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자, 아리는 단정히 몸을 가다듬고 비화원의 정문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니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설희, 듀드, 홍아, 그리고 오늘부터 동행할 클레릭 소녀였다.
"어젯밤에 잠은 잘 잤니?"
설희가 밝은 미소로 말을 걸었다. 아리는 미소를 되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꼬맹이가 벌써 임무를 나가다니 감개무량하구나."
여전히 능글맞은 홍아의 농담에 아리는 피식 웃었다. 오늘만큼은 그 농담마저도 기분 좋게 들렸다.
마지막으로 듀드가 짧게 격려했다.
"잘 다녀오너라."
세 사람의 짧은 격려와 함께 아리는 클레릭 동료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
처음 나서는 모험이라 긴장되었지만, 그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슬리피우드로 가는 길에는 초보 모험가들이 상대하는 약한 몬스터들만 있었고, 아리와 동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예상보다 빠르게 슬리피우드 입구에 도착한 그들은, 문지기에게 통행증을 건네고 안으로 들어섰다.
"우선 짐을 풀고 쉬도록 하죠."
두 사람은 마을 중앙의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 문을 열자, 삐에로같은 파마를 한, 배 나온 중년 남자가 환영했다.
"어서 오게나, 이런 오지의 마을까지 오다니 수고가 많았구나. 푹 쉬다 가렴"
그는 웃으며 목욕가운과 방 열쇠를 건넸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기 시작했다.
"후… 오랜만에 이렇게 오래 걸으니 힘드네요. 그런데…"
짐을 정리하던 아리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혹시 이름이 뭐예요?"
몇 시간을 함께 걸었지만 그들은 여행 내내 대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결국 아리쪽에서 먼저 어색함을 깨고자 다가가도록 하였다.
"메르…"
"네?"
"메르시라고 해요."
클레릭 소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도적님 이름은요?"
"아, 제 이름은 아리에요. 잘 부탁드려요, 메르시."
아리가 손을 내밀며 인사하자, 메르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아리는 짐을 풀고 있는 메르시를 힐끔 바라보았다. 푸른색 로브를 벗은 그녀는 금색 장식이 둘러진 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연한 갈색의 긴 생머리에 두 갈래로 땋은 옆머리, 황금빛 눈까지. 메르시는 클레릭이라기보단 어엿한 비숍처럼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메르시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저…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아, 아뇨. 그냥… 옷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하하…"
아리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칭찬을 들은 메르시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렇죠? 이 옷은 소중한 사람이 준 선물이거든요. 그래서 중요한 날에는 꼭 이 옷을 입어요."
"아… 가족이 주신 선물인가요?"
메르시는 고개를 저었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죠."
그렇게 말하는 메르시의 눈동자가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녀의 아련한 표정을 본 아리는 차마 더 묻지 못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그들은 온천으로 가서 여행의 피로를 풀기로 하였다. 온천의 따뜻한 물은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하였고 두 사람은 긴장을 풀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리는 자신이 비화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와 설희, 듀드, 홍아와 함께했던 다양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메르시는 조용히 듣기만 하면서도 가끔 맞장구를 치며 미소를 보였다.
조금 뒤, 자신의 이야기가 바닥나자 아리는 메르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또래를 만난 탓인지 질문은 흡사 소개팅이나 취조에 가까웠다.
"좋아하는 건 뭐예요?"
"취미는요?"
그녀는 의욕적으로 질문했지만, 사제인 메르시에게는 모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사제의 일상은 아침 기도와 사람들을 돌보는 일로 가득했고, 아리와는 공통점도 없었으니까, 결국 대화는 금세 끊겨버리고 말았다.
대화를 이어가던 중, 아리는 오랜 온천욕 때문인지 현기증을 느꼈고 그래서일까? 아니면 그저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은 조급함 때문이었을까?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무심결에 꺼내고 말았다.
"그런데 메르시는 왜 비숍이 되려고 하시는 거예요?"
질문이 튀어나오고 나서야 아리는 스스로의 실수를 깨달았다. 얼핏 듣기엔 단순히 꿈에 대해 묻는 평범한 질문처럼 들렸겠지만, 아리는 비화원의 일원으로서 여신교의 구조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여신교의 계급 체계는 교황, 추기경(비숍), 주교(프리스트), 신부(클레릭), 그리고 신도로 나뉘어 있었다.
추기경이나 주교 같은 내근 직책은 교회 내에서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비숍, 프리스트 그리고 클레릭 같은 외근 직책은 상대적으로 낮은 취급을 받았다.
뭐, 당연한 이야기다. 이런 몬스터가 들끓는 세계에서 밖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아니까. 물론 비숍이나 프리스트 같은 고위 모험가의 경우에는 외근과 내근의 차이가 없지만 클레릭은 달랐다. 그들은 그저 흔해빠진 사제들 중 하나였기에 일종의 소모품 취급을 받았다.
특히, 클레릭에서 프리스트로 전직하려면 상당한 뒷배경이 필요했다. 여신교는 권위와 명성을 지키기 위해 아무 연줄 없는 클레릭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메르시처럼 이런 험난한 시험을 치름에도 불구하고 검증된 모험가가 아닌 뒷골목 모험가인 자신과 함께한다는 사실만 봐도 그녀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차… 왜 이런 질문을 한 거지?'
아리는 속으로 후회했다. 메르시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사과라도 할까 망설였지만, 이미 던져버린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때 메르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어딘가 서글픈 목소리였다.
"제게 소중한 사람이 사제였거든요."
아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아까 그 옷을 주셨다던 분이요?"
메르시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온천의 수면 위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과거의 기억으로 가득 찬 듯했다.
"아주 오래전에, 저에게 꿈과 살아갈 이유를 주신 분이지요."
메르시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8년 전, 엘리니아 외곽의 작은 마을
깊은 숲 속,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골 마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단출한 삶을 살았고,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만큼 평화로웠다. 메르시도 그런 마을에서 소박하지만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한겨울의 밤, 차가운 바람이 마을을 휘감던 그때, 굶주린 와일드 보어 떼가 마을을 습격했다. 짙은 눈 속에서 사냥감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마을의 따스한 불빛을 보고 몰려온 것이다.
도시였다면 모험가들이 나서서 그들을 물리쳤겠지만, 작은 산골 마을엔 그런 존재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몬스터의 위협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비명과 혼란 속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마을은 그들의 발톱 아래 짓밟혔다.
그날 밤, 메르시의 부모님도 목숨을 잃었다. 어린 메르시는 부모님과 함께 숨어있었지만, 몬스터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부모님은 망설임 없이 딸을 품에서 떼어냈다. 그들은 몬스터를 유인하기 위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메르시는 부모님의 비명소리가 멀어져 가는 동안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저 방 안에서 숨죽여
그녀의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때까지 울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이 되자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무너진 집들, 쓰러진 마을 사람들, 그리고 차가운 부모님의 시신 앞에서 어린 소녀는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마을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울부짖었고, 메르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부모님 앞에서 죄책감과 슬픔에 몸부림쳤다.
그런 마을에 한 외지인이 찾아왔다.
하얗고 짧은 약간 곱슬거리는 단발머리에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자신을 요한이라 소개했다. 그는 다친 사람들을 치유하고, 쓰러진 이들의 장례를 치렀으며, 무너진 집을 정리하고 마을 곳곳을 돌보았다.
그의 노력 덕에 혼란에 빠졌던 마을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제야 요한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다시 한번 소개했다.
"저는 요한입니다. 여신을 섬기는 일개 사제일 뿐이죠."
요한은 자신의 지위를 낮춰 말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신부님으로 불리며 신뢰와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요한의 눈길은 종종 마을 뒷편 언덕의 단풍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는 소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항상 혼자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가족을 모두 잃은 것은 마을에서 그녀가 유일했다고 한다.
요한은 몇 차례 소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녀는 그를 볼 때마다 도망쳤다.
요한은 그런 그녀가 계속해서 신경쓰였고 그는 소녀를 위해 과자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점심이 끝나고 마을 언덕으로 올라가자, 소녀는 그 날도 어김없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안녕? 꼬마야, 혹시 이름이 뭐니?"
요한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녀의 이름은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지만, 적당한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녀는 요한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하... 아저씨는 요한이라고 하는데, 혹시 배고프지 않니? 과자가 있는데 조금 먹을래?"
요한은 웃으며 과자를 내밀었다.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땅을 바라봤다.
" 후... "
요한은 결국 그녀에게 과자를 주는것은 포기하고 대신 그녀옆에 조용히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요한쪽이였다.
"우리 여신교에서는 이런 말이 있단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
요한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따뜻했다.
"쉽게 말하면, 분노하거나 원망하는 게 결국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메르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의미가 없을까?"
메르시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요한은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기에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은 수없이 많지. 분노도 그중 하나일 뿐이란다. 그리고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벽할 수 없고, 분노를 통해서라도 살아가는 힘을 얻는 사람도 있단다.
그러니까, 메르시... 억지로 참을 필요는 없단다.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내도 돼. 참기만 하면, 그건 오히려 너의 마음을 좀먹게 될 거야."
그 순간, 메르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요?"
"응?" 요한이 되물었다.
메르시는 고개를 들어 요한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마을을 습격했던 와이들보어 무리들은 이미 떠나버렸는데, 대체 누구한테 화를 내라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마지막에는 절규가 되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원망할 대상이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대상을 진심으로 원망하고, 그 책임을 직시하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요한은 읽을 수 있었다.
"메르시," 그는 조용히 말했다. "진실을 하나 알려주마."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메르시는 다시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의 표정은 한층 진지해졌다.
"너희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모두 나 때문이다."
그 갑작스러운 고백은 마치 커다란 돌덩이가 메르시의 머리를 강타한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숨이 멎은 듯 말을 잃었다.
"마을로 오는 길에 너희 마을 근처에서 연기가 나는 걸 봤었단다.
하지만 단순히 가정집에서 나는 연기일 거라 생각했지. 아무 일 아니라고 지나쳤어.
만약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마을 사람들은 무사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요한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분명 허점투성이였다.
메르시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자신의 마을이 습격당한 건 한밤중이었다. 연기가 보일 리 없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이 억누르고 있던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부모님을 죽인 건... 바로 나야.'
만약 자신이 더 강했더라면. 아니면, 적어도 그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만큼 빨랐다면.
어쩌면 부모님은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 무너질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메르시는 요한의 엉성한 거짓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망설이는 메르시를 보며, 요한은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고통과 죄책감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부드럽지만 무겁게 말했다.
"혹시... 아저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들이 서 있는 언덕 아래로 번쩍이는 벼락이 떨어졌다.
순간, 눈부신 섬광과 함께 땅이 진동하며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미안하지만, 사실이야."
요한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너희를 모두 구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단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렴."
메르시는 요한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흔들렸고, 그녀의 온몸은 분노와 슬픔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퍽!
소녀의 작은 주먹이 요한의 가슴에 내리쳤다.
퍽! 퍽!
"왜... 어째서..."
퍽!
"왜 아무것도 못한 거야... 왜!"
그녀의 울부짖음은 마치 가슴속에서 억눌려 있던 모든 감정이 터져 나온 듯 거칠었다.
작은 주먹이 그의 가슴을 계속 때릴 때마다 그녀는 목이 잠기도록 울었다.
요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서서 그녀의 분노를 받아들였다.
그의 표정에는 아픔과 연민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르시가 주먹질을 멈추고 흐느낌만 남을 때까지 그는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짧지만 긴 시간이 흐른 뒤,
소녀는 차츰 진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던 것인지, 요한의 사제복에 박혀있던 단추 때문에 그녀의 작은 손에는 얕은 상처가 나 있었다.
요한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늘 들고 다니던 반창고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에 붙여주었다.
"조금은 진정이 되었니?"
메르시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한은 안도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거 다행이구나. 후… 그럼 조금 쉴까?"
말을 마친 요한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단풍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게 머릿결을 스치고 지나갔다.
"좋은 곳이구나. 바람도 선선하고, 햇빛도 가려주고… 정말 딱이야."
메르시는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들어 불어오는 바람을 느껴보았다.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그저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바람이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요한은 빙그레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메르시, 혹시 단풍나무의 꽃말을 아니?"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요."
요한은 손바닥에 그 단풍잎을 올려놓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단풍나무의 꽃말은 사양, 은둔, 그리고 자제란다. 여기서 사양은 겸손을 뜻하는 그 ‘사양(辭讓)’이지. 그런데…"
그는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한자를 천천히 그렸다.
‘斜陽’.
그것은 ‘사양’, 하루가 저물어 갈 때 지는 해를 뜻하는 단어였다.
"이건 하루가 끝나갈 때의 저녁노을을 의미한단다. 나는 이것이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해. 때로 사람들은 모험가들을 어리석은 불나방에 비유하곤 하지. 위험한 곳에 도전하다가 목숨을 잃는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아니란다."
요한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하루의 끝은 곧 내일의 시작이기도 해. 앞선 이들이 어제를 이어주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듯, 그들의 모험은 어리석은 도전이 아니라 남겨질 이들을 위한 ‘개척’이야.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진짜 ‘단풍의 의지’라고 나는 믿는단다."
메르시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하지만 단 하나의 말은 가슴속 깊이 와닿았다.
‘앞선 이들이 어제를 이어주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랬다. 그들이 자신을 지켜준 덕에 지금 자신이 살아남아 이곳에 있는 것이다.
복받치는 감정을 참으려 애쓰는 그녀의 머리를 요한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메르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또 감정이 끓어오를 때가 있을 거야. 슬픔이라는 건 결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만약 그런 때가 온다면…"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내가 언제든 너의 분노를 받아주마."
갑작스럽게 건넨 말에 메르시는 울음을 멈추고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그거 고백이에요?"
당황한 요한은 멋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저씨는 사제라서 결혼 같은 건 못 한단다. 하지만 네 보호자는 되어줄게."
" 대신 약속 하나만 해줄 수 있겠니?"
"약속이요? 그게 뭐예요?"
요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네 분노와 원망을 받아주듯이, 너는 다른 이들의 축복이 되어주렴. 누군가를 믿어주고, 지친 이들에게는 휴식처가 되어주고, 길을 잃은 이들에게는 나침반이 되어주는 존재. 그런 존재가 되어주렴."
메르시는 불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자신 없어요. 제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겠어요…"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는 없어. 중요한 건 의지를 가지고 한 걸음 씩 나아가는 거란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도 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다면 돌아가도 돼. 중요한건 목표를 잃지않고 나아가는 것이지."
요한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토닥이며 덧붙였다.
"무엇보다 네가 힘들 때, 아저씨가 곁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가면 된단다."
그 말에 메르시는 불안과 두려움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먼 길이겠지만, 요한이 옆에 있다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겨났다.
"…할게요. 대신 꼭 도와줘야 해요, 약속이에요."
요한은 그녀의 대답에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앞으로 잘 부탁하마, 메르시."
메르시는 손에 꼭 쥔 단풍잎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마치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