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리, 아론, 테스는 알카드노의 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환하게 웃는 줄리엣이었다.
"안녕하세요! 오셨군요."
줄리엣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자, 일행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줄리엣 씨."
줄리엣은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하며 환대했다. 그녀의 옆을 따라가던 아리는 문득 줄리엣을 힐끔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줄리엣 씨,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안색이…"
아리의 질문에 줄리엣은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A 씨를 도와서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최근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요."
"아… 그렇군요."
아리가 당황한 듯 말을 머뭇거리자, 줄리엣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여러분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요."
줄리엣의 밝은 미소에 아리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럼 혹시 진전이 있나요?"
아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줄리엣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주눅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너무 오래된 자료라 복구조차 쉽지 않네요…"
"역시 그런가요…"
줄리엣의 대답에 일행의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잠시 후, 줄리엣은 그들을 휴게실로 보이는 방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그럼 저는 A 씨를 모셔올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자, 줄리엣은 방을 나서며 어딘가로 이동했다.
잠시 후,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일행은 줄리엣과 A를 맞이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들어온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길고 헝클어진 흑발, 오랫동안 입은 듯 낡은 회색 로브를 걸친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로 일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누구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낯선 남자가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묻자, 아론이 나서서 정중히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모험가 길드에서 온 모험가들입니다. 이곳엔 줄리엣 씨와 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모험가라는 아론의 대답에, 남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호오, 모험가라…"
그는 잠시 일행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혹시 내 연구에 협조해 줄 수 있겠나? 사례는 섭섭하지 않게 해주지."
남자의 질문에 아론이 물었다.
"연구요? 어떤 연구인데요?"
"의약품에 관한 연구야. 내 연구 분야는 질병과 약에 대한 연구거든."
"그.. 도움이라는게 혹시..?"
남자의 대답을 들은 테스가 조심스럽게 묻자, 남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임상시험이야. 하지만 걱정마, 충분히 검증된 약들이니까."
임상시험이라는 남자의 대답에, 일행들이 그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남자가 당황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해, 해독제도 있다고! 그리고 딱 한번만 도와주면 너희들이 원하는건 뭐든 도와줄게, 응?"
"하지만 실험체가 되는 건 역시…"
아리와 테스가 망설이며 머뭇거렸다. 그 순간, 아론이 그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남자 앞에 섰다.
"제가 할게요."
뜻밖의 대답에 파티원들은 물론 남자까지 당황한 표정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야, 아론! 제정신이야? 스스로 실험체가 되겠다고?"
테스가 경악하며 그를 말리려 했지만, 아론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 저주나 상태 이상에는 자신 있어. 그리고 이거 하나 해주면 뭐든 협조해준다잖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아론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얼른 가죠."
"어, 어? 응, 그래… 가자고."
남자는 아론의 당돌한 태도에 약간 당황한 듯 했지만, 곧 그를 이끌고 자신의 연구실로 데리고 갔다.
연구실 문을 열자, 안에는 각종 약품과 실험 장치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남자는 아론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자, 여기 앉아."
아론이 의자에 앉자마자 남자는 그의 몸에 심박 체크 장치, 링겔 등 여러 장치들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아리와 테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들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일부러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단순히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장치야. 이상이 생기면 즉시 의료장치가 가동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나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을 뒤로하고, 남자는 준비를 마쳤다.
"자, 조금 있으면 약물이 천천히 투여될 거야. 몸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말해야 해. 알겠지?"
남자가 주의를 주자, 아론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을 확인한 남자는 장치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링겔을 통해 약물이 천천히 아론의 몸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남자는 컴퓨터 화면과 아론의 상태를 번갈아가며 면밀히 체크했다.
"아론, 괜찮아?"
아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묻자, 아론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아직 별 문제 없어."
그 반응에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흠… 예상보다 훨씬 거부반응이 적군. 평소에도 상태 이상 같은 걸 자주 겪었던 거야?"
그의 질문에 일행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머쓱한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분 후, 충분한 데이터를 얻은 듯 남자는 아론의 몸에 부착된 장치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일단 링겔은 조금 더 꽂고 있어. 이건 비타민이랑 약이니까 나중에 꼭 챙겨 먹어."
그는 작은 약봉지를 아론에게 건넸다.
아론은 약을 받아들자마자 곧장 입안에 털어넣고 물 없이 삼킨 뒤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약속대로 저희를 도와주세요."
그 말에 남자는 살짝 놀란 듯 물었다.
"어? 이렇게 바로? 나야 상관없지만, 뭐가 그렇게 급한 거야?"
"시간이 없어서요. 그래서 그런데, 10년 전 사건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예를 들면, 그때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던가요."
"10년 전 사건이라…"
남자는 턱에 손을 대고 잠시 고민하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 끄응..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좋아, 내가 알고있는 거라도 괜찮다면, 말해주도록 하지."
그는 주위를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대신 이건 협회장님께는 비밀이다. 만약 들키면 내 연구비가 끊길 거거든."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하자,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이상한 점이라… 그러고 보니, 그 사건 이후로 사라진 연금술사가 한 명 있었어."
"사라졌다고요? 설마 돌아가셨다는 건가요?"
테스가 조심스럽게 묻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녀석은 그 뒤로도 꾸준히 우리에게 약을 보내고 있으니까."
"약이요?"
아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키니가 먹는 약 있지? 그 약을 그 사람이 보내고 있어."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길래 약을 보내는건데요?"
아론이 묻자,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당시 생명 연금술의 권위자이자 키니의 아버지, 드랭 박사야."
"드랭 박사…?"
아론이 중얼거리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드랭 박사는 생명 연금술의 최고 권위자였어. 그의 연구는 생명을 유지하고 치유하는 데 있어 혁신적이었지. 하지만 10년 전 사건 이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런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고, 심지어는 약까지 보내고 있다는 건가요?"
아리가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누가 우리에게 약을 보내겠어."
그의 말에, 테스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누군가가 그 사람을 흉내 내서 약을 보냈을 가능성은요?"
"그럴 리 없어. 그 약은 오직 키니만을 위해 만들어진 약이야. 시중에 풀린 적도 없고, 남아 있는 자료도 없어서 복제는 불가능해."
남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아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드랭 박사님은 왜 나타나지 않으시는 걸까요?"
남자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댄체 잠시 고민하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쩌면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서일지도…"
"어떤 연구였는데요?"
테스가 묻자,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 더 나아가서 영생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였어."
"영생이라니요? 그게 가능해요?"
일행의 질문에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가능할 리 없지. 인간의 몸은 기계 장치에 담긴 코어 에너지를 견딜 수 없어. 아마 영생을 시도하기도 전에 몸이 붕괴해 버릴 거야."
그의 대답을 들은 아리가 여전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그런 위험한 연구를 계속하셨던 거죠?"
남자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녀석의 아내 때문일 거야. 필리아 씨라는 분이지."
"필리아 씨요? 그분이 왜요?"
아론이 되묻자, 남자는 천천히 대답했다.
"필리아 씨는 엘프야. 엘프는 우리 인간보다 훨씬 긴 수명을 가지고 있지. 드랭은 아마 자신이 죽은 뒤에 혼자 남겨질 그녀가 걱정되어 연구를 계속했을거야."
남자의 말에 일행은 잠시 침묵했다. 드랭 박사의 연구 동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안타까운 감정이 일었다.
"그래서… 그 연구를 완성하려고 숨어버렸다는 건가요?"
테스가 입을 떼며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는 누구보다 집요하게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남자가 말을 마치자, 일행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 그러니까…"
일행이 머뭇거리자,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러셀론. 내 이름이야."
"아, 감사합니다, 러셀론 씨!"
아리가 정중히 인사했다.
"뭘, 나야말로 덕분에 좋은 자료를 얻었으니. 혹시 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오라고."
일행은 러셀론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줄리엣과 A가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돌아오자, 줄리엣과 A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걱정했어요. 어디 가셨던 거예요?"
줄리엣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리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러셀론 씨께서 잠시 부탁을 하셔서… 죄송해요."
"그런가요. 어쨌든 무사하시니 다행이에요."
줄리엣은 안도하며 밝게 웃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일행들에게 말했다.
"아! 그보다 A 씨께서 자료를 하나 복구하셨는데, 한 번 보시겠어요?"
"정말인가요?!"
일행이 놀라운 표정으로 줄리엣에게 다가가자, A는 노트북을 들고 와 그들에게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건 10년 전 마을에 설치되었던 감시 카메라 영상 중 일부입니다."
A는 노트북을 켜고 영상을 재생했다. 화면에는 마을 중앙 광장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이 비쳤다.
"이건… 마을 광장인가요?"
아론이 물었고, A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카드노 내부의 영상은 복구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마을 쪽 카메라의 데이터는 살릴 수 있었습니다."
영상은 평온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주더니, 곧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직후,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마지막으로 카메라가 어디론가 튕겨 날아가면서 영상이 끝났다.
일행은 모두 굳은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다가, 아리가 A를 돌아보며 물었다.
"폭발은 알카드노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광장이 폭발의 중심지인 거죠?"
A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희도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알카드노에서 시작된 연쇄 폭발이 원인인 줄 알았는데, 정작 광장이 폭발의 중심지라니…"
"광장 아래에는 무엇이 있죠?"
아론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A는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하수도와 전선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었다면 폭발의 원인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A의 말에 일행은 눈빛을 교환하며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면 광장 아래를 조사해 보면…"
아론이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밖에서 매드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리엣? 이곳에 있는 거냐?"
매드의 목소리에 일행은 급히 노트북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줄리엣은 당황한 표정으로 매드를 맞으러 나가려 했지만, 매드는 이미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매드는 방 안의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물었다.
"A랑 모험가 친구들까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매드의 물음에 테스는 허둥지둥하며 대답했다.
"그, 그러니까… A 씨에게 안드로이드의 약점 같은 걸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길드에 보고할 자료가 필요해서요, 하하."
매드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런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줄리엣이 서둘러 매드의 휠체어를 밀며 말했다.
"할아버지! 산책 나가실 시간이잖아요. 어서 가요!"
그녀는 매드의 휠체어를 밀며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나가기 전, 줄리엣이 일행을 향해 간단히 인사했다.
"여러분, 다음에 또 뵐게요!"
매드와 줄리엣이 방을 떠나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A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광장 아래에 뭔가 있는지 직접 조사해 봐야겠죠?"
아론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A는 고개를 저으며 신중하게 답했다.
"알려진 지하 통로같은건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조사를 진행하려면 광장 위에서부터 파 내려가는 방법뿐이지만, 그럴 경우 선생님께 들키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테스가 팔짱을 끼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럼 결국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거잖아…"
A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부분은 제가 조사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무리하지 않고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A 씨에게 맡기고, 우리는 혹시 드랭 박사와 관련된 단서를 더 찾을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네요."
일행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광장 아래의 비밀과 드랭 박사의 행방, 그 모든 퍼즐 조각들이 서서히 한데 모이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