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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오그리마의 어떤 밤 - 2

아이콘 끝없는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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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97
추천: 7
2018-10-29 09:45:43

 "늦었군, 가로쉬."


 쏘아붙이는 트롤의 목소리에 가로쉬는 문득 게야가 떠올랐다. 게야는 소리에도 색깔이 있다고 했다. 정신을 어지럽히는 눈을 감고 조용히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눈꺼풀 위로 희미하게 그 색깔이 떠오른다고 했었다. 게야가 들었다면 분명히 볼진의 목소리를 파란색, 지나치게 덧칠해서 검은색이나 다름없는 파란색이라고 했겠지.


 "새벽에 찾아오는 게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 볼진."


 횃불로도 다 밝히지 못한 어둠 속에서 볼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그림자와 가장 잘 어울리는 트롤이었다. 볼진이 눈을 감고 있으면 한낮에도 그 곳만은 햇빛이 닿지 않는 것만 같았다. 어둠사냥꾼? 가로쉬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림자가 어둠을 사냥한다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서신에 대한 답을 하러왔다. 우린..."


 "거절은 거절하겠다, 트롤."


 이미 알고 있던 대답이었다. 가로쉬는 망토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망토가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눈에 제대로 담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없다. 옥좌에 걸터앉고서야 비로소 볼진이 눈에 가득 담겼다. 볼진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림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어느새 떠진 볼진의 두 눈만이 어둠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볼진과 눈이 마주치자 가로쉬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그래.바로 저 눈빛이었다.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내리깔아보는 저 눈빛. 저 눈빛을 볼 때마다 어린 날 자신의 등을 헤집어 놨던, 테로카르 숲의 흑표범이 떠올랐다. 친구들에게 소외되기 전 오기로 나선 사냥이었다. 흑표범은 그의 마지막 사냥감이였다. 사냥에 실패하고 비웃음거리가 된 뒤로 사냥에 나선 적이 없었다. 눈 앞의 트롤은 그 흑표범을 닮았다.


 "아직도 미친 용이 날뛰던 악몽을 꾸는 이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세계의 종말이 가까웠던 그 때를 기억하고 있지. 상처가 아물지도 않는데 굳이 새 상처를 만드려는 이유가 뭐냐, 오크."


 "날 부를 땐 호칭을 빼먹지마라, 건방진 트롤. 내가 대족장이라는걸 잊은 건 아니겠지?"


 숨결이 느껴질 만한 거리까지 다가왔지만 볼진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의 생각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가 스랄에게도 이런 눈빛을 보인 적이 있던가? 그럴 리가 없지. 저 눈빛은 언제부터였던가. 그래, 케른이 쓰러져서 아침의 햇살을 다시 맞이하지 못 한 그 날 밤부터였다. 죄인이 되어 갇혀있던 자신에게 다가와 뱉어내던 볼진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가로쉬. 명심해라. 검은창 부족의 트롤 중 너를 존경할 이는 단 한명도 없다.'


 자신을 내려보던 그 눈빛은 머리 속 어딘가에 화상처럼 뜨겁게 남아버렸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로쉬는 어금니 사이로 짜증을 뱉어냈다.


 "아직 날 인정하지 못 하고 있나?"


 한심하군. 하마터면 튀어나올뻔한 말이지만 볼진은 가까스로 그 말을 삼켰다. 볼진은 스랄의 생각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뻔히 흘러나오는 열등감을 왜 알아채지 못 했나. 열등감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팽? 케른? 자신? 그 정도면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일선에서 물러난 스랄이 대지의 수호자로 다시 등장했을 때, 이 오크의 표정은 참으로 볼만 했다. 감출 수 없는 질투에 휩싸여 간신히 모두를 물러나게 했던 오크의 표정을 스랄이 봤어야만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가끔 자리는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는 사실을 스랄은 몰랐으리라. 그는 애초에 대족장의 그릇이었으니.


 "대족장은 누군가가 인정한다고 만들어지는 자리가 아니다. 증명해야 하는 자리일뿐."
 
 볼진의 날카로운 한 마디에 가로쉬는 눈을 감아버렸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약한 오크가 보인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 하고 나그란드의 초원 한구석에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던 오크. 웅크려있던 오크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기 전에 가로쉬는 도망치듯이 눈을 떴다. 인정? 그것이 중요한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자랑스러운 그롬의 아들이자 호드의 대족장이다. 그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는 대족장.


 "쓸데없는 말장난은 그만하지. 한 번만 다시 말하겠다. 참여해라, 볼진."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야겠다. 이 쓸데없는 전쟁의 이유."


 "이유가 필요한가? 얼라이언스와 호드는 오랜 적이었지.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할 때가 돌아왔을 뿐이다."


 "과거를 덮어두고 우린 공동의 적을 향해 창을 들었다. 물론 완벽하진 않았지. 하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생각할 수도 있었지."


 조그만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은 사울팽의 스쳐가는 짧은 한마디로부터 시작됐다. 드라노쉬를 나그란드의 초원으로 돌려보내며 사울팽은 말했었다. 얼라이언스와 호드는 서로 많은 피를 흘렸지만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드라노쉬의 마지막 순간을 배려해준 인간의 왕은 증오가 크긴 하나 그 증오에 잡아먹히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상심한 사울팽은 그 이후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볼진은 그의 말을 잊지 않았다. 미친 용이 날뛰던 때에도 바리안을 살펴왔고 그 과정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그려볼 수도 있다는 희망을 키워나갔다. 가로쉬가 북부감시요새를 공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래에 대한 희망?"


 가로쉬는 볼진의 말이 우스워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웃다가 다시 바라본 볼진은 달라보였다. 자욱한 밤안개처럼 느껴진 아까와는 다르게 뚜렷한 무언가가 보인다. 야수의 눈빛 아래로 몽상가의 눈빛이 자리잡고 있었다. 후 하고 불면 날아가버릴 연약한 것들에 기대는 낭만주의자가 여기 있다니. 그런 이가 또 있긴 했다. 바로 이 자리에 앉아있던 스랄이 그러했다.


 " 더 나은 미래는 이런 걸 말하는 거다."


 가로쉬는 한쪽 벽을 가리고 있던 천을 힘껏 뜯어버렸다. 숨겨둔 광기와 정복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시요새와 테라모어에는 아무런 병력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미 호드의 문양이 덧칠되어 있었다. 병력은 잿빛골짜기에 집결되어 있었고, 칼림도어의 중앙에는 붉은색 물결이 넘실거린다. 그려지지 않은 전선도 볼진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전선은 칼림도어 중앙을 가로질러 아즈샤라-북풍의 땅까지 이어졌다. 이 두터운 붉은 파도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파란 깃발은 너무나 힘없이 나부낀다.


 "나이트엘프와 드레나이의 고립. 테라모어를 선택한 이유가 이거였군.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냐, 가로쉬."


 가로쉬는 붉은색 물결을 결집된 호드로 생각하겠지만 볼진은 그 안에서 앞으로 흘려야할 피를 보았다. 지도에서 흘러넘친 피가 자신을 휘감는 환영에 볼진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군. 그저 성가신 것들을 쓸어버릴 뿐이다."


 가로쉬에게 이 일은 그저 가시를 뽑아내는 일이었다. 그에게 드레나이와 인간은 발 밑 어딘가에 박혀버린 가시였다. 긁어봐도 도무지 빠지지가 않아서 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마다 자꾸 절룩거리게 만드는 가시. 얼라이언스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마다 불편한 감정은 그를 괴롭혔다. 그들을 볼 때마다 귓가에는 환청이 맴돌았다.


 '너희는 모두 더러운 침략자이자 약탈자일 뿐이야.' 


 시도 때도 없는 이 환청이 무엇이건간에 그는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기보단 입을 닫게 만드는 게 헬스크림의 방식이다. 이제 그 얼굴들을 보러갈 것이다. 피의 울음소리를 들고서.


 "더 이상 공동의 적은 없다. 그러면 다시 서로가 적이 될 차례지. "


 "아직 많이 늦지는 않았다. 감시요새의 병력을 철수시키고 얼라이언스에게 사절을 보내라. 제이나만 중재해준다면..."


 "난 네 조언을 구한게 아니다. 명령을 한 거지. 오그리마의 병력은 남쪽으로 향할 거다."


 "더 나은 선택도 분명히 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마라, 가로쉬. 그롬이 그랬던 것처럼."

 

 "그만!"

 

 가로쉬는 주저하지 않고 피의 울음소리를 던졌다. 찰나의 순간에도 전장에서 다져진 감각이 볼진의 몸을 움직였다. 땅에 닿을듯 바싹 몸을 낮춘 볼진의 머리카락을 몇가닥 베어내고 피의 울음소리가 벽에 박혔다. 벽에 틀어박힌 도끼는 주인의 감정을 대신하는 것처럼 부르르 떨고 있었다. 가로쉬는 느꼈다. 북쪽으로 향하기 전에 쓸어버려야 할 것은 테라모어 뿐만이 아니라는걸. 눈 앞의 칼과 등 뒤의 단검 중에서 위험한 것은 언제나 등 뒤의 단검이었다.


 "잠시 흔들리긴 했지. 이 전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지만 널 보니 확신할 수 있구나.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대화로 무언가 풀어보려는 네놈의 나약함을 보니 헛구역질이 나.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있다는 생각이 들면 빈 손으로 올 게 아니라, 네놈의 그 잘난 창들을 들고 왔어야지. 날 죽일 각오로 말이야. 그런 각오도 없는 놈의 말 따위에 내가 설득당할 거라 생각했나? 너야말로 선택해라. 남쪽으로 향하는 병력이 메아리 섬을 지나쳐야할지, 아니면 짓밟고 가야할지."


 빌어먹을!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볼진의 머리 속을 스쳐갔다. 지금 창 끝을 향해야할 상대는 얼라이언스인가, 아니면 눈 앞의 이 오크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밴시 여왕과 블러드엘프 섭정의 뜻을 알아 본 뒤에도 늦진 않으리라. 지금 창을 뽑아든다면 그들의 뜻을 알기도 전에 메아리 섬은 또 다시 새로운 침략자의 발 아래 신음 할 게 분명했다. 메아리 섬과 오그리마는 지나칠 정도로 가까웠다.

  

 "알았다. 한 달 뒤 테라모어. 그 전에는 볼 일이 없길 빌겠다."


 "선봉은 트롤이 서게 될 거다. 네 건방짐의 대가지."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트롤의 목소리를 죽이려는 수작. 말로는 용맹을 외치면서 선봉을 트롤에게 넘기려는 가로쉬의 모습에, 볼진은 비틀린 미소를 내비치며 처소를 나섰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지만 그 빛들이 오히려 그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대족장의 처소를 나서면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웠던 적이 있던가.

  

 "저 하늘에 떠있는 게 별인지 태양인지도 모를만큼 긴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짧은 대화조차 개운치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만큼 가벼워지는 마음을 안고 돌아가던 그 때의 오그리마는 초라한 모습에도 빛이 났다. 하늘의 별들보다 빛나는 희망들이 오그리마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오그리마에 빛나는 것은 별 뿐이었다.


 "결국 테라모어로 가게 되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볼진은 놀라지 않았다. 이 타우렌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언제나 상반된 두 마음이 그를 괴롭게 했다. 반가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었다

.

 "나는 막지 못 했소, 바인. 미안하오."


 "전쟁광이 도끼를 뽑아드는군요. 제이나에게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그러시오. 그녀는 오랜 우군이었으니까."


 바인의 뒤에 서있던 드루이드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까마귀로 변해 하늘을 날았다. 바인은 드루이드가 벗어두고 간 후드를 챙기며 이 귀한 가죽을 늘 바닥에 내팽개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볼진은 이 젊은 타우렌에게서 케른의 모습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케른은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현명한 이였다. 그는 입버릇처럼 새로운 시대의 물결이 밀려오는 게 느껴진다고 했었다. 자신은 밀려나가야 할 물결이라며 곧 아들에게 족장을 물려줄거라던 그가 생각났다. 메아리 섬에 간혹 들를테니 좋은 낚시터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라고 농담을 던지는 그를 존경했다. 바인은 그런 케른을 닮았다. 인내심으로 분노를 잠재우고 있는 지금의 모습까지도. 바인을 더 이상 바라볼수가 없던 볼진은 고개를 돌렸다. 바인에게 이 말을 위로랍시고 던지는 스스로가 싫어졌다.


 "늦지는 않을 것이오, 바인. 가로쉬는 파멸을 향해 다가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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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모어 침공 계획을 놓고 볼진과 가로쉬의 대화는 이렇지 않았을까라고 끄적였던 옛날 글.


아아.. 그립습니다, 트루 워치프님.

Lv79 끝없는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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