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항상 토게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글 써봅니다.
RPG의 장르분류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데요. 뭐 D&D 얘기도 나오고 이래저래 어지럽습니다.
사실 굳이 안 따지려면 상관 없지만, 장르의 원류나 원형(archetype)을 따지고자 한다면 항상 원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죠. 그래서 D&D 얘기도 나오는 것일 거고요.
근데 사실 지금의 탱딜힐 개념 논쟁에서 D&D 얘기는 살짝 논점을 벗어나지 않는가, 싶어서 몇 줄 써봅니다.
애당초 RPG라 함은 컴퓨터 RPG가 아니라 TRPG를 의미하는 말이었죠. 플레이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TRPG에서 RPG라는 개념은 명료한 편입니다. 물론 저기서의 Role을 단순히 파티 내에서의 역할로 볼 것이냐, 아니면 배경세계 전반에서의 캐릭터의 Role로 볼 것이냐의 논쟁은 있었지만.... 거진 전자로 정리되고 있는 것이 현 시기 RPG Scene의 대세고요. '각 플레이어가 각자 하나씩의 캐릭터만을 조종하여, 마스터가 준비한 배경 속에서 협동을 통해 시나리오를 해결해 가는 게임'으로 볼 수 있겠죠.
사실 이 원형의 입장에서 보면 탱딜힐도 RPG의 핵심 개념이 아니고, 성장도 RPG의 핵심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씩의 캐릭터를 조종한다는 점과 시나리오가 있다는 점이 핵심이겠네요. 하나씩의 캐릭터를 조종한다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에 대해 다른 분들은 FPS나 어드벤처 얘기를 하실 수도 있을텐데, 애당초 RPG가 컴퓨터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 주십시오. 이 RPG가 스스로를 구분하는 타자는 FPS나 어드벤처 같은게 아니라 워게임이나 TCG 같은 것입니다.
물론 저기서 중요한 것은 캐릭터를 구성하는 것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워게임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전투 자원(Battle Resource)으로서 구성된 데이터 집합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 전투 자원으로서의 성격만 갖춰지면 성장은 없어도 관계 없어요. 실제로 캠페인 해보면 레벨업 하나도 안 하고 하는 게임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논쟁이 컴퓨터 RPG로 넘어오면 문제가 복잡해지는게, 애당초 컴퓨터 RPG란 자신만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진 장르가 아니라 단순히 TRPG의 하위 호환일 뿐입니다.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RPG에서 해봤던 이러이러한 것들을 컴퓨터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시각화시킬 수 있겠다 싶어서 시도해본 것 뿐이죠. 실제로 초기 RPG에 속하는 울티마나 위저드리 같은 게임들은 D&D의 극히 일부만을 구성하는 '던전 크로울링'이라는 지점만을 추출해 적용한 것이죠. 일본식 RPG라고 흔히 부르는 게임들은 원래의 RPG에서 시나리오라는 지점만을 추출해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게임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컴퓨터 RPG는 스스로를 TRPG에서 독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 TRPG의 특정 면면만을 기술적 한계 내에서 취하는 형태로 만들어 왔고, 이 때문에 현대 컴퓨터 RPG의 장르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대가 발전하여 MMORPG라는 장르가 생겨나면서 상황은 조금 또 뒤바뀝니다. 애초에 함께 즐기는 취미였던 RPG의 원형에 컴퓨터 RPG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거죠. 지금까지의 모든 패키지형 컴퓨터 RPG들이 건드리지 못했던, TRPG의 또다른 면모를 끌어온 겁니다.
사실 MMORPG라는 장르가 원형의 TRPG와 아무 관계 없는 독립적인 장르라고 본다면 상관 없지만, 분명히 연속선상에 있는 장르라고 본다면 MMORPG가 절대 버려서는 안 될 정체성이 바로 각자의 캐릭터를 조종하는 플레이어들의 '협동'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MMORPG는 시나리오도 던전 크로울링도 패키지 RPG에 비해 더 낫거나 최소한도로 구분될 수 있는 독자적 면모가 전혀 없거든요. 그러나 협동의 측면은 다릅니다. 이것은 MMO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 장르상의 혁신이고 컴퓨터 RPG가 원형의 RPG에 보다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말씀드렸듯 컴퓨터 RPG란 근본적으로 원형의 RPG의 하위호환에 불과하며, 따라서 원형의 RPG에서 이룰 수 있었던 많은 면모를 여기서 구현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실제로 '협동'이라 해도 TRPG에선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구현되죠. 아예 전투에는 도움이 안 되는 캐릭터도 파티의 일부분으로서 훌륭한 협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전투 자체에선 비슷비슷한 컨셉인 두 캐릭터라 해도 성격이나 사회적 기술, 지위에 따라 서로의 결점을 커버해주는 관계를 만들 수 있죠. 하지만 컴퓨터 RPG의 단순한 세계에선 이게 안 됩니다.
결국 MMORPG가 시스템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협동이란 전투 시스템 상에서의 협동으로 한정되는 겁니다. 그것도 컴퓨터 프로그래밍 속에서 명료하게 드러나는, 전적으로 논리적인 형태의 협동으로요. 이런 한계 속에서,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시스템이 바로 탱딜힐인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RPG 자체의 장르분류에서 탱딜힐을 핵심적인 개념으로 놓고 볼 수는 없을지 몰라도, MMORPG가 RPG의 테두리 내에 속한다고 규정하기 위해선 탱딜힐이 요청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꼭 MMORPG에서의 협동이라는 것이 탱딜힐로만 가능한가, 에 대해선 확언할 수 없습니다. 일단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은 새로운 시스템의 가능성은 항상 배제할 수 없고, 시각에 따라서는 리니지에서의 혈맹도 협동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단순히 플레이어들의 자발성에만 기대는 게임의 정체성이란 조직화되지 못한 것이라는 점에서 불안하고, 시스템이 고도로 발전할수록 그 비중이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즉 현재까지의 시점에서 MMORPG의 협동성을 구현하는 궁극의 시스템이 탱딜힐이라는 것이죠.
또 이런 얘길 한다고 해서 'FPS에서도 팀원끼리 협동하지 않는가'하고 지적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요.... 탱딜힐은 MMORPG의 '핵심' 개념이지 '유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당연히 위에서 언급한 '전투 자원'으로서의 캐릭터 데이터나 이 데이터에서 산출되는 성장의 '가능성', 그리고 시나리오 등도 유기적으로 RPG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어요. FPS는 전투 자원으로스의 캐릭터 데이터가 없고, 스포츠 게임은 시나리오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MMORPG가 패키지 RPG와 일정 정도 구분되면서도 RPG의 내연에 속하게 하는 핵심이 뭐냐고 한다면 그게 협동이고 탱딜힐이란 얘기죠.
뭐 근본적으로는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기왕 논의가 된 김에 몇 줄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