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기] 양가감정의 게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

게임소개 | 정재훈 기자 |



정말 솔직하게 내 속마음을 꺼내고 시작하자면,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출시 소식에 딱히 별 감흥이 없었다. 게임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 그냥 내 게이머이자 기자로서의 성향이 '리마스터'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시대의 명작은 그 시대에 나왔기에 명작이었다고 생각하는, 단순히 내 개인의 성향이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더해졌다. 연말이다 보니 휴일이 많아지고, 그 와중 다른 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게임 출시 후 10일이 지나서야 게임을 설치했다. 이즈음에 이르러 다른 이들은 이 게임을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찾아보니 이게 뭐람? 게임 평가가 바닥을 치고 있다.

리뷰를 진행할 때, 가장 맥빠지는 순간이 바로 이럴 때다. 다른 이들의 평가가 완전 박살이 나 있을 때. 좋은 점을 보고 쓰면 '억빠'가 되기 십상이고, 객관만 담아 쓰면 재미가 없으며, 남들처럼 혹평하려 하면 그저 그런 리뷰 중 하나가 되어 버린다. 많은 이들이 혹평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때문에, 잔뜩 풀죽은 상태로 게임을 켰다. 안 해 보고 쓸 수는 없으니 일단 억지로라도 실행한 게임. 그렇게 수 시간 동안 플레이를 이어간 후, 문득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예상 이상으로 게임을 몰입해서 플레이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정식 리뷰보다는 보다 짧은 체험기에 가깝겠지만, 후술할 내용들을 박박 긁어 액기스만 쭉 짜냈다고 가정하고, 한 문장으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을 말해보자. "생각보다 괜찮다" 혹평의 이유들이 영 근거 없는 건 아니지만, 플레이 할 가치가 없는 코드 뭉치 덩어리까지는 아니다. 물론,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이지만.

다른 리뷰들과는 조금 다른 눈높이에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이 어떠했는지를 한 번 풀어봤다.

어쩔 수 없이 불편하긴 하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의 골격은 클래식 RPG다. 보다 정확히는 JRPG쪽에 가깝다. 원작이 출시된 94년은, JRPG가 한창 강세를 보이던 때였고, 우당탕탕 게임을 만들던 국내 게임 산업은 아직 독창성보다는 선진적이었던 옆 나라 게임 시장을 따라가던 경우가 많았다. 게임 산업도 아직 불분명했던 당시의 대한민국은 명백히 게임 소국이었으니까.

때문에, 게임의 톤부터가 클래식 그 자체다. 여관에서 일어나는 정의로운 기사 주인공부터 왕국을 위협하는 음모, 파티원들을 모으고 떠나는 모험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전투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만큼 현대의 게임에 비하면 불편한 것도 어쩔 수 없다.



▲ 굉장히 왕도적인 연출과 서사

그런 의미에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게임들에 비하면 어쩔 수 없이 불편한 게임이다. 미니맵은 전혀 미니맵같지 않고, 달리기의 스테미너 시스템은 굳이 있었어야 했나 싶으며, 각 캐릭터가 어떤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지도 명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아 상점에서 비교하거나 하나씩 눌러 봐야 알 수 있다.

'리파인'이라는 단어가 좀 더 와닿게 하려면, 전반적인 시스템 전체를 손보는게 아마 맞았을 것 같다. 원작에 대한 리스펙트를 보여주고 싶은 건 이해하는 바이나, 개인적으로 원작에서 무조건 가져와야 할 부분은 캐릭터와 서사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다. 시스템의 골조까지 굳이 같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특유의 지형 지물과 상황을 활용하는 전투는 충분히 잘 묘사되어 있다. 적의 측면이나 후면을 타격할 때 보정이 들어가는 사이드, 백 어택 시스템이 존재하기에 '뒤를 내 주지 않는' 지형 선택이 무척 중요하며, 지형에 따라 적을 유도해 광역기로 압살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술도 쓸 수 있다. 문제는, 후반으로 갈 수록 전투가 점점 단순화된다는 점이지만, 적어도 게임 중반까지는 이 독특한 재미가 살아 있다.



▲ 지형 활용이 중요한 게임

그리고, 이 전투 과정에서의 연출은 상당히 잘 뽑았다. 약점을 전부 공략했을 때 뜨는 즉사 판정의 '인스타킬'이나 치명타 연출 등은 2D 턴제 RPG 치고도 상당히 준수한 편이며, 액션 게임도 아닌 주제에 타격감이 훌륭한 편이다.

나아가 앞선 불편함들도 의식하면 느껴지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만한 수준이다. 정말 게임 진행이 힘들 정도로 불편했다면, 나 또한 게임에 집중할 수 없어 리뷰에 기관포를 갈기고 있을 테니 말이다. 정확하게 수준을 말하자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참으면서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해야 맞을까?



▲ 전투 연출은 꽤 만족스러웠다


오히려 흐름을 깨는 '어스토니시아다움'


그래픽을 보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도트 감성을 유지하는 편에서는 그럭저럭 준수하게 뽑아낸 수준이라 생각된다. 장비를 바꿔도 거적떼기를 입고 있는 캐릭터나, 도끼를 들려 줘도 단검으로 찌르는 캐릭터 연출은 솔직히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종합적으로 현대 그래픽 수준에서 볼 때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지진 않는다.



▲ 셰이더가 좀 과한 느낌은 있지만 어쨌든 보기는 좋다

개인적으로 이 게임에서 느낀 가장 큰 문제는, 이 게임이 너무나 '원작스러움'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있다.

손노리는 먼 옛날부터 게임 곳곳에 온갖 재미 요소(당시 기준)를 넣어 두는 게임사였고, 실제로 당시에는 꽤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는 이들의 첫 작품인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리파인도 논외가 아닌데,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수많은 '메타 발언'과 패러디를 마주하게 된다.



▲ 잘 알고 있구만

개발진이 강조했던 캐릭터인 '패스맨'이 아마 좋은 예시일 거다. 과거 불법복제를 막기 위해 도입되었던 패스워드 시스템을 조금 더 유려하게 풀어내고자 도입했던 패스맨이 본작에도 등장하는데,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될 걸 쓸데없이 말이 많다. 주인공 로이드조차 이 말에 휩쓸려서 메타 발언을 내뱉으며 제4의 벽을 깨기 시작하는데, 게임 초반부터 이러다 보니 게이머로서는 서사에 몰입할 틈이 없다.

이런 식의 '손노리식 장난'이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보인다. 중세 판타지 배경의 세계관에서 인터넷이 안 터진다고 불평하는 하숙생이나, 뜬금없이 북두의 권을 쓰는 칠성이나, 조각배를 모는 크레토스까지 나온다. 몰입을 떠나 캐릭터 판권은 문제 없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 이 아저씨 나와도 되나



▲ 이런 장비도 굳이 남겨뒀어야 하나 싶다

'원작 감성의 재현'을 내세운다면 사실 할 말이 없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이 요소들이 게임의 가치를 굉장히 크게 떨어트리고 있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서사 흐름은 꽤 탄탄하며, 리파인도 이를 그대로 가져온 만큼 서사 몰입감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하지만 이 몰입감이 별 의미없는 개그 씬에서 다 깨져나간다. 지금의 게이머들 대다수는 손노리의 이스터 에그를 잘 모르며, 재미를 느끼는 포인트도 당연히 다르다. 그 시절을 살았고, 그 시절의 손노리를 알고 있는 나조차도 딱히 이 부분들이 재미있게 와닿지는 않았다. 아예 새로운 게이머들에게는 아마 더 그럴 거다.



▲ 딱 요정도 수준은 괜찮게 넘어갈 만 하다. 벌크업하는 엘프라니


'모르는 사람'에게 오히려 적합한 게임


꽤 오래 고민한 것 같다. 게임의 문제를 파고들면, 스크롤을 끝도 없이 내릴 정도로 쓸 수 있다. 하나하나 쓰기 너무 길어서 그렇지, 사실 혹평대로 게임은 문제가 많으니까. 다만, 반대로 재미도 있다. 왜 재미있는지를 풀어서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렇지 분명히 재미는 있다. 포가튼 사가 시절부터 손노리는 이랬다. 게임은 엉망진창인데 재미있는, 마약사범 락스타같은 매력이다.

그러던 중 머릿속에 떠오른 깨달음이 있으니, 바 내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말로만 많이 들었을 뿐 실제 플레이는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 재미는 확실히 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손노리의 게임 자체는 어린 시절부터 여럿 했었다. 여러 의미에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던 포가튼 사가도 했었고, 게임 잡지의 광고 유혹에 져버려 플레이했던 '강철 제국'도 있으며,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쨌든 악튜러스도 플레이했었다. 하지만,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직접 플레이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로이드의 이야기는 처음이니까. 카이난의 지팡이를 되찾기 위해 이 친구가 어떤 모험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가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더 즐겁게 다가왔고, 몰입해가며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게임이 '원작 감성의 재현'이라는 슬로건 때문에 스스로 리미트를 걸고 개발되었다는 점일 거다. 때문에 흥미로운 서사도, 캐릭터 간의 관계와 인물상도 너무나 낡은 틀 안에 들어 있는 느낌이 물씬 난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끝내주는 코스 요리를 군용 식판에 받아 먹는 느낌이다.



▲ 이런 부분들이 게임을 아쉽게 만든다. 갑자기 분위기를 깨니까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은 원작을 플레이했던 사람보다는 오히려 원작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더 적합하게 다가설 수 있는 게임이다. 혹평의 이유 중 원작보다 오히려 떨어지는 부분들이 있는 점도 포함되기에 더 그럴 거다. 원작을 모르면 뭐가 떨어지는지 알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게임 개발은 원작을 재현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기에, 이 적합 타겟 유저층과 개발 기조의 미묘한 불협화음이 표면적으로 들어난 것이 혹평의 이유가 아닌가 싶다. 억지로 칭찬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플레이 자체는 꽤 재미있게 했다. 미리 정해 둔 플레이 시간 보다 훨씬 오래 할 정도로 말이다.



▲ 아예 다른 형태로 풀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라는 원작의 서사와 캐릭터를 남기면서, 아예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냈다면 오히려 더 좋은 게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잘 만든 스토리 드리븐 RPG는 언제나 수요가 있으니까. '왜 명작이었나?'를 조금 생각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명작이었던 이유가 게임 시스템 골조나 개그 요소 때문은 아니었을 테니까.

다소 아쉽긴 하지만,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은 그런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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