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내렸는가?"
매드는 여전히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A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A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모르겠습니다... 가족을 만나고 싶지만... 제가 무슨 염치로..."
자신 없어하는 A의 대답에 매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기다려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군."
"예? 그게 무슨..."
A가 고개를 들어 매드를 바라보자, 매드는 말없이 몸을 돌려 책상 위의 컴퓨터를 조작했다. 그의 손이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자, 곧 컴퓨터 화면이 밝아지며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매드는 화면을 A가 볼 수 있도록 돌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걸 보면 자네도 알게 될 걸세."
화면 속에서는 거대한 진흙 괴물이 마을을 휩쓸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덩어리처럼 요동치며 제뉴미스트 학회의 건물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괴물이 연구실 내부를 파괴할 때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충격파로 인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며 마을 곳곳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나 괴물은 그러한 파괴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목적이 있는 듯, 연구실 깊숙이 더 많은 것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A는 굳어진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화면 속 괴물을 가리키며 매드에게 물었다.
"저게... 저게 대체 뭡니까...?"
"저건-.."
매드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유토가 그를 가로막으며 대신 입을 열었다.
"내가 만든 것일세."
"뭐...?"
갑작스러운 유토의 고백에 A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토는 다시 한 번 또렷하게 말했다.
"내가 만든 것일세. 정확히 말하면, 자네 몸에 있던 마력석을 떼어낸 결과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유토의 말을 들은 A가 크게 소리치며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씩씩대며 따지듯 외쳤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가! 왜!"
A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유토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피했다. 그 모습에 A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소리쳤다.
"대답을 해보란 말일세!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정말 몰라서 묻는건가?!"
"뭐?"
갑작스러운 유토의 호통에 A가 당황하며 움찔했다. 유토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외쳤다.
"자네가 그렇게 된 뒤로 필리아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 거라 생각하는가?!"
A는 숨을 삼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토는 감정을 누르려는 듯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사라진 뒤, 필리아는 하루하루를 오직 자네만 기다리며 살았네. 처음엔 자네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네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절망했어. 마침내,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게 됐지."
A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유토는 그런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키니. 자네 딸 말일세."
A는 움찔하며 유토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자네가 사라진 이후에도 매일같이 광장에서 서서 자네를 기다렸네. 아버지가 돌아올 거라고, 언젠가 꼭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말이야."
"....키니가...?"
A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어린아이가 몇 년 동안 변함없는 얼굴로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네는 상상이나 해봤는가?"
유토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A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사라진 시간 동안, 남겨진 가족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난 자네의 몸에서 마력석을 떼어내기 위해 역술식을 펼쳤네.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필리아와 키니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도록, 우리 손으로 시작한 비극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이 손으로 모든 걸 망쳐버렸네... 그리고 이제, 그 결과가 저 괴물일세."
유토는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 속 괴물은 여전히 학회를 파괴하며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연금술의 실패작이 아니었다. 과거의 집착과 절망이 만들어낸, 멈출 수 없는 재앙이었다.
A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명색이 연금술사라는 놈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고 말았군요..."
매드와 카슨, 유토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A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단단한 결심이 서린 눈빛으로.
"이 모든 건 제 탓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끝내야겠지요."
잠시 후, 카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네. 하지만 이건 자네 혼자 감당할 일이 아니야. 모두를 불러 작전을 세우도록 하지."
그는 방을 나가 일행들을 소집했다.
잠시 후, 아리와 론도를 비롯한 일행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A씨, 기억이 돌아오셨다면서요? 괜찮으세요?"
아리는 A의 상태를 확인하며 그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A는 그런 그녀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이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현재 마을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는 컴퓨터 화면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저 괴물은 제 몸에서 빠져나온 마력석의 부산물입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마을 전체가 삼켜질 겁니다."
론도는 이를 악물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저걸 막을 수 있다는 거죠?"
론도의 질문에 카슨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괴물의 본체는 여전히 마력석일세. 그것만 제거하면 괴물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소멸할 걸세."
그러나 매드가 곧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문제는 저 마력석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지. 어설프게 제거하려 들었다가는 저 마력석에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걸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아리가 초조한 목소리로 묻자, 매드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괴물을 완전히 처치하는 것은 포기해야 하네."
"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일세. 우선 괴물을 유인할 조와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킬 조로 나눈 뒤, 유인조가 괴물의 주의를 끄는 동안 대피조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아리안트로 대피시키도록 하겠네."
아리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주먹을 꽉 쥐며 되물었다.
"그럼 마을은 어쩌고요? 이렇게 두고 떠나야 하나요?"
"아쉽지만 마을은 포기해야 하네. 지금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우선일세."
론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도 괴물을 막을 방법은 있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냥 두고 떠날 수는 없잖아요!"
"괴물을 저지할 수는 없어도 유인할 수는 있네."
카슨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놈의 목표는 마력석일세. 제뉴미스트에 남아 있는 마력석을 모두 흡수하고 나면 다음 목표는 이곳, 알카드노가 될 걸세. 따라서, 유인조가 일정량의 마력석을 가지고 괴물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면 시간을 벌 수 있지."
매드가 덧붙였다.
"유인조가 마력석을 일정량씩 들고 있다가 괴물이 접근할 때마다 던져 주며 이동한다면, 녀석은 마력석을 따라 움직일 걸세. 그동안 대피조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대피시키는 거야."
론도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다가 괴물이 모든 마력석을 먹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마을을 넘어서 다른 마을까지 노리지 않을까요?"
카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마력석을 전부 먹어 치운다고 해도 이 마을 밖은 끝없는 사막일 뿐이지. 괴물이 다른 마을을 습격하려 해도 가장 가까운 곳은 아리안트인데, 그곳까지는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네. 놈이 그 거리를 버티며 움직일 가능성은 희박하네."
론도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곧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후, 별수 없죠. 그럼 우선 조를 어떻게 나눌지를..."
"저, 저기 잠깐만요!"
슈가가 갑자기 론도의 말을 끊으며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주위의 반응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괴물을 처치하려면 마력석을 제거해야 한다는 거죠?"
"...그렇네."
슈가의 질문에 매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혹시 괴물을 니할 사막으로 유인하면 안 될까요?"
"니할 사막? 그곳은 왜..."
슈가의 제안에 카슨과 매드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전에 베딘 씨가 그러셨어요. 마력석은 내부의 마력을 태워서 열을 발생시키고, 그 열을 이용해 술식을 활성화한다고요."
"그렇지."
매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마력을 태우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사막의 불꽃'이라는 보석이라고..."
론도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잠깐만, 슈가... 너 설마..."
"맞아."
슈가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을 니할 사막으로 유인한 뒤, 놈에게 사막의 불꽃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놈의 몸속에 있는 마력석의 마력이 폭주하게 되겠지. 그러면 주변에 피해가 갈 수도 있겠지만, 그곳은 사막 한가운데라 큰 피해는 없을 테지."
슈가의 말을 끊으며 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네. 그렇게 거대한 놈의 마력을 모두 폭주시킬 만큼 충분한 양의 사막의 불꽃이 필요할 텐데, 그걸 어떻게 확보할 셈인가?"
"그건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아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는 단단한 결의를 다지며 당당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유인조가 괴물의 시선을 끄는 동안, 저희가 보석을 최대한 모아보겠습니다."
카슨은 여전히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유인조가 그 정도로 오래 버텨줄 거라고는... 쉽지 않을 걸세."
그때, 매드가 팔짱을 끼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돕겠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안드로이드들을 투입하지."
"매드? 그게 무슨—"
"전혀 관계없는 친구들도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데, 명색이 대표라는 인간이 아낀다고 되겠는가?"
카슨은 잠시 매드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작전은 이렇게 진행하겠네."
그는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치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각자의 역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시작했다.
"론도 군과 아리 양, 두 사람은 유인조를 맡아주게. 수집조가 보석을 모으는 동안 괴물을 붙잡아 두고, 마지막에는 저 괴물을 니할 사막까지 유인하는 것이 자네들의 임무일세."
"만약 위험해지면 마력석을 일정량씩 떨어뜨리며 시간을 벌게. 하지만 최악의 경우 모든 마력석을 놈에게 넘겨주는 한이 있더라도 자네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나."
"알겠습니다!"
아리와 론도가 힘차게 대답했다.
"아론 군, 테스 군, 그리고 올리비아 양. 자네들은 보석 조달을 맡아주게. 최대한 많은 사막의 불꽃을 확보해서 우리가 준비한 장치에 장전해야 하네."
"네! 맡겨만 주세요!"
세 사람은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매드, 자네는 안드로이드를 세 개의 조로 나누어 배치해 주게. 유인조, 수집조,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마을을 지킬 방어조로 말일세."
"알겠네."
매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슈가 양과 남은 사람들은 이곳에 남아 주민들을 보호하고 대피를 돕게."
모두의 시선이 카슨에게 집중되었다.
"질문 있는가?"
그의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A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저... 카슨 학회장님, 저도 유인조로 가고 싶습니다."
A의 말에 카슨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단호했지만, 동시에 깊은 이해를 담고 있었다.
"자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지금 자네의 몸 상태로는 유인조를 맡길 수 없네."
카슨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책임을 지는 것이 꼭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네. 자네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게나."
A는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저는...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제가 직접..."
"그만."
카슨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자네를 벼랑 끝으로 몰지 말게나. 무엇보다 자네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카슨의 말에 A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카슨은 잠시 그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더니, 모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작전을 시작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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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뉴미스트 학회를 덮쳤던 괴물이 마침내 그곳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물은 처음부터 목표가 정해진 듯, 느리지만 꾸준히 알카드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괴물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건물들이 거대한 굉음을 내뿜었다. 그 소리에 아리와 론도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유인조의 역할은 대부분 내 안드로이드들이 수행할 테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나."
두 사람을 격려하듯, 매드가 가볍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리, 론도. 조심해야 해."
슈가를 포함한 일행들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리와 론도는 마지못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매드의 안드로이드 부대를 선두로 두 사람도 괴물을 유인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유인은 성공적인가?"
마을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통해 상황을 주시하던 카슨이 조용히 물었다.
"괴물이 유인조를 따라 마을을 벗어나고 있어. 문제없이 진행 중일세."
매드가 화면을 보며 답했다.
"수집조의 진행 상황은?"
"보석 채굴이 1시간 내로 완료될 걸세. 그때까지만 버틴다면 계획대로 진행될 거야."
카슨은 화면 속 멀어지는 유인조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부디, 무사하게나..."
.
.
.
.
.
"생각보다 더 여유로운데?"
마을의 건물 위를 뛰어다니며 괴물을 유인하던 론도가 아리에게 말했다.
아리도 뒤를 돌아 괴물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상보다 속도가 훨씬 느려. 이 정도면 굳이 마력석을 던져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두 사람은 혹여나 괴물이 관심을 잃지 않도록 최대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였다.
괴물은 느린 속도로 기어오며 장애물에 걸려 자주 멈춰섰고, 덕분에 두 사람은 무리 없이 유인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돼. 놈이 갑자기 속도를 높일 수도 있으니까."
아리의 경고에 론도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주변을 살폈다.
"알겠어. 지금처럼 거리를 유지하면서 유도하면 될 거야."
계속해서 괴물을 유인하던 두 사람은 어느 폐허 앞에 멈춰섰다. 론도는 무너져내린 건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리, 여기... 제뉴미스트 학회 맞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웅장한 크기의 건물과 그 곳을 빛춰주던 부유석이 있던 곳이 이제는 그저 잔해만 남아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착잡함을 느끼며 론도는 무너진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상에 젖을 시간 없어. 이 작전이 실패하면 이 마을 전체가 이렇게 될 거야."
아리의 단호한 말에 론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사람은 다시 괴물을 유인하며 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으아아악—!!"
건물 사이의 간격을 잘못 계산한 론도가 점프 거리가 부족했던 탓에 반대편 건물 난간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매달렸다. 아리는 곧바로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아당겨 그를 건물 위로 끌어올렸다.
"헉, 헉... 뭐야... 원래 간격이 이렇게 넓었던가?"
아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다시 건물 위로 올라온 론도는 헛웃음을 지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제길... 이러니 간격이 달랐지..."
그의 발밑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건물들이 괴물이 지나가면서 속속들이 붕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마을 동쪽에 있는 알카드노에 최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기 위해, 서쪽의 제뉴미스트 학회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돌고 있었다.
처음엔 괴물이 제뉴미스트 학회만 노렸기에 비교적 피해가 적었지만,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 그들이 계속해서 서쪽에서만 괴물을 유인한 탓에, 서쪽 일대에는 점점 넓은 평야가 나타나고 있었다.
더욱이—
"론도! 조심해!"
"으아아악—!!"
진로를 방해하는 건물들이 사라지면서 괴물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처음 예상했던 것과 달리 괴물의 움직임이 가속되면서, 괴물에게 던져주는 마력석의 양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퍼버버벙-!
괴물의 진군을 막기위해 아리가 마력석을 던지는동안, 옆에서는 안드로이드 부대들이 총알을 퍼붓거나 마법공격을 펼치며 괴물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가까스레 괴물에게서 벗어난 론도가 아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헉, 헉.. 야, 아리.. 우리 마력석 얼마나 남았냐..?"
론도의 물음에 아리가 가지고 있는 보따리를 펼쳐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삼분의 일 정도"
"제길.. 우리가 도망친 지 얼마나 됐지?"
"30분, 그마저도 저 괴물이 본격적으로 움직인지는 10분 정도 밖에 안됐을거야."
"미치겠네, 더 이상 도망칠 공간도 없는데.."
론도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서쪽 일대는 거의 폐허가 되어 더 이상 높은 건물을 활용한 이동이 불가능했다.
"이대로라면 놈을 사막까지 유인하기도 전에 마력석이 먼저 바닥나겠어."
론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아리도 마력석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속도대로면 남은 마력석으로는 10분을 버티기도 힘들어."
"젠장..."
론도는 주먹을 꽉 쥐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퍼버버벙—!
뒤에서 안드로이드 부대가 총격과 마법 공격을 퍼부으며 괴물의 진군을 늦추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보였다.
괴물은 공격을 맞으면서도 점점 속도를 높이고 있었고, 남은 건물마저 붕괴시키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곧 따라잡혀."
아리가 냉정하게 현실을 짚었다.
"방법이 필요해..."
론도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때, 무너진 건물 너머로 넓게 펼쳐진 사막이 눈에 들어왔다.
론도는 눈을 빛내며 아리를 향해 외쳤다.
"아리, 사막으로 바로 뛰어들자!"
"뭐? 지금? 아직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이 근처엔 더 이상 장애물도 없어! 어차피 시간이 문제라면, 지금 당장 놈을 사막으로 끌고 가는 게 최선이야!"
론도의 결단에 아리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금 당장 이동하자!"
두 사람은 남은 마력석을 움켜쥐고 있는 힘껏 사막을 향해 달렸다.
괴물도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하자 더욱 거친 움직임으로 뒤쫓기 시작했다.
그들은 괴물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마력석을 조금씩 뿌려대며, 놈이 그것을 흡수하는 동안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계속해서 괴물을 사막으로 유인했다.
아리와 론도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어떻게든 사막까지 도착하기 위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이며 달려갔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들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숨은 거칠어졌고 다리는 점점 힘을 잃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결국, 발밑에 있던 잔해를 미처 보지 못한 아리가 그만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우앗-!"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진 아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과 다리는 후들거렸고, 이대로 일어선다 해도 사막까지는 아직 한참 남은 상황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조금 전까지의 다급함은 사라지고, 짧은 휴식에서 오는 달콤함이 그녀를 감쌌다. 멀리서 들려오는 괴물의 굉음조차도 마치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몸을 감싸는 피로감이 점차 정신까지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야, 아리! 정신 차려!"
론도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강한 손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으읏..."
희미한 시야 속에서 론도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그녀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일어나! 지금 멈추면 끝이야!"
론도는 있는 힘껏 아리를 끌어올렸다.
아리는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이를 악물었다.
"하아... 하아... 괜찮아... 나 아직 할 수 있어."
손을 꽉 쥐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거대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쿵—!
뒤를 돌아보니 괴물이 아리와 론도가 멈춰선 틈을 놓치지 않고 급격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젠장, 너무 가까워졌어!"
론도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사막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직 도달하려면 더 달려야 했다.
"이대로는 따라잡힐 거야. 방법이 필요해!"
론도는 주머니를 뒤져 남아있는 마력석을 확인했다. 단 한 개.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아리의 품에서 마력석을 빼앗아들고 외쳤다.
"아리, 내가 놈을 잠시 멈춰볼 테니까 넌 먼저 가!"
"뭐?! 무슨 소리야, 같이 가야지!"
"이러다간 둘 다 잡힌다고! 내가 시간을 벌 테니까 넌 전력으로 뛰어!"
론도는 남은 마력석 중 일부를 높이 던지며 괴물의 시선을 끌었다.
"자, 이거나 먹어라!"
마력석이 공중에서 반짝이며 괴물의 관심을 끌었다.
괴물은 즉시 그 방향으로 움직였고, 론도는 그 틈을 타 반대편으로 몸을 던졌다.
'됐어..! 이러면 놈은 이제 나를 쫓아올…'
그렇게 생각하며 론도가 뒤돌아본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뭐야... 저 자식, 어디 가는 거야?"
조금 전, 자신이 던진 마력석을 모조리 집어삼킨 괴물은 분명 자신을 쫓아와야 했다.
그런데—
"야, 이 자식아! 어디 가는 거냐고!"
괴물은 론도가 쥐고 있는 마력석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론도는 괴물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절망하듯 중얼거렸다.
"저긴... 알카드노가 있는 방향이잖아... 마력석은 전부 우리한테 있을 텐데..."
"아마 저곳에 남아 있는 안드로이드들의 마력석이 우리가 가진 것보다 강한 신호를 내고 있는 거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리가 론도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미안... 내가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자책하는 아리에게 론도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론도를 아리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론도가 살짝 뒤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
"......응."
"네 말이 맞아."
론도의 말에 아리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다시 힘을 내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