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보셨으면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짐작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블리자드는 카드를 너무 성의없이 만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중간 코스트 이상의 하수인들에 대해서요. 너무 난잡해질 것 같아 넣진 않았지만 하스스톤에 4/4, 5/5, 6/6 같은 획일적인 스텟을 가진 하수인이 얼마나 많은지 다들 알고 있으실 겁니다. 과연 이 카드들의 스텟이 모든 밸런스를 고려하여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것일까요? 얼굴없는 화염투사의 스텟을 배분할 때, 6은 너무 낮고 8은 너무 높기 때문에 7이 가장 적절하다! 라고 생각해서 스텟이 7/7로 결정된 것일까요? 글쎄요.
왜 용족 위상들은 다 8/8 아니면 4/12일까요? 거인들은 왜 하나같이 8/8이죠? 하스스톤의 상급 카드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공격력을 체력과 똑같이 만들어 둔 카드들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대충 설정한 스텟은 실제로 밸런스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스스톤에서 공격력 7 이상의 하수인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번 턴에 그 하수인을 처리하지 못하면, 당신은 패배합니다.' 물론 이런 역할을 하고, 또 해야만 하는 하수인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그렇지 않은 하수인들에게도, 블리자드는 기계적으로 7/7, 8/8의 스텟을 줍니다. 그리고 절대로 바꾸지 않습니다. 귀찮아서? 아니면 공체가 같은 게 미관상 좋아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용암거인이 너프되기 전, 거인 흑마가 1티어이던 시절에 저는 쭉 의문이었습니다. 왜 산악거인과 용암거인의 스텟이 똑같아야 할까요? 둘은 완전히 다른 카드입니다. 사용처도 다르고, 나오는 타이밍도 다르고, 수행하는 역할도 다릅니다. 두 카드의 공격력은 경기의 흐름에 전혀 다른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두 거인을 포함해서 하스스톤에 존재하는 모든 거인들은 하나같이 8/8입니다. 거인흑마가 탑티어이던 시절, 게임의 승패는 산악 거인을 처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났습니다. 4턴에 상대 흑마가 산악거인을 냅니다. 만약에 그 산악거인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게임에서 집니다. 산악거인이 가지고 있는 공격력 수치 8은, 게임을 단순한 이지선다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운빨겜'이라는 오명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런 데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거인흑마를 상대하는 데에 가장 짜증나는 요소 중 하나였죠. 지금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4턴에 얼굴없는 화염투사가 필드에 등장합니다. 손에 제압기가 있습니까? 아니면 최소한 그 공격을 버틸 수 있는 도발 카드가 있나요?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게임에서 패배해야만 합니다.
용암거인의 공격력이 8인 것은 납득할 만 합니다. 용암거인은 자신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내놓는 최후의 발악입니다. 그런 식으로 나온 용암거인이라면 다음 턴에 즉시 게임을 끝장낼 수 있는 파워가 있어야만 합니다. 5/10 같은 애매한 스텟으로는 얘기가 안 됩니다. 그런데 산악거인은 왜, 대체 왜 공격력이 8이어야 하죠? 왜 산악거인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패배로 직결되어야만 했을까요? 그것이 산악거인에게 주어진 올바른 역할이었을까요? 화염투사는 어떤가요? 4코스트, 과부하를 포함해도 6코스트에 나온 하수인이 왜 두 턴만에 상대 명치를 털어버릴 수 있는 공격력을 가져야만 할까요?
비전 거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문드루에 시달려 보신 분들이라면 격하게 공감하시겠지요. 비전 거인을 나온 턴에 바로 처리하거나, 혹은 못해도 그 다음 턴에 처리하지 못하면, 당신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비전 거인은 (조건부이기는 하지만)거의 노코스트로 뜬금없이 튀어나와 전장을 장악할 수 있는 주문 덱의 조커입니다. 그런데 왜 비전 거인의 공격력은 8이 되어야만 할까요? 왜 그런 강력한 파괴력을 가져야만 하죠? 천편일률적인 8/8 대신 6/10이나 5/12면 안 됩니까? 아니면 스텟을 확 낮추고 도발을 주는 방법은요? 아니면 깡스텟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제압 성능을 주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요? 뜬금없이 노코스트로 튀어나온 비전 거인에게 명치가 한 방에 털리는 것은, 유저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패배가 아닙니다.
알렉스트라자는 더합니다. 나오면서 상대의 체력을 15로 만드는데, 자체 공격력이 8입니다. 알렉스트라자를 나온 턴에 처리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패배합니다. 이번에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요.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 알렉스트라자 별로 쓰이지도 않는데, 공격력이 높은 게 대체 왜 문제냐?' 라고요. 하지만 실은 인과관계가 반대입니다.
자, 잠시 스크롤을 다시 위로 올려 봅시다. 제가 나열한 저 수많은 고코스트 - 고타점 카드들 중에, 현재 게임에서 쓰이고 있는 게 몇 장이나 있나요? 공격력이 의미가 없는 라그나로스를 제외한다면,(사실 라그나로스의 8데미지도 테클을 매우 걸고 싶기는 합니다.) 비전 거인과 빛그나로스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런데 이번 패치로 비전 거인도 입지가 줄어들 것이 예정되어 있죠. 블리자드는 요그샤론을 너프함으로써 성행하던 주문 덱에 제동을 걸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정말 조정이 필요한 것은 비전 거인이라고 봅니다.
머나먼 옛날, 하스스톤 초창기에 유행했던 '빅 드루이드'를 기억하시는지요. 말 그대로 big, 정신 자극과 급속 성장, 육성을 두 장씩 꽉꽉 채운 후에 고코스트 전설 카드로 남은 자리를 도배한 덱이 있었습니다. 5코 이하 하수인은 발드와 숲수 정도가 고작이었지요. 심한 경우 고코스트 전설(혹은 일반)카드가 십수 장이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설 카드는 정말로 전설 카드의 위용이 있었고, 모든 운영 덱에서 고코스트 전설 카드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덱의 파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당시 운영 덱 - 특히 전사 운영 덱은 '지갑전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아무리 후반을 바라보는 운영 덱이라고 해도 1~2장이 고작입니다. 라그나로스 한 장, 조금 더 욕심을 부리면 이세라 한 장. 이렇게 두 장만 넣고 가도 '욕심을 잔뜩 부린 덱'으로 취급받죠. 여기에 네파리안이나 대도 라팜, 아니면 오닉시아 같은 카드를 더 넣는다? 뭐 넣을 수는 있겠지만 승률은 장담 못 합니다. 아니, 장담할 수 있죠. 일단 50%보다는 아래일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쩌다 유저들의 수집 욕구를 자극해야 할 전설 카드들이 이런 취급을 받게 된 걸까요. 어그로 덱이 너무 강력해서일까요? 제압기가 너무 많아서일까요? 이유를 들자면 많습니다만, 조금 다른 측면에서의 이유 - 블리자드가 왜 공들여 만든 강력한 전설 카드들을 전부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러한 환경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다면, 전 대체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스스톤의 고코스트 카드들은 적극적으로 활용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 없이 설정한 공격력 때문에요.
예를 들어, 하스스톤의 환경이 바뀌어서 후반을 바라보는 덱이라면 공격력 7 이상의 하수인들을 툭툭 던질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전설 카드들이 상당한 확률로 다음 턴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요. 밸런스 붕괴가 일어나지요. 하스스톤의 고코스트 카드들 - 특히 전설 카드들은 나온 턴에 바로 제압되지 않는다면 하나같이 게임을 터트릴 수 있는 괴랄한 성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렉스트라자를 내었는데 낸 턴에 제압되지 않았다? 그럼 손에 화염구 한 장만 있어도 게임이 끝납니다. 라그가 처리되지 않고 필드에 남아 있다? 매턴 떨어지는 불덩이 폭격에 3턴 내에 gg가 나옵니다. 심지어 이번 확장팩 최악의 전설이라 평가받는 '괴물'도 필드에서 버틸 수만 있다면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한 부가 효과가 없더라도 7~12의 공격력으로 상대 명치를 두 대만 때리면 사실상 게임이 끝나죠. 유일한 예외는 이세라와 말리고스(...) 정도입니다만... 이 카드들이 필드에 2턴 이상 남아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굳이 설명을 더 해야 할까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블리자드는 이런 고코스트 - 고타점 카드들이 도저히 쓰일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 역할을 나이사가 담당했습니다. 블리자드는 나이사를 통해, 쓸데없이 높게 설정한 고타점 카드들의 공격력을 사실상 없는 것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나온 턴에 죽는 것이 당연했으니까요. 이 때문에 고타점 카드들의 소양은 '나오자마자 제압되더라도 효과를 볼 수 있느냐' 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카드들은 전부 사장되어 갔습니다. 블리자드 역시 이러한 불합리한 밸런싱에 문제를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정규전이 시작되자마자 나이사를 고인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런 상황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해소할 수 없었습니다. 어그로 덱의 강세는 여전하고, 나이사가 없어도 하스스톤에 제압 카드는 차고 넘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불합리한 공격력 때문에 밸런스가 무너져 버리니까요.
다른 tcg를 예로 들어볼까요. 유희왕의 하급 어태커들은 대체로 공격력이 1000대 중후반이고, 간혹 2000을 넘기기도 합니다. 제물을 하나 바쳐서 나오는 상급 어태커는 대체로 2000대 초중반이고, 최상급 어태커도 웬만해선 공격력이 3천을 넘지 않습니다. 물론 공격력이 4천, 5천 하는 놈들도 있습니다만, 이들은 대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소환 조건을 가집니다.(신의 카드라거나, 아니면 퀘이사, 쉬프르 같은.) 쉽게 말해서 유희왕에서는 최상급 몬스터인 블랙 매지션 - 공격력 2500 - 에게 한 대를 맞는 것보다,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튀어나오는 하급 몬스터인 '번개왕' - 공격력 1900 - 에게 두 대를 맞는 것이 훨씬 아프다는 겁니다. 물론 유희왕에도 상대의 명치를 터는 데에 특화된 몬스터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생존력이 약한 대신 타점을 괴랄하게 높일 수 있거나, 질풍이 있거나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강력한 공격력은 강력한 공격력을 발휘하도록 설계된 하수인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7/7이나 8/8로 스텟을 통일하는 대신에 말이죠.
하스스톤에서 5를 초과하는 공격력은, 실질적으로 상대의 명치를 때릴 때 이외에는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 위에 나열된 수많은 카드들 중,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그리고 수행해야만 하는 카드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데스윙, 왕 크루쉬, 용암거인, 그리고 고대의 존재(...) 정도이죠. 그 이외의 카드들 - 특히 비전 거인과 얼굴없는 화염투사는 체력과 맞춘 공격력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공격력을 낮춰야만 할 이유는 잔뜩 있지만 말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저 위의 카드들을 일괄적으로 너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스스톤의 쓸데없이 풍부한 제압기에도 대대적인 손질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부 직업은 특출나게 많은 제압 수단을 가질 수도 있고, 그것은 그 직업의 특색이 됩니다. 하지만 모든 직업이 풍부한 제압 수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특히 어그로 덱에게는 말이지요. 모든 덱에는 단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파훼법이 생기고 상성 관계가 성립합니다. 초, 중, 후반이 모두 강력하며 전개력이 좋고 필드 복구가 빠르며 피니쉬도 좋은데 광역기도 고성능이며 제압기도 최상급인 덱 같은 것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아쉽게도 현재 하스스톤에는 그런 덱이 딱 하나 존재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