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술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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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점점더 치열해 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복수심과 젊은 패기로 호기롭게 전장으로 나왔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전장은 상상속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날카로운 쇠붙이가 수시로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으며,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온몸을 적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줄어들지 않는 적의 숫자가, 전투에 임하는 이 젊은 오크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두려움이 정신을 마비시킨다. 군단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세계의 주술사들을 모집한다는 말에
피끓는 투지와 패기를 가지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이 참혹한 전장에서 이 젊은 오크 주술사는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있었다. 모든것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장에서, 머뭇거리는자에게 돌아오는것은 죽음 뿐이었다.
이 서툰 주술사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은 하나둘씩 군단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 쓰러져 갔다.
사랑하는이들의 죽음에 분개하여 전장에 나온자들, 절망에 빠진 아제로스를 구하기 위한 정의감에 전장에 나온자들,
수많은 염원을 가진 이들의 의지가 비정한 대지위로 처참하게 꺾여 쓰러진다.
공포심에 손을 덜덜 떨고 있는 이 젊은 오크에게도 예외없이 군단의 검이 겨누어 졌다. 아군과 함께 싸우지만 결국
전장에서 자신을 지켜주는것은 자기자신 뿐이다. 하지만, 전장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패닉상태에 빠진 그는 자신을
지킬수가 없는 상태 였다.
- 끼이익!
흉포한 지옥박쥐의 울음소리가 창공을 울리고 악마의 손에 쥐어진 죽음의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젊은 주술사의 심장을
향해 다가온다.
- 푸학!
핏물이 대지를 적신다.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젊은 주술사의 장대한 꿈이 차가운대지에 내팽개쳐진다.
일격에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급소를 피했다.
하지만, 옆구리가 깊게 베인 상태로, 이대로 있으면 곧 죽음이 다가올 것이다. 물론, 눈앞의 무자비한 악마는 그것마저도
기다려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군단의 악마는 젊은 주술사의 옆구리를 베어낸 기형검을 다시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뻔히 보이는 이런 단순한 공격조차도 피할엄두를 내지 못했다. 두려웠다. 심장이 마구 뛰어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적들에게 주먹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는게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리 깊지 않은 배움
이었지만 선배 주술사들에게 배운 정령의 힘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게 너무나도 억울했다.
하지만, 적의 잔인한 칼날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을 질끈 감는것 외에 그가 할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쾅!
생각보다 죽음의 고통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극심한 통증과 함께 숨을 거두리라 생각했지만, 상상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허나, 곧 지옥사냥개들의 먹잇감이 되겠지.
- 쿵!
폭음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혹시 아직 죽음이 찾아 오지 않았나?
자신의 눈앞에서 난 소리도 이상했다. 날카로운 쇠붙이로 육신을 베는데 '쾅' 같은 소리가 날리가 없었다.
젊은오크는 눈을 번쩍 떳다.
그러자 눈앞에 믿을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을 향해 죽음의 이빨을 들이대던 악마가 반쯤 불에 녹은채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주위에 아군은 분명히 없었다. 신께서 이 목숨을 거두어 가기에 아직 이르다고 생각 하신걸까.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젊은 오크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그'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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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 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는 이 전장의 피비린내 역시 그런 익숙해 지지 않는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서 여기까지 왔다. 실리더스의 모래폭풍속에서 살아남았고, 노스랜드 원정대의 일원으로
낙스라마스와 얼음왕관 성채를 함락시켰다. 용의영혼에서 위상들과 함께 데스윙과의 격전을 치렀고, 대족장 가로쉬
헬스크림의 폭주로 오그리마에서 일어났던 대참사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싸워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바로 얼마전, 군단척결군 최정예 공격대의 일원으로 흑마법사 굴단과 기만자 킬제덴의 종말을 이끌어 냈다.
지겨운 전장의 공기는 지치지도 않고 '그'를 끌어 당겼다. 전설에나 나올법한 일을 수없이 겪고도 살아남아 또
이 전쟁의 대지위에 서 있는, 이 붉은머리카락과 녹색피부를 가진 오크남자의 오른손에는 바로 그 '둠해머'가 쥐어져
있었다.
통칭 유물이라 불리는 강력한 무기중 하나인 둠해머의 힘은 막강했다. 밤의요새에서 벌어진 굴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수
있었던 것도, 부서진 섬에서 기만자에게 최후를 고할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둠해머의 힘 때문 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장대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남자는 문득, 공허감을 느꼈다. 이런 유물에 의지하다보니 주술사 본연의 힘을
잃어가는것만 같았다. 정령계와의 결속또한 약해진것 같았다. 이대로 라면, 자신은 도저히 이 유물이 없이는 싸울수가
없는 상태가 될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군단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손에 쥐었던 둠해머다. 둠해머가 불러낸 파멸의 바람은 수많은 격전을 뚫고 여기까지 오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힘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기의 힘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무기의 힘으로 감당이 안되는 적을 언젠가는 만날 것 이다.
그때 믿을수 있는것은 오직 스스로의 힘 뿐이다.
남자는 무기의 힘보다는 자신의 힘을 믿어 보기로 했다.
다시한번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보기로 했다.
결심을 굳힌 남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의 근육질 녹색 피부와 우중충한 전장의 하늘색이 왠지모르게
어울려 보였다.
남자의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카락이 전장의 바람과 함께 휘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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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균형을 잃었다. 군단의 무한한 병력이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흉포한 야수들의 외침에 아제로스 연합군의 절망감은 더해져 갔다.
천리안으로 전장을 둘러보던 남자는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 곳에, 아직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한 어린오크 한명이
군단의 칼날아래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려 하고 있었다.
즉시 천리안을 거둔 남자의 온몸에서 푸르스름한 정령의 기운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한마리 늑대정령이 되어 전장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한마리 늑대의 주변으로 정령의 힘이 결집되며 대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순간, 질주하던 한마리 늑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붉은머리 오크 주술사가 굳건히 대지를 밟고 서있었다.
결집된 정령의 힘이 군단의 악마를 향한다.
대기를 가르며 뻗어나간 불타는 용암의 힘이 악마의 가슴팍에 적중하며 가슴 한가운데가 녹아내린채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비록 상처입고 쓰러져 있지만, 저 젊은 오크를 구할수 있었다.
어떤 인연의 이끌림일까? 남자는 어느새 쓰러진 오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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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아제로스 전역을 탐험하며 '그'가 이룬 업적은 책으로 몇 권이나 써도 모자란다.
이 상처입고 쓰러져 있는 젊은 오크 역시, 노예검투사 출신인 대족장 스랄의 영웅적인 발자취와 더불어
저 붉은머리 오크 주술사의 모험담을 들으며 자란 세대다.
비록 차가운 대지에 상처입은 채로 누워 있지만, 저 남자의 손에 의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이 젊은 오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지자 이 젊은 오크는 자신이 상처 입었다는 사실조차 잊은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몸이 일으켜 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젊은 오크여."
예! 라고 당차게 대답하고싶다.
하지만 상처부위의 통증 때문에 도저히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물의 힘을 다루는 주술사들이 곧 올걸세."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남자는 뒤에 메어져 있는 유물 '둠해머'를 꺼낸다.
"짐이라 생각하지 말게."
둠해머를 손에 쥐고 눈길을 떼지 못하며 말을 하던 그는 곧, 둠해머에서 시선을 거두고, 둠해머를 누워있는 청년오크에게
건낸다.
"둠해머를 잠시 맡아 주게."
이게 무슨소리인가? 상처로 인한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청년오크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남자는 당혹스러워 하는 청년의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둠해머를 청년오크의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결의에 찬 얼굴로 몸을 일으키고는 뒤돌아 선다.
저 남자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젊은 오크는 다급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를 뒤로 한채 남자는 어느새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남자의 오른손에는 용암의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고, 왼손에는 번개의 힘이 서리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청년오크는 누운채로 온힘을 다해 둠해머를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몸에 힘을 주니 상처가 벌어져 통증이 더 심해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라도 해야만 할것 같았다.
남자와의 거리가 상당히 벌어져, 크게 외쳐야 목소리가 들릴것 같을때 쯤,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살아남게! 그리고, 다시 만나세!"
자신에게 하는 다짐일까, 우연히 만난 젊은이에게 하는 부질없는 약속일까. 그 목소리를 듣고 혼자서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둠해머를 들고 있는 젊은 오크 주술사를 뒤로 한 채 남자는 계속해서 전장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남자의 손이 전방으로 뻗을때 마다 악마의 육신이 푸른뇌전과 진홍빛 용암에 불타올랐고 대지가 갈라지며 악마들은
설 곳을 잃어갔다.
남자의 주변으로 부터 전장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충만한 정령의 힘으로 군단의 악마들을 쓰러뜨려 가는 위대한 주술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 한명의 젊은 오크가
영웅의 길로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정화된 물의 힘을 다루는 대지고리회의 현자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청년오크의 눈에 어렴풋이 보였다.
따스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고 느끼며 청년오크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저번에 성기사를 주제로도 한번 써본 내용 입니다만,
유물력 모으기가 귀찮다는 생각을 하다가 주술사를 주제로도 한번써 봤슴다.
유물무기는 뉴비에게 줘버리고 우린 빨리 다음 확팩으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