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시된 지 30년이 되어가는 고전 게임이고, 현재는 SOOP 플랫폼을 중심으로 리그가 이어져 일각에서는 '그들만의 리그'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승전 현장을 메운 인파와 열기는 이 리그가 가진 힘이 여전히 거대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액션보단 스릴러, 치열했던 빌드 싸움과 심리전
박상현과 이영호의 결승전은 풀세트 접전이었지만, 끊임없는 난전이 펼쳐지는 액션 영화라기보다는 시작 전부터 치열한 눈치 싸움이 오가는 '심리 스릴러'에 가까웠다.
보통 명승부라고 하면 200 대 200의 대규모 물량 싸움, 난전과 맵 전체 자원줄을 둘러싼 처절한 '액션'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한다. 다수 팬들이 열광하는 지점도 바로 숨 막히는 긴장감과 엄청난 난전, 웅장한 전투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ASL 결승은 완전히 결이 달랐다. 액션보단 스릴러였고, 숨 막히는 심리전이 핵심이었다.
이영호의 다전제는 남들과 다른 맛이 있다. 기본기에 있어 이영호가 최고인 것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지만, 이영호의 진면목은 대회에서의 판짜기다. 스타크래프트의 초반 빌드는 상성의 크기만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확실히 가위, 바위, 보처럼 유, 불리가 있다. 이영호는 빌드 선택부터 상대의 심리를 간파하고 압박한다.
비록 패배한 경기긴 하나 16강 이제동과 대결에서도 단판임에도 과감한 생더블을 성공시키거나 8강 장윤철, 4강 이재호전도 빌드에서 말리고 시작한 경기는 드물다. 결승도 그랬다. 3연속 생더블, 전체로 보면 7판 중 4판을 생더블을 시도하는 과감함과 상대의 빌드까지 파악하는 치밀함은 역시 최고였다. 그에 못지않게 박상현도 승부사 기질이 있는 선수기 때문에 4세트 4드론을 시도해 승리했지만, 그때 이영호는 생더블이 아닌 전진 8배럭으로 빌드만 보면 이영호가 진 싸움이라고 보긴 힘들다.
결과적으로 빌드 준비에 있어선 이영호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박상현의 군더더기 없는 대처, 움직임, 컨트롤을 통해 이영호를 넘고 우승을 차지한 그런 결승전이다.

'최종병기'는 왜 장기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명승부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알 수 없는 아쉬움은 공존했다. 이영호 특유의 '압도적인 최적화를 통한 장기전 운영'이 이번 결승전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디파일러의 다크스웜, 울트라리스크 소 떼가 등장하고, 테란이 배틀크루저나 레이트 메카닉으로 맞서는 후반 진흙탕 싸움은 한 경기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6년 만에 ASL에 돌아온 이영호는 이번 시즌 내내 장기전보다는 '초반 타이밍 러시'가 핵심 테마였다. 최근 T VS P 대결 중 최고의 명승부로 평가받았던 8강 장윤철과 대결 테마도 최적화를 통한 타이밍 러시였고, 필연적으로 장기전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던 이재호와 4강전마저 핵심은 초반 전략이 골자였다.
그리고 저그전인 결승전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빌드에서 앞선 뒤 1/1업 메카닉 타이밍 러시나 바이오닉을 했던 2세트도 사실상 5배럭 압박 이후 한방 러시가 주요 포인트였다. 어떤 빌드든 완벽에 가깝게 소화하는 '최종병기' 이영호가 하나의 테마만을 갈고닦았다는 점은 의아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남겼다.

팔목 부상이라는 족쇄... 그리고 빛났던 박상현의 대처 능력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영호가 이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그의 '팔 상태' 때문은 아닌가 싶다. 이영호는 이번 시즌 내내 인터뷰와 방송을 통해 팔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게임 수를 소화할 수 없고, 강제적인 휴식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일례로 4강 승리 후 1주일 동안은 아예 게임을 쉬겠다고 밝혔고, 이번 시즌이 사실상 마지막 ASL이라는 언급도 수차례 했다.
예상보다 팔 상태가 더 심각했다면, 후반 장기전 운영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평소 10개의 전략을 준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 5개밖에 준비하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이었다면, 남들에겐 보이지 않았던 스스로의 핸디캡을 안은 셈이다.
'팔 부상'으로 인해 이영호가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이게 만약 사실이더라도 박상현의 우승 가치를 깎아내릴 순 없다. 박상현은 이영호가 준비한 날카로운 공격을 완벽한 대처와 피지컬로 막아내며 본인이 왜 챔피언인지를 스스로 증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