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닝시티 도적 전직관 건물 앞, 그곳에 다섯 명의 모험가가 건물 앞에 모여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밧줄에 묶인 채, 다른 이들에게 이끌려 연행되는 모습이었다.
“젠장… 정말 이 방법밖에 없냐?”
밧줄에 묶인 론도가 파티원들을 향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 잔말 말고 연기나 시작하라고.”
테스가 재촉하자, 론도는 한숨을 쉬었다.
“제길…”
그는 마지못해 밧줄에 묶인 상태로 건물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만지의 전언에 따라 커닝시티로 향한 아리 일행은, 곧바로 도적 전직관 다크로드가 있는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이들은 다크로드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방법에 대해 토의하였다.
“만지 씨처럼 물어보면 알려주지 않을까?”
슈가의 말에 론도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 아저씨도 결국 ‘어리석음’이니 ‘나약함’이니, 별로 대단한 정보를 준 건 없었잖아.”
“음, 그렇긴 해…”
파티원들은 적당한 수를 찾으려 했지만, 번뜩이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평소처럼 강행 돌파를 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한쪽에서 다크로드의 시선을 끄는 동안 아리가 방에 잠입해 일기를 훔쳐 나온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좋아, 그럼 누가 시선을 끌지?”
론도가 묻자, 모든 시선이 론도에게 향했다.
“왜, 왜 나를 보는 거야?”
그가 당황해 물었고, 테스가 론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머지 파티원들도 ‘힘내’라는 눈빛으로 그를 격려(?)했다.
이렇게 해서, 론도가 밧줄에 묶여 소란을 일으키고, 아리가 그 틈에 건물 안으로 잠입하는 작전이 짜였다.
그리고 지금, 론도는 실제로 밧줄에 묶인 채 건물 앞에 서 있는 중이었다.
“하아… 가자고.”
밧줄에 묶인 론도가 한숨을 쉬며 건물을 향해 걸었다. 테스가 신호를 보내자, 파티원들은 일제히 외치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 못된 도적놈! 감히 우리 물건을 훔치다니!”
“다, 다크로드 나와라! 도적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채..책임지세요..!”
마치 론도가 물건을 훔친 범인인 양 떠들어대며, 건물 안에 있는 다크로드를 불러내려는 의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런 상황에 당황한 다크로드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밧줄에 묶인 론도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난리인가? 그리고 저 아이는 또 뭐고?”
다크로드가 론도를 가리키며 묻자, 론도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오해예요, 다크로드님! 전 이 사람들 물건에 손 댄 적 없다고요!”
“어디서 발뺌이야? 너 말고 주변에 누가 있었는데!”
“진짜 아니라니까! 다크로드님, 제발 좀 살려주세요!”
론도의 ‘명연기’에 다크로드는 당황한 기색으로, 우선 상황부터 파악하기 위해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했다.
그가 론도와 파티원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이, 아리는 슬그머니 건물 안으로 숨어들었다.
아리는 곧장 다크로드의 방으로 향했다. 운이 좋게도 다른 모험가나 경비들에게 들키지 않아, 별다른 방해 없이 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아리는 일기가 있을 만한 책장이나 책상 서랍 등을 꼼꼼히 뒤졌다. 책장에는 빅토리아 아일랜드 도적들의 명부나, 여러 임무·시설 관련 장부들이 가득했고,
그 모습에 아리는 책상 서랍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살펴보던 중, 아리는 일기로 보이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이건…?”
아리가 책을 펼쳐 내용을 확인하니, 그건 20년 전의 일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곧, 책의 내용을 읽으려던 아리에게 문득 문 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시선을 문쪽으로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숨어있지 말고 나오시죠."
그러자 다크로드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대단하군, 설마 눈치 챘을거라고 생각은 못했는데.. 역시 비화원의 블레이더인가"
그는 아리의 실력에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제 정체를 다 알고 있었던 건가요?"
“물론이지. '다크로드' 라는 명칭이 괜히 있는건 아니지, 저주받은 신전의 일을 포함해서 너에 대한건 대부분 파악하고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밖에 있던 사람은.. '쉐도우 파트너'였나요?"
"정답이다, 역시 밖에 있는 애송이들보다야 훨씬 낫군. 그래서, 그 일기를 찾아서 뭘 어쩌려는거지?"
그는 아리의 손에 들린 일기를 주시하며 물었다.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왜 그게 알고 싶은거지? 설희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
다크로드가 아리를 노려보자, 아리는 애써 쓴웃음을 지었다.
"둘 다 에요. 그들을 원망했던건 사실이더라도 어쨌든 가족이었으니까, 신경쓰이는건 어쩔 수 없네요."
아리의 말에 다크로드는 잠시 고민하듯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 아직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한 현실이었고, 우린 거짓된 진실로라도 그녀가 살아가길 바랐지.”
잠시 뜸을 들이던 다크로드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 날, 우리가 저주받은 신전에 도착했을 때 였다. 우리는 신전의 가장 안쪽방에 놓아진 제단으로 향했고, 곧 그곳에 붙어있던 부적을 사제가 가져온것으로 바꿔붙였지. 하지만..."
다크로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그는 괴로운 기억을 꺼내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
.
.
.
.
"어.. 어째서..."
만지와 진이 떨리는 눈으로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제단 뒤쪽에서 거대한 검은 형상의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형상은 불안정하게 흔들려 정확한 윤곽이 잡히지 않았지만, 조금씩 형태를 갖추는 듯 보였다.
"이봐요, 사제님! 당신이 준 부적 제대로 된거 맞습니까?"
성이 사제를 돌아보며 말했지만, 이미 그곳에 사제는 빠져나가고 없었다. 하지만,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성은 곧바로 만지에게서 부적을 건네받아 부적을 교체하기 위해 제단에 있던 부적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 순간,
"크윽!"
제단은 마치 성을 거부하는 듯 그를 튕겨내었고, 이내 그는 몇 미터 뒤로 날아가 신전 기둥에 부딪혔다.
"스승님!"
"성 씨!"
진과 만지가 기둥에 처박힌 성을 꺼내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성은 그들에게 호통 치듯 외쳤다.
“멍청이들아! 뒤를 봐!”
그들은 뒤를 돌아봤고, 날아오는 거대한 창 한 자루가 눈앞에 보였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절망하던 그 순간,
챙―!
트리스탄이 검을 휘둘러 창을 쳐냈다.
“자세 잡아, 이 녀석들아! 멍 때리면 죽는다!”
그가 호통치며 눈앞의 적을 노려봤다. 일렁이는 발록 형상 너머로, 타우로마시스가 거대한 몸집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콧김을 뿜어대며, 위압감이 넘치는 몸에서는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건방진 인간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난동을 부리는 것이지?”
살기를 내뿜는 몬스터의 기세에, 만지와 진은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그들 앞에 당당히 서서 검을 내밀었다.
“네 놈들 대장을 봉인하러 왔다. 죽기 싫으면 비켜라.”
“감히.. 네놈들은 마왕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타우로마시스가 창을 불러들인 뒤, 트리스탄을 향해 질주했다.
트리스탄 역시 검을 휘둘러 그의 공격에 맞섰다.
챙―!
투콱―!
트리스탄과 타우로마시스가 격돌하는 동안, 성은 기둥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크윽… 체면이 말이 아니군…”
기둥에 단단히 박혀 버둥대는 성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놀란 눈으로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그곳엔 설희가 있었다.
“설희…? 네가 왜 여기에…?”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딸의 등장이었기에, 성의 눈이 커지며 흔들렸다.
“저만 두고 가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설희는 뾰루퉁한 얼굴로 성의 손을 잡고 그를 기둥에서 끌어냈다. 가까스로 설희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성은 자신의 딸을 혼내려 하였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챙-!
콰앙-!
그들의 앞에서는 트리스탄과 타우로마시스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주위에는 주니어 카고들까지 몰려들고 있었다. 성은 어쩔 수 없이 설희를 뒤로 물리고, 만지와 진을 불러들였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힘을 합쳐 주니어 카고들을 처리한 다음 트리스탄을 도우러 가자. 알겠나?”
“네!”
아이들은 각자의 무기를 쥐어 들고, 몰려드는 주니어 카고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때때로 위험에 처한 순간도 있었지만, 성이 곁에서 엄호해 주었기에 이들은 한 마리씩 차근차근 적을 처치했다.
곧 신전에 있던 주니어 카고 대부분이 정리되자, 그들은 트리스탄에게 합류했고, 타우로마시스 역시 그들의 합공에 쓰러지고 말았다.
“헉… 헉… 다들 괜찮나…?”
싸움이 끝난 후, 서로의 안위를 확인한 그들은 만지의 부적으로 제단을 교체하기 위해 움직였다.
만지가 부적을 교체하자, 검은 형상은 점차 형태를 잃으며 신전 이곳저곳에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불안함을 느낀 진이 만지에게 물었다.
“야, 이거 원래 이런 거야…?”
“글쎄… 나도 부적 쓰는 건 처음이라…”
그 순간, 모여든 검은 연기가 설희를 향해 날아들었다.
“꺄아악―!”
설희는 비명을 지르며 연기를 떨쳐내려 했으나, 그것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일행이 서둘러 달려갔지만, 연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이 놀라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갑작스럽게 설희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설희야!”
성은 당황해서 그녀를 흔들어 깨우려 했으나, 설희는 미동도 없었다.
당황한 성이 설희의 맥박을 확인하려 고개를 가까이 대는 순간…
푹!
설희가 갑자기 단검으로 성의 가슴을 찔렀다.
“커억?! 이, 이게 무슨…?”
피를 흘리며 설희를 바라보는 성의 모습에, 진과 만지가 달려왔다.
“스승님!”
“성 씨!”
두 사람은 급히 성을 설희에게서 떼어놓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 탓에 성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진이 분노를 터뜨렸다.
“야! 설희,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러나 설희는 진의 외침을 무시한 채, 미소를 짓더니 이내 미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설희의 행동과 변화에, 진은 공포와 당혹감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진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사이, 트리스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칼끝을 설희에게 겨누고, 그녀를 주시했다.
“자, 잠깐만요! 트리스탄 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진이 당황해 물었고, 트리스탄은 큰소리로 호통치듯 말했다.
“정신 차려! 지금 저게 네가 알던 설희로 보이냐?”
트리스탄은 여전히 설희에게 검을 겨눈 채 말했다.
“저 마기는 이미 몬스터나 다름없다.”
“몬스터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설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자의 말이 맞다, 애송아. 난 발록, 몬스터들의 신이다.”
“역시… 아까 그건 빙의였군.”
트리스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빙의라니…? 그럼 아까 그 검은 연기가…?”
“정답이다. 이 아이의 몸이 가장 취약했기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지.
가능하다면 더 강한 몸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이 아이로 만족해야겠지.”
발록의 조롱에 트리스탄은 더욱 칼을 굳게 쥐고 외쳤다.
“누가 설희를 순순히 넘겨줄 것 같냐!”
그러나 발록은 여유 있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반문했다.
“그럼 어떻게 할 테지? 네가 이 아이를 직접 죽이겠나?”
“크윽…”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트리스탄이 망설이는 사이, 설희가 단검을 들고 트리스탄에게 달려들었다.
챙―!
설희가 휘두른 단검과 트리스탄의 대검이 부딪혀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그런 그들의 싸움을, 진은 그저 멍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만지가 조용히 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진, 스승님이 녀석의 시선을 끄는 동안 네가 뒤로 돌아서 설희를 제압해. 그럼 내가 발록을 떼어내 볼게.”
“뭐? 어떻게 발록을 떼어낸다는 건데?”
진이 믿기 어렵다는 듯 묻자, 만지는 진지하게 답했다.
“제단에 붙인 부적을 설희의 몸에 붙이겠어. 그러면 발록은 설희의 몸에서 빠져나갈 수밖에 없겠지.
시간이 없어, 서두르지 않으면 성 씨의 목숨도 위험해!”
“젠장… 알았어! 부탁할게!”
진은 다크사이트를 써서 설희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 신전 기둥 쪽으로 몸을 숨겼다. 만지는 곧장 제단으로 달려가 부적을 떼어 내고, 자신의 스승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핏 설희와의 싸움에서 압도하는 듯 했지만, 망설임 때문인지 조금씩이지만 그녀에게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만지가 서둘러 트리스탄의 뒤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저희가 그녀를 제압해 보겠습니다. 그 뒤, 스승님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주세요.”
갑작스러운 제자의 부탁에도 트리스탄은 잠시 망설이는가 하더니,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지는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의 검에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만지의 검에서 밝은 빛이 뿜어지자, 설희는 흥미로운 듯 중얼거렸다.
“호오… 그 빛은 설마... 네 놈, 그 일족의 후예였나?”
“알아봐줘서 영광이군. 이번에야말로 널 봉인해주마!”
만지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트리스탄 또한 엄호하듯 함께 설희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발록은 양팔로 그들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었다.
“크윽…!”
트리스탄과 만지가 온 힘을 다해 밀어붙였음에도, 설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큭, 네 기술이 조금만 더 완성되었더라면 날 벨 수도 있었을 텐데.”
설희가 조롱하듯 웃는 순간,
“아니, 충분해.”
만지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설희가 의아해하며 그를 보는 찰나, 뒤에서 진이 나타나 설희를 세차게 밀어 넘어뜨렸다.
“지금이야!”
진이 설희의 위에 올라탄 상태로 양팔을 제압하자, 만지는 재빨리 품에서 부적을 꺼내 설희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설희 또한 그 의도를 깨달았는지, 즐거운 듯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부적으로 날 몰아낼 셈인가, 하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던 타우로마시스의 창이 갑자기 떠오르더니, 이번엔 만지를 향해 날아왔다.
“네 놈들이 그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을까?”
“만지!”
진이 소리치자, 만지가 반사적으로 뒤돌았다.
날아드는 창을 보며 ‘피할 수 없다’고 느낀 그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콰지지직—!
트리스탄이 달려와 대검으로 창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창은 대검을 계속 파고들었고, 결국 검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검을 뚫고 트리스탄의 몸까지 꿰뚫었다.
“스승님!”
만지가 그에게 달려가려 하자, 트리스탄이 호통쳤다.
“자리를 지켜라! 네 역할을 수행해!”
트리스탄의 갑옷은 순식간에 그의 피로 물들었고, 타오르는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몸에 박힌 창을 붙들고 더 이상 지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젠장…!”
만지는 다시 설희에게로 시선을 돌려, 부적에 기운을 불어넣어 발록을 떼어내려 집중했다.
설희 또한 그 모습을 보면서 경외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훌륭한 전사들이로군. 하지만 날 다시 바깥으로 내보내면, 부상 입은 너희가 뭘 할 수 있지? 내 본체와 싸움을 이어가겠느냐?”
그 말에 만지와 진의 얼굴에 망설임이 어렸다.
그들은 정말로 발록을 떼어낸 뒤의 계획이 없었으므로, 모두가 불안해졌던 것이다.
그때,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네 놈을 받아들이겠다.”
돌아보니, 그 곳에는 성이 있었다.
그는 가슴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힘겹게 호흡하며 똑바로 서 있었다.
“내 몸을 내줄 테니… 내 딸에게서… 당장 나가.”
“푸하하핫! 네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설희는 즐거운 듯 크게 웃었고, 진은 스승의 결정에 경악했다.
“안 돼요, 스승님! 그런 짓을 하시면…!”
“진.”
성은 그의 말을 끊고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제자를 보았다.
“미안하구나… 너까지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성은 진에게 마지막으로 미소 지어 보였고, 진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 설희의 몸에서 다시금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성을 감쌌고, 성이 진을 향해 힘겹게 한마디를 남겼다.
“진… 부탁한다…”
진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검을 쥐며 일어섰다, 이내 성에게 다가간 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남기실 말은… 없으세요…?”
성은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너희가 내 자랑이었다.”
마지막 유언을 건넨 성은 진을 바라보았다. 아직 떨리는 손에 단검을 쥐고 있는 진은 그저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성은, 이내 결심한 듯 스스로 단검에 몸을 맡기며 진을 안아주었다.
“스승님?!”
깜짝 놀란 진이 단검을 빼려 했으나, 성은 더욱 강하게 그를 끌어안고 나즈막히 속삭였다.
“설희를… 잘 부탁하마..”
딸을 부탁한다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성은 곧 숨을 거두었고, 그 곳에 남은건 스승을 모두 잃은 두 아이의 절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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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렇게 우리 모두는 존경하던 스승과 사랑하던 가족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선대 다크로드의 뜻에 따라, 모든 책임을 지고 그녀의 원망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지.”
“거짓된 분노로라도, 그 아이가 살아가길 바랐으니까.”
아리는 아무 말 없이 다크로드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다크로드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제 넌 어쩔 셈이지? 우리에게 복수라도 하려고 온 거냐?”
그 말에 아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세요?”
“시치미 떼지 마라. 만지에게서 이미 연락을 받았다. 너는 친구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며 우리를 찾은 거 아니냐?”
그 말에 아리는 멋쩍게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건.. 어떻게든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어요, 그렇게라도 안하면 말씀을 안해주실 거 같아서.. 애초에 복수를 할 생각은 없었어요.”
“어째서지? 너는 분명 우리 탓에 소중한 이를 잃지 않았나?”
아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 친구가 그런 걸 바라진 않았을 거 같거든요. 물론 억지로라도 진실을 알고 싶었던 건 맞지만… 제가 이어가려 했던 그 아이의 길은 ‘용서’이지, ‘복수’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복수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진실이 궁금했을 뿐이에요.”
아리의 말에, 다크로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토록 무리수를 두며 내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했단 말이냐?”
“하지만 결국 알려주셨잖아요? 오히려 제가 궁금하네요. 어째서 저한테 모든 걸 털어놓으신 거죠?”
그녀의 질문에 다크로드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 입장에선 내가 적이 아니냐? 그런데 방금의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아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눈이… 닮았거든요.”
“뭐?”
“소중한 사람을 떠올릴 때 지으시는 표정이, 제 친구랑 닮았어요. 그러니까 믿어요.”
다크로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허탈하게 웃은 뒤, 책상에서 장부 하나를 꺼내 아리에게 건넸다.
“이건…?”
“그날 이후, 그 사제에 대해 조사하며 알아낸 것들이지. 여기엔 그 사제가 받은 의뢰와 의뢰주, 그리고 온갖 정보가 담겨 있다.”
아리가 장부를 건네받은 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렇게까지 알아내셨으면서도, 왜 진실을 숨기신 건가요?”
아리의 물음에, 다크로드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려웠으니까. 내가 제멋대로 진실을 밝혀버려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 나아가지 못했지.”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덧붙였다.
“하지만 멈춰 있는 자를 기다려줄 시간 따윈 세상에 없더군. 우리가 진실을 외면하며 흘려보낸 세월 동안, 세상이 또 다른 상처를 입었다면… 이제는 진실을 마주하고 그 책임을 져야겠지.”
그 말에 아리는 작게 미소지었다. 곧, 아리가 장부를 가지고 방을 떠나자, 홀로 남아 있던 다크로드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저 꼬마애가 우리 같은 겁쟁이들보다야 훨 낫군."
익숙한 남성의 음성에 다크로드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는 몇 십년이 지나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데, 정말이지 당돌한 녀석이군."
후련한 표정을 짓는 다크로드의 옆에 선 만지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셈이지?"
“뭘 어떡하긴. 꼬맹이 앞에서 멋대로 폼 잡아놓고, 아무것도 안 하면 체면이 안 서지 않겠나.”
“녀석이 장부 속 범인을 쫓는 동안, 우리도 우리 식으로 책임을 져야겠지.”
다크로드는 간결하게 말을 맺고, 방 한가운데에 놓인 칼자루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 낡은 칼자루에는 선대 다크로드의 엠블럼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두렵다고 피하지 않겠네, 이 끝에 무엇이 존재할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히 마주해 보겠네."
그의 목소리에 미묘하게 떨림이 느껴졌지만, 그 눈빛은 분명 새로운 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만지는 그를 지켜보며 옅게 웃었다.
"그렇지, 피하기만 해서는 나아갈 수 없지, 삶은 언제나 나아감의 연속이니, 우리도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겠지."
만지의 말에 진은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묵직한 과거의 짐을 짊어지면서도,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곧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희미한 노을만이 남아 맴돌았다.
그리고 그 빛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 어둠이 밀려오기 전의 잠깐의 붉은빛으로 두 사람의 결심을 비춰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