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전초전
어둠이 빛을 삼킨 성당에 희미하게 아침이 드리웠다. 거의 잠들지 않는 시체들이 사는 마을의 등불은 아침이 되기 전에도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싸우고, 훈련하고, 짐을 나르고, 문서를 정리하고… 의식이 남아있다면 그것이 끊어질때까지 미친듯 일하다가 이따금씩 혼수상태에 빠지고, 다시 의식이 돌아오면 하던 일을 반복하는 밴시 여왕의 도구들. 집착에 가까운 목적의식으로 항상 최고의 성과를 내놓는 화살통 안의 화살들. 단순히 살아난 시체들에 불과한 이들이 아제로스의 한 세력이라 자처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광기어린 목적의식에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에 회의감을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했다. 그들은 종종 자신이 얼마나 잠에 들지 않았는지, 얼마나 먹지 않고 싸울 수 있었는지를 자랑하고는 했다. 자신들은 최고의 병사라며, 잠을 자지 않고도 싸울 수 있고, 먹지 않아도 절대 죽지 않는 최고의 ‘도구’임을 자부하고는 했다. 다넬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그 속에 항상 분노와 복수심을 품었다. 자신을 버린 인간들, 가족들, 빌어먹을 늙은이… 그들의 머리를 꼬챙이에 끼워 사령부앞에 전시하고 남은 생을 밴시 여왕을 위해 바치는것을 온 티리스팔에 선언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포세이큰 특유의 흔들리지 않는 냉철함과 이성주의는 종종 그에게 아름다움으로 보이고는 했다. 비록 최근에 어느 전투에서 어느 여자의 눈물을 보고 나서 잠시 흔들려버렸지만 말이다. 그 모습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가 뱉은 말 때문이었을까. 그 이후로 그는 그 품에 잠시 품고 있었던 온기를 이따금씩 떠올렸다. 차갑게 식어버린 몸 사이에서도 느껴지는 비물리적인 따스함과 안정감…마치 영원히 그 안에 머무르고 싶어지는… 위험한 덫. 그녀는 위험했다. 저 밖의 붉은 십자군보다도 더 위험했다. 순간 다넬은 필사의 정신력으로 기억을 머리에서 몰아냈다. 머무른다는 것, 안정을 찾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온 세상이 그들을 증오하고 죽이기 위해 쫒는 이 상황에서 어디론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자살행위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복수자다. 나는 복수와 실바나스의 영광을 위해 산다. 그렇게 속으로 다시 되새기며 그는 한때 창고로 사용되었던 행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게, 다넬. 늦었구만.”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넬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서는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다. 책상에는 티리스팔 숲의 큰 지도와 함께 붉은 색, 푸른 빛, 그리고 보라 빛의 말들이 모여 현 대치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참모장 포세이큰이 가운데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유난이 팔에 살점이 없어서 들고 있는 지시봉과 팔이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윽고 장내를 정리하기 위해 가볍게 기침을 한번 한 후, 상황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크흠, 흠. 그럼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도록 하죠. 이 지역에서 큰 세력을 이루는 자들은 셋이 있습니다. 가장 큰 세력이 우리, 포세이큰이며, 그 다음이 붉은 십자군이 우리 동쪽에, 이곳 수도원을 근거지로하여 주둔하고 있죠. 그리고 남은 하나가 주로 아가만드 제분소에 위치하고 있는 잔존 스컬지 세력입니다. 둘 다 언젠가 몰아내야 할 세력들이지만, 우선순위는 후자죠. 아가만드를 정벌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고, 그곳의 병력들을 흡수하여야만 장차 붉은 십자군 수도원을 정벌하는데 발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작전에 대해 브릴에서도…"
지루하다. 빌어먹을 행정관 놈들. 저들은 실제로 싸우지도 못하면서 그저 탁상공론에만 능하다. 최적화, 관료화, 효율성을 따지는 수많은 규칙, 규칙, 그리고 또 규칙… 이 지긋지긋한 것들이 아가만드를 단숨에 부숴버리고 싶은 내 심정을 알까?
"...따라서 병력의 증대를 위해 비축된 시체들을…"
그들에게는 산 자에 대한 증오가 있는 걸까? 아니겠지. 저들은 살아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야. 밴시 여왕의 죽어버린 뼈다귀 화살들이지… 영혼 없는 기계들...
"...납골당 관리인에 따르면… 현재 약 80%…"
그렇다면 넌?
"...그렇다면 칼스턴을 중심으로 하여…"
난 저들과 다르다고. 난 분노하고 있고, 증오를 품고 있으며, 산 자들을 머리를 뽑고 내장을 토막질하기를 원하는 위대한 전사야! 나는 밴시 여왕의 전쟁 기계다!
"...침투조는…"
그래? 네가 정말 다른 것 같아? 너도 기계일 뿐이잖아. 더 끔찍하지. 학살기계. 이 잔인한 놈.
"...특히 이번에 두각을 보인 인원이…"
아니! 난 정당하게 복수한거야! 내가 빼앗기고 당했던 일을 생각해 보라고! 누가 그런 일을 겪고도 복수하지 않을 것인가? 날 죽이려 달려오는 세상에 무기력하게 당해야 하는가?
"...관…"
그건 아니지. 너의 복수는 정당해. 넌 그들을 난도질할 자격이 있어. 하지만 그걸 로즈는 절대 좋아하지 않을 꺼야. 널 혐오할꺼야...네가 로즈를 비참하게 만들 꺼야…
"...집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네 운명이다. 살인귀, 악마, 전쟁기계… 네 논리가 너를 갉아먹는구나… 너는 합법적으로 살인귀이며, 전장을 지배할 악마다. 네 칼날에 그녀가 무참이 쓰러져 짓이겨질 것이...
"징집관!"
다넬은 자신이 회의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네, 듣고 있었습니다."
"다른 생각한거 아니지?"
"물론이죠."
"아, 그러신가.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뭘 이야기했는지 짧게 브리핑을 좀 부탁하네..."
다넬은 천천히 생각을 가다듬으며 입을 떼었다.
"아가만드를 쳐 부셔야 된다는 거 아닙니까. 1차적으로 가장 손쉬운 전략은 현재 아가만드에 있는 지도부를 암살하는 것이죠. 그들이 주변의 좀비나 언데드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그들만 없앨 수 있다면 나머지 하수인들이 전부 포세이큰의 품으로 들어오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실패했을 경우. 2차적으로 전면전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까지 가지 않는것이 가장 좋습니다. 여기까지 얘기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잘 듣고 계셨구만. 다시 회의를 계속 하도록 합니다. "
"네, 사령관님. 우선 전면전을 할 경우 납골당에서 수리중인 투석기를 사용하여 화력을 퍼부을 것입니다. 그 후, 살아남은 병력을 지상군이 제압하게 됩니다. 주요 부대로는…"
다넬은 요즘 자신이 혼자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감정적으로 변하는 일도 잦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어쩌면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단순한 합리화일지도 몰랐다.
“좋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각 부서 진행상황만 보고하고 오늘은 마무리지읍시다. 서쪽 탑의 공략은 징집관이 맡아서 하고 있었지. 작전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작전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병력 차출, 완료되었습니다. 작전 완료 후 보고하겠습니다.”
“좋아. 다음 병기담당관?”
“납골당 관리인이 병기 제작은 거의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작전 시행일까지 무리없이 준비될 것입니다.”
“그 친구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 모든걸 다 했을지 모르겠구만. 그친구가 작년에 갑자기 나타났을때가 이 모든 작전의 시작이었지. 다음, 보급관…”
그렇게 몇개의 부서들이 자신의 역할을 브리핑하고 확인했다.
“좋아, 마지막, 작전담당관? 그 침투조 편성은 어떻게 되었지?”
“네. 침투조는 암살조 1개 부대와 후방 지원 의무병으로 구성됩니다. 이미 선정은 끝났습니다.”
“그래. 요번에 전투에서 활약한 그 친구도 들어가 있는거지? 이번 작전 이후로는 브릴로 소환될꺼니까 이번에 최대한 활용하자고.”
“잠깐. 전 그런 인사명령은 내린 기억이 없습니다만."
다넬은 갑자기 정신이 들은 듯 말을 꺼냈다.
"아직 특별징집령에 적합한 병사는 선발 중입니다. 그리고 그 인원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힌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만.”
“징집관, 인사에 대한 자네의 의견은 존중하지. 하지만 이건 이미 끝난 일이라네.”
“제가 담당자인데 저 없이 승인이 났다는 이야깁니까?”
“내 권한으로 끝냈다네. 나도 그 전투를 지켜봤거든. 그렇게 대단한 인재를 고작 납골당 보조관리인으로 쓰는건 효율이 좋지 않지. 내가 직접 추천서를 써서 보냈다네.”
“존경하는 사령관님, 제 의견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인사입니다. 그 인원은 전투 중에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릅니다만.”
“물론 그것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팔에 살점이 없는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 인원을 전투에 투입해서 얻을 수 있는게 불안정성으로 오는 손해보다 더 크다는 판단이 서더군요. 아니면 그 불안정성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겠죠. 예를 들면 적진에 혼자 떨군다거나..."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절대 안됩니다! 동포를 사지로 몰겠다는거 아닙니까!”
“징집관, 자네, 군인이면 군의 명령에 따라야지? 언제부터 전쟁이 한사람 한사람 다 생각하며 하는 짓이었나?”
다넬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흥분을 가라앉혔다. 감정은 설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숨을 잠시 삼키고 난 후 다시 다넬은 말을 떼었다.
“물론, 저희는 명령에 따르는 군인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포세이큰입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포세이큰의 신념이지 않습니까? 그런 작전을 수행했다가는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칠것으로 생각됩니다. 심지어 포세이큰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건네고 있는 저희지 않습니까.”
그 말에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 친구들 지금 다 어디있나? 징집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다넬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넬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자네, 자유롭게 사는 언데드 집단 본적 있나? 다 죽었잖아. 그 중 상당수는 우리가 죽였지. 자네도 지난주에 그 뭐야, 썩은뇌수인가? 그 친구들 토벌하고 오지 않았나?”
“그런 자들은 후에 스컬지에 다시 지배되기나 하죠.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위협이 됩니다. 빨리 제거하는게 최고의 효율을 냅니다.”
참모장이 말을 거들었다. 다넬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도 그런 사실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반대편에서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물론 자네 말이 무슨말인지는 알아. 그것까지 고려해서 작전을 시행할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아, 물론 그렇게 할꺼라는 결정도 아직 내리지 않았다네. 방금 이야기는 그냥 예시아닌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자,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잘 수행하시오!”
담당관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나갔다. 다넬도 그 무리에 휩쓸려 회의실을 나왔다. 다른 담당관들이 자신의 업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며 자리를 뜰 때, 다넬은 조금 전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 흥분할 필요가 있었나? 매번 그래왔던 일인데. 로즈가 죽는다면, 자신의 정신이 쓸데없는 감정에 휩싸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딴생각을 하며 집중하지 못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로즈를 혼자 적진 한가운데 떨어트려버리는 것은 최고의 판단이다, 그렇게 다넬의 이성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 온기. 그 따스함. 그걸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걸까? 그런건 다시 찾기 어려운 느낌이야… 언제까지 복수에만 사로잡힌 망령으로 살아가려고 그래? 이제 그만 포기할 때가 되었어…. 사령관에게 왜 휘둘리지 말고 그 느낌을 네가 소유해버려...
머리가 아파왔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넬은 애써서 의지적으로 그 고민을 잊었다.
로즈가 되살아난지도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로즈는 그 시간의 대부분을 납골당에서 보내고 있었다. 사령부의 지시(라고 다넬은 말했다)로 매일 ‘전투훈련’이라는 것을 받고있기는 했지만 훈련교관이 죽어 없어져 버린 바람에 허수아비 앞의 로즈를 딱히 누군가가 챙겨주지는 못했다. 사실상 허수아비와 교본뿐인 거의 방치형의 훈련이었다. 로즈도 의욕적으로 훈련을 한다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적당히 따라하거나, 심심풀이로 교본에 있는 그림을 쳐다보며(로즈는 글을 모른다.) 시간을 때우고는 했다. 그런 식이였으니 의욕이 생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미 납골당보조로 쓰기로 결정된 것은 아닐까? 이 방치된 상황에서 오직 다넬만이 의욕적이었다. 다넬은 그렉의 얼굴을 보는 것에 대해 항상 이상할 정도의 증오를 품고 있었지만, 매 아침마다 기계라도 된 것처럼 로즈를 찾아왔다. 여관 안과 밖의 다넬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여관 안에서는 분노하는 언데드 괴물이었지만, 로즈와 함께 말을 타고 있을 때면 이상할정도로 차분해지고 친절해졌다. 가끔은 귀찮을 정도로 말을 붙이려고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다넬도 방치형의 훈련에 대해서는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일축해버렸다. 로즈는 다넬이 어쩌면 의욕적이라기보다는 그냥 고지식한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로즈는 훈련장으로 가는 것보다는 납골당에서 남의 시선 부담없이 지내는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모르도는 귀찮도록 일을 시킬때도 있었지만 대개 자기 일에 빠져있었고, 로즈는 편하게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두침침하고 햇볓도 잘 들지않는 티리스팔 숲의 납골당이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괴롭힘받거나 싸우지 않아도 되는 한가로운 일상이 로즈는 좋았다. 평온한 하루가 끝난 후에는 꿈틀대는 애벌레로 돌아와 그렉과 수다를 떨었다. 그렉은 흔히 생각해오던 사제의 이미지에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잘 들어주는 그렉에게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을 때면 거미줄친 먼지 낀 여관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집이 되었다. 죽은 후에야 세상이 그녀에게 안식을 허락하기라도 한 듯, 로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에 모르도가 완전히 깔렸다니까요! 그 특유의 화났는데 자기 탓이라 뭐라 하지 못하는 억울한 표정이 진짜 너무 웃겼어요!"
로즈와 그렉이 동시에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깔깔 웃었다. 한참 숨이 넘어갈 듯 웃은 그렉이 운을 띄었다.
"그 친구, 확실히 똑똑한 건 맞는데 말입니다, 한번씩 그렇게 웃기는 짓을 벌이더군요. 그 친구가 나타난 뒤로 한번씩 웃을 일이 생겨서 좋습니다."
"모르도는 여기 온지 얼마 안되는 거 같더라고요. 다넬도 그렇게 이야기하던데."
"네, 한 1~2년 쯤 되었을겁니다. 뭐하다가 온 친구인지는 몰라도, 참 아는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더군요."
"저도 물어봤는데, 말 안해주던데요. 근데 상관없어요. 이제 거기서 시체들 걸어다니는거 보는게 익숙해요."
"납골당이 꽤 맘에 드신것 같군요."
"그럼요. 빨리 훈련받는게 끝나고 납골당으로만 갔으면 좋겠어요. 다넬한텐 좀 미안하지만, 아무 도움이 안되는것 같아요.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옆 사람들한테 하나하나 다 물어볼수도 없고. 가르쳐 주지도 않아요. 책도 그렉이 읽어주지 않으면 알아볼수도 없는데요."
"좀 문제가 있기는 하죠… 그래도 익혀놓으면 나쁠건 없습니다. 요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요."
"그렇다고는 하는데, 요즘 같은 일상에선 딱히 상상이 안가요. 다시 싸우러 나가지도 않을꺼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로데론이 무너지던 날도 아무도 예상 못했답니다. 자기 몸 지키는 최소한의 방법정도는 알고 있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거 말이죠."
그렉은 로즈의 교본 중간쯤을 펼쳐 로즈에게 보여줬다. 그곳에는 희끄무레한 안개에 휩싸인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죠?"
"'3장, 은신의 기초'라고 적혀있습니다. 이런 기술은 익혀 놓으면 도움이 많이 되지요."
"그렉, 나 싸우러 안나갈꺼라고요."
"이건 싸우는 기술이 아니잖습니까. 도망치는 기술이죠."
"그냥 안하면 안되나요…"
로즈의 얼굴에는 이미 '하기싫다'라고 씌여져 있었지만, 그렉은 그날따라 집요하게 로즈를 졸라붙였다.
"이건 재미있을꺼에요. 제가 도와드리죠. 요즘 훈련하는데 너무 무료해보여서요. 그래도 뭐 하나 배우는게 있어야죠. 쓸모 있을겁니다."
"예를 들면?"
"모르도를 놀리고 도망간다던지?"
"오."
스스로 쓸모있고 재미있다고 생각해야 뭔갈 배울 의욕이 생기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싸우는 건 질색이지만 이 기술은 잘 배워놓으면 약간은 단조로운 일상을 더 재미있는 장난들로 채워줄지도 몰랐다. 로즈의 얼굴에 그 나이에 걸맞는 순수한 장난기 어린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괜찮네요. 생각 못해봤는데. 빨리 배울 수 있는건가요?"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제가 도움을 드리면 좀 쉽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둠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라서요."
그렉은 로즈에게 책을 펼쳐보이며 손가락으로 그림을 짚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씌여있는대로 말씀드리면, 은신이라는 것은 어둠의 힘을 이용하는 기술입니다. 시전자 주위의 빛을 몰아내고 어둠의 힘을 끌어모아서 주변에 얇은 막의 형태로 유지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몸을 보이지 않는 상태로 숨기는거죠. 숙달된 암살자들은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주변의 동료들의 모습까지도 감출 정도로 강하게 어둠을 끌어모을 수 있다고 하는군요."
"이거… 마법같은건가요?"
"그런건 아닌것 같고, 제가 책을 좀 읽어 봤는데 암살자들은 어둠에 대한 마법적인 지식보다는 신체적이나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 자신을 어둠에 가깝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이죠."
"그게 뭔 차이죠."
"예를 들면, 저는 이런걸 할 수 있습니다."
그렉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렉이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그렉의 왼손이 검보라빛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분명한 '어둠' 그 자체였다. 아니, 잠깐. 그렉은 사제인데?
"그렉은 빛의 사제 아니었어요? 이런걸 하면… 교단에서 뭐라고 안해요?"
"원래는 빛의 사제였죠."
그렉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다시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왼손의 검보라빛이 사그러들고 오른손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을 너무 가까이하다보니 빛의 결점이 보이더군요. 사실 빛은 꽤나 오만합니다. 좋고 나쁜것을 판단하기가 너무 쉬워지죠."
다시 중얼거리자 양 손의 빛과 어둠의 크기가 비슷해졌다. 여전히 둘 다 일렁이고 있었지만, 어느 하나로도 치우치지 않은채로 그렉의 손 안에서 조금씩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균형이 중요한거랍니다."
다시 모든 빛과 어둠이 사라지고 원래의 거미줄 친 거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세계의 구성이 다 이런식이에요. 적당한 빛, 적당한 어둠. 그리고 적당한 선택. 빛의 사제들은 빛에 대한 신앙, 암흑 사제들은 어둠에 대한 신앙, 또는 저같은 중도파도 있죠. 아무튼 처음으로 돌아가면, 암살자들은 어둠에 대한 신앙을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네요. 그냥 애초에 자세 자체를 어둠과 가깝게 만들다 보니 자연히 친화력이 생기고 신앙 없이도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이걸 할려면 '어둠'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런 느낌이죠. 하지만, 저는 어둠을 다룰 줄 아니까 좀 도와드릴 수 있을겁니다. 가까이 와보시죠."
"이렇게요?"
그렉은 다시 왼손에 검보라 빛을 집중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보라빛이 손 끝으로, 손가락 가운데로 모이더니… 그것을 로즈의 이마에다 가까이 댔다.
"저기 그렉? 이거 괜찮은거 맞죠?"
"아마도요… 하하하… 주변의 어둠을 끌어모을겁니다. 사실 저도 생각만 해본거라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
"괜찮을겁니다… 아마도?"
"잠깐… 잠깐만요!"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그렉이 뭔가를 한 듯 했다. 주변이 희끄무레하게 어두워지더니, 뭔가가 얇게 몸을 덮는 것을 로즈는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니, 잘못 들은 건가? 존재여부조차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고요한 뭔가가 느껴지는 듯 했다. 음산하면서도 달콤한…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교묘한 느낌이 로즈를 낚아채려하고 있을때, 그렉이 놀란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럴수가, 이거 진짜로 되는군요! 설마 했는데! 한번 확인해 보시죠!"
"우와! 진짜 안보이잖아!"
로즈가 아래를 쳐다보자 그곳에 보인것은 로즈의 몸과 다리가 아니라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모닥불 빛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몸 전체가 희미하게 사라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희미한 형체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이정도면 누가 보고 알아채기가 굉장히 힘들 듯 했다. 아까는 분명 뭔가 꺼림직한 목소리가 들린 듯? 했지만. 지금은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벌써부터 로즈는 모르도를 골려먹을 생각에 신이 나있었다. 당장 납골당으로 달려가서 모르도의 뒷통수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정말 신기해! 그렉! 나 보여요? 나 지금 뭐하고 있게요?"
"너무 격하게 움직이지는 마세요. 은신이 풀릴껍니다."
"아, 그러네. 다시 조금 보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럼 이거 풀리면 다시 그렉에게 부탁해야 하는건가요?"
"일단은요?"
"뭐야, 그럼 혼자서는 못하는 거잖아요."
"그건 조금 연습을 하셔야겠죠. 다만 통상적인 방법으로 은신한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연습을 해야 될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것도 가르쳐줘요! 이거 정말 재밌어질것 같아."
"정말 괜찮으신가요? 어둠을 너무 직접적으로 접한게 아닌가 싶은데… 무슨 이상한 느낌같은건 없으셨나요?"
"그러고보니 아까 좀 느낌이 이상하긴 했는데… 뭔가 찝찝한? 그런 느낌이 조금 들었거든요? 안좋은건가요?"
"글쎄요. 원래는 어둠을 형태만 이용을 해야하는데 제가 강제로 집중을 시키느라 어둠 자체를 가져다 대버렸거든요. 지금은 괜찮은 듯 보이긴 하는데…"
"그래요? 그럼 나중에 문제 있으면 그 때 해결해요.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길꺼에요! 저 잠깐 납골당 좀 갔다올께요. 좀 있다 봐요!"
그 말을 남기고 로즈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용하게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앞에는 다시 늙은 언데드 하나가 조용히 남았다. 그렉은 잠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게 아닐까 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둠이 보여주는 진실에는 항상 절반의 거짓이 함께한다. 어둠이 제공하는 혜택에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댓가가 존재한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렉이었지만, 가끔은 그 자신도 어둠에게 속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위험하지만 달콤한 그 속삭임에 넘어갔음을 깨달았을때는 항상 한참 후의 일이었다. 지금, 그렉은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이미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지만 언데드에게 일몰은 아무 의미가 없는 시간이었다. 오히려 어둠이 깔려야 그들의 음산함과 광기가 거침없이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종소리 마을의 언덕을 가볍게 뛰어 올라가고 있는 이 소녀의 모습은 언데드의 그것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생은 이전 생이라는 듯 과할 정도로 생기로 가득찬 발걸음이 납골당을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저 멀리 납골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모르도의 모습도 보였다. 모르도는 수레에 뭔가를 옮겨 싣고 있는 듯 했다. 로즈의 머리에 하나의 장난이 떠올랐다. 난 지금 안보이는 상태니까, 몰래 모르도가 수레에 하나를 옮겨 실을 때마다 하나를 수레에서 내려버려야지. 끝이 없는 노동에 모르도가 지쳐 쓰러질무렵에 모르도를 놀리고 도망간다… 재미있겠다. 이미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간 로즈는 은신이 깨지지 않도록 적당히 속력을 내며 언덕위로 뛰어올라갔다.
다가가서 보니, 모르도는 수레 곁에 서있었지만, 뭔가를 싣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수레 뒤에 가려진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전에 납골당에서 본 적은 없는 언데드였다. 머리는 길게 늘어뜨린 장발에 푸르죽죽한 해초빛이 돌고 있었고, 죽기 전에 붉은 십자군이라도 되었는지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눈구멍은 푹 꺼져서 빛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로즈와는 수레를 사이에 두고 조용히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회를 … 절대 … "
"그렇다면... "
"…다시 구해주겠네…"
"...상부의…그렇게까지…"
뭐라고 중얼대는 소리는 들려왔지만 대화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았기에 로즈는 조심조심 모르도의 뒷편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이미 가슴은 흥분감과 기대감으로 쿵쾅대고 있었다. 그 떄 갑자기 여자가 자신을 놀란 듯 똑바로 쳐다보았다. 로즈도 깜짝 놀라 주춤한 사이에 여자는 순식간에 표정을 정리하고 말을 걸었다.
"그쪽, 로즈 맞죠? 마침 찾으러 갈 참이었는데 잘됐네요."
그러자 모르도도 뒤를 돌아보았다. 모르도도 내심 놀란 듯 했지만 금방 침착해졌다.
"아직까지 안가고 여기있었어?"
"뭐야, 나 보여요? 언제 풀렸지. 뛰어오다가 풀렸나."
"은신인가요? 훈련을 제대로 받으시나 봅니다. 반가워요. 사령부에 있는 엘레스라고 합니다. 이번에 처음 보죠?"
여자가 다가와서 악수를 건네었다. 로즈는 당장 은신이 들켰다는 실망감과 낯선 사람에 대한 어색함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엘레스의 악수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긴 무슨일로…"
"하하, 별건 아니고, 모르도랑 친하거든요. 얼굴도 한번 보고, 몇 가지 부탁도 좀 하고, 일 얘기도 할 겸 해서 왔습니다."
"친하긴 무슨, 일 있을 때나 얼굴 비치는 주제에."
"에이, 왜 그래. 자기도 가끔은 나 보고 싶잖아."
엘레스라는 여자는,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죽기 전에는 한 미모 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과 턱의 피부가 닳아서 시커먼 썩은 뼈가 드러나보인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였지만 말이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네. 누가 이런 눈알도 없는 해골을 좋아해!"
"난 좋아한다는 말은 안했다?"
로즈는 모르도가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면서 당황하는 것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모르도를 당황시킨다는 것은, 그 나름의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로즈가 언덕을 올라오며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마음에 드는 광경이었다. 엘레스는 그 생김새와는 다르게 죽기 전의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는지, 로즈에게도 금방 친숙하게 말을 걸어왔다.
"얘가 할 줄 아는건 많아서 이름은 좀 유명한데, 도통 인생을 즐기지를 못해서요. 그래서 가끔 제가 놀아주러 오고 있어요."
"맞아. 요샌 안에 쳐박혀서 잘 나오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사람 불러놓고 심심하게."
"모르도가 좀… 뭐랄까 찐따같은 구석이 있죠."
"이 망할 여자들이… 그런 얘기는 나 없을 때 해야 되는거 아니야? 이제 아주 대놓고 하네? 로즈 너도!"
원래 계획은 모르도를 신체적으로 놀려먹을 생각이었지만 말로 놀려먹는 것도 그에 못지 않은 재미를 로즈에게 가져다 주었다. 엘레스는 그런 일에 로즈보다 적어도 몇 년은 선배인 듯 했다.
"남의 욕을 하려면 뒤에가서 해! 앞에서 대놓고 까지 말고!"
"원래 앞담화가 뒷담화보다는 예의바른거라는 말, 못들어봤어?"
"전 동의합니다. 물론 상대적인 거지만."
모르도는 로즈가 오기 전부터 이렇게 시달리고 있었던 걸까? 포기했다는 표정을 짓던 모르도는 깔깔대는 두 여자를 뒤에 둔채 투덜거리며 수레 앞자리에 올라가 앉아버렸다.
"재미있네요. 진작 좀 오시지. 같이 모르도 놀려먹으며 놀아요."
"일이 워낙 많아서요."
"사령부에 계신다고 했죠? 무슨 일을 하세요?"
"그냥 행정관들 뒤치닥거리죠. 거기도 모르도 같은 사람들 천지거든요."
"일 하는게 아주 재미지겠지… 사람들 놀려먹고, 가지고 노는게 재주니… 정신 나간 년."
모르도가 빈정댔지만 엘레스는 가뿐히 웃어 넘겨버렸다.
"그래, 그게 진짜 재미있는거라고! 할게 많아서 그렇지. 사실 오늘도 주 이야기는 일이야기였어요. 오늘 밤에 작전이 있거든요. 모르도가 함께 도와줘야 되는데 몇 가지 말을 잊은게 있어서 잠시 왔습니다. 맞다. 괜찮으시면 구경이라도 잠시 같이 가시죠?"
"어딜요?"
"작전지역이죠."
"저는 납골당쪽에 계속 있을꺼라 전투지역에선 별 필요가 없을텐데…"
"전투요원이 아니라, 내 조수로 가는 거야. 어짜피 너 데리러 가려 헀어. 좀 봐야 일을 또 배우지."
조용히 수레에 타고 있던 모르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기… 꼭 지금 가야 되는건가요? 사실 지금 제가 여기 있을 때는 아니었는데…"
"이런 작전이 잘 없어요. 기습작전이라. 살짝 치고 빠지는 느낌이라, 적당히 구경만 하면 괜찮을꺼에요. 나중에 큰 전투가 벌어지면 이렇게 구경하는 재미는 없다고요. 같이 놀러가요."
"놀긴 뭘 놀아. 로즈. 그냥 잔말 말고 따라와. 이건 일이야."
로즈는 전투지역이라 불리는 곳에 발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지만, 모르도의 강압과 엘레스의 꼬드김에 넘어가 조용히 수레에 오르게 되었다. 수레에는 지난번에 죽었던 붉은 십자군 시체들이 쌓여서 조용히 썩어가고 있었다.
"모르도?"
"왜."
"이거 전에 뒀다 쓴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 쓸꺼니까 꺼냈지."
"이거 오늘 작전에 쓴다고 하네요. 언데드로 되살릴꺼래요. 제가 오늘 아침에 서류에서 봤거든요."
"전에 어떻게 붉은 십자군은 포세이큰으로 만드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헀지? 잘 봐둬. 오늘 보여줄테니. 늦었구만. 이제 출발하자고."
모르도가 혼자 앞자리에 앉아서 수레를 몰고, 로즈와 엘레스는 십자군 시체와 함께 뒤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로즈가 느끼기에 엘레스는 좋은 대화상대였다. 엘레스는 조금 전 로즈가 언덕위를 달려 올라오던 때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쪽으로 신이 나 있는 듯 했다. 로즈가 하는 말에 맞장구는 물론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신나게 떠들어댔다. 반면 엘레스와 달리 모르도는 뒷좌석의 두 여자들에게 진이 빠졌는지 말이 없었다. 원래 자기기분위주로 퉁명스럽게 말을 뱉어대는 모르도였지만 오늘은 그저 조용히 수레에 올라 해골마들에게 채찍질을 할 뿐이었다. 가끔 로즈와 엘레스가 모르도에게도 말을 걸어댔지만, 오늘 그는 영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닌 듯 했다.
수레는 길을 너무 벗어나지도 않았지만, 길대로 달리지도 않았다. 한참을 달리다가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다시 길로 돌아와 달리기도 했다. 분명 전쟁터로 가는, 평소같았으면 로즈가 전혀 반기지 않을 여정이었지만 엘레스가 붙임성있게 말을 잘 걸어주어서 로즈는 거의 소풍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로즈와 엘레스는 이미 오랜 친구라도 된 듯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가득 쌓인 십자군 시체에 등을 대고 비스듬하게 누워서 모르도가 찌질했던 이야기, 사령부 이야기 등등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나누었다. 로즈가 언덕을 신나게 뛰어올라올때 막 노을이 지려고 하던 하늘은 완전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다행히 아제로스의 밝은 달빛이 수레가 갈 길을 잘 비춰주고 있었지만 몰고 있는 것도 시체요, 수레 안의 화물도 모두 시체고, 그 수레를 끌고 있는 말도 이미 죽은 말인데다가 약간 들뜬 분위기, 그리고 달빛이 합쳐지니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달리는 죽음의 수레가 완성되었다.
"저기, 모르도? 좀 천천히 가면 안돼요? 이 시체들 이렇게 가다간 굴러 떨어질 것 같아요!"
"몰라! 떨어지든 말든! 알아서 해!"
"저긴 냅둬요. 삐지면 오래가니까. 우리끼리 놀아요! 요샌 뭐하고 지내세요? 훈련은 받을만 한가요?”
“아니요. 그러고보니 그거 누가 책임잔가요?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챙겨주는 사람도 없어서 거의 그만두고 있었어요. 엘레스는 사령부에 있으니까 얘기좀 해주면 안돼요?. 이럴꺼면 그냥 나 좀 빼달라고.”
“에, 그게, 제가 알기로는 그쪽 훈련담당관이 저번에 죽었잖아요. 그런데 그 후에 훈련담당을 정하는데 이게 결재를 저 위까지 갔다오다보니까 공백기간이 길어진거라고 들었어요. 이게 맘에 안들고, 저게 맘에 안들고 하다보니 다시 정하고. 그러면 시간이 길어지는거죠."
"그래도 되는건가요?"
"그런게 관료제의 허점이죠."
"높으신 분들은 뭐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 이야기를 듣더니 엘레스가 잠시 킥킥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로즈는 높으신 분들을 본적이 없나보네요."
"그게, 예전에 살아있을때도 워낙 밑바닥만 보며 살다보니, 그렇게 됬어요. 가끔 큰 길에 행렬이 지나가는 걸 보면 다들 너무 예쁘고 고귀하게 생기셨길래. 좀 다른가 했죠."
"세상은 어디가나 시궁창이에요. 높으신 분들이 더하죠."
"제발, 정말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요?"
"그런 말을 들으면 있잖아요, 그냥 그만 살고 싶을 때가 있었어요. 살아있을 적에."
로즈는 잠시 옛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세상 어딜 가도 다 시궁창이고, 뭘 해도 내가 불행하다면, 난 왜 굳이 살아있어야 했던 걸까요? 그렇다고 자살은 무서워서 못했고요. 전 그렇게 그냥… 어거지로.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래도 세상 어느 한구석은 좀, 밝았으면. 그렇게 생각했는데. "
"로즈는, 생각보다 되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네."
"뭐야, 난 그런얘긴 처음들어보는데?"
"내가 너무 긍정적인건가? 난 시궁창이라서 더 재미있는것 같아요. 내가 그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잖아."
"엘레스는 그럴 능력이 되니까. 난 기껏해야 모르도나 좀 놀려먹는 정도인걸."
"아니에요. 그건 노력하기 나름이지. 최대한 이용해 먹어야 내가 편해지는걸."
"아니야. 난 그렇게 누가 누굴 이용해 먹는 관계는 지긋지긋해. 그래서 지금이 난 꽤 괜찮은 것 같아요. 막상 죽고보니, 인생이 재시작한 기분이 나거든. 모든 관계가 없어져버려서. 날 괴롭히던 사람도 없고, 의무도 없고, 적당히 평온하게 살 수 있게되어서."
"그래. 그럼 좋은거지. 아무튼 난 이렇게 세상이 뒤죽박죽이어서 더 재미있고 좋은것 같아. 진짜 미친 일들도 많이 일어나거든."
"말해봐바. 재미있겠다."
"그 근방에 살아난지 얼마 안된 미친 여자가 있었는데 혹시 봤어? 내가 그 여자한테 거울을 보여줬거든. 자긴 스컬지는 아니라면서 펄쩍 뒤던데 그 꼴이 얼마나 웃기던지."
그렇게 한참을 달려 두 사람 사이의 대화소재도 거의 떨어질 무렵, 저 멀리 익숙한 장신의 언데드 전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엘레스가 수레 앞에서 큰소리로 다넬을 부르며 외쳐댔다.
"아, 저기 있구만. 이~봐! 다넬! 우리 왔어!"
모르도의 수레는 큰 삼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다넬과 죽음경비병들, 그리고 발키르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잖아."
"미안. 징집관님."
"전투는 시간이 생명이라고! 최적의 시간에 맞춰서 공격하기로 했잖아! 조금만 더 늦었으면 다 말아먹을뻔 했어! 아니, 그리고 로즈는 왜 데리고 왔어? 전투에선 빠지기로 한거 아니었나? 여긴 지금 전쟁터라고!"
"그냥 같이 있다가 온거야!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오늘 중에 일만 마치면 되는 거 아냐? 왜 화를 내고 그래?"
"아니, 둘 다 또 왜그래요."
로즈가 모르도와 다넬 사이에서 말려 봤지만 둘 다 오늘은 날이 아닌 듯 했다. 그 틈 사이로 엘레스가 끼어들었다.
"제군들, 이미 지나간 것을 생각하지 말고 작전만 생각합시다. 징집관님, 지금이라도 빨리 시작안하면 정말 늦어요?"
"출동 준비는 끝났고, 빨리 시체를 위치시켜야 돼."
"좋아요. 우리가 알아서 하지요. 빨리 출발하시라고요."
"일단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가긴 가는데… 쯧, 좋아 있다가 다시 얘기하자고."
다넬은 뭔가 맘에 안드는 듯 따지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자기 병사들을 이끌고 저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제 삼거리에는 약간의 호위병과 로즈, 모르도, 엘레스, 발키르 하나, 그리고 십자군 시체를 실은 큰 수레만이 남아 있었다. 모르도는 짜증이 난다는 듯이 투덜거리다가 이내 자기 임무를 기억해내고 로즈를 불렀다.
"로즈, 이리와봐. 할 일이 있어."
"뭔데요. 싸우는 건 뺴고."
"안시켜. 그냥 이 수레만 좀 가져다 놓고 오면 돼."
그렇게 말하고나서 모르도는 품에서 양피지 조각을 하나 꺼냈다. 언뜻 보기에도 그것은 지도였다. 모르도는 그 비쩍 마른 팔로 능숙하게 이곳저곳에 표시를 해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해줄께... 지금 뭘 하는거냐 하면, 붉은 십자군이 점령하고 있는 탑이 있어… 여기를 기습해서 적 병력을 끌어내려고 하거든?다넬이 적당히 지는 척 하며 끌어낼꺼야. 그리고 빈집을 공격하는 거지. 여기로 기습병력이 치고 들어갈껀데, 십자군들을 포세이큰으로 되살린 병력을 투입한대. 그래서 우리가 온거야."
"하지만 전 지도도 볼 줄 모르고 길도 잘 모르는데…"
"걱정말아. 아가타가 있으니까. 사실 아가타가 수레를 몰 수 있으면 아가타만 가면 되는데, 그게 안되서. 잘 모르겠으면 아가타만 따라가. 다시 돌아올떄는 아가타가 데려다 줄꺼야. 한명 정도는 쉽게 들고도 날더라고."
하늘 높은곳에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죽음의 천사가 두둥실 떠있었다.
"거기다 놓고 오기만 하면 아가타가 포세이큰으로 되살려서 그들을 정신지배할꺼야. 그리고 적당히 빠져서 구경이나 하면 돼.”
"그거만 하면 되는거죠?"
"물론이지. 사실 시킬 일이 없거든. 이미 다 해놔서. 아, 그래도 가기 전에 간단하게 갑옷 정도는 맞춰입고 가는게 좋을꺼야. 이봐, 여기 가죽 방어구 보급품 하나만 좀 맞춰줘."
엘레스가 근처 호위병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죽음 경비병들은 로즈에게 여벌 가죽갑옷을 가져다주었다. 로즈는 다시 예전처럼 정신을 잃고 날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없는 것 보다는 하나 걸치는게 그래도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복장을 받았다. 나름 구색을 맞추기는 했지만 죽음경비병들의 보랏빛 판금갑옷보다는 훨씬 평상복에 가까워보이는 가죽 옷이었다. 너무나도 투박해서 도움이 될까 싶은 느낌도 들었지만, 막상 입고 보니 스스로도 제법 포세이큰 군단의 한사람, 정확히는 암살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맡은 임무가 보잘 것 없긴 했지만, 나름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로즈는 해골마가 이끄는 수레에 앉았다.
“빨리 갔다와. 갔다와서도 할일이 많으니까.”
“빨리 갔다 오셔요. 로즈. 빨리 끝내고 저 언덕에 올라가 전쟁구경이나 하자고.”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놓고 올께요.”
로즈는 해골마를 몰기 시작하자 아가타도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아가타를 따라 로즈는 숲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갔다. 호위병사들은 이미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고 엘레스와 모르도만이 남아 로즈가 탄 죽음의 수레가 숲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렇게 깊이 깊이. 얼마나 들어간건지 로즈는 가늠할 수 없었다. 지도도 받아 오기는 했지만 지도를 볼 줄 모르니 아가타가 이끄는대로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아가타가 날아가는 속도가 꽤 빨라서 겨우겨우 멀리 떨어져가는 아가타를 겨우 뒤쫓아 가고 있었다. 후방이긴 하지만 전쟁터에서 혼자 움직이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가타는 로즈와는 한번도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 준 적이 없었다. 납골당에서 자주 마주치기는 했지만 항상 아무말없이 시체를 일으키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도 멀리 떨어져 날고 있었기에 말을 붙이기는 어려웠지만, 상당히 강력한 힘의 소유자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가타가 도와줄꺼라 믿으며 로즈는 수레를 모는데만 집중했다.
한참을 달려 숲에서 빠져나오자 로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 낡아서 버려진 농장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몇 채의 집이 남아있었지만 이미 반쯤 무너지고 있어 사람이 살 수 있을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탑도 이미 부서져 사용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날아가던 아가타가 버려진 농장의 한가운데 공터에 멈춰섰다. 이제야 다왔구나. 아가타는 그 자리에 머물러 높이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로즈는 서둘러 수레를 공터로 몰아갔다.
공터에 도착하고나니 아가타는 너무나 높이 날아가서 하늘에 어디쯤 떠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정찰이라도 나간걸까? 그럼 난 이제 그냥 가면 되는건가? 아니 잠깐, 아가타가 데려다 준다고 했잖아. 여기서 기다려야 되는건가? 그때, 뒤쪽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끄응…"
"으윽…… 몸이 왜이렇게 무겁지…"
"...이봐! 내 위에서 내려와! 무겁잖아!"
그 소리는 한 사람의 신음소리가 아니었다. 수레에 가득 실어져 있던 붉은 십자군 시체들이었다. 수십명은 되는 시체들이... 일시에 죽음에서 부활했다! 원래 산처럼 쌓여있던 십자군들은 일시에 살아나자 순식간에 산을 무너트리며 수레 옆으로 쏟아져내렸다. 일반적인 시체들도 죽음에서 부활하면 적잖게 당황하고 현실을 부정하는것이 보통이지만, 십자군들은 그 보통의 이상으로 당황하고 있는 듯 했다.
"...이럴수가, 내 몸이….!"
"내 팔이… 팔이 없어! 이게 어떻게 된거야?"
"대장님, 우리 모두…"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저주받은 스컬지라니!"
곧 절규와 울음이 작은 광장을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절규는 전염병처럼 그 옆사람에게 번져나갔고 또 그 옆사람에게, 또 다시 그 옆사람에게 번지고 중첩되어 혼란을 가중시켜 작은 농장의 한가운데를 광기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보통의 사람들은 언데드가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살아났다는 사실을 감사하는 사람도 로즈는 많이 봐 왔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를 저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로즈 본능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이들은 절대 로즈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로즈는 급히 수레 앞자리에 엎드려 몸을 숨겼다. 빨리 도망쳐야 하지만 그 분위기에 질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 잠깐! 이대로는 안돼. 모두 진정해보라고!"
그 중 대장처럼 보이는 십자군이 크게 소리를 내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십자군 대장은 어느정도 주의를 집중시키는데는 성공한 듯 보였다.
"이대로는 아무 도움이 안된다. 일단 상황부터 파악해야돼. 여긴 도대체 어디냐? 시간이 얼마나 지나간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몸이... 썩어가고 있어요!"
"시간이 보통 지난게 아닌것 같습니다… 잠깐 여긴, 솔리덴입니다! 솔리덴 농장의 폐허에요!"
"그러면 단홍빛 울타리가 바로 지척입니다. 일단 그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병사들 사이에 작은 희망이 떠올랐다. 그러나 십자군 대장의 의견은 다른 듯 했다. 그는 오히려 공포에 질려 다급하게 외침으로서 잠깐 떠올랐던 희망을 다시 짓뭉개버렸다.
"안돼! 절대 안된다! 여기가 솔리덴이라고? 그럼 우린 최악의 상황에 빠진거다. 어서 여기서 도망쳐야 해!"
"아니, 대장님 왜그러십니까. 바로 지척에 아군이 있잖아요. 그곳으로 가면 저희 사제단이 있습니다. 빛이 우리를 저주에서 구해줄 수 있을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 멍청한 녀석들아…"
그 목소리는 반쯤은 울고 있었으며 반쯤은 정신이 나가있었다. 그는 기가막히다는 듯이 내뱉었다.
"이 멍청한 믿음만 좋은 바보들아… 너희들은 그 교전의 말을 그대로 믿었단 말이냐?"
"그게… 그게 무슨말입니까? 그게 아닙니까?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속았다는 말이잖아요!"
"그래. 너흰 모두 속고있었지. 빛은 우릴 구원해줄 수 없다. 빛도 언데드를 생명으로 정화하지는 못해. 그들은 우릴 구원해주지 않아! 우릴 불로 정화할꺼다!"
"...거짓말이야!"
"안돼…난 죽고싶지않아…"
"달아나야해… 어서! 빨리!"
"그럼 우린 어디로 가야하는거야? 스컬지로 살기는 싫다고!"
잠시 이성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듯 했던 수레는 다시 광기의 영역으로 돌아가버렸다. 처음 이성을 잡으려 했던 십자군 대장마저 침착을 잃었다. 그들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사분오열하여 수레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로즈도 그래야 했다. 빨리 아가타를 찾아서 모르도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 멀리 날아가버린 아가타는 소식이 없었다. 그래, 수레 밑에 숨어있자. 그리고 저들이 전부 사라질때까지 기다리는거야. 로즈는 몰래 수레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십자군들의 눈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아악! 이거놔요!"
십자군 하나가 로즈의 머리칼을 잡아챘다.
"이 년, 우리 부대는 아니야! 네가 우릴 여기까지 끌고 온거냐?"
흩어진 광기와 혼란은 복수의 대상을 찾아 다시 한곳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잠시 자기 살길을 위해 어떻게든 도망치려던 십자군들은 순식간에 다시 수레로 모여 갑자기 나타난 포로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저기… 전 아무것도 몰라요… 살려주세요…"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면 살려주겠다. 넌 뭐냐? 왜 여기 있었지?"
십자군 대장이 로즈의 눈 앞에 칼을 들이대고 말했다. 십자군 대장 말고도 수십명의 눈이 로즈를 분노에 찬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전… 그냥 납골당지기에요… 그냥시키는 대로 한 것 뿐이라고요… 여기에다가 여러분 시체를 두고 오라고…"
그때 한 병사가 뭔가 알아챈듯이 소리쳤다.
"잠깐!"
"뭐야?"
"나 이 년 알아… 이년… 날 죽인 년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로즈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로즈가 검을 잡던 그 순간, 로즈를 장검으로 찌르려 했던 그 병사였다. 로즈가 간과하고 있던 한가지 사실은, 그곳에 있던 병사들 대부분은 로즈가 죽인 병사들이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폭로가 또 다른 사람들의 폭로를 불러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모두 알게 되었다. 지금 눈앞에 무력하게 무릎꿇은 여자가, 그들 대부분을 저주받은 언데드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년을 죽여야합니다!"
"불살라버려야 해!"
"아니, 이년을 잡아서 진홍빛 울타리로 돌아가자. 성과를 낸 것을 보이면 우릴 정화하지는 않을꺼야. 도움을 받아야 해!"
"아니야, 아니야… 나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 그렇게 말하면 우리의 썩은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나?"
일갈을 날리는 대장의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 아마 그가 살아있었다면 뜨거운 눈물 또한 흐르고 있었으리라. 그녀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즈는 책임질 수 없었다.
"죽음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대장의 칼에 빛의 권능이 내려졌다. 찬란한 빛이 칼을 감쌌다. 인간에게는 경이로운 모습이었지만 죽은자와 악마에게는 모든것을 태워없앨 정화의 불꽃이었다. 로즈는 두려움에 떨며 눈을 감았다. 그들의 분노가 극에 치닫고 있던 그 순간, 광장 저편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군대가 몰려옵니다! 언데드입니다!"
다넬의 기습병력이었다. 기습을 마치고 도망쳐 나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렇게 병력의 양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기습부대인 탓에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십자군들은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우리가 전과를 올리면, 십자군은 우릴 받아줄꺼야!"
"저주받은 스컬지로는 절대 살지 않겠다! 전원 전투준비!"
다넬의 병력은 전속력으로 광장을 향해 오고 있었다. 십자군들은 순식간에 수레를 바리케이트로 삼고, 가지고 있던 장비를 동원해 전투태세를 마쳤다. 방패병은 수레가 막을 수 없는 구역을 막아섰고, 궁병과 마법사들은 수레위에 올라가 사격준비를 마쳤다. 사제들은 방벽 뒤에 모여 지원할 준비를 마쳤다. 바보같은 모르도. 시체를 무장해제도 안하고 방치하다니!
다넬의 군대가 지척에 다가왔다. 로즈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각오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이전의 끔찍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도망치려 했지만, 다시 전쟁터에 몰아넣어진 것이다. 그렇게 포세이큰 군대가 눈에 보이는 지경까지 다가왔다. 로즈는 선두에 서있는 다넬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전투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의 그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넬의 군대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
험험... 마지막 글을 올린지 3개월쯤 되었군요.
늦게 업데이트를 하여 정말 죄송합니다ㅠㅜ
변명을 좀 해보자면... 시험기간 1달 쉼 + 입원 1달 반 + 재활... 뭐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마침 복귀를 하려고 해보니 인벤도 뻥뻥 터져나가고 있었고...
어쩔까 생각을 해봤는데 그래도 시작한데에서 끝은 내줘야 할 것 같네요.
물론 루리웹쪽도 올려볼 생각은 있지만... 그건 진짜 생각좀 더 해봐야겠습니다.
아무튼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방학 안에 chapter1을 끝내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