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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도망치는 여자 Chapter 1-6 전장의 죄수

들남
댓글: 12 개
조회: 1745
추천: 29
2018-07-11 13:03:11
Chapter 1-6 전장의 죄수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로즈 뿐 아니라 십자군들도 모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모두 언데드를 잡기 위해 거의 평생을 전투에 몸을 쏟았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가끔 언데드 암살자들이 연기처럼 몸을 감추며 사라지는 일은 흔히 있어왔다. 그러나 지금처럼 암살자들도 아닌 일반 군대가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몸을 감춰버리는 일은 그들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게어떻게…?"
 
"잠시 헛것을 봤나?"
 
"정신을 놓지 마라! 이건 집단 은신이다!"
 
오직 십자군 대장만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곧 놈들이 너희들의 뒤에서 나타날 것이다! 전원, 수레를 중심으로 밀집대형! 사수들은 진형 주위에 섬광을 뿌려라!"
 
십자군 대장은 본능적으로 적이 사라진게 아니라 잠시 몸을 숨겼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수십번의 전투경험에서 나온 정확한 판단이었다. 몸을 숨긴 적은 아군의 진영을 돌아 사각지대에서 기습을 할 것이다. 여전히 그의 머리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었지만, 십자군들은 그 지시에 따라 완벽한 움직임으로 진형을 바꾸었다. 바리케이트였던 수레는 진영의 중심으로 옮겨졌고, 그 주위를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진형으로 바뀌었다.  병사들은 서로 단단하게 모여 방패를 이어붙였다. 사각은 없어지고, 은신을 감지하기 위한 섬광이 주변을 둘러쌌다. 은신한 적이 다가온다면 금방 감지될것이다.
 
로즈는 대장의 손에 끌려와 수레 가운데서 꿇어 앉혀졌다. 긴박한 상황이 된 탓에 지금 당장 목을 베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보이지않는 적과의 대치상태가 한참동안 계속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긴장감은 더해져갔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한순간의 날렵함에 달려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치솟아 가던 긴장감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꼭대기에 다달았을 때, 그들 모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대장님, 이거…"
 
"적의 술책이다! 긴장을 늦추는 순간 공격당한다!"
 
그러나 이미 들기 시작한 의심은 이미 긴장감을 앞질러 추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병사가 저도 모르게 방패를 내렸다! 스스로도 깜짝 놀라 다시 방어태세를 취했지만, 어떤 공격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한 의심은 부대 전체에 퍼져나갔다.
 
"대장님… 아무래도 적이... 공격할 것 같지 않습니다. 단순히 은신해서 도주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니…그럴리가 없는데…"
 
그도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방어태세를 반쯤 해제하고 있었고, 심지어 섬광마저 꺼져가는데도 아무런 공격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가 이상했다. 공격이 들어오려면 바로 지금이어야 했지만 버려진 농장의 공기는 너무나 평온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막 바뀌려는 그 순간, 또 다른 군대가 농장 저 편에서 나타났다.
 
"아군입니다! 붉은 십자군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의 교전에 따르면, 그들은 저주받은 괴물이며, 아제로스의 평화를 위해 박멸되어야 할 악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아직도 붉은 십자군의 휘장을 걸치고 있었다. 한때 정의를 위해, 빛을 위해, 이 몸과 삶을 바치기로 함께 맹세한 그들이었다. 빛은 선이었고, 빛은 자비로웠다. 그들의 전체 삶에 걸친 노력을, 헌신을 빛은 기억해 줄지도 모른다. 물론 빛이 언데드를 완전히 살아있는 인간으로 다시 되돌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이 자격이 있다면, 생사를 함께 했던 동지들의 손으로 정화당하는 것은 피할 수 있을것이다. 아까까지만해도 절망하던 십자군 대장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비단 한사람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붉은 십자군은 그들의 지척에 도착해 있었다. 로즈는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십자군의 얼굴에서 고뇌에 빠진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정녕 빛은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질주하던 십자군은 농장의 광장에 멈춰 섰다. 로즈는 선두에 붉은 휘장을 두른 말은 탄, 당황하는 표정의 지휘관을 볼 수 있었다.
 
"이럴수가…"
 
"멈춰, 다들 멈춰봐! 이봐, 자네… 1중대의 델린저 맞지? 나야! 3중대 지휘관, 서머셋이라고! 여기 전부 3중대 병사들이야!"
 
지휘관의 머리속에 수십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음은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그같은 상황은 인간이라면 해봄직한 상황이기도 했다. 자신이 죽고, 언데드로 되살아나 공포의 존재가 된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빛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자신이 버림받을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 보지 않은 듯 했으며, 지금도 그랬다. 잠깐 떠올랐던 고뇌의 표정은 곧 사라지고, 믿음과 확신에 찬, 결의에 굳은 표정이 지휘관의 얼굴에 떠올랐다.
 
"전 부대! 돌격하라! 적을 빛의 힘으로 정화하라!"
 
"뭐라고! 이봐 잠깐만! 나라고! 나 서머셋이란 말이야! 우리 부대원들이라고!"
 
"저주받은 저 괴물들을 빛의 힘으로 정화하라! 빛에 영광을!"
 
"빛에 영광을! 빛에 영광을! 빛에 영광을!"
 
병사들이 외치는 전투의 함성이 낡은 농장을 가득 채웠다. 지휘관의 한마디에 병사들은 자신의 선악에 대한 판단을 포기해버렸다. 그것이 빛의 역할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쉽고 편한 결론을 제시해주는 것. 어리석은 자들의 할일은 오직 따르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빛의 맹신자들에 반해, 한번 죽었던 자들은 아직 자신의 갈길을 정하지 못했다. 일부는 싸우려하였고, 일부는 절망하여 자리에 주저 앉았고, 일부는 무기를 내팽겨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영을 이탈한 달아나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날아와 머리를 부숴버렸다. 상처에 박히는 순간 화살촉이 벌어져서 타격을 입히는 기계식 브로드헤드(broadhead) 화살촉이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왜 아무도 공격해오지 않았는지. 어둠속으로 사라진 자들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그들은 누가 자신들을 대신해 싸워줄지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날아오는 화살들은 철저히 위치를 벗어나는 언데드 십자군만을 노렸다. 빛의 사명감에 고취된 인간들은 날아오는 화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채 살육전에 돌입했다. 곧 고함소리와 절규가 온 농장을 가득 채웠다. 사방에서 빛의 섬광이 쏟아졌고, 피와 살점이 튀었다. 그것은 로즈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 그 이상의 처참한 현장이었다. 십자군의 손길은 로즈에게도 미쳤다. 수레 아래쪽에 붉은 십자군 방패병이 들러붙었다. 그들은 진영 가운데에 있던 수레에 뛰어올라가 그들의 적을 공격하는 대신 그대로 뒤집어버리는 쪽을 선택한 듯 했다. 로즈와 로즈의 목에 칼을 들이대던 십자군대장은 수레와 함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똑같은 붉은 옷을 입은 십자군들이 서로 뒤엉켜 난장을 이루자, 그제서야 멀리 떨어져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죽음경비병대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십자군은 완벽히 경비병단에 포위되었다. 모습을 드러낸 경비병단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먼 발치에서 화살소나기를 퍼부었다. 일반적으로 백병전에서는 포위된 쪽은 가운데의 고립된 병사들이 싸울 수 없게 되어 불리하다. 거기다 그 와중에 십자군은 서로 편을 갈라 싸우고 있었다. 그 이상의 혼란이 없을 것 같은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로즈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생존, 생존뿐이었다. 로즈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삶을 포기한 자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평생을 바쳐온 신념에게 버림받고 존재의 이유를 이미 잃어버린 자였다. 삶을 원하는 자와 삶을 포기한자가 눈을 마주쳤고 삶을 포기한자는 자신에게 남은 오직 하나, 분노만을 칼끝에 담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네가… 네가… 우리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다!"
 
로즈는 가까스로 몸을 피해 도망쳤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사방에서 싸우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오직 둘만이 쫒고 쫒기는 듯 했다. 휘두르는 검 끝에 서린 빛의 힘이 칼이 닫지 않는 곳까지 검기를 휘둘렀다. 땅에 앉은 채로 뒷걸음치던 로즈는 등에 수레의 잔해가 닿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뒤로 도망갈 틈이 없는 로즈는 반대편으로 몸을 날려 다가오는 칼을 가까스로 피했다. 그렇게 몸을 날리고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천으로 싼, 단단한 막대기 같은 것이었다. 수레를 몰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아까 수레가 넘어질 때 앞좌석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뭔지 모를 것을 손에 쥐고 다시 한번 몸을 날리던 로즈는 손을 놓쳐 천으로 싼 것을 풀어지게 하고 말았다. 풀려진 뭉치에서 나온것은 놀랍게도 단검 한쌍이었다. 로즈는 본능적으로 단검 한 쌍을 꼬나쥐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로즈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었다. 로즈는 다시 예전처럼, 끔찍한 모습으로 죽이기위해 날뛰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거부감이 아니었다. 로즈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피와 살점 그 자체가 그녀는 두려웠다. 동시에 로즈의 안에는 살기 원하는, 생존본능이 함께 살아나 검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둘로 갈라진 양립할 수 없는 본능이 로즈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다시 빛으로 벼려진 칼날이 정면으로 위에서부터 로즈를 향해 날아왔다. 이번엔 피하지 않고 막을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로즈는 그 이상의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검을 들어 적의 머리를 공격하면 달아날 수 있었지만 로즈는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멍청한 년!'
 
갑자기 날카롭고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귀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로즈의 머리 안에서, 소리 그 자체로써 강하게 울려퍼졌다.
 
‘정말이지 나약하기 짝이 없는 년이구나! 넌 네 목숨이 날아갈 상황에서도 그 작은 칼 하나 휘두르지 못하는거냐?’
 
너무나도 강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로즈는 잠시 정신을 놓치고 말았다. 소리는 그 자체로도 머리를 아프고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스스로를 한심하고 비참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로즈는 한번의 칼을 쳐냈지만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자신의 한 몸도 지켜내지 못하는자에게 자유는 의미가 없다.'
 
십자군의 칼이 로즈의 머리위로 내려오고있었다.
 
'밴시 여왕의 칼날이 되어라!'
 
그 목소리의 외침과 함께, 로즈의 오른손이 위로 치솟아 칼을 막아냈다. 동시에 그녀의 왼손은 정확히 상대의 목덜미에 날아가 꽃혔다. 로즈는 꽃힌 왼손을 바깥쪽으로 돌려베어냈다. 머리통이 날아가 수레바퀴 아래에 떨어졌다. 놀라운 반응속도였다. 그러나 로즈의 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살아있는 십자군의 갈비뼈를 꿰뚫었다. 뜨겁게 고동치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라 로즈의 얼굴을 뒤덮었다. 다시 공중제비를 돌아 적의 어깨를 밟고 뛰어넘어 적의 눈알을 찔렀다. 로즈는 다시 한번, 그녀 홀로 아군인 전쟁터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학살하고 있었다. 끔찍한 비명이 울려펴졌지만 로즈는 멈추지 않았다. 손발에 실이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그녀는 지금 생존본능의 노예였다.
 
로즈의 몸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는, 로즈의 몸만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 껍데기 안에 자리잡은 그녀의 정신은 고통을 참다 못해 울부짖고 있었다. 로즈는 두려웠다. 사방에서 튀어오르는 핏방울이 두려웠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머리가 터져가는 언데드들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피가 튈때마다 수도없이 울음을 터트렸지만 눈물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제발…이제 그만해주세요…'
 
로즈의 칼이 십자군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어요… 살려주세요…'
 
다리 하나가 잘려나갔다.
 
'무서워요…도망치고 싶어요…'
 
로즈는 간청했지만 매서운 목소리는 로즈를 놔줄줄 몰랐다.
 
'어리석은 것! 전장에서 도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싸워서 이기거나 쓰러질 뿐이다!'
 
로즈는 계속해서 전장을 휘저었다. 이제는 로즈의 몸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제 몇번째인지도 모를 적의 머리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한번의 칼을 휘두를 때마다 한번의 공포, 한번의 절규가 찾아왔다. 눈을 깜박이는 찰나의 틈새를 타고 어둠은 로즈를 한걸음 한걸음 그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이대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싶었다. 잠깐의 어둠이 점점 길어지고, 서서히 눈이 감겨갈 무렵이었다.
 
'...불쌍한….것….’
 
순식간이었다. 매서운 목소리가 갑자기 사라지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또다른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훨씬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며 깊은 목소리였지만, 왠지 모르게 음침하고 소름돋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잠시잠깐의 그 순간을 통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감당하지도…노예가…’
 
‘그늘로…도망…’
 
‘…섬...겨라…!’
 
찰나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길어지는 와중에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의식들이 로즈의 안으로 침입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로즈의 의사와 관계없이 몸을 흔들어댔다면, 이 음침한 목소리는 깊은 정신 안으로 파고들어가 내부에서부터 로즈를 복종시켰다. 로즈는 복종했다. 복종당했다. 두려움이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짧고도 영원같은 시간이 눈을 깜박이는 짧은 시간동안에 지나갔다.
 
 
 
 
 
 
 
‘…? 뭐지…? 이게 어떻게?’
 
정신을 차렸을 때, 로즈는 자신이 풀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매몰찬 목소리와 음침한 목소리 어느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지만 아무도 로즈를 향해 칼을 들이대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몸은 그렉의 집에서 신나 뛰어나올때처럼 투명하게 형체만 남아 있었다. 로즈는 어떻게 된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와중에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을 떠올렸다. 손에 들고 있었던 단검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로즈는 정신이 든 즉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은신이 풀릴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저 이 마법이 그녀를 지켜주는동안 어떻게라도 이 아수라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달렸다. 계속해서 달렸다.
 
로즈는 자기가 어느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지 자각이 되지 않았다. 사실은 어느 방향으로 달려야 하는지도 알지 못 한 채였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전장은 저만치 보이지도 않게 멀어져있었다. 로즈가 있는 곳은 더이상 농장이 아니었다. 이제 지쳐 더이상 뛰지 못하고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는 로즈는 길게 뻗어있는 숲 가장자리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 격렬하게 달린 탓인지 은신은 거의 풀려 있었다. 이제 로즈의 몸은 그저 약간 희미하기만 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게 정말 다행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직도 전투는 한창일 것이고, 부대로 돌아가게 해줘야 할 아가타는 농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자신을 몰아세우던 그 목소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렉의 도움 없이 다시 은신을 할 수 있게 되었던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여긴 어디인걸까?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곤두박칠치듯 로즈에게 날아왔다.
 
“아가타!어디로 갔었던 거에요… 내가… 얼마나 힘들었…”
 
로즈는 반가움과 서러움이 섞인 인사를 건네었다. 하지만 매몰찬 목소리가 중간에 인사를 끊어버리고 소리쳤다. 목소리는 귀에서 들리는것이 아니라, 로즈의 머리 안에서 직접 울려퍼졌다.
 
‘네가 감히!’
 
아가타는 조금전 로즈의 머리속에서 울려퍼지던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창을 목전에 들이밀었다.
 
‘어떻게 내 지배에서 벗어나 도망친거지?! 내가 널 찾을 수 없을 줄 알았나?’
 
“아가타…?”
 
어안이 벙벙한 로즈를 향해 아가타는 창을 휘둘러 뒤끝으로 로즈의 복부를 강타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고통이 밀려왔다.
 
‘자비를 빌어라, 도망자야! 너는 포세이큰의 수치다! 죽음으로 벼려져 밴시여왕께 충성을 맹세한 자가 전쟁터에서 도망치느냐? 네게 주어진 그 힘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죽음의 천사가 땅에 엎드려 배를 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로즈에게 일갈을 날렸다. 로즈는 천천히 기억을 되돌려보았다. 그녀가 충성을 맹세한 적이 있었던가? 양립하는 두가지의 답변이 모두 존재했다. 말로 꺼낸적은 없지만, 포세이큰을 위해 일했다. 밴시여왕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밴시여왕 때문에 일한적은 없었다. 단지 살고 싶었을 뿐이다. 원하지 않은 선물을 강제로 들이밀고, 그 댓가로 충성을 요구하는 자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었다. 단지 죽음 후에도 그런 자들이 있을거라는 것을 로즈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오랜 경험을 통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로즈는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럴..께요..”
 
‘다시 한번 명을 거역하면 그땐 정말 의식이 없는 좀비로 만들것이다. 네가 받은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라. 누가 널 살렸는지, 누가 네게 진정한 안식처를 제공하는지 상기해라.’
 
말을 마친 아가타는 격렬한 고통속에 신음하는 로즈에게 양피지에 싼 뭔가를 던져줬다. 로즈는 겨우겨우 몸을 추스려 그것을 펼쳐보았다. 단검 두자루와 지도였다.
 
‘네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줄것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지도에 표시된 붉은 십자군의 주둔지, 단홍빛 울타리가 나온다. 이제 곧 우리 병력이 다시 돌아와 단홍빛 울타리의 남은 잔당을 처리할 것이다. 그 전에 저곳에 침투하여 할 일이 있다.’
 
로즈는 천천히 지도를 펼쳐 보았다. 지도에는 큰 주둔지의 요소요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글을 몰라 어디가 어디를 나타내는 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주둔지 한가운데에 표시되어있는 탑의 모습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안에는 탑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언데드 죄수가 하나 갇혀있지. 그 죄수를 풀어 놓는것이 네 임무다. 죄수를 설득할 필요는 없다. 데리고 올 필요도 없다. 그저 풀어놓기만 하면 죄수는 자신의 일을 할것이다. 곧 십자군과의 전투가 끝날 것이니 서둘러 시행하라.'
 
말을 마친 아가타는 천천히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의 정신속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명심해라.’
 
그렇게 머릿속에서 울린 말소리를 끝으로 아가타는 또다시 저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엔 쓰러진 로즈만 홀로 남아있었다. 아직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지만 공포가 로즈의 몸을 일으켰다. 이 상태로 꾸물거리면 다시 아가타가 로즈의 몸을 지배할것이다. 로즈는 고통을 참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아가타가 가르킨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비록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었지만 로즈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이 로즈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고, 로즈는 전속력으로 달려 울타리에 도착했다. 단홍빛 울타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웅장함과 비루함을 동시에 풍기며 서 있었다. 이전엔 이곳에 정말 성채라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거대한 성벽이 일부만 남아있었고 심지어 어느 부분은 무너져있어 초라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입구에는 십자군의 붉은 기가 세워져 있었지만 지키는 자는 이미 칼날에 쓰러진 뒤였다.
 
성벽 내부도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천막은 대부분이 반쯤 무너져 있었고 곳곳에서 불길이 기지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아직 남은 자들이 어떻게든 불길을 잡고 기지를 다시 복구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고 있었지만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로즈는 알고 있었다. 조금 후면 포세이큰들이 돌아와 그들을 다 죽일것이다. 불과 몇십분 후의 미래도 알지못한채 헛된 노력으로 발악하는 불쌍한 영혼들이었지만 그것도 죽음 후까지 농락당하는 로즈의 처지에는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로즈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아가타가 어디서 어떻게 지켜보고 있을지, 또 어떻게 로즈의 의지를 빼앗을지도 알 수 없었다. 로즈는 조금 전에 자신도 모르게 사용한 은신을 다시 한번 사용해보고 싶었지만 그렉의 도움도 없이 어둠속으로 숨어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그맣게 속삭여 오던 수수께끼같은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풀숲과 나무 그늘 사이에 숨어 탑으로 이동해야 했다. 다행히도 사방이 아수라장이라 풀숲 사이로 조심조심 이동하고 있는 로즈를 알아챈 병사는 없는 듯 했다.
 
기지 한쪽에 우두커니 세워져 있는 감시탑 또한 그리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정면의 입구와 주변은 그런대로 멀쩡했지만 외벽에 방금 폭발한것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는 큰 구멍이 있었다. 아마도 뭔가가 날아와서 큰 타격을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타격에도 불구하고 다른 구조물들에 비하면 외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다른 모든 십자군들은 탑 보다는 다른 것들을 먼저 지키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로즈에게는 큰 행운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탑에 들어온 로즈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안을 둘러보았다. 탑은 웅장한 외형에 비해 내부가 무척 초라했다. 안에는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외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다. 그 외에 사방에 깨진 등과 빈 상자, 폭팔의 충격으로 쓰러진듯한 시체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늙은 호박들이 몇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단순한 내부구조안에 죄수를 수용할 수 있을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따로 방이나 창살 같은 것은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가능성은 탑 위쪽이었다. 로즈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나무로 된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올라갔다.
 
나무로 된 계단은 끝없이 이어졌다. 탑 내부의 가장자리를 나선형으로 돌아가며 위로 올라가고 있었던 계단은 위로 갈수록 점점 손상된 부분이 많아졌다. 계단이 빠져있거나, 중간에 큰 구멍이 나있기도 하였다. 로즈는 탐색을 멈추고 죄수가 이미 달아난것같다고 아가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아가타가 했던 말이 떠올라 섣불리 도망칠 수 없었다. 빈틈을 뛰어넘고, 길이 없는 계단을 억지로 난간을 타고 올라가는 여정을 쉼없이 반복한 끝에, 결국 로즈는 탑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탑의 꼭대기에도 다른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그곳에는 쇠창살로 된 커다란 새장같은 감옥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로즈가 찾아해메던…
 
"그때 그 미친년씨?"
 
"넌 뭐야? 누가 미친년이라는거야?"
 
...미친년이 있었다.
 
"아… 그게 미친년이 아니라…"
 
"염병, 말 다해놓고 변명하지마."
 
"...죄송해요."
 
"됐어. 근데 넌 누구냐? 날 알아? 십자군 출신인가?"
 
"아니요. 저… 기억 안나세요? 그때 왜… 제가 그… 책자 같은거 읽어드렸는데."
 
"아."
 
"네. 맞아요... 그때 봤던…"
 
"미친년놈 커플."
 
"……"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할 수는 없었다. 로즈 생각에도 그때 읽은 책자나 모르도나 다들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저도 제 의사로 한건 아니었다구요."
 
"글쎄, 네 남자친구가 시켜서 했다고 해도, 너도 딱히 반항하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럼 너도 하고 싶어서 한거잖아?"
 
"그건… 저도 잘 몰랐어서…"
 
"네 나이가 몇인데."
 
"열아홉살요. 죽을 때 기준으로."
 
"그만큼 살고도 뭐가 정상이고 미친건지 구별이 안되니? 몰랐다는 건 변명이 안돼. 그냥 니책임인거지."
 
"이봐요, 막 죽었다가 깨어나서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럼 시키는대로 해야지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그게 핑계라고. 적어도 난 미친년 소리 듣더라도 니네한테 끼어서 미친짓은 안했다."
 
"그건…"
 
로즈는 말문이 막혔다. 그도 그럴것이 로즈는 그렇게 살아왔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런 주관도, 저항도 없이.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흐르면 흐르는 대로. 나서지 않음으로서 위험을 피하고, 뒤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 그녀였기에. 자신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그동안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고 살던 로즈였지만, 릴리안의 태도 앞에서 왠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암튼 그건 됐고, 너 진짜 뭐냐? 아까보니까 스컬지 놈들 다 도망가던데. 넌 내부 침투조냐?"
 
"그런건 아니고요, 당신을 풀어주러 왔어요."
 
"뭐? 날 왜?"
 
"그건… 개인적인거에요."
 
"뭔 소리야. 너 나랑 무슨 연있어? 나 풀어주고 그때 그 책자 또 읽어주려고? 엄청 투철한 직업정신이네."
 
"아니에요! 그거 안읽을꺼야! 그냥… 누가 좀 풀어주래요… 시켜서 하는거에요."
 
릴리안이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넌 정말 시키는 대로 잘하는구나."
 
그 한마디가 로즈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아니야! 난 안그렇다구요. 난 누가 시키는대로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어쩔 수 없는거라고요. 당신을 안풀어주면 난…"
 
로즈가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던 서러운 감정이 갑자기 치솟아 올라왔다.
 
"...난, 난…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단 말이에요……"
 
눈에서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연신 독설을 퍼붓던 릴리안은 갑작스러운 울음에 당황하고 태도를 바꿨다.
 
"야… 잠깐만… 울지마, 울지마…"
 
"...오늘, 흑,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흑, 알아요?"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내가 말을 너무 독하게 했어… 울지마…"
 
한참만에 사람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어서 그런건지, 갑작스럽게 긴장이 풀려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즈는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로즈는 한참동안 넋두리를 풀어놓았다.
 
"...그래그래, 알았어. 참 못됬네. 그래, 이제 울지마, 뚝!"
 
"...흑, 난… 흑, 그냥 조용히 있고, 훌쩍, 싶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로즈는 좀 진정된 듯 했다.
 
"그래, 알았어. 네 맘대로 하라고. 날 풀어주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훌쩍, 네… 그런데 그거, 어떻게 열어요? 열쇠 같은건 없어요?"
 
"어… 원래 여기 경비병이 가지고 있을텐데, 너 올라오면서 누구 안만났니?"
 
"다... 훌쩍, 죽어있던데요. 그 시체를 뒤져봐야 되나?"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꺼야. 네 말대로 이제 곧 놈들이 다시 돌아올텐데 빨리 탈출하려면 시간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리 좀 가까이 와봐. 내가 사실은, 아까부터 여기 창살을 좀 벌리고 있었거든. 조금만 도와줘서 이걸 힘으로 당기면, 내가 그 틈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꺼야."
 
"네, 흑, 그럼 한번 해볼께요."
 
로즈는 감옥에 가까이 다가가 창살을 살폈다. 과연 창살에는 조금 휘어져있는 틈이 있었다.
 
"이걸 당신이 이렇게 만든건가요?"
 
"물론, 그렇게 안보이겠지만 난 십자군의 비밀병기 같은거였거든. 촉망받는 인재였지. 물론 이렇게 되기 전이지만 말이야. 그쪽을 꽉 잡고 있어봐바. 그럼 내가 여기 틈을 더 크게 벌릴 수 있을꺼야."
 
"이거 말인가요?"
 
"그래. 그거 꽉 붙잡아서 뒤로 당기고 있어봐봐.”
 
로즈는 튀어나온 창살을 붙들고 뒤로 몸을 젖혔다.
 
"그래! 조금만 더!"
 
"으으으… 이렇게요?"
 
"어, 잘하고 있어! 이제 조금만 더 벌리면 될꺼야!"
 
창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튼튼했다. 정말 이렇게한다고 틈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일단은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시키는대로…
 
시키는대로!
 
그 순간, 로즈의 목을 뭔가가 콱 붙잡았다.
 
"끅…이게 무슨…"
 
"멍청한 년. 결국 끝까지 남의 손에 놀아나는구나."
 
"잠...깐…… 살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내게 눈을 돌려도, 난 저주받은 스컬지와 함께하지 않겠다."
 
릴리안의 보라빛으로 빛나는 손이 로즈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있었다. 도저히 죽은 사람의 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었다. 로즈는 의식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몸에 힘이 완전히 빠져나간 로즈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것을 릴리안은 혐오스러운 듯 바닥에 던져버렸다.
 
"멍청한 누더기 골렘같으니."
 
로즈는 희미하게 떠진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수 있었지만,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팔과 다리는 물론, 작은 신음소리 말고는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릴리안이 손을 털고 있을 때, 거대한 함성소리가 탑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이런 젠장, 놈들이 정말 다시 돌아왔군."
 
다넬의 군대가 다시 단홍빛 울타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추격을 나간 십자군은 필시 괴멸되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탑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난장판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젠장, 누구 정말 없어? 나 아직 여기있다고! 나야, 릴리안 보스란 말이야! 게블러? 나 좀 구해줘!"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걸까. 곧 탑 아래층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뛰어올라왔다. 판금갑옷을 걸쳐 입고 검은 투구를 쓴 십자군이었다.
 
"게블러!"
 
릴리안은 검은 투구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십자군은 아무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지? 아니, 그게 지금 중요한게 아니잖아. 이대로 있다간 우리 다 죽어. 빨리, 나 좀 여기서 꺼내줘!"
 
"릴리안."
 
검은 투구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희 아버지의 말을 전해줄께. 너희… 아버지는 릴리안 보스는 이미 죽었다고 하셨다."
 
"그래. 당연히 난 한번 죽었… 잠깐, 그거 설마…"
 
"지금 철창 안에 갇힌것은 릴리안이 아니다. 그건 릴리안을 흉내내고 있는 껍데기일 뿐이다. 당장 그 흔적을 없애 빛에게 영광을 돌려라!"
 
"뭐라고?! 아니야! 난 릴리안이라고! 정말 나란 말이야! 게블러, 우리 친구잖아. 우리 어린시절부터의 친구였잖아!"
 
하지만 게블러는 마음을 굳힌 듯 했다. 이 모습을, 언데드가 된 동료를 앞에 두고 잠시 갈등하는 듯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릴리안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다. 릴리안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오직 로즈만이 알 수 있었다.
 
"정말이야! 난 다 기억할 수 있어, 아니, 말할 수도 있다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나무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날도 기억해. 아무리 오래된 기억이라도 상관 없어, 다 알고 있다고! 나야, 정말 릴리안이라고! 제발…"
 
"릴리안은…세상에 없다…"
 
게블러는 자신의 검에 빛의 축복을 내렸다. 빛은 이윽고 광채를 감고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릴리안의 창살로 다가갔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줘! 제발, 그럼 아버지라도 한번만 다시 보게 해줘!"
 
"네 아버지는… 널 보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게블러는 칼을 들어 창살 사이로 찔러넣을 준비를 했다.
 
"이것이… 정의다… 죽음으로 돌아가라, 스컬지야!"
 
빛을 휘감은 칼이 창살사이로 깊게 찔러들어갔다. 릴리안은 그 좁은 공간 속에서도 놀라울만큼 빨리 움직여 검을 피하려 했지만, 검은 릴리안의 왼쪽 옆구리를 깊게 파고 들어갔다.
 
"끄아악, 게블러 너…!"
 
"흙으로 돌아가라, 괴물아!"
 
릴리안은 고통에 울부짖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찌른 칼을 든 팔을 붙잡아 자신 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동시에 자신의 몸에 박힌 칼과 함께 게블러의 팔을 휘돌려 꺾었다. 게블러의 팔은 칼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팔꿈치가 바깥쪽으로 꺾여 괴이한 외형과 함께 부러져버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각자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이미 두 사람은 돌아갈 수 없는 경계를 넘었다.
 
"으악! 내 팔이…"
 
"너만은… 너만은 날 믿어줄꺼라 생각했었는데!"
 
뜯겨져나간 옆구리를 뒤로하고 릴리안의 오른손이 게블러의 목을 파고 들었다. 게블러가 온 몸을 빈틈없이 철갑으로 감싸고 있었지만, 릴리안의 손은 갑옷과 투구 사이의 빈틈을 놀랄만큼 잘 파고들고 있었다. 게블러는 이미 칼을 놓쳤다. 기묘하게 꺾여버린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왼손을 자신의 목을 조르는 팔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상태로 공중에 들려있었다. 어떻게 그 작고 연약해보이는 팔에서 그런 놀라운 힘이 나오는지 로즈는 알 수 없었다.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 두사람의 비극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게블러, 다시 한번 묻겠다. 정말…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셨어?"
 
게블러는 거의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말이 나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는 드문드문 투구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릴리안...은… 죽...었다…"
 
릴리안은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자신은 정말 누구란 말인가? 스스로 릴리안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은 릴리안이 아닌 것인가? 내 존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했던 모든 존재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진 것인가? 진정 나는… 존재 자체가 악인 괴물인가?
 
"정말…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난 널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난… 널..."
 
릴리안은 슬픔에 온몸을 떨고 있었다.
 
"...넌...괴...물이야…"
 
게블러의 목소리가 조용히 새어나왔다. 그도 흐느끼고 있었다.
 
"...내… 사랑하...는릴리안을… 돌...려줘…"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릴리안의 몸에서 검보라빛 불꽃이 일었다. 이윽고 게블러는 땅에 쓰러졌다. 릴리안도 감옥 창살을 붙들고 무릎끓었다. 로즈는 먼 발치에서도 그것이 몸의 고통이 아닌,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겨우겨우 로즈는 몸을 바닥에서 일으킬 수 있었다.
 
"릴리안… 우리, 여기서 빨리 나가야…"
 
"가까이오지마!"
 
"이제 그만해요… 우린… 이미 되돌릴 수 없어요…"
 
"절대로! 난! 스컬지가 되지 않을꺼야!"
 
그때 탑이 큰 충격을 받아 진동했다. 다시 쳐들어온 포세이큰 군대가 투석기라도 날린 모양이었다. 이미 한번 외부에서 타격을 받았던 탑은 재차 들어오는 공격에 취약했다.
 
"이건… 큰일이야. 탑이 무너질꺼야!"
 
이미 탑을 내려가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충격에 탑은 통채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안돼… 이봐, 그만해! 여기 아군이 있다고!"
 
로즈가 외치는 소리는 전쟁의 함성과 포격소리에 뭍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투석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포격을 탑에 퍼부었고, 이윽고 탑은 상층부가 꺾인 채 해안가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포격이 탑의 중심부에 명중했다. 탑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로즈와 릴리안은 탑의 잔해와 함께 해안가로 떨어지고 있었다. 대해의 깊은 바다가 그들을 덥쳐왔다. 로즈는 바다에 강하게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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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덧. 제목 수정하였습니다.

Lv14 들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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