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레일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간밤에 발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물을 마시고 발작은 진정 되었지만, 물이 없을 때 발작을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해결방법은 말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임시로 술병에 물을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술도 통 할런지는 모르지만, 일단 발작을 일으키면 그것을 실험해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확인해 볼 수 없었다.
“해적이다!”
한창 고민을 하는 로자레일의 귀에 망루의 선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로자레일 일행은 어제부로 제국 식민지 근해에 들어섰었는데, 근방을 누비는 해적들 중에 하나가 로자레일의 배를 목표로 삼은 것 같았다.
검을 들고 선장실을 나선 로자레일이 갑판위에 도착하니, 선원들이 모두 선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미 방향에서 해적이 출몰한 것 같았다. 로자레일이 선미루로 달려가며 외쳤다.
“동요하지 마라! 모두 제자리를 지켜!”
선미루에는 마르탱과 마렐, 제브릭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데무트에 대한 집착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위험이 보이지 않았기에, 제브릭이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제브릭의 직책은 일단은 갑판장이었다. 출신성분을 떠나 경험과 실력을 존중해주는 것이 뱃사람의 생리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가 공공의 적인 해적 출신이었으나, 로자레일의 선원 대부분이 해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떤가? 따라잡힐 것 같나?”
“아닙니다. 저쪽은 카락급 배인 것 같은데, 세로돛 위주이기 때문에 바람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가 유리합니다.”
로자레일의 질문에 마르탱이 망원경을 건네며 대답했다. 망원경을 통해 해적들의 배를 보니 메인마스트뿐만 아니라 서브마스트도 모조리 세로돛으로 구성된 세로돛 위주의 배였다. 세로돛은 역풍에는 강하지만 순풍에서는 가로돛만 못했다. 더군다나 지금 배에는 마땅히 짐이라고 할만한 것이 실려 있지 않으니, 마르탱의 말대로 풍향이 바뀌지 않는 이상 따라잡힐 염려는 없었다.
로자레일은 안심하고 망원경으로 해적선을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해적선의 갑판에서는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연신 소리치며 부하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갑판에 보이는 저들의 숫자는 42. 무장은 모두 칼이었고, 활이나 머스켓은 보이지 않았다. 세로돛 위주의 돛을 한 번 더 살펴보는데, 아까는 확인할 수 없었던 해적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칼을 물고 화살을 눈에 맞은 검은 해골. 누구의 문장이지?”
“왼쪽이요? 오른쪽이요?”
제브릭이 되물었다.
“왼쪽, 무슨 차이가 있지?”
“다행히 형이군. 칼을 물고 화살을 눈에 맞은 검은 해골은 형제해적단의 문장이요, 왼쪽 눈에 화살을 맞은 해골은 형, 오른쪽 눈에 맞은 해골은 동생.”
“형제해적단은 처음 듣는데, 혹시 세력이 큰가?”
여러 척의 배를 소유한 해적단이라면, 양동작전을 펼칠 수도 있기에 물어본 것이다.
“프랜시스 로슈에가 동생이오, 형인 세드릭 로슈에보다 유명하지.”
제브릭의 대답에 마렐이 대경하여 물었다.
“프랜시스 로슈에? 도살자 로슈에 말입니까?”
“그렇다.”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세드릭 로슈에와 달리 프랜시스 로슈에는 매우 유명한 해적이었다. 세력이나 실력보다는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치는 해적이었는데, 그는 포로를 절대 살려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상 토막 내서 죽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도살자에게 형이 있었나?”
“그렇소, 영업은 외려 세드릭 로슈에가 먼저 시작했지. 지금에야 형제해적단이라고 해서는 모르고, 프랜시스 로슈에라고 해야 알아듣지만 말이오.”
“안면이 있나?”
“대 제독회합 때 가까이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소, 말을 나눈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해적들 간에도 정기적인 회합이 있는 것 같았다. 대 제독회합이라니, 로자레일은 내심 우스꽝스런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무명이라고 해서 세드릭 로슈에를 얕보아서는 안 되오. 결국 프랜시스를 키워낸 게 형인 세드릭이니까.”
제브릭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지난 몇 일간 지켜본 결과 그는 매우 소심한 인물이었다.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성격이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데무트의 일을 제외하고는 매사에 몸을 사렸다.
“좋아! 마르탱, 조타실에 가서 키를 잡도록! 저들을 떨쳐내야지!”
“알겠습니다!”
장장 이틀에 걸친 추격전 끝에 형제해적단의 배를 떨쳐낼 수 있었다. 중간에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는데, 갑작스런 돌풍이 몰아쳐 바람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나마 깊은 밤이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다행히 형제해적단의 배를 따돌리고 가까운 항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본래 계획에는 없던 기항지였지만, 해적선을 안전하게 피하기 위해 잠시나마 머물기로 한 것이다.
항구관리소에 간단하게 입항허가서를 작성한 로자레일은 일행을 이끌고 바로 번화가의 여관으로 향했다. 항구에서 만큼은 선원들이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해야 바다에서의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여관에 자리 잡은 로자레일 일행은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말 코딱지만 한 곳이군.”
“캬! 술맛은 좋소!”
제브릭의 불평에 마르탱이 대답했다. 커다란 맥주잔을 한 번에 비워버린 마르탱은 “한잔 더!” 라고 외쳤다. 마르탱의 주문에 흑인여성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이 항구가 흑인이 원주민인 제국 식민지에 속한 항구여서 그런지 노예가 아닌 흑인이 능숙하게 공통어를 말하며 일을 하는 모습이 간혹 눈에 띄었다. 로자레일로써는 상당히 낯선 모습이었다.
“데무트가 향한 곳이 베레로크 항이라고 했나?”
베레로크 항구는 제국 식민지에서 가장 큰 항구 중에 한 곳으로 노예무역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특산품이 있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노예거래가 활발한 항구가 바로 베레로크 항이었다.
“그렇소. 데무트 옆에서 깐죽거리던 늙은이가 베레로크 항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소.”
“확실한가?”
“내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소? 데무트 그 자식의 팔다리를 찢어버리고 기회가 된다면, 깐죽거리던 그 늙은이의 목도 따버릴 것이오.”
이를 악물고 말하는 제브릭의 서슬 퍼런 기색에 마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데무트와 한 노인이 목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만약 데무트를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래도 제브릭을 죽여야 하나. 로자레일은 제브릭을 죽이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마치자 로자레일은 심한 갈증을 느꼈기에 종업원을 향해 말했다.
“이봐, 여기 맥주 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