괜찮았다.

 

  셀브림은 하늘이 떨어뜨리는 빗물을 보며 겨울이 되기 전 가을의 마지막 발악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셀브림은 억수같이 내리꽂는 빗줄기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말했다. 

 

  “철수하자. 상황 종료됐으니까.”

 

  병사들은 시위에 걸어두었던 긴 화살을 제거했다. 셀브림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발리스타를 움직여 철수에 착수했다. 육중한 발리스타의 몸체가 종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셀브림은 무너진 종탑을 슬쩍 쳐다보곤 병사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눈앞이 흐릿하다. 이비가 주었던 안경을 잃어버린 듯했다. 확인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안경은 어딘가로 날아갔다. 피오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다.

 

  “읏……!”

 

  몸에 힘을 주자마자 신음소리가 튀어나온다. 피오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몸이 무겁다. 최대한 고통을 참기위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내며 뒤를 봤지만, 알게 된 건 현재 상황이 무척 좋지 않다는 사실 뿐이다. 피오나는 어깨뼈 아래의 육체 전부를 깔아뭉개고 있는 거대한 종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흐릿한 시야에 왼팔을 팔꿈치까지 누르고 있는 종탑의 잔해가 보인다. 종탑의 거대한 벽 일부가 그대로 피오나의 왼팔을 터트릴 것처럼 찍어 누르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종이 몸을 깔아뭉갰을 때 피오나는 그대로 몸이 터져 죽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있었다. 그 이유가 부드러운 토양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피오나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티이의 모습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있길 바라는 건 힘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티이를 찾았다. 쉽게 포기하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고개를 움직이느라 얻게 된 고통의 끝에서 피오나는 누워있는 사람의 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티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녀의 금색 머리카락을 연성시키는 황금빛에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저 빛깔이 황금색인지 자신할 수 없다. 지금 그녀의 눈은 원래 시력에 비하면 장님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다.

 

  눈앞이 점차 더 흐릿해진다. 정신을 잃어간다는 확신이 들었다. 혀를 깨물어 이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눈꺼풀이 마치 몸을 누르고 있는 종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무겁다. 

 

  어느새 피오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피오나의 머리 위로 종탑의 잔해가 마저 부서져 떨어진다.

 

  칼을 뽑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가 아닌 두 자루의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다. 하지만 보통 칼이 빠져나올 때 나는 날카롭고 경박한 소리가 아니다. 하나는 흐르지 않는 수면에서 찾을 수 있는, 조심스러운 파문이 일으키는 고요함을 가졌다. 그리고 다른 하나도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소리를 듣는 사람이 누구든지 마음의 평정을 찾을 것만 같은 은은하고 잔잔한 소리. 

 

  칼집을 떠난 칼이 너, 나 할 것 없이 각자 다른 움직임을 취한다. 두 개의 칼날은 피오나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종탑의 잔해를 잘랐다. 이어서 철로 만들어진 종과 피오나의 왼팔을 압박하던 잔해를 찾아가 잘라낸다. 할 일을 마친 칼들은 주인의 능숙한 손놀림에 의해 집을 찾아 들어갔다.

 

  일부가 잘려나간 종이 기울기 시작한다. 

 

  그대로 놔두면 다시 피오나를 누를 것이다. 칼의 주인은 멍청하게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피오나를 두 팔로 안았다. 그녀가 고통스러운지 신음을 흘린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는 최악이다. 즉사는 면했지만 이대로 두면 반드시 죽는다.

 

  시선을 돌려 티이를 바라본다. 티이의 상태는 피오나와 비교하면 퍽 양호하다. 티이의 발목을 뭉개버린 잔해는 정리했다. 회복하는데 전념한다면 몇 개월 뒤면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다. 이비가 도와준다면 몇 주 내지는 며칠. 이곳에 방치하고 간다한들 죽지는 않는다. 지금 급한 건 품에 안은 여자다. 

 

  종탑의 잔해 곳곳에 발리스타의 화살이 있는 걸로 보아 근처에 용병들이 있다. 티이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한 사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그가 가진 영롱한 빛을 띠는 녹색 눈동자가 길을 찾는다. 최대한 피오나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사내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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