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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웅이 되기 직전에

아이콘 바람부는날
댓글: 3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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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15
2020-04-14 02:28:14

"답답해."

한 여성이 복숭아를 우악스럽게 씹어먹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 주위엔 아무도 없다. 품에서부터 어깨에 기대놓은 거대한 무기가 크게 존재감을 차지할 뿐이다.

그런데도 여성은 분명히 누군가와 대화하듯 눈을 힐끔하고, 뻘쭘한지 에췻! 하며 되도않는 재채기를 하며, 마치 주의를 끌려는 듯 하고 있었다.

"뭐가 또 그렇게 답답한데? 왜 그리 불평이야?"

"뭐긴 뭐겠어? 옴짝달싹 못하는 내 상황이 답답한거지."

"나는 네가 나를 복숭아 껍질이나 깎는 용도로 쓴다는게 더 답답해 아란."

"시끄러워 마하."

그녀는 무기에 대고 대화를 잇고 있었다. 그리고 무기는 정말 말을 하고 있었다. 무기는 여성을 아란이라 부르고, 여성은 무기를 마하라 불렀다. 무기와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기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둘에겐 익숙했다.

아란은 턱을 괴더니, 곧 답답하다며 기지개를 피곤 바닥에 대 자로 누워 하늘을 노려보았다. 지탱하던 어깨가 사라지자 마하는 바닥에 무성의하게 쓰러져 큰 소리를 냈다. 자신을 좀 살살 다루라는 목소리가 아란의 귀에 질러졌다. 아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다 무심히 말했다.

"있지 마하. 어떻게 해야할까."

"뭐를?"

"이곳 무릉은 공기가 참 좋아. 경치도 마찬가지지. 처음 볼 때는 그냥 우와 하는 정도였는데, 보통 이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질리잖아? 그런데 가면 갈수록 질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이 들어. 마음에 든단 말이지."

"그렇게 마음에 들면 정착하면 되잖아."

"너는 무기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사람은 달라. 나라는 사람은 여기에 와서 너라는 무기를 받을 때까지는 온 세계를 누비고 다녔어. 의뢰나 수행하며, 돈을 벌고, 살기 위해 발버둥쳐왔지. 그래야만 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잠자코 들어. 난 여기 오래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어. 소매치기만 안 당했으면 네 대금을 금방 지불하고 바로 여기를 떴었을 거란 말이야. 그러지 못해서 부려먹히고 있지만 어쨌든…."

아란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더니 마하의 손잡이를 쥐었다.

"어쨌든, 여기 있다보니까 좀 마음이 덜 급해졌어. 여유가 생기니까 생각도 많아졌지. 몸만 무식하게 쓰던 때랑은 좀 느낌이 달라졌단 말이지.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나는 왜 그렇게 급하게 떠돌아다녔을까, 하는 거야."

"……?"

"내 능력이면 어떤 곳에서는 먹고 살 정도론 벌 수 있어.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부호 정도로 살 수 있었겠지. 그런데도 내가 왜 떠돌아다녔었을까. 그 답을 요즘 생긴 여유 탓에 알게 되어버렸거든."

아란은 읏차, 소리내며 남은 하반신까지 완전히 일으켰다. 지금껏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마하는 대뜸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더 이상 아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무는 정도의 침묵을 했다. 그러다 나직한 목소리로 아란을 불렀다. 말을 끊지 말라는 주인의 대꾸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잠시만 아란."

"나도 알아.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겠다."

아란은 마하를 다시 어깨에 들쳐맸다. 그녀도 무언가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위에 산재하고 있는 무언가의 기운. 아란이 느끼기론 이런 범상치 않은 것은 항상 적의였다. 어느 대륙에서든 마물에 의해 지겨울 정도로 맛보았던 것이다.

평화로워보이는 무릉에서조차 이러한 마물들이 나타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아란은 기분이 불쾌해졌다. 평화를 침범당하는 것이 이토록 기분이 나쁜 것이었나. 이전에는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근래에 자주 느끼는 탓에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덕분에 마하를 쥐고 있는 오른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리고 그 힘은 마하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데에 기꺼이 사용되었다.



태산이 흔들리는 진동이 수어번 울렸다. 그것으로 전투는 끝났다. 피칠갑을 한 아란은 지겹다는 듯이 혀를 차곤 다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젠장, 끈적거려서 마음에 안 들어."

"……여기도 이런데, 마을은 괜찮을까?"

"……."

생각 안하려 했는데, 아란은 다시 한 번 혀를 차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과연 괜찮을까 하는 불안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데도 마을로 향하는 아란의 발걸음은 꿋꿋할 정도로 느렸다. 급해야 할 텐데도 왜 발걸음이 그러는지는 그녀 스스로도 몰랐다.

마하의 걱정과는 반대되게 마을은 평화로웠다. 피칠갑을 한 자신의 꼴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평소와 다른 게 없었다. 괜한 걱정이었다고 아란은 생각했다. 이렇게 마을에 들른 김에 피부터 닦아내야겠다 생각을 옮겼다. 항상 유용히 사용하는 목욕탕 쪽으로 갔다. 정말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정상 영업을 하고있었다. 아란은 가게 위에서 거대한 가마솥으로 물을 끓이고 있는 팬더 노인에게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봐! 뎁혀놓은 물 있어?"

"아 있지요! 미리 준비해두었으니 마음껏 사용하셔도 됩니다 영웅님!"

"그 영웅이란 호칭 되게 좋아하네. 낯간지러우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마을을 지켜주시는데 영웅이란 호칭은 과분하지 않을 겁니다.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싶은 노인네의 주책이라 생각하고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알겠으니 얼른 목욕물이나 준비해줘."

팬더 노인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이며 아란에게 말했다. 아란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분명 열려있어야 할 가게 문이 열리질 않았다. 누가 사용하고 있지 않는 한 이런 일은 없다. 아란은 끈적한 피가 갑자기 기분나빠져 노인에게 다시 소리질렀다.

"이봐! 누가 사용중이야? 문이 잠겨있는데!"

"아……! 죄송합니다. 안에 프리드 님이 있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

프리드란 이름을 듣자 아란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은 기껏 마을을 노리는 녀석들을 흠씬 혼내주고 왔는데, 안에선 태평히 느긋함을 즐기고 있는 녀석이 있다니. 어쩐지 찬밥 대우를 받는 듯한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불쾌를 품고 있자, 그 생각을 읽은 듯이 안의 문이 덜컥 열렸다. 원래라면 로브를 입고있었을 프리드는 후질그레한 무명옷을 입는 모습을 비추었다. 아란은 잠시 물음표를 그렸다.

"아, 아란. 먼저 사용중이었어. 이제 사용해도 좋아."

"팔자 좋구만. 누구는 피튀기는 전투를 벌이다 왔는데 태평히 목욕이나 하고있고 말야."

피칠갑을 한 자신과 대비되는 뽀송한 피부. 아란은 그걸 최대한 비꼬며 말했다. 항상 느긋하고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는 프리드였지만 이번만큼은 신경쓰였는지 미소가 얼굴에서 싹 사라졌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사람이 없으니 날카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란도 프리드도 자리를 비키지 않고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다 큰 숨을 들으킨 프리드가 어떤 말을 꺼내려 입을 열기 시작하려는데, 정작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그 틈을 비집은 건 가게 주인장이었다.

"아란 님. 그런 게 아닙니다."

"음?"

"프리드 님은 저희 마을을 습격해오던 몬스터를 막 물리치신 참입니다. 부디 그런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런."

괜히 뻘쭘해진 아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씰룩거리는 얼굴 근육으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고 프리드만 쳐다봤다.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괜찮아."

프리드는 어느샌가 평소같은 미소로 되돌아와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그 덕택에 아란은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프리드는 얼른 피를 씻는게 좋을거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뭉게뭉게 김이 피어오르는 욕탕은 생각을 정리하거나 하는 여유를 가지기에 걸맞은 곳이다. 아란은 피를 씻고 몸을 푹 담근 채 긴장과 피곤을 씻겨내렸다. 입 근처까지 몸을 담구고, 푸우 하는 긴 숨도 내뱉었다. 마하는 근처에 널부러져 있다. 녹이 슬지도 모른다며 고래고래 소리지르곤 있지만, 아란은 대꾸하지도 않는다.

"마하."

"왜?"

"여기를 떠날까?"

"갑자기?"

"여기에 더는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아까는 여기가 좋다며?"

"……그렇지. 그랬지. 아니다, 아냐."

평소의 호쾌함은 어디가고 유유부단한 말만 하는 아란에게 마하는 의문을 가졌다. 물어봐도 도통 대답해주지도 않는 터라 마하의 답답함은 심해져갔다.

"정 떠나고 싶으면 그 프리드란 사람을 따라가면 되잖아. 동료를 구한다는데."

"그 이야기 때문에 고민하는 거야."

"그럼 그 사람이 떠나기 전에 말해봐. 같이 가도 되냐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아란은 그 말을 끝으로 욕탕을 나설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오는데도 눈썹과 눈이 평소보다 가라앉아 자신감이 없어보이는 듯했다. 변덕이라고밖에 마하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기는 주인의 마음을 너무나 모른다.

"혹시 시간 될까?"

"……."

가게를 나서자 아까와 그대로의 후줄근한 차림을 한 프리드가 아직도 있었다. 아란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또 동료가 되어달란 그런 소리나 하겠군."

"맞아. 아란 너도 알겠지만 점점 세상이 위태로워지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자리를 바꿔도 되나?"

프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은 떠나는 아란과 프리드를 공손히 배웅했다. 영웅이라 치켜올리며 동경하는 눈이다. 아란은 그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퍽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얼른 그 시선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이 제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좀처럼 시선이 떠나질 않아 임시 거처로 프리드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거처에 도착한 아란은 양반다리를 거만히 하며 크게 하, 하는 한숨 비슷한 콧바람을 냈다. 프리드는 여전했다. 평소같은 나긋해보이면서도 어딘가는 진중한, 그런 얼굴이다.

"네 말대로긴 하지. 평화로워던 여기까지 점차 침범당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으니."

"이미 점령당해버린 지역도 있어. 검은 마법사가 이끄는 집단의 소행이야. 그래서 아란, 네가 동료가 되어줬으면 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마."

그 누구보다 단도직입적인 아란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거에 마하는 놀랐다.

"아란,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입 닥쳐 마하. 난 지금 나름대로 진지하니까."

"……."

정말 평소답지 않았다. 호쾌하고 감정적인듯 보여도 아란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냉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감정에 휩쓸려 되는대로의 말을 하고있었다. 마하는 이런 아란은 처음 보았다. 당황해서인지 마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프리드는 그런 아란을 쳐다보다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낌새를 보였다. 아란은 큰 목소리로 아까의 말을 이었다.

"세상을 구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하게 할 이야기던가? 방향도 제시하지 않고 대뜸 동료가 되란 이야기를 하니 콧방귀가 나오는군."

"아란."

"이봐 프리드. 하나만 묻겠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의 의도야 정말 좋은 거겠지. 그런데, 그러면 내가 떠나고 난 다음엔 이 마을은 도대체 누가 지키지? 변변찮은 전투병력 하나 없는 이 마을이 덮쳐진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느냔 말이야. 당장 그것부터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 동료가 되긴 커녕 여기에서 너를 내쫓을 거다. 잘난 영웅놀이는 너희들끼리만 하라면서."

아란은 그 말을 하다 깨달았다.

떠날지 말 지 망설였던 이유. 그리고 동료가 되기를 망설였던 이유.

이전에 세상을 누비고 다녔던 자신이 왜 그렇게 다급했었던가. 마을의 사건 하나를 해결하면 다급해져선 그곳을 헐레벌떡 떠났는가를.


그건 정이 들지를 않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보다 혹여나 급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있을까 불안해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쉬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던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지체하면 사람들에게 정을 붙이고 떠나지 못하게 될까봐. 그러다가 위험한 다른 사람들을 놓치게 되어버릴까봐. 그 때문에 그렇게까지 다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그런 생각이었을 텐데. 아란은 이미 무릉도원이라는 마을에 너무 정을 들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체감해버렸다. 무기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정착했던 건 고작 몇 달 뿐이었지만, 경험해보지 못했던 정과 평화에 마음이 누그러져 태평해져있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 정도 쯤은 대우를 받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안일해져선. 그렇게 될까봐 영웅이란 과분한 칭호로 불러달라 하지 말았거늘.

그래서 아란은 더욱이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졌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프리드가 정말로 영웅이어서, 자신의 의문 따위는 금방 해결해주고 동료로서 자신을 맞아주었으면 했다.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도무지 떠나지 못할 것이기에.

"……."

하지만 그런 아란의 바람과는 반대로 프리드는 침묵했다. 도무지 대답이 없자 아란은 마음속의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말만 번지르르한 그런 샌님이었나. 마음속으로 설마하는 의심을 품고 프리드의 눈을 째려보았다.

그런데 프리드의 눈은 의젓했다. 노려보는 자신이 흠칫 기죽을 정도로 꿋꿋했다.

"아란."

그리고 프리드가 묻자, 아란은 으르렁거리며 대답했다.

"뭐지."

"정말로 평화를 바라?"

"당연히."

"그 염원은 충분해?"

"부족하다 생각해?"

"정말로 간절해?"

"몇 번을 묻는 거지?"

"네가 나를 시험하듯, 나도 너의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시험하고 있어."

마음을 들켜 아란은 잠시 당황했다.

"……말은 번지르르하네. 그래서 내가 제시한 물음의 답은?"

"네가 정말로 평화를 염원한다면, 세계의 무사를 간절히 기도한다면, 이것으로 너에게 해답을 안겨줄거야."

프리드는 그 말을 하며 붉은 보석을 아란의 손에 건넸다. 은은하면서도 속으로는 찬란해보이는 듯한 보석이었다. 손에 쥐자 느껴지는 건 어째선지 뭉클함이었다. 단순히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와 가까웠다. 불분명할텐데도, 해답과 멀 텐데도 기이하게 설득력을 느끼게 되어버리는 물건이었다. 아란이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자, 프리드는 설명했다.

​"그건 여러 사람의 염원이 깃드는 보석이야. 평화에 대한 네 의지가 정말로 강하다면, 그걸 이루어주겠지."

"……그렇게 잘난 물건이라면 세계는 왜 이렇게 된 건지 설명이 되지 않는데."

"이 보석은 사용하기엔 조건이 까다로우니까.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륙의 특정한 매개물, 파괴를 멀리하고 평화를 바라는 강한 의지, 그리고 결정적으론…… 많은 사람의 염원이 필요하지. 그런데도 효과는 대륙에 한정되지만."

프리드는 꿋꿋했던 표정을 잠시 누그러뜨리며 나긋이 말했다.

"아무튼 너를 설득하기 위해 여기에 있으면서 염원을 조금씩 모았어. 다들 상냥히 응해주었어. 이게 구심점이 되어준다면, 이곳엔 파괴의 힘을 가진 사악한 의지는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런가."

"그래."

아란은 점잖게 침묵하다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프리드를 뒤로 하더니 다급하게 집을 나섰다. 프리드는 화들짝 놀라더니 아란을 따라갔다.

아란은 심경이 복잡했다. 마음속에서 답답하고 매캐한 무언가가 들끓는 기분이었다. 프리드의 두루뭉실한 언변뿐인 대책에 설득되어버렸다는 점이 스스로를 원망케끔 했다. 어쩌면 자신은 이곳을 죄책감 없이 떠나고만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달콤한 말에 현혹되어, 제대로 된 방책조차 내놓지 못하고, 책임감없이 떠나버리는.

아란은 그게 싫었다. 그래서 대답을 듣고싶었다. 프리드가 아닌 누군가에게. 자신이 떠나 이곳이 잘못될 지언정, 그건 자신의 탓이 아님을 확고이 하고 싶어서. 원망 받고 싶지 않아서. 제대로 책임을 졌고 때문에 떠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아란의 빠른 발걸음이 향한 곳은 마을의 장로가 있는 장소였다. 황급히 오는 아란을 본 장로는 아란보다 더 황급히 아란을 반겼다.

"무, 무슨 일이오? 아란."

"장로, 하나만 묻고 싶은데. 내가 이 마을을 떠도 되겠나?"

"ㅇ, 예?"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서인지 장로의 숨은 헉헉댔다. 아란은 더욱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떠나려는데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말이야. 내가 이 마을을 떠도 되는지 당신이 말해줘."

"……아란."

장로는 벅찬 숨을 크게 숨쉬어 진정시키려 했다. 아란은 답을 기다렸다. 늙기 때문에 장로의 숨은 진정되는데 오래 걸렸다. 간신히 진정한 장로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이 늙은이의 허락을 받으면서 결정하는 것입니까?"

"내가 호쾌해보여도 좀 섬세한 사람이야. 난 솔직히 무섭거든. 너희들이 나를 원망할까봐. 멋대로 마을을 떠나, 더 이상 지켜주지 않는다고 뭐라 할까봐."

"그렇지 않습니다."

장로는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당신은 마을의 영웅입니다. 이미 우리는 당신에게 신세를 많이 지었습니다. 민폐도 많이 끼쳤지요. 그런데도 떠나려는 당신을 붙잡는다는 건, 분명 그릇된 아집일 뿐일 겁니다."

"…흐악, 헉, 흑."

저 멀리서 프리드가 시체같은 모습으로 오고있었다. 장로는 프리드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무언가를 직감하고 얘기를 이었다.

"떠나는군요 아란."

"몰라, 아직 결정 안 됐거든."

"프리드 님과 함께."

"아직 결정 안 됐다니깐?"

"아니오, 떠나주십시오."

장로는 갑자기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아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희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희는 당신에게 짐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당신을 이곳에 옭아매고 있을 심산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바르지 않게 전달되었나 봅니다."

"뭔 뜻이야?"

"프리드 님이 이곳에 오고 나서부터, 당신이 마음 한 구석으로 망설이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당신을 떠나보낼 준비를 차츰 하고 있었지요. 위기란 것이 저희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니까. 당신이라는 큰 그릇이라면 이곳같은 작은 마을뿐만이 아닌 더 큰, 세계를 지키고자 할 테니까."

마치 확신하는 듯 장로의 말투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미 마지막을 직감하기라도 한 듯이 묵례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아란. 당신을 이곳에 옭아매고 있을 심산은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언제라도, 프리드 님이 말한 준비가 완성된다면 미련 없이 떠나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아쉬웠는지, 조금이나마 더 함께하고 싶어서인지, 당신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행동을 조금씩 해왔나 봅니다. 그것이 아란, 당신에게 고뇌를 안겨주었다니……."

"……."

"…아, 아란. 이건 정말이야. 이 보석, 봉인석에는… 허윽. 대륙 하나정도를 지킬 힘은, 흐… 있어."

헐떡거리는 프리드를 힐끔 바라보고 아란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자신을 떠나보낼 준비를 했었구나. 준비되지 않은 건 자신뿐이었구나. 그 사실을 깨달으니 잠시 웃음이 나왔다.

"그렇구나. 잘 알아들었어."

장로는 눈을 감고 예를 취했다. 이미 그는 떠나보낼 준비가 만전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만큼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따라가겠어 프리드."

정에 휘둘려 구질구질할 정도로 미련하게 굴면 안 되고, 그들이 바라는 영웅의 모습으로 자신감 넘치게.

사람으로서가 아닌 영웅으로서 마을을 떠나는 게 그들에 대한 최대한의 예인 것을.​

그렇기에 아란은 쥐고있던 봉인석을 장로에게 호쾌하게 넘겼다.

그것으로 마을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자신의 이상으로 한발짝 내딛기 위해.

===


올려도 될지..
소설란이 있긴 했지만 리젠이 하도 없길래 고민을 좀 했습니다.

일단은 지르듯 올려버렸으니, 조약한 솜씨여도 좋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

Lv71 바람부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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