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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세의 검 EP 1 . [적막한 고성 (1) ]

오렌지병
댓글: 3 개
조회: 4747
추천: 13
2020-07-28 03:55:55













엘나스산맥을 처음 보는 타지인들은, 대개 예쁘고 새하얀 눈이 뒤덮은 대지를 보며 천혜의 자연경관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수십년을 살아 온 현지인들에게 눈은 새하얗든 말든 그저 홍수에 오는 비와 같이 그저 필요악일 뿐이다.

이렇듯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척박한 엘나스산맥에는 국가 단위 보다는 보통 부족 단위 정도로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편이고,  그 중 가장 큰 마을이 산맥 하부에 위치한 엘나스마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곳에는 자연스레 인적이 드물게 되었고, 이러한 생활방식에 만족한 소수의 현지인만이 남은, 폐쇄적인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수백년 전,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산맥 높은 곳에 세워진 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들은 이야기로는 그 왕국은 기사의 나라였으며, 먹을 것 하나 입을 옷 하나 귀한 가난한 나라임에도 국민들은 소박함을 즐기며 서로를 도왔고, 기사들은 긍지와 명예을 알면서도 발로 뛰며 국민들의 일을 도왔다는,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이상적이고도 소박한 왕국의 이야기.. 

바로 지금, 나는 그 왕국..아니, 이제는 왕국의 흔적이라 불릴 만한 쓸쓸한 성터로 향한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그 왕국과 왕에 매여진 잔인하고 슬픈 저주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산맥의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오를수록, 사박사박 가볍던 눈 밟는 소리는 점점 깊고 무거워지고 있다.
문득 이전에 처음 이곳을 오르던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는 열악한 장비에, 체력도 금방 바닥나 조금 오르고 쉬고 오르고 쉬고를 반복해야 했지만, 그 때의 동료들과 수 주일에 걸쳐 야영하고 사냥했던 그 아련하고 즐거운 추억들은, 이제는 이런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는 것 쯤은 별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음에도 마음은 착잡함으로 가득차  있는 지금의 상황과 상반되어 한편으로는 따뜻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산의 정상 부근. 여전히 버려진 채로 쓸쓸히 서 있는 폐성이 눈 앞에 들어온다.

성은 여전히 주인을 닮아 고요하고 스산한 기운을 입구에서부터 내뿜고 있다.
그 수백년 동안 이어져 왔던 저주스런 운명을 허물고 그와 이 성에 자유를 안겨 줄 수 있을까?
마음 속으로 수백번을 되뇌이며 열린 채 방치된 성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 성에 첫 발을 내딛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던 외부의 모습과 달리, 내부에는 전과 다르게 몬스터는커녕 숨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긴 했지만, 그 동안에 바뀐 것이라곤이라곤 전혀 없었던 반 레온의 성의 변화..
마치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한, 그런 변화.
별로 좋은 변화일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을 뒤로 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탑루를 옮겨가는 그 와중에도, 여전히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숨이 막혀오는 듯한 적막함에 내 발걸음도 점점 빨라져만 간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오만가지 생각을 곱씹으며 나는 네번째 탑루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던 그간의 성과는 다르게 그곳엔 여전히 루덴이 알현실 쪽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하지만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인기척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루덴, 오랜만입니다."

"앗, 용사님.. 당신은..!"

나름 반갑게 맞아 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오랜만에 왔는데 별로 제가 반갑지 않아 보이시는군요."

"...."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가볍게 던진 농담에도 루덴은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사람처럼 표정을 쉽사리 풀지 못했다.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오면서 보니, 이전과는 달리 성 안의 몬스터들이 한 마리도 없더군요. 성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당신이 이렇게 좋지 못한 표정을 짓는 것은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그제서야 기다렸다는 듯, 루덴은 천천이 입을 뗐다.

"온 메이플월드에 뻗친 검은 마법사의 사슬은 이곳 역시 덮쳤습니다. 그런 흉물스런 것에 탄식하는 것도 잠시, 
왕께서는 탑루 앞의 공터에 모든 몬스터를 모아놓고는.. 짧게 말하셨습니다."

"오늘 부로, 나의 주인이자 너희의 주인인 검은 마법사의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 망할 세계가 불타 무너지고, 너희는 그의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기 위한 너희의 마지막 임무는, 부질없이 저항하는 저 아래의 인간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다. 
자, 내려가라. 내려가서, 저항하는 존재와 마을은 모두 불태워라. 너희가 딛고 살아갈 새로운 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말이다!"

듣고 있자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혼자 남겨진 세상에 대한 증오가 전해져 오는듯 했다.
하지만, 그의 증오의 방향은.. 잘못되었다. 적어도, 아무런 간섭없는 그만의 의지와 생각으로 판단할 기회 정도는 주어야 한다. 

루덴은 내 여러 복잡한 생각을 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온 하늘과 대지를 뒤덮었던 검은 사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져 무너졌고,  왕께서는 그분의 몬스터 군대 단 하나도 없이 혼자 돌아오셨습니다.
약간의 조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으로 알현실에 들어가시더니... 그 뒤론 한 번도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정황상 반 레온도, 루덴도 검은 마법사의 패배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그는 이제.. 지금껏 그나마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군단장으로써의 의미마저 잃었다. 더 이상 자신의 존재 가치 자체가 없어져버렸다는 사실은 사자왕 본인이 가장 
뼈아프게 느끼고 있으리라. 그런 그를 진실마저 모른채로 스스로를 옭아매는 구렁텅이에 빠져.. 죽음만을 기다리는 낙오자가 되게 할 순 없었다.
그는 명백히 검은 마법사의 운명 조작에 가장 크게 희생된 자들 중 하나다. 적어도 나는 그에게 진실을 목도하고,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수많은 왕국의 영혼들
앞에서 그의 자유 의지로 판단한 선택을 보여주는 것 정도라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레온 본인 외에도 그 진실을 알 권리가 있는 자들, 그들의 국민들과 기사들.. 그 중 하나는 바로 내 앞에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그의 왕이 있는 곳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한참의 정적 후, 루덴은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다.

"...용사님께서는.. 패잔병이 된 왕의 처분을 내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로군요."
 
그 말에 왜 그가 재회부터 지금까지 낯빛이 어두울 수 밖에 없는 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분위기의 핵심을 파악한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 그럴 생각이었다면 연합의 정규군을 이끌고 그 대표자로써 왔겠지요."

"...!"

루덴은 역시나 내 말을 예상치 못했는지 다소 당황스러워했다.

"그는 분명히 우리 연합의, 나아가 메이플 월드의 적이었죠. 하지만 저는.. 검은 마법사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그 모든 진실을 알고 나서, 적어도 사자왕에게는 도저히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진실이라니요? 무슨 진실 말이십니까?"

"당신의 왕,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국민들, 기사들, 나아가 이 왕국 전체를 속박한 운명에 대한 진실입니다.
 당신도 그 진실을 알 권리가 있는 존재 중 하나이겠지요."

"운명..?"

루덴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서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어쩌면 이 진실은 독이 될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때론 차디찬 비수처럼.. 가슴을 후벼파니까요. 이 이야기는 듣기에도 충분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도 들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루덴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비장한 표정으로 즉시 답했다.

"우리 왕국의 기사는 두려움을 알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기사의 용기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 성에는 아직, 당신 말고도 이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는 자들이 여럿 있지요."

"...왕비님!"

"왕비님 뿐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왕국의 백성들이 수백년 동안이나 갈 곳을 잃은 채 이곳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왕비님이 계신 곳으로 모아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에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루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수긍했다.

"..저는 왕비님이 계신 다섯 번째 탑루로 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덴과 잠시 헤어진 나는 다시 왕비가 있는 다섯번째 탑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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