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미에서는 상대가 없던 닌텐도에게도 흑역사쯤으로 취급되는 기기가 있다. 바로 버추얼 보이(Virtual Boy)다. 당시만 해도 수천만 대 수준의 판매고를 올리는 게 익숙한 닌텐도였지만, 버추얼 보이는 글로벌 판매량 77만 대라는 다른 의미로 엄청난 수치를 기록했다. 플레이스테이션, 세가 새턴 등 디스크 기반으로 32비트 게임 전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버추얼 보이의 게임 경험은 말 그대로 시대에 뒤떨어져있었다.
직접 전원을 꽂아 사용하는 게임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휴대용이라고 하기엔 과도하게 무겁고 불편했다. 불편한 스탠드를 놓고 쓰는 사용 경험은 두통이나 목 통증을 유발했다. 여기에 붉은색으로 가득한 디스플레이는 게임 화면을 보기에도 부적절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닌텐도64와 슈퍼패미콤의 공백기에 출시됐지만 이미 릿지 레이서, 철권 등 3D 게임으로 눈이 높아진 게이머들의 기대를 한참 못미치는 게임이었다. 3D 효과도 이미지의 각도를 살짝 틀어 보여주는 정도였지만, 가상현실이라는 문구로 포장되어 공개됐다.
오랜 기간 버추얼 보이는 조롱의 대상이었고, 이례적으로 닌텐도에서도 실패를 공언한 기기다. 그렇게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길 원하는 기기였을지도 모르지만, 이게 당당히 리뉴얼되어, 닌텐도 스위치용으로 출시된 것이다.

공식 출시 시기보다 먼저 배송이 이루어진 버추얼 보이 - 닌텐도 클래식. 2월 17일에는 게임 플레이가 가능한 소프트웨어가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 + 추가팩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배포되기 시작했다. 가장 이상하면서도, 원래 버추얼 보이를 그대로 담아내는 형태로 말이다.
버추얼 보이는 닌텐도 스위치나 닌텐도 스위치2를 기기에 직접 꽂아 디스플레이로 사용하는 헤드셋이다. 과거 골판지로 만드는 닌텐도 Labo VR처럼 기본적인 렌즈가 달려 있는 형태다. 그리고 이 렌즈를 통해 닌텐도 스위치가 쏘는 SBS(Side-by-Side)화면을 각각의 눈이 개별 시청하게 만들어, 3D 효과를 내는 방식이다. 고전적인 방식이지만, 별도의 고가 장비 없이 3D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식이다. 이건 원래의 버추얼 보이가 시차를 통해 만든 3D 방식과 유사하다.
원래의 버추얼 보이의 화면은 진동을 통한 잔상 효과를 활용했던 만큼, 소리도 있었고, 충격에도 약했다. 하지만 두 눈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화면을 쪼깬 닌텐도 스위치의 디스플레이를 그대로 사용하는 만큼, 내부 팬 소음을 빼면 기계음이 날 이유도, 딱히 고장이 날 이유도 없다. 사실상 닌텐도 스위치용 버추얼 보이의 역할은 닌텐도 스위치를 거치하고, 닌텐도 스위치가 송출하는 분할된 화면을 분리해 렌즈 필터를 통해 담아낼 수 있도록 집중하는 데 있다.



필터라는 말을 쓴 만큼, 눈으로 보는 버추얼 보이의 렌즈 부분은 붉은색 필터로 화면을 더욱 검고 붉은 적흑 단색 디스플레이로 만들어주는 역할에 집중한다. 실제로 인게임 파트를 제외하면, 닌텐도 스위치 앱에서 화면은 컬러로 나오게 된다. 양 눈이 서로 다른 화면을 보는 과정에서 수렴각을 위해 화면을 볼록하게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타이틀 선택 화면 등에서는 일반적인 컬러로 화면을 볼 수 있는 식이다. 하지만 렌즈 필터를 통해 이 부분을 적흑 단색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게 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실제로 타이틀 화면이 컬러로 출력됐다는 걸 알게 된 건 수십 분의 첫 플레이가 끝나고였다. 스위치2를 분리해 촬영한 이미지를 확인했을 때서야 이 부분이 필터만으로 버추얼 보이 느낌을 내고 있다고 알게 된 것이다. 그 정도로 필터는 화면을 버추얼 보이답게 만드는 데 제대로 역할을 한다.
인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타이틀 선택 후 마주하는 게임 플레이, 옵션 등은 원래의 버추얼 보이처럼 적흑으로 표시되지만, 스위치2의 LCD 디스플레이 특성상 특유의 회색빛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필터는 이 부분까지도 완전히 검은색으로 만들어 화면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입체감, 그리고 3D 화면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눈 사이 거리 조절은 처음 앱 실행, 그리고 게임 중 언제든 소프트웨어적으로 조절하게 만들었다. 얼굴에 직접 닿는 폼 부분도 부드럽고 폭신해, 빛샘을 막기 위해 강하게 압박하는 편인 현세대 VR 헤드셋보다는 훨씬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번 첫 소프트웨어 라인업은 7종으로 게임 안에서는 적흑 단색 화면을 그대로 유지한다. 애초에 1990년대 중반 출시된 게임인 만큼, 높은 수준의 게임 플레이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타이틀들이다. 그마저도 화면 색상 뿐만 아니라, 기기 성능의 한계로 게임 보이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의 모습이 담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보여준 기술적 도전은 꽤 의미가 있다.
'버추얼 보이 와리오랜드'는 화면의 입체감을 가장 잘 활용한 게임이다. 장애물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왔다, 멀리 사라지는 듯한 연출은 화면 전경과 어우러져 독특한 몰입감을 준다. 여기에 적흑 단색이라는 화면이 오히려 묘한 신비감을 준다. 이게 여러 원근감 효과와 더해지며 꽤 그럴듯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그려진다. 당시 이러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실제 게임으로 만들어낸 부분은 퍽 놀라운 부분이다.
대신 '버추얼 보이 와리오랜드'를 제외하면 핀볼, 3D 테트리스, 골프 등 버추얼 보이이기에 꼭 플레이해보아야 한다는 느낌을 주는 타이틀은 없다. 이건 원작 버추얼 보이 자체가 처참한 성적과 함께, 그럴듯한 게임 라인업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출시될 게임들 역시 기대감을 높이기엔 부족한 타이틀들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국내에서는 쉽게 체험할 수 없었던 원작 버추얼 보이의 경험을 제대로 된 느낌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부분일까?
사실 필터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닌텐도 스위치 VR 화면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으로의 확장이 더 기대되기도 한다.



게임 경험만큼이나 실제로 게임기를 접했을 때, 정말로 이걸 어떻게 즐겨야할지 감이 오지 않는 것도 기기의 아이덴티티를 잘, 아니 그냥 물려받은 부분이다. 앞서는 헤드셋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걸 헤드셋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밴드가 달려 고글 형태로 완전히 머리에 부착하는 형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탠드를 세우고 거치했을 때 편하게 얼굴에 밀착되는 느낌도 아니다.
책상 위에 올려두면 스탠드 덕에 위치는 대충 맞는다. 의자 높이를 조절하면 그나마 허리를 조금이나마 더 펴고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는 얼굴과 화면에 거리가 생겨,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굽히고, 목을 잡아빼 눈을 더 가까이 들이밀어야 한다. 그렇다고 누워서 착용하자니 밴드가 없어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눈과 렌즈가 멀어져버린다. 기존 기기가 스탠드를 포함해 760g이나 해 도저히 고글 형태로 만들 수 없었던 것에 반해, 이번 버추얼 보이는 속이 비어 매우 가볍지만, 결국 닌텐도 스위치나 스위치2를 결착해야하는 만큼, 무게는 높아져버린다.
결국, 닌텐도 스위치 버전 버추얼 보이는 원작의 만듦새와 감성을 훌륭하게 옮겨냈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이는 곧 원작의 불편함과 부족한 라이브러리 경험 역시 그대로 가져왔음을 뜻한다. 그래서 원작의 경험을 '잘' 개선해 물려받았다기보다는 '단점마저도 충실하고 완벽하게 물려받았다'는 표현이 적절해보인다.
99,800원이라는 가격도 닌텐도 마니아를 위한, 특별한 레플리카 정도로 접근해야 감당 가능한 가격이다. 다행이라면 원래 버추얼 보이 출시 가격이 15,000엔, 현재 닌텐도 스위치 버전도 미국에서는 99.99달러에 판매되니, 그나마 환율 방어를 했다는 점일테고.


콘솔 게임기 사업에서 여러 차례 부침을 겪었던 닌텐도의 역사를 생각하면, 닌텐도의 게임을 즐기는 팬 중에는 닌텐도 스위치, 닌텐도 스위치2의 흥행으로 새롭게 유입된 팬들 역시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버추얼 보이를 즐긴다면, 독특한 재미보다는 후회에 가까운 경험을 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그런 닌텐도 신 세대를 위한 게임기가 아니다. 어찌보면 닌텐도가 닌텐도 스위치라는 새 시대에도, 계속 과거 라이브러리를 복원하고자 하는 뜻이 드러난 또 하나의 부분이기도 하다.
2024년 개관하기 전 닌텐도 박물관을 처음 방문했을 때, 화투패부터 수많은 기기와 장난감 속에서 버추얼 보이가 가장 눈에 띄었던 게 기억난다. 닌텐도 스스로도 최악의 실패라고 밝힌 바 있지만, 버추얼 보이는 닌텐도 기기의 발전사 중 한 시대를 차지한, 중요한 기기로 존재했다. 그리고 플레이는 아니지만, 직접 게임 화면을 똑같은 헤드셋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놓았고 말이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당시 인벤과의 인터뷰에서 닌텐도의 오랜 역사 중 훼손되거나 버려지는 것이 많다며, 최근 그것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건 닌텐도의 흑역사 쯤으로 보이는 버추얼 보이에도 통하는 의미였다.
조금 시간을 돌려, 버추얼 보이가 처음 나왔을 때로 돌아가보자. 버추얼 보이는 경쟁자들이 외면했던 프라이빗 아이 기술을 획득한 뒤, 이걸 어떻게 게임으로 만들지 고민한 결과였다. 버추얼 보이의 탄생을 이끈 요코이 군페이와 팀은 처음에는 방 안을 걸어 다니는 VR을 구상했고, 실제 플레이어가 머리에 쓰고 다니는 화면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런 요코이 군페이의 발상을 따라오지 못했다.
고글 형태는 너무 무거웠고, 외부 충격 등으로 화면이 깨졌을 때 파편이 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법적 우려를 뚫지 못했다. 여기에 청색, 녹색 LED가 존재하지 않았고, 컬러 LCD는 너무 비싸 적흑 단색 LED가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적흑 단색이 배터리 효율도 좋고, 무한한 공간감을 만들어내기 좋다는 요코이의 판단도 있었으나, 결국 결과물이 이를 따라주지 못했다. 아이디어 구상 당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이동성'이 전혀 구현되지 못하고, 요코이 본인도 만족하지 못하는 기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버추얼 보이는 반대로 요코이 군페이가 꾸준히 구상해온 철학에서 출발했다. 점점 마니아들만의 것이 되어가는 게임. 그는 게임의 본질적인 재미를 누구나 처음 즐기는 새로운 경험으로, 더 많은 유저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게 과거 요코이 군페이가 성공시킨 게임&워치, 게임보이 제작의 기술적 기반이 됐고, 버추얼 보이로 이어졌다.
버추얼 보이의 새로운 출시는, 잘못된 선택과 과거를 그저 지우고 싶은 흑역사로 남기는 게 아니라, 현대로 옮겨 창의성을 재조명하고, 영원히 기록하는 데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닌텐도 마니아들이라면 그저 과거의 잘못마저 완벽하게 재현해도 구매하리라는 계산적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고. 분명한 건 이러한 선택이 꽤나 특별하다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