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에 걸친 항해 끝에 베레로크 항에 도착한 로자레일 일행은 우선 여관에 여장을 풀고, 선원이 주로 드나드는 주점을 위주로 데무트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아고고는 아쉽게도 베레로크에 도착하자마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일행을 떠나버렸다.
“아고고는 왜 베레로크에 왔을까요?”
“글세, 말이 통하지를 않았으니...”
마르탱의 질문에 로자레일이 대답했다. 마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또 시비에 휩싸이지는 않을지 모르겠네요.”
“흥, 그깟 흑인 놈 걱정할 시간 있으면, 데무트 놈을 잡을 방법이라도 생각하라고!”
제브릭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내뱉었다. 반나절동안 항구 근처의 주점을 돌아다니며 데무트에 대해 수소문 해봤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제브릭 이외에도 일행 모두 상당히 지치고 피로한 상태였다. 주점에서 정보를 얻으려고 하다 보니, 술에 취한 뱃사람들과 싸움이 벌어지기 일 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로자레일 일행이 지는 경우는 없었지만, 상대가 거친 뱃사람들이다보니 선원들 중 몇 명은 여관에서 요양 중이었다. 방금 전에도 푸닥거리를 치른 일행에게 아고고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마르탱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로자레일이 선원들을 다독이며 말했다.
“베레로크에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많을 테니,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보다 제브릭의 말처럼 데무트를 찾을 다른 방법에 대해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봐.”
“항구관리한테 뇌물을 먹여서 항구기록을 확인하면...”
“도둑 길드에 의뢰하는 것은 어떨까요?”
“둘 다 돈도 많이 들고, 까딱하면 감옥행이군.”
“휴, 그럼 이렇게 계속 찾아다녀야 합니까?”
“지금은 그 수밖에 없겠어. 일단 오늘은 이만 하기로 하고 내일은 번화가의 주점들을 위주로 찾아보자고.”
밤이 깊은지 오래였기에, 로자레일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반나절동안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해 일행 모두 발걸음이 무거웠다.
여관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한 로자레일 일행은 여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술만 홀짝이는 모습이 일행이 얼마나 지쳐있는 지를 설명해 주었다. 육체적인 피로보다는 앞으로 얼마나 더 데무트를 찾아 해매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피로 때문이었다.
식당에는 로자레일 일행 이외에도 서너 테이블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 중 상인처럼 보이는 중년의 손님의 목소리가 무척 커서 식당 홀 안의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말솜씨도 제법이어서 식당 안의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봐, 그 소식 들었어? 노예시장에 웬 이상한 놈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키가 2m를 넘고, 용력이 얼마나 굉장한지, 말을 번쩍 들었다던데!”
“에이, 흰 소리 하지 말게, 사람이 말을 어떻게 들어?”
상인의 일행이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상인의 말을 받았다.
“아 거참, 말이 아니면 망아지라도 들었나보지! 아니면 흑마라도 들었으려나?”
“하하, 흑마라면 나도 들 수 있지! 고런 탱탱한 살결만 보면 없던 힘도 솟아난다니까! 하하하!”
흑마는 흑인 여성을 뜻하는 속어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상인들은 노예에 대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베레로크의 노예시장은 제국에서 허가받은 곳으로, 노예거래 허가증이 없더라도 노예를 사고 팔 수 있었다. 쓸만한 노예가 있다면 메데이로스 섬에 데려갈 생각이 있는 로자레일이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어쨌든 말을 들었다는 그 놈이 내일 노예 경매에 나온다는데, 그놈을 살 수 있다면 아마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거야!”
“그런 노예를 어떤 정신 나간 주인이 베레로크에서 판다는 거야? 최근에는 전쟁도 없었는데, 전쟁노예는 아닐 테고. 설마 노예사냥을 당한건가?”
“후후, 놀라지 말게. 노예가 아니라 평민인데, 자기 자신을 노예 경매로 팔겠다는 군! 아무리 베레로크라고 해도 이런 일은 처음 아닌가!”
“에이, 정신 나간 놈 이구만! 돈이 필요하면 배를 타거나 용병이라도 할 일이지, 자기를 노예로 팔아? 힘이 장사면 뭐하나, 제 정신이 아닌데!”
“그래서 내일 경매에 참가 안하겠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라...”
“하하, 잘 생각했네! 잘만하면 떼돈을 만질 지도 모르지. 이번에도 잘 해보자고!”
상인들은 서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번에도 서로 힘을 합쳐 잘 해보자는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상인들의 대화를 곱씹어 본 로자레일은 상인들이 말하는 노예가 아고고인 것 같아, 마르텡에게 말했다.
“저들이 말하는 자가 아고고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높아 보입니다.”
로자레일과 마찬가지로 상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르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어.”
“제가 가보겠습니다.”
마르탱이 럼 한 병을 들고 상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마르탱은 상인들에게 럼을 권하고 웃으며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로자레일에게 손짓을 보냈다. 로자레일이 그 뜻을 이해하고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렐과 제브릭도 뒤따랐다. 로자레일의 상인들의 테이블에 도착하자, 마르탱이 로자레일의 자리를 마련하주며 서로를 소개했다.
“이쪽은 로자레일 선장님이십니다. 선장님, 이쪽은 제국 개척지를 주름잡는 거상이신, 알로너 씨와 레폴트 씨이십니다.”
“하하, 너무 금칠을 해주시는 군요,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선장이시라니 대단합니다.”
“반갑습니다, 동료들이 옆에서 잘 도와준 덕분이죠.”
알로너와 레폴트는 로자레일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배를 지휘한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로, 능력이 정말 출중하거나 귀족가문의 자제이거나 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잠시 세상 돌아가는 정세에 따른 시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지역에 전염병이 유행하니 그곳에 의약품을 팔면 한 몫 잡을 수 있을 거라거나 제국의 어느 지방이 가뭄이라는 이야기 등이 주를 이루었다. 어느 정도 형식적인 정보를 교환한 로자레일은 아고고에 대해 묻기로 했다.
“실례지만, 아까 대화를 나누셨던 노예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까요?”
“아하, 로자레일 선장도 노예에 대해 관심이 있나보오?”
“예, 베레로크 하면 노예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지요! 베레로크 하면 노예지요!”
알로너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상당히 취기가 오른 것 같았다. 로자레일이 그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혹시 그자가 흑인입니까?”
“캬! 술맛 좋군! 나도 직접 보지는 못했소, 다만 듣기로는 흑인이라더군!”
와인을 한잔 들이 킨 알로너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로자레일은 노예시장도 둘러볼겸 직접 확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로자레일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알로너가 말했다.
“관심 있으면 내 소개장을 써주겠소, 노예상인이 아니라도 노예는 살 수 있지만, 최소한 조합에는 소속되어있어야 하지!”
“하하하! 역시 베레로크 최고의 거상이신 알로너 님 답습니다!”
“하하, 마르탱 군은 작은 조합의 상인에 불과한 나를 추켜세우니, 도저히 감당 못하겠구려! 비록 말단이기는 하나 정식 회원의 소개장이니 임시조합원으로 등록할 수는 있을 거요!”
상인 조합은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새로운 조합원이 되는 길은 정식 조합원의 추천을 받는 길 뿐이었다. 그러나 정회원의 추천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보통은 까다로운 심사절차를 거치는데, 이곳 베레로크의 조합은 너무나 많은 군소 조합들이 난립하고 있는 형태라 이렇게 쉽게 소개장을 써 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뭔가 있어 보이는 로자레일을 조합에 끌어드리면 나중에라도 공을 쌓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계산도 한 몫 했다.
“나도 써주겠소, 나는 정식 회원 추천장을 써주지!”
마르탱이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대답했다.
“역시 레폴트님은 대인이십니다!”
“하하, 자 대인의 잔을 받으시오!”
“영과입니다! 하하!”
마르텡과 술잔을 주고받는 레폴트라는 상인은 부화뇌동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알로너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서 로자레일에게 소개장을 써준 반면, 레폴트는 분위기에 휩쓸려 추천장까지 써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술에 취해 하는 말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알로너 그세 소개장을 완성하여 로자레일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베레로크 카머 조합은 비록 조합원의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허가받은 노예상인이 대다수라서 자금력에서는 거대 조합 못지않소, 더군다나 요즘에는 상인들의 청부도 많이 받아들이는 편이라 정보력도 상당히 좋아졌지.”
“카머 조합은 베레로크에서 가장 많은 의뢰를 받는 조합 중에 하나요!”
레폴트가 알로너의 말을 거들었다.
“사람 찾는 의뢰도 받습니까?”
“물론이요, 집나간 마누라도 찾아주지!”
알로너의 걸쭉한 농담에 일행 모두 크게 웃어버렸다. 로자레일은 내일 날이 밝으면 꼭 카머 상인조합과 노예경매장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