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단이 아제로스와 아르거스 사이에 거대한 차원문을 여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 것은 잘 아실 겁니다.
킬제덴의 함선 위에서 쐐기석을 던지면서 손쉽게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 내어 두 세계 간의 벽을 허물어 버렸죠.
그 걸 생각하다 보니,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살게라이트 쐐기석으로 저렇게 손쉽게 세계를 이을 수 있으면서, 왜 불타는 군단은 차원문을 열기 위해, 고대의 전쟁부터 이번 군단 확장팩까지의 긴 시간 동안 삽질을 거듭 하였는가?'
고대의 전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통틀어, 불타는 군단의 전략적 목표는 한결 같았습니다.
'살게라스 조차 지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하고 거대한 차원문을 개방한다.'
이를 위해, 영원의 샘, 놀드랏실(과 그 아래에 있던 영원의 샘), 태양샘, 살게라스의 무덤 등의 강력한 힘의 원천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들이 모두 저지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죠. 게다가 이번 군단 확장팩에서는 전략을 살짝 바꿔 일리단의 육신에 살게라스의 영혼을 불어넣으려 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군단의 술책들이 좌절되는가 싶었지만, 막판에 일리단이 불타는 군단에 아주 톡톡한 공을 세웠습니다.
행성급 규모의 초거대 차원 균열을 말이죠.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일을 성사 시키는 데에 '살게라이트 쐐기석'이라는 도구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 물건의 원 소유주는 악마사냥꾼을 생성해본 분들이라면 역시 잘 아시겠지만, 불타는 군단 이었습니다. 이들은 왜 진작에 이 지극히 유용한 물건을 쓰지 않았을까요?
몇가지 가설을 생각 해봤습니다.
1. 살게라이트 쐐기석을 발견/발명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이 가설이 맞다고 생각해보면, 적어도 고대의 전쟁부터 불타는 성전이전 까지의 실패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타는 성전 시기에, 쐐기석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작중에 묘사된 것이 맞다면, 최소한, 막 검은 사원이 개방되던 시점에는 마르둠에서 살게라이트 쐐기석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타는 성전'을 운운하면서 계략을 세웠던 킬제덴이 왜 쐐기석을 쓰지 않았을까요?
변호 해보자면 쐐기석을 확보하자마자, 일리다리들이 탈취해갔다고 하거나, 확보한지 한참이기는 하지만, 방심과 게으름 때문에 일을 그르쳤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방심과 게으름'의 경우 무난한 변명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억지스럽고 허술하다는 감상이 가시지 않습니다.
2. 살게라이트 쐐기석으로 아제로스와의 차원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제로스 출신의 시전자가 필요하다.
쐐기석으로 차원문을 연 것이, 아제로스 출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일리단이기 때문에 생각해볼 수 있는 가설입니다. 하지만 '어느 곳으로든 통하는 차원문을 열 수 있는 유물'이라는 설명이 걸림돌이 됩니다. 이를 연관하여 생각해보면 일리단은 그냥 아르거스 근처에서 아제로스와 통하는 차원문을 연 것일 뿐입니다.
3. 살게라이트 쐐기석으로 만든 차원문으로는 살게라스를 통과시킬 수 없다.
일리단이 연 차원문이 그냥 거대하기만 할 뿐, 뒤틀린 황천의 강대한 존재가 지날 수 있을만큼 질이 좋지는 않다는 가설입니다. 하지만, 이번 확장팩에서 보여줬던, 살게라스의 무덤이 문제가 됩니다. 굴단이 연 차원문 만으로도 거대한 침공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행성 규모의 차원문이라면 더 거대한 침공도 가능했을 겁니다. 굳이 살게라스가 지날 수 없을 지라도 전략적 가치는 여전히 상당합니다.
4. 뒤틀린 황천과 현실 우주 간의 연결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르거스와 그 근방이 뒤틀린 황천이 아닌, 현실 우주였다는 추측에서 내본 가설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아르거스에서 병력을 모아, 아제로스를 공격한다는 전략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습니다. 더욱이 아르거스가 뒤틀린 황천에 위치하지 않으면, 더 큰 설정구멍들이 생기기 때문에 말이 안됩니다.
5. 만든 차원문을 통해 역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말이 되면서, 또 말이 안되는 가설입니다. 게임 외적으로 보자면, 어떤 적들이라도 꺾어버리는 플레이어들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내적으로 보면, 무한의 강대한 군대라고 평해지는 불타는 군단이 고작 한 행성의 역습을 두려워 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설령 차원문을 열었다 하더라도, 아제로스 세력이 군단의 함선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우주전을 수행 할 수 있을 지도 장담 할 수 없습니다.
이상이 제가 생각했던 바들입니다.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살게라이트 쐐기석'은 어차피 블리자드의 고질적인 메리 수 적 장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너무 편리한 설정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어치워버리면, 이 게시판 자체가 의미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