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 그 후속작인 '커피 토크 도쿄'가 출시되었다. '히비스커스 & 버터플라이'라는 DLC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작의 확장팩에 가까운 작품. 이번 작품은 배경부터 등장인물까지, 완전히 새로운 신작이다.
개인적으로, 무척 기대하고 있던 작품이기도 하다. 비주얼 노벨에서 중요한 건 결국 이야기. '커피 토크'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로웠다. 진행 방식은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얽히는 옴니버스의 형태를 띄고 있으면서도, 극적이기보다는 다소 정적으로 풀리지만, 그 흐름이 지루한 적은 없었다. 온갖 이종족이 모여 사는 뉴 시애틀의 여러 문제들은, 현실에도 상당 부분 맞닿아 있었기에 일종의 사회 고발적 메시지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만큼 즐거웠으니, '도쿄'의 이야기는 또 어떠할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와 너, 우리의 이야기
'커피 토크 도쿄'의 주인공 바리스타는 전작과는 다른 인물이다. 비슷한 바이브와 가게 운영 철학을 지니고 있지만, 전혀 다른 별개의 인물. 전작에도 등장했던 인물이자, 게임의 첫 손님이 되어주는 헨드리의 말에서, 게이머는 '커피 토크 도쿄'가 전과는 다른, 새로운 공간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게임의 시스템은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쿄 모처의 작은 심야 카페에는 여러 손님들이 찾아오고, 잔잔하게 울리는 로파이 음악과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속내를 꺼내 놓는다. 게이머의 역할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그리고, 다소 애매할 수 있는 주문에 맞춰 센스 있게 알맞는 음료를 제조하는 것이다.
몇몇 부분에서 사소한 변화는 있다. 뜨거운 음료만 있던 이전과 달리 찬 음료를 만들 수도 있고, 휘핑 크림을 얹거나 아이스크림 플로트를 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선에서 음료를 만들 수 있으며, 음료를 내어준 후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결국 이 게임의 핵심이다.

그리고,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듯 이 요상한 세계 속 도쿄 또한 갖가지 고민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이 약간 다르다.
전작인 '커피 토크'의 이야기는 '세계관'이 상당히 큰 영향을 주었다. 숲을 떠나 기업을 세우기 시작한 엘프, 중공업에 종사하는 드워프와 IT 업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오크 등, 뒤엎어진 세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갈등과, 이를 마주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주된 테마였다.
본작의 이야기들은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르다. '커피 토크 도쿄'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개인으로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를 다룬다. 도쿄가 어떤 도시인지, 세계가 어떤 상황인지는 사실 큰 상관이 없다. 부모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아이와 아이가 더 자신에게 의존했으면 싶은 부모. 자아를 잃어버린 채 자신의 존재 의미를 고민하는 유령,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하나의 풍조가 되어가는 남성 전업 주부, 육아와 경력 단절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은퇴한 회사원까지. '커피 토크 도쿄'의 이야기는 굉장히 현실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오늘날을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이야기를 다룬다.


전작인 '커피 토크'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으며 동시에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느끼긴 했지만, 사실 완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은 아니었다. 침을 뱉는 것을 존중으로 생각하는 '듄' 세계관의 이야기처럼,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 디테일이 더해지는 과정을 보는 즐거움이라 해야 할까? 이 세계 속 '현실적' 이야기들은 분명 생동감을 더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곧 나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커피 토크 도쿄'의 이야기는 우리의 실제 삶에 훨씬 더 깊숙히 다가온다. 2세를 고려하는 부부이면서,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은 나. 10년 이상 지속된 일에서 오는 매너리즘과, 애써 이를 부정하고 싶은 나.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그렇기에 더 본심을 말하기 어려운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이영도 작가의 구절이 떠오르는, 타인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괴리까지.


어떻게 보면 피곤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커피 토크 도쿄'는 현대인들의 고민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많은 고민 중 여럿을 동시에 하고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자 가장으로서의 나'에게는 상당히 위안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위로로도 자주 쓰이는 글귀처럼, '나만 힘든 건 아닌가 보다' 싶었으니 말이다.
음료 제조,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그 공간에서, 주인공인 바리스타는 음료를 만들고,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섣불리 어떤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주인공은 화자로서의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청자로서의 자세를 지키며, 이들이 홀로, 때로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고민을 깨닫고 이겨내는 과정을 바라본다.
물론, 주인공에게도 고민은 있다. 음료를 만들기가 생각보다 더 어렵다. 진짜로.
'커피 토크 도쿄'의 인물들은 자신이 원하는 음료를 정확히 모를 때가 있다. 가끔은 '차가운 호지차'라던가, '커피와 생강, 꿀이 들어간 음료'처럼 정확하게 본인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때로는 '매콤달콤한 음료' 나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처럼 애매한 주문을 할 때도 있다.

이 때, 게이머는 이들의 마음과 원하는 음료를 적당히 때려 맞춰 음료를 조합해야 한다. 기회는 하루에 총 5번. 5번 안에 원하는 음료가 나오면 다행이지만, 기회를 다 쓰고도 제대로 된 음료가 나오지 않으면 아쉬워도 어쩔 수 없이 미완성 음료를 대접해야 한다. 손님의 다소 묘한 리액션은 덤이다.
이를 보조하는 시스템은 전작에서도 쓰였던 SNS 앱인 '토모다칠'이다. 토모다칠의 기능은 전작 대비 크게 강화되었는데, 단순히 등장 인물들의 상태를 엿보는 것 뿐만 아니라 이들이 남긴 피드나 해시태그를 타고 더 많은 정보들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 중에는 간간히 새로운 음료에 대한 레시피가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 레시피가 언제나 쓸모있는 것은 아니며, 하루가 지나면 피드가 사라져 버리기에 어딘가 메모라도 해 둬야 한다.

아직 다회차를 하지 못했기에 이 '실패한 음료 대접'이 엔딩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완벽주의를 노리는 게이머 입장에서는 꽤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부분이다. 인터넷을 찾아 보면 레시피를 구할 수야 있겠지만, 몰입이 깨지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패' 또한 서사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면 딱히 문제가 될 건 아니다. 잘못된 음료를 내놓는다고 게임 오버가 되는 건 아니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다소 도전적인 콘텐츠 형태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결국 제조에 실패했을 때 아쉽기는 했지만, '게임이 뭐 이래'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별 의미 없이 존재하던 '물건 건네주기'는 삭제되었다. 덕분에, 게이머는 커피 토크의 핵심인 음료 제조,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에 보다 집중할 수 있다.
심야 카페는 여전히 성업 중
'커피 토크 도쿄'는 그런 게임이다. 전작을 해 본 게이머라면 낮섦을 느끼지 못할 익숙한 디자인. 아트 풍이 살짝 변하긴 했지만, 민감하지 않은 게이머들이라면 큰 문제 없이 넘어갈 부분이며, 그 외 부분은 우리가 잘 아는 그 커피 토크와 다르지 않다.
다만, 캐릭터의 디자인에서 다소 호불호가 갈릴 여지는 있다. 전작의 '프레야'처럼 주인공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인물인 '뷘'의 경우 주인공의 조수이자, 사고로 사지를 모두 의수와 의족으로 대체한 인물인데, 핑크색 머리와 사이안 블루의 눈화장, 그리고 논바이너리라는 성 정체성까지, 온갖 호불호가 갈릴 설정을 죄다 달고 있다. 물론, 이 설정이 게임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꽤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다.

또 다른 하나의 걸림돌은 '번역'이다. 사실 커피 토크 도쿄의 한국어화는 상당히 훌륭한 부분인데, 말장난부터 시적 표현, 각종 밈의 활용까지 상당히 디테일하게 한국어화가 이뤄져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칭 대명사를 혼동하거나, 반말과 존대를 혼용하거나, 번역이 아예 안 된 부분이 있는 등 잘 된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큰 문제가 될 오역은 없지만, 간혹 눈에 띄면 몰입감이 떨어지게 되는 아쉬운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게임은 단단하다. '커피 토크 도쿄'는 전작과 굉장히 닮았고, 실제로도 유사하지만 완성도 높은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이 '이야기가 달라진다'라는 점이 후속작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치다. 전작 또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코지한 분위기가 엮이며 만들어지는 게임이었을 뿐, 게임 디자인이 월등하게 독보적이거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주얼 혁명을 노린 게임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커피 토크 도쿄'도 하루를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 어떤 이는 이야기에서 본인을 볼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가까운 누군가를 볼 것이다. 커피 한 잔과 함께 풀어내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 게임은 할 가치가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