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평이 압도적이었던 엘가시아, 혹평이 과반수였던 플레체에 비해 볼다이크 스토리는 아무래도 평이 많이 갈리는 것 같다. 심지어 호평 혹평 포인트도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후반부가 좋았다 그러고, 누구는 초반부가 좋았다 그러고, 누구는 후반부 개연성이 아쉽다 그러고 누구는 초반부가 지루하다 그러고 사람마다 소감이 갈리는 듯했다.
본인의 소감을 요약하자면 좀 아이러니한데, 초반부에는 좀 기대를 했는데 막상 후반부에 와서 좀 실망했다. 이거에 대해 좀 상세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1. 기 -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
초반부는 마리우와 만나 호문쿨루스를 만들고, 그 호문쿨루스에게 정을 붙이게 만드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걸 위해 호문쿨루스가 최대한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도록 디자인과 감정표현에 많은 정성을 들였다. 이름은 원정대 공유이니 신중하게 지으라는 경고문도 비슷한 맥락의 장치다. 한번 지으면 못 바꾸니 신중하게 지어야지, 라는 생각에 이름을 뭐라 지을까 고민하다보면 저절로 애착이 생겨나게 되는 법이니까.
초반부는 지루했는데 호문쿨루스 귀여운거 보고 버텼다는 후기가 많았는데 사실 애초에 이게 의도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저것 정신없게 사건이 터지면 감정적인 거리는 멀어지니까, 초반부 내내 호문쿨루스 만들고, 이름 지어주고, 놀아주는거 외에는 유저에게 뭘 시키려고 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알빠노?"인 사람도 있겠지만 꽤 많은 플레이어에게 호문쿨루스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한 채로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어간다. 왜냐면 다음 내용이 호문쿨루스를 부숴버리는 것이니까.
2. 승 - 신과 인간, 인간과 호문쿨루스
현자시험과 현자의 탑에서 그림 감상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화두를 지적한다. 실패와 무력감.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신적 존재라는 가디언과도, 인간보다 훨씬 강한 악마와도 대등히 맞설 수 있는 특별한 존재다. 그러나 그런 주인공조차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고 많은 사람을 잃었다(꽤 많은 수가 악마나 가디언이 아니라 사람한테서 못 지킨 거란 사실은 좀 아이러니하지만). 주인공이 이럴진대 평범한 인간들이 가디언이나 악마 앞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이전 지역에서 우리는 라제니스가 루페온에게 애완동물 내지는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는 도구 취급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초월적 존재들 앞에서 나약한 생명들의 발버둥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강조한다. 이 구도를 깔아 놓은 상태에서 굉장히 재밌는 장면이 등장한다. 가디언을 비롯한 신적 존재를 극혐하는 마레가가 주인공의 호문쿨루스를 연구를 위해 공격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필자는 꽤 많은 기대를 했다. 플레이어가 호문쿨루스에게 애착을 가지도록 유도한 뒤 그걸 부숴버리는 전개로 뭘 말하고 싶었을까? 에서 기묘한 모순이 느껴졌던 것이다. 가디언이 인간을 벌레로 보고, 신들이 정한 운명 속에서 인간도, 할도, 실린도, 라제니스도 도구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제시하자마자 인간도 똑같이 자신의 창조물을 핍박하고 도구 취급하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동등한, 아니 대부분 인간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호문쿨루스인 세헤라데도 나온다. 그러나 마레가는 세헤라데도 똑같이 도구 취급한다. 인간과 동등한 지성을 지닌 인간의 창조물을 인간이 박해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주제는 예로부터 SF류의 단골 소재였지만 그걸 로스트아크 세계관에서, 신들과 가디언의 존재와 함께 풀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인간도 호문쿨루스를 벌레 취급하고 도구 취급하면서 자신들을 우습게 보는 가디언과 신을 증오할 자격이 있는가?
이 화두는 호문쿨루스를 감싸는 주인공에게 정당성을 준다. 플레이어 중에서도 내심 "인간의 미래를 위해 일개 도구인 호문쿨루스쯤은 희생해야 한다"라는 마레가의 말이 옳다고 느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창조주와 우월한 존재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면, 마레가에게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존재들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도덕적 맹점이 생기게 된다.
주인공은 자신이 생명을 주고 빚은 호문쿨루스를 친구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목숨까지 건다. 피조물을 위해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프로키온처럼. 마레가는 타인이 만든 피조물조차 자신의 목적을 위해 거리낌없이 파괴한다. 자신의 치부를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자식들을 학살하고, 라제니스를 방치하고 업박한 루페온처럼.
정말 멋진 대조다. 호문쿨루스에 대한 관점의 차이와 현자의 탑이 생긴 이유만 엮어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렇게나 많다. 좋은 화두는 다 던졌으니 이제 풀어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정확히 여기서부터 스토리가 실망스러워지기 시작한다.
3. 전 - 쿠콰과과과ㅏㅏㅏㅏㅇ
주인공이 호문쿨루스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뜻을 바꾼 세헤라데는 주인공을 움벨라로 이끈다. 그리고 움벨라에서 프로키온의 뒤를 이은 새로운 신, 크라테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곧이어 로스트아크가 쿠르잔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세이크리아, 그 중에서도 황혼의 사제들이 이미 로스트아크를 확보했다는 암시를 준다. 이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속 시원하게 답변을 주는 것은 아주 좋다.
문제는 움벨라를 나와서부터 시작된다. 툭 까놓고 얘기해보자. 스토리에 조금이라도 집중한 사람 중에 진지하게 라자람 풀려날거 몰랐던 사람? 라자람이 카오스게이트를 열고 무수히 많은 혼돈의 가디언과 바르칸이 강림하는 장면은 멋졌지만, 기껏 강림한 바르칸은 결국 루와 에버그레이스가 나서서 낚아채주는 싱거운 결말로 끝난다. 방금 전까지 신적 존재들에게 무력하게 당하기 싫다는 얘기를 했으면서 제일 무서운 상대를 그 신적인 존재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는 전개가 과연 최선이었을까 싶다.
이러니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김이 샐 수밖에 없다. 차라리 라자람을 쓰러뜨리면 카오스게이트를 닫을 수 있다는 언급이라도 하던지, 제일 무서운 바르칸 없으니 그 사이에 나머지 잡졸은 그래도 인간끼리 어떻게든 해결하자는 전개에 긴장감을 느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바르칸이 다 죽이라 했다고? 그럼 걔네가 뭐 인사만 하고 가겠냐?
물론 이거는 다음주에 어비스 레이드가 나와보면 해결될거라 생각하고 있다. 스토리 던전인 라자람이 쉽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라카이서스 전투에서는 새로운 배틀 아이템을 활용할거라는 언급도 있어서 이걸 플레이해보면 볼다이크가 가디언을 이겨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라자람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체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라우리엘은 주인공과 니나브 두 명이 힘을 합치고도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을 스토리 던전에서도 확실하게 어필했다. 스토리 던전에서 즉사기와 전방위 폭격을 날려대며 "아니 어쩌라고!"가 육성으로 튀어나오게 연출만으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바로 이전 어비스 던전에서 증명한 적이 있다. 그때에 비해 상아탑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부족했는지 던전의 퀄리티가 많이 아쉽다.
라자람의 무서움이 부각되지 않으니 자연히 스토리상 피크에 해당하는 마레가와 세헤라데의 희생도 빛을 잃는다. 희생이란 본디 "정말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절박함이 있을때 빛을 발한다. 그런데 라자람 이 놈은 세긴 한건지도 모르겠고, 걍 나 혼자서 패면 죽을거 같은데 쟤네는 왜 꼴값을 떨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그건 실패한 연출이 된다.
차라리 바르칸이 진짜 4페이즈 보스였다면 어땠을까. 절망적일 정도로 강한 바르칸을 상대로 시간이라도 끌어보겠다고 마레가도 세헤라데도 자기 목숨을 불태워가며 발악하고, 바르칸이 뜻밖에도 상처를 입고 분노해서 본격적으로 싸우려는 순간 루가 나타나 싸움을 말리고 바르칸을 데리고 갔다면? 루가 오기 전까지 버텨내고, 바르칸에게 자력으로 상처를 입혔다는 것에 자랑스러워하는 현자들의 승리 선언이 조금 더 값지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도 "와 바르칸을 상대로 에스더들도 없이 이만큼이나 했네"라는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바르칸과 동급이라는 카단과 카멘의 이어지는 레이드에도 조금 더 기대가 실리지 않았을까?
4. 결 - 죽음은 죽음이다
그럼에도 볼다이크 스토리에 대해 한 가지 칭찬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세헤라데의 소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아이작이 대현자가 되고 후일담에서 볼다이크는 현자의 탑 특유의 신비주의와 쇄국정책을 중단하고 대륙 전체와 긴밀한 협력을 위한 개방을 선언한다. 여기까지는 예정된 결말이고, 엔딩의 대부분은 코어를 기반으로 세헤라데를 살리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주인공은 세헤라데를 새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되살리지는 못했다. 주인공이 만든 세헤라데는 이전의 기억 일부를 간직하고 태어난 완전히 새로운 개체고, 라자람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전대 세헤라데는 죽었고 돌아오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이 결말에는 좋은 평을 주고 싶다. 만약 세헤라데가 진짜 살아났다면 그거야말로 "호문쿨루스는 도구다"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된다. 호문쿨루스도 인간처럼 한번 죽으면 끝이고, 새로 만들어도 그건 이전까지의 호문쿨루스와 다른 개체다. 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호문쿨루스를 파괴하고 새로 만드는 것을 거부했던 것에 정당성을, 세헤라데의 희생에 가치를 부여하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호문쿨루스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묻는다. 따라오겠냐고. 호문쿨루스는 당연한 대답을 하고, 주인공의 펫이 되어 진짜로 주인공의 모든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은 잃고 싶지 않은 또 하나의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
총평: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겁이 너무 많았다
상술한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호문쿨루스의 관계의 대비가 필자의 헛다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본인이 보면서 든 생각은 이러했다는 의견을 전달해보고 싶었다. 이런 내용을 조금 더 확실히 전달했다면 호불호는 갈려도 깊이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가디언들이 깽판치고 다 때려부수는 내용이랑 호문쿨루스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같이 소화시킬 자신은 없었던게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 호문쿨루스에 대한 고찰이 겉핥기로 끝난건 개인적으로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심지어 가디언들이 때려부수는 부분에서조차 바르칸이라는 굵직한 보스를 지금 소모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바르칸의 임팩트는 주고 싶고, 벌써 보스로 써먹기는 아깝다든 과욕이 후반부의 임팩트를 깎아먹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유저가 바르칸을 본 순간 에버그레이스나 루를 기다렸을거 같은데, 그 예측을 깨뜨리는 척이라도 했다면 어땠을지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결과적으로 본인에게 누가 좋았냐 싫었냐 물어본다면 좋았던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호문쿨루스도 귀여웠고 비주얼도 잘 뽑았고 떡밥도 잘 해결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개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너무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