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드리운 숲속, 한 소녀가 숨을 헐떡이며 달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치고 있었다.
"헉... 헉..."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깊은 밤, 소녀가 왜 이 숲에 혼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자신을 뒤쫓는 들개 무리로부터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알 수 없었다. 체력은 바닥났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하지만 멈추는 순간, 들개들이 자신에게 어떤 짓을 할지 알기에 소녀는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고 결국, 그녀는 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앗!"
무릎은 긁혀 피가 흐르고 온몸이 쑤셔왔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소녀는 어떻게든 몸을 숨기려 나무 뒤로 기어갔지만, 노련한 사냥꾼인 들개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제 그녀의 바로 뒤까지 다가온 들개들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다. 그저 이 순간이 빨리 그리고 고통없이 지나가기를 빌면서..
그 순간, 들개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깨갱! 깽!"
놀란 소녀는 살짝 눈을 떠보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정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 손에 칼을 하나씩 들고 있는 실루엣이 선명했다.
‘사람...?’
소녀는 혼란스러웠다. 저 사람은 누구일까?
이 시간에, 이런 깊은 숲속에서 무기를 든 채 돌아다니는 사람이 과연 안전한 사람일까?
도망쳐야 할까? 그렇다면 어디로?
혼란에 빠진 소녀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그녀의 다친 무릎을 치료하고 있었다.
5년 후 – 커닝시티 외곽 비화원
[상급 훈련이 종료되었습니다. 기록은 3분 12초입니다.]
[현재 기록은 1등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리 님.]
익숙한 훈련 로봇의 음성과 함께 하루 훈련을 마친 소녀는 땀을 닦으며 훈련장을 나섰다.
5년 전 숲에서 만난 남자는 자신을 비화원의 소속 블레이더라고 소개했다. 그는 갈 곳 없던 소녀에게 함께 비화원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던 소녀는 그의 손을 잡았고, 이후 5년 동안 비화원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아왔다. 훈련장의 기록판을 빼곡히 덮어씌운 그녀의 기록들은 그 동안의 노력을 보여주는듯 했다.
"여어! 오늘도 훈련장에 다녀온 거야? 정말 기특한걸."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리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는 홍아 아저씨야말로 훈련은 언제 하시는 건데요?"
" 크큭.. 나는 이미 그런건 옛적에 마스터한 몸이라고, 이제 와서 내가 다시 훈련장에 돌아가면 네 기록 전부 다 나한테 뺏겨버릴걸? 그리고 매번 말하지만 나는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란다 "
" 그런거 신경쓰면 아저씨라던데요 "
" 에휴.. 요즘 어린것들이란 "
언제나 그런식으로 능글맞은 장난을 치는 사람이었지만 아리 또한 속으로는 그에게 약간의 존경은 있었다. 홍아 또한 자신이 비화원에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존경심과는 반대로 그의 패션 센스는 정말로 그가 아저씨라고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요즘 시대에 저런 낡아빠진 삿갓이나 쓰고 저런건 옛날 저레벨 모험가들이나 쓰던거 아닌가? 한 번은 그에게 삿갓이 촌스럽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는 정말로 화를 내며 소리친적도 있었다. 자신이 어릴적에는 이게 표창도적의 낭만이였다나 뭐라나... 그러면 표창이나 던질것이지 칼은 왜 들고 다니는거야?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아리에게 다시 홍아가 말을 걸어왔다.
"참, 그러고 보니 설희 님께서 널 찾더라. 훈련도 끝났으니 한 번 가봐."
"…설희 님이요?"
아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설희를 만나는 건 주로 함께 간식을 먹으러 갈 때뿐이었다. 갑작스러운 호출이 이상했지만, 아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희의 방으로 향했다.
설희의 문 앞에 선 아리는 가볍게 노크한 뒤,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올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잠시 후.
"응, 들어와."
설희의 대답에 아리는 가벼운 목례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비화원의 수장 설희, 그리고 다른 한 명은 5년 전 숲에서 그녀를 구해준 남자이자 현재 그녀의 스승인 듀드였다. 두 사람 모두 아리에게 친숙한 인물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부름과 그곳에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점은 의아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문은 접어두고, 설희의 부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설희님, 저를 부르셨다던데 무슨 일이신가요?"
"응, 그래. 아리, 너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네? 어... 5년 정도요. 그런데 그건 왜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리는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5년이라...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아리, 너도 알다시피 우리 비화원의 자금 대부분은 장로님이 알선해 주시는 임무에서 나오지. 그리고 그 임무들을 이곳 블레이더들이 맡아 처리하는 거고."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아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도 이제는 비화원의 어엿한 블레이더들 중 하나이고 말이야"
눈치가 빠른 아리였기에 자신이 이곳에 불려온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네 첫 임무가 들어왔어. 다만, 난이도가 꽤 높으니 결정은 너에게 맡길게."
'결정은 나한테 맡긴다라..' 비화원에 몸을 의탁한 처지에서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을까.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받아준 비화원이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컸다. 그런 그녀의 고민하는 모습을 눈치챈 듀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 네가 하겠다고 해도 무리라고 판단되면 내가 대신 나설 테니."
따듯한 말이였다. 그리고 그러한 따스함이였기에 아리는 더더욱 자신의 임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저도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지금 훈련장 기록들 대부분, 제가 1등이잖아요?"
아리는 웃으며 대답했고, 듀드도 그녀의 자신감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다오. 절대 무리하지 않겠다고."
스승의 걱정을 아는 아리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응접실로 가보렴. 장로님과 의뢰인들이 너를 기다리고 계실 거야."
설희의 말을 들은 아리는 짧게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방 안에 남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다.
"역시 말렸어야 했을까요..."
걱정스럽다는듯 아리가 떠난 곳을 바라보는 설희에게 듀드는 걱정말라는듯 말했다.
"저 아이라면 잘 해낼 겁니다."
.
.
.
.
아리는 응접실 앞에서 망설였다. 저 안에는 비화원의 2인자이자 자금 조달을 책임지는 장로가 있었다.
그녀는 그 영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경멸했다. 자신이 비화원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던 첫인상이 나빴기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 설희와 듀드, 그리고 홍아처럼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유독 까다롭게 구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설희의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것 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비화원이 음지에서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장로에게 있었기에 설희 조차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너라."
안에서 들려오는 짜증나는 장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아리는 인사를 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테이블과 네 개의 의자가 있었고, 한쪽에는 장로와 빈 의자가, 반대편에는 성직자 복장을 한 노인과 푸른 로브를 입은 또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장로는 아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두 사람을 소개했다.
"여신교의 사제님과 클레릭이시다."
아리는 손님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장로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여신교]
메이플 월드의 여신을 믿는 종교 단체로, 대륙 전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다. 특히 비숍을 양성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란 점에서 메이플 월드의 모든 단체들이 설령 여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신교와 가까이 지내려 애쓴다.
‘내 생각보다 훨씬 큰 임무 같은데...’
아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장로를 바라보았다.
'그냥 못하겠다고 했어야 했나...'
아리는 속으로 한탄하며, 장로의 허연 수염을 몰래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장로는 그런 그녀의 심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임무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네 임무는 간단하다. 눈앞의 클레릭 분이 프리스트로 전직 시험을 치르기 위해 [저주받은 신전]에 갈 것이다. 너는 저분과 동행하며 호위를 맡아야 한다."
"저주받은 신전이라니요?"
아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은 상급 모험가(70레벨)나 되어야 겨우 도전할 수 있는 위험지대 아닌가?
순간적으로 장로가 나를 골탕 먹이려는 속셈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도 장로는 여유롭게 이어 말했다.
"저 클레릭 분은 이미 프리스트 스킬 대부분을 숙달한 상태다. 그리고 너 또한 상급 훈련장에서 우수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두 사람이라면 충분히 임무를 끝낼 수 있을터이지. 끌끌..."
아리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두 분이 나를 말리려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열받았지만, 이대로 임무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저 장로의 비웃음을 보고도 참아 넘길 수 있을 만큼 아리는 성숙한 인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출발은 언제인가요?"
"내일 아침이다. 그러니 준비를 마치고 쉬도록 해라."
' 끝까지 자기 할 말만 하는군.. '
아리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응접실을 나왔다.
저녁, 아리의 방
짐을 챙기던 아리는 문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문이 가볍게 두드려졌다.
"아리, 잠시 시간 되겠느냐?"
인기척의 정체는 듀드였다. 그녀는 서둘러 문을 열고 스승을 맞았다.
"스승님, 무슨 일이세요?"
"내일 임무에 앞서 격려를 해줄 겸 선물을 가져왔다."
선물? 혹시 새로운 단검일까?
아리는 설렘을 품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받았다. 그러나 듀드가 건넨 선물을 받은 순간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게... 뭐예요? 완전 먼지투성이잖아요."
그녀의 손엔 낡고 바랜 주문서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창고를 두l져서 간신히 찾은 거다. 슬리피우드로의 왕래가 뜸하다 보니 남은 물건이 이것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걸 어디다 쓰는거에요?"
듀드는 아리의 불만을 잠자코 듣다가 설명했다.
"마을 귀환 주문서다. 정확히는 슬리피우드 귀환 주문서지. 마법으로 곧바로 슬리피우드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들어준다."
"슬리피우드로 간다고요? 설마 이걸 타고 내일 출발하라는 건 아니겠죠?"
듀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이건 도망칠 때를 위한 것이다."
"도망칠 때요?"
아리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듀드는 조용히 말했다.
"슬리피우드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너나 클레릭 동료 모두 슬리피우드를 탐사하는데 부족한 실력은 아니지 하지만, 실전은 다르다. 변수도 많고, 다쳤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만약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 닥친다면 절대 망설이지 말고 이 주문서를 사용하겠다고 약속해다오."
듀드의 표정엔 진지함과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아리는 스승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정말로 위험해지면 바로 도망칠게요. 무엇보다 클레릭과 도적의 조합인데요? 도망치는 건 자신있어요!"
듀드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래. 내일 준비 잘하고 푹 쉬어라."
그는 조용히 방을 나섰고, 아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첫 임무...'
처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레이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처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채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