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휩쓸려 정신을 일었던 로자레일은 귓가에 울리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괜찮으십니까?”
로자레일의 왼편에 포박된 채로 앉아있던 마르텡이 안부를 물었다. 그의 몸에도 밧줄이 감겨 있었는데, 팔다리를 살펴본 로자레일은 온몸이 쑤셨지만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들어왔다. 군인들은 갑판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선원들을 포박하고 있었다. 자신을 포박하고 있는 밧줄에 힘을 주어본 로자레일은 얼굴을 찌푸리며 마르텡을 바라보았다.
“폭풍에 휩쓸려 제국 령으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애나벨은?”
“모르겠습니다.”
선원들을 포박하여 갑판 한쪽에 몰아넣고 있던 제국군인들 중에 몇 명이 로자레일에게 걸어왔다.
“네가 선장인가?”
하급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묻자 로자레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방지게!”
“나둬.”
지휘관의 옆에 있던 군인이 로자레일을 걷어차려고 했지만 지휘관의 제지에 뒤로 물러나며 로자레일에게 눈을 부라렸다. 로자레일도 굴하지 마주 노려보았다.
“나는 베로쉬 중위다. 세나콘과 블레야의 깃발을 모두 달고 있던데, 어디 소속이냐?”
베로쉬가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일단은 세나콘 소속이요.”
“일단은? 뭐, 좋아. 곡물을 대량으로 싣고 있던 것을 보니 상선인가보지? 아니면 설마 군 보급선인가?”
“그런 건 왜 묻소? 죽이려면 얼른 죽이시오.”
의도를 알 수 없는 베로쉬의 눈빛에 로자레일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씹어뱉듯 내뱉었다. 포악하고 잔인한 제국 군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라온 로자레일은 이미 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선장이다 이건가? 어린놈이 자존심은...”
베로쉬도 20대 후반의 나이에 불과 했지만, 갓 20을 넘은 것으로 보이는 로자레일이 자존심을 세우는 것처럼 보이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살지 죽을지는 아직 모르는 거야, 어린 선장.”
로자레일을 보며 피식 웃은 베로쉬가 검지로 로자레일의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그놈이 이 배의 선장인가?”
“옛, 파롱 소령님”
덩치 좋은 군인의 질문에 베로쉬가 거수경례를 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아마도 베로쉬의 상관인 것 같았다. 파롱은 서쪽에 서있었는데, 마침 오후였기에 역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인상을 쓰며 눈에 힘을 주자 대충 그의 얼굴 윤곽은 알 수 있었다.
“파롱 소령이다.”
베로쉬의 상관 파롱은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흑인...”
로자레일은 마르텡의 말에 놀라 마르텡을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파롱을 보니 마르텡의 말처럼 파롱은 시커먼 피부를 가지고 있는 30대 후반 정도의 흑인이었다.
“흑인이 군인이라는 것이 놀라운가?”
로자레일은 침음을 삼키며 파롱을 바라보았다. 1년 여간 노예생활을 하면서 노예근성에 물들었던 그였기에, 노예에 대해서는 상당히 열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막상 노예의 대명사인 흑인을 보자 부정적인 시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소령님, 예항 준비가 끝났습니다!”
“복귀한다.”
놀란 표정의 마르텡을 바라보던 파롱은 부하의 보고에 잠시 생각하는듯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읊조렸다.
“본대로 복귀한다! 각자 위치로!”
파롱의 명령을 들은 베로쉬가 부하군인들을 지휘하자, 군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령을 내린 베로쉬와 파롱은 조교를 건너 스쿠너로 보이는 군함으로 돌아갔다.
“흑인인데도 상당한 신임을 받나 보군요.”
“으음.”
일사분란 한 제국군인들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마르텡의 말에 로자레일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실질적으로는 베로쉬가 지휘를 하긴 했지만 부하들이 파롱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기강 잡힌 모습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파롱의 통솔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로자레일이 배 채로 끌려간 곳은 섬 전체가 요새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메데이로스 섬과 비슷한 크기의 섬에 성벽을 쌓아 요새로 만든 것이다. 요새의 항구에는 슬루프에서 갤리온까지 수십 척의 군함들이 정박해 있었다.
“장관이군요.”
포박된 채로 배에서 내리면서 주위를 둘러본 마르텡은 입을 떡 벌리고 말했다. 로자레일도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제국이 달리 제국이 아니었군.”
“이 정도 가지고 놀라긴. 우리는 일개 연대라고. 어서 걸어.”
로자레일이 넋을 잃고 서서 군함을 둘러보고 있자 베로쉬가 로자레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로자레일은 반제국 연합과 제국연합의 군편제가 다르기 때문에 연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천인대를 뜻한다고 이해했다. 이정도 숫자의 군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군인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충성!”
“충성.”
로자레일이 최종적으로 안내된 곳은 상당히 지위가 높은 인물의 집무실로 보이는 곳이었다. 중간에 마르텡 및 부하들과 헤어져서 따로 이곳으로 안내된 로자레일은 2명의 경비를 지나쳐서 파롱, 베로쉬 두 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충성!”
“오, 파롱님. 이 분입니까?”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던 한 인물이 벌떡 일어나며 환한 미소를 짓자, 파롱이 그에게 경례를 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경례를 받은 인물은 20대 중반으로 상당히 젊은데다가 파롱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폭풍에 떠밀려 국경을 넘은 자입니다. 아마도 상인인 것 같습니다.”
“호오, 호오. 호오! 아, 저는 레토라입니다. 반갑습니다!”
“로자레일이요.”
포박된 로자레일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탄성을 내뱉던 레토라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본인의 소개를 하며 묶여 있는 로자레일의 양손을 잡고 흔들었다. 상당한 괴짜인 것 같았다.
“대령님, 아직 신원이 확실치 않습니다.”
“아아, 그렇죠.”
파롱이 레토라를 로자레일로부터 떼어냈다. 로자레일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 레토라는 로자레일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호오, 호오! 그렇군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로자레일을 살피던 레토라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로자레일은 상당히 특이한 이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상했다.
“이분은 상인이라기보다는 기사에 가깝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기사는 아니고. 아마도 상인이지만 검을 다룰 줄 아는 분인 것 같습니다!”
로자레일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잠시 자신의 모습을 살피기만 했는데도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갑자기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을 끄는 레토라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한 로자레일은 긴장한 표정으로 꿀꺽 침을 삼키며 레토라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하하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레토라가 굳은 표정을 풀며 웃었다. 좋게 보면 유쾌하고 나쁘게 보면 괴짜인 레토라의 행태에 로자레일은 화가 치밀어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 했지만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파롱의 눈치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욕을 간신히 삼켰다.
“레토라 대령님.”
“아, 알았어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레토라의 장난에 일이 진행되지 않자 파롱이 레토라를 재촉했다.
“상인이시죠?”
로자레일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에 상당히 많은 곡물이 실려 있던데, 우리가 그것들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로자레일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자레일의 지식으로는 당연히 처형되거나 노예가 되고 배에 실려 있는 물건들은 추징될 줄 알았는데 굳이 곡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니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말은....?”
“우리가 사겠다는 말이에요!”
로자레일이 희망을 품으며 레토라를 바라보자 레토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목숨만 살려주시오! 그러면 곡물쯤은 그냥 드리겠소! 아니, 배에 실려 있는 양만큼 더 드릴 수도 있소!”
“호오! 그것참 좋은 생각이군요!”
“그러면?”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던 로자레일은 절망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아, 오해하지 마세요! 적당한 가격을 쳐드린다는 거니까요, 하하!”
레토라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여긴 로자레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어차피 로자레일이 레토라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선물도 있지...”
콰광! 레토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굉음이 들리며 창문에서 무엇인가가 날아들어 왔다.
“애나벨!”
“페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