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예전부터 게임을 해 왔던 분이면 미드AP누커에 대한 기억들이 다들 있으실 겁니다.
애니, 브랜드, 베이가, 르블랑, AP사이온, 제라스 등으로 대표되는 미드AP누커..
라이엇에서 공식적으로 챔프분류를 해준 설정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미드AP누커는
"비교적 긴 스킬 쿨다운, 강력한 한방 버스트 데미지를 가진 AP 챔피언으로, 스킬 쿨을 한바퀴 다 돌리는 이른바 '원콤' 형태의 딜방식을 통해 상대가 손쓰기도 전에 킬을 만들어내는 챔피언"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분명 매력적인 컨셉이고 이와 반대되는 DPS형 챔프들이 '1000의 딜을 5초에 넣는' 컨셉이라면, '700의 딜을 1초만에 퍼붓고 4초동안은 평타만 때리고 있는' 이러한 컨셉은 분명 대비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샌가 미드AP누커들은 대회고 일반 게임에서고 점점 그 픽률과 승률이 감소하는 추세에 있으며, 요사이 와서는 '멸종' 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건 꽤나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어느 챔피언 하나(대표적인 예로 리메이크를 기다리고 있는 카르마, 하이머딩거 같은)가 고인 수준이라면 그건 게임의 전체적인 양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챔프들은 그냥 현재의 메타에 맞는 컨셉의 챔프로 수정해 버리면 그만이지요. 시즌2 최고의 트롤픽이던 이블린이나 신짜오 등등도 리메이크 한방으로 인생 대역전에 성공해 대OP의 반열에 들어선 게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케릭터군의 컨셉 자체가 도저히 손쓸 수 없을만큼 고인이 된 거라면, 이건 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전략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라이엇의 패치방향과도 맞지 않는 것이고, 그 케릭터군에 속한 케릭터들 전체가 사장되 버리는 것이니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했던 챔프들을 사실상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어째서 시즌1 시즌2동안 미드의 자존심이었고, AP챔프들의 정석이었던 누커(nuker)들이 더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고인이 되었는지, 저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봅니다.
High risk, low return.
시즌1 당시 미드에서 애니와 브랜드가 붙으면 참 재밌었습니다.
그당시 누커 vs 누커가 붙으면 조개따위 선템으로 가는 경우가 잘 없었습니다. 오로지 도란도란 마관신..
누가누가 짤 잘 넣나 싸움 하다가, 각 나오면 순식간에 플래시동반하여 풀콤보가 들어갑니다.
피통이 비슷했다면 먼저 스킬 다 맞추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당연히.
방템따위 가지않던 미드라이너들이 녹는데 걸리는 시간은 2초 미만.
그래서 미드는 어찌보면 가장 남자다운 라인이었고 가장 손빨, 그날의 컨디션빨을 많이 탔습니다.
그렇게 킬을 따낸 미드누커는 급격히 성장했고 전라인에 영향을 미치며 게임을 캐리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EU스타일이 확립되고, 유저들의 평균 실력이 증가하면서 타라인 로밍이 쉽지 않아졌습니다.
라이너들 간의 '상성관계'가 확립되고, 그에 따라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은 잘 하지 않게 되면서 '타워 끼고 cs만 먹는다' 는 개념이 널리 퍼지게 되고, 따라서 솔킬은 점점 힘들게 되었으며 점차 게임 시간과 한타싸움의 지속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렇게 무료하게 cs만 먹는 게임이 지속되면서 점차 누커들은 카서스, 오리아나 등으로 대표되는 AP DPS 케릭터들의 어마어마한 후반 딜량을 따라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카서스, 오리아나, 라이즈 등으로 대변되는 AP DPS 케릭터들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low risk, medium return입니다. 실력이 비슷하다면 라인전을 1:1로 압도하기는 힘든 케릭터이지만, 무난한 성장을 바탕으로 후반 한타를 열었을 시 그 무게감이 AP Nuker에 비해 훨씬 큽니다. 만약 라인전을 압도한 경우라면 high return이 되기도 하구요. 이런 와중에 AP누커가 할수 있는 것은 잘 큰 상대 딜러를 한방콤보로 끊어내는 일 정도인데, 이미 '탑-정글 탱커라인, 미드-원딜 딜러라인, 딜러라인 보호 서포터'의 역할분담이 완벽한 EU스타일 하에서 많은 cc기로 무장한 탑-정글 탱커라인을 뚫고 AP누커가 딜러진에 원하는 만큼의 딜을 꼽아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시즌2후반 이런 패턴의 질질 끄는 장기전, cs파밍 위주의 게임을 라이엇이 싫어한 나머지 여러 가지 패치를 통해 시즌3가 되면서 게임 시간은 빨라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빨라진 게임 메타에서도 AP누커들은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암살자형 누커'들이 등장하면서죠.
시즌2 후반 최강의 OP케릭이 되었던 이블린, 최근 아주 핫한 카사딘, 아칼리, 얼마전까지 메뚜기월드를 창시했던 카직스, 랭겜필밴의 제드 등등... AP누커들과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딜을 하지만 '접근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몸을 사리는 상대 라이너에게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딜을 깜짝스럽게 뽑아낼 수 있던 암살자형 케릭들은 'high risk, high return'의 컨셉으로 어느새 득세하게 됩니다. 접근기나 은신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전통의 AP누커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로밍력을 가졌고, 설상가상으로 카직스나 제드와 같은 AD형 누커들은 AP누커들이 가지지 못한 '강력한 평타'까지 겸비하면서 그냥 맞다이를 쳐도 오히려 AP누커들이 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안정적으로 성장을 도모하면서 후반을 바라보기에는 AP DPS 케릭터들에게 그 딜량과 유틸성 면에서 크게 밀리며, 그렇다고 암살자형 케릭터들처럼 미드를 압살해 버리면서 정글과 타 라인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는. 잘 컸다고 해도 한타에서 순식간에 상대 딜러라인에 붙어 프리하게 딜을 넣을 수 있는 암살자형 케릭터들과는 달리 그 딜을 쉽게 넣지도 못하는. 일명 'high risk, low return'의 챔프가 되어버리면서 자연스레 그 픽과 승률이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risk를 낮추거나(high risk -> low risk), return을 높이거나(low return -> high return)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최근 브랜드의 궁이 패치가 되었는데, 고정데미지를 주는 방식에서 고정데미지+체력비례 마법데미지를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대충 계산해 보니 후반 탱커라인에 주는 데미지를 증가시키는 것을 의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라이엇은 return을 높이는 방식으로 AP누커를 수정하려고 하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는 바람직한 패치 방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암살자형 누커들과는 다른 컨셉의 딜러라인을 구축할 수도 있죠. 암살자형 누커들은 게임 초반부터 후반까지 몸 약한 딜러진만을 집요하게 노리는 형태의 플레이를 하게 된다면, 이런 고전적인 AP누커들은 오히려 원딜과 함께 상대 탱커라인이나 암살자형 케릭터들부터 잡아내는 형태의 플레이를 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무리해서 상대 딜러진에 붙으려고 하지 않구요.
섣불리 레인전의 risk를 낮추는 방향으로, 즉 AP누커들이 초반을 보다 휘어잡을 수 있도록 하는 패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바로 이게임에는 엄연히 '초보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보자란 흔히 커뮤니티에서 말하는 '심해'가 아닙니다. 아무리 심해라 한들 30렙 찍고 룬 마스터리 셋팅이라는 개념정도는 있는 사람들이며 르블랑 상대 카운터가 조개껍데기인 정도는 압니다. 바로 '갓 시작해서 인제 라인개념이 막 생기고 게임에 흥미를 붙이려 하는' 몇달 안에 우수고객님들이 될 신규유저들입니다.
이 신규유저들이 있는데 AP누커들의 초반 딜을 증가시킨다거나, 초반 사거리를 올려주는 방식으로 레인전의 risk를 낮춘다? 딜계산에 익숙하지 않고 아이템빌드, 사려야 할 타이밍 등등을 잘 모르는 초보자들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없는 킬이 나오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와 피통 70%정도였던거 같은데 갑자기 들어오더니 한번에 죽네 애니 사기임" 이라든가... 이는 초보자들의 흥미를 뺏아가고 짜증을 유발하며 따라서 신규유저들의 유입장벽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사안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AP누커의 해결책이 후반 보상을 늘려주는 방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AP누커는 아니지만 최근 궁쿨에 있어서 패치를 받은 리븐이나 다리우스처럼 초반 레인전에서 가져갈 수 있는 스노우볼링의 요소는 줄이거나 적절한 수준일 경우 유지하되, (개인적으론 적절한 수준이라고 보기 때문에 딱히 하향해야 할 요소는 없다고 봅니다) 후반 기여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2/3렙 궁쿨을 크게 줄여 준다거나, 스킬레벨에 따라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계수를 적용하는 방식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예를들어 1렙스킬은 70+0.6 AP였다면 5렙스킬은 250+1.0AP가 되게 하는 방식으로)
추가로 컨셉 자체는 괜찮은것 같은데 좀 한계가 보이는 몇몇 AP누커들에 대해 얘기해 보면... 베이가의 경우 나서스와 같은 스택형 후반성장 AP누커인데, 나서스처럼 q데미지가 아닌 다른 스킬들과 스펙을 버프해 준다면 충분히 좋은 픽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사거리라든가 패시브라든가...) 또한 제라스의 경우 긴 사거리를 이용해 상대 딜러진을 노리는 컨셉의 '시즈탱크'형 누커인데 컨셉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궁이 제대로 적중하지 않았을 경우의 risk가 너무 커서 좋은 픽은 아니라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럭스처럼 포킹할 수 있는 대치상황에 좀더 유용할 수 있도록 w변신 시 궁극기의 사거리는 조금 줄이되 q나 e의 사거리는 보다 늘이는 방향으로.. 패치방향을 잡는다면 케릭터 컨셉 자체도 유지한 채 risk는 줄이는 방향으로 패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언젠가 미드를 휘어잡았던 AP누커들이 다시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라이엇이 추구하는 '다양한' 형태의 게임방향이기도 하고. 브랜드의 화끈한 불쇼가 미드에서 펼쳐지는걸 보고 싶은 사람은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