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중앙 광장에 도착하니 꽤 많은 사람들이 교수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누군가 처형이라도 당하는건가 해서 가보았더니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재판관이 포박당한 여자와 재판을 벌이고 있었다.
"죄인 크산티페는 지난 3년간 아테네의 술탄을 자청하며 수 많은 상선과 군함선을 나포했다. 인정하는가."
포박을 당했는데도 사못 당당한 표정의 여인. 구릿빛 피부에 검은색 긴 생머리가 목 뒤까지 닿고 있었다. 크산티페라는 해적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미인이었다는 말은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만약 내가 크산티페에 대해 얘기를 꺼낸다면 그녀는 엄청난 미인이였다는 말을 결코 빼놓지 않으리라. 길게 빠진 목. 흑진주처럼 맑은 눈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미모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크산티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인정 못합니다."
그러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수근거리며 야유를 보냈다.
"어째서 인정하지 못 하는가. 콜록.. 콜록.."
재판관은 비오듯이 흘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런 증상은 감기가 아니면 무조건 흑사병이다. 그는 크산티페가 입을 열려고하자 잠시 기다리라는 재스처를 취한 뒤 육두구와 메이스가 들어있을 향료갑을 자기 코에 갖다대고 크게 흡입했다. 그러자 한결 나아진 표정을 짓고서 크산티페에게 증언을 해보라고 말했다.
"저는 아테네의 술탄을 자청한 사실이 없습니다. 저는 위대하신 술레이안 술탄의 복속국인 파타니라는 나라에서 병력을 지원받기 위해 온 사절에 불과합니다. 이 머리색과 피부색이 그를 증명해줄 겁니다. 그리고 상선들과 군함선들이 먼저 저희를 공격했기 때문에 그에 대응했을 뿐. 정당방위였습니다.”
그녀의 발언에 사람들은 잔뜩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재판관은 나무망치를 탕탕 두들겼다.
“그대의 말은 거짓이네. 나는 살면서 파타니라는 나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 콜록... 콜록... 술탄이 다스리는 아프리카와 인도대륙의 방대한 영토 중에 파타니란 곳은 존재하지 않아."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은 이것을 보고 하는 말이군요."
"뭐야?! 감히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전 당신과 당신네 나라사람이 단 한번도 발을 딪은 적이 없는 곳에서 왔습니다. 향신료 섬에서 고작 5km정도 떨어진 곳의 동남쪽의 인도죠. 인도와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향신료의 나라입니다."
"거짓말 하지마! 술탄의 세력이 동남의 인도까지 뻣어있을 리가 없어."
"10년 전, 자애로운 술레이안 술탄께서는 저희 파타니의 존립을 인정하면서 술탄의 속국이 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저희는 그 댓가로 코끼리 300마리와 향신료 2톤을 상납했습니다. 그것으로 저희 왕권을 지방의 술탄으로 인정해주었고 왕의 직속 호위병이자 최고 부대인 예니체리 100인을 저희 왕족에 하사하셨습니다."
"그런 거짓말을... 콜록!"
재판관은 피를 토하더니 이윽고 쓰러지고 말았다. 서기 담당의 부재판관은 그의 코에 손을 대보더니 죽었다고 크게 소리쳤다.
"재판관이 죽었으므로 내가 대신 죄를 발표하도록 하겠소."
그리고서 미리 완성되어 있던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죄인 크산티페는 해적이므로 처형되어야 마땅하나 아테네의 술탄으로 그 권위를 인정함으로 상인들에게 입힌 피해와 전쟁에 대한 배상금으로 13만 듀캇트를 배상하라는 바이오."
"잠깐! 이 재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불공평해요!"
"판결은 내가 내립니다. 이 재판에 이의가 있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신기하게도 재판을 구경했던 사람 모두 그리스인이었다. 이슬람 사람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손을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재판장 저 멀리서 경비대들이 이슬람사람의 출입을 엄격히 제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산티페는 억울한 듯 소리쳤다.
"타산에 맞지 않는 금액입니다.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제시해주십시오."
"시끄럽소. 더 이상 이이를 제기하면 당장 사형을 시키겠소!"
크산티페는 분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흥분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이 13만 듀카트를 현금으로 갖고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음... 좋소. 그렇다면 죄인은 13만 듀카트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사료되는 바. 소유한 100톤급 갤리선 9척과 400톤급 갤리아치2척, 대포 45문을 배상금으로 지급하시오."
그러자 아그네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막무가내야.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판결을 내리다니."
"인정하던 못하던 크산티페는 전쟁포로니까. 어쩔 수 없는거지."
"불쌍해...."
재판관이 판결 선언하는 망치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 배심원 중 누군가가 '이이있소!' 이렇게 외쳤다. 재판관이 놀란 듯 그곳을 향해 돌아보자 그리스인 뱃사람처럼 입은 남자가 옷을 확 벗어버리고 있었다. 그 안에 입고 있는 것은 흰색의 고풍스러운 옷에 붉은색 혁띠가 매어져 있는 옷이었다. 나는 순간 놀라서 외치고 말았다.
"예니체리!"
술탄의 직속 경호원이자 튀르크의 최정예부대, 예니체리.
아그네스도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예니체리는 머스켓 총을 빼들고 하늘로 발포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놀라며 그의 주변에서 멀리 떨어졌다.
"사치 알라! (알라를 위하여!)"
이렇게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 건물 옥상과 참관인들 무리에서 예니체리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와 경비대들에게 사격을 했고 의외의 기습으로 경비대들은 혼란에 빠졌다. 사람들 역시도 경비대처럼 혼란에 빠져서 이곳 저곳으로 도망쳤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예니체리들이 나와서 지붕을 향해 한눈을 파는 경비대를 칼로 공격했다. 암살자처럼 능숙하게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말끔히 처리했다. 나도 사람들에게 떠밀려 아그네스의 손을 꼭 붙잡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졌다. 먼 곳까지 와서도 예니체리들의 활약은 돋보였다. 내 앞으로 지나가는 경비대들이 지붕 위에서 예니체리들이 발포한 총을 맞고 몇몇이 죽어버렸다. 깜짝 놀란 아그네스는 비명을 질렀다.
"꺄악!!"
나도 놀라서 움찔거렸다.
"으앗! 일단 숨어."
우리는 과일 판매대 뒤에 숨어서 예니체리들의 소란을 지켜보았다. 일순간에 재판대 주변의 삼엄한 경비를 재압한 예니체리들은 크산티페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추가로 경비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예니체리들은 크산티페의 신변을 보호하며 유유히 사라졌다.
이런 혼란으로 내가 불쾌해 하고 있을 때 아그네스는 무슨 선물이라도 받은 듯이 무척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굉장해! 정말 근사하지 않아?!"
이게 근사해? 라고 되묻는 것도 이제는 지쳤기 때문에 동행했던 선원들을 다시 집한시킨 뒤 조르지오 박사의 논문을 학회에 전하기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도중에 선원들에게 30실링이라는 많은 돈을 주고 여러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영국 출신의 용병 이얀 토마스의 행적을 물어보라고 지시했다. 선원들은 신나하며 당장 근처에 있던 음식점으로 들어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