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이라도 여행길에 오를 것처럼 약속했던 그들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을의 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요한 또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 후로도 몇 달을 마을에 머물렀다.
그 시간 동안 메르시는 요한의 곁에서 틈틈이 그를 도왔고, 때로는 신도가 되기 위한 교육과 간단한 마법 스킬들을 배워 나갔다. 요한의 지도를 받으며, 메르시는 차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약 1년의 시간이 흐르고, 마을은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 긴 세월 동안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때였다.
"이제 준비는 다 되었니?"
요한의 물음에 메르시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짐이 모두 꾸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마을 어귀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리고 장로님이 대표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제님이 오신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네요. 그동안 마을을 위해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가시는 길마다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요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지난 1년간 정말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감사와 아쉬움이 섞인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은 메르시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메르시, 언제나 건강해야 한다. 그리고 힘들거나 지칠 때는 언제든지 마을로 돌아와도 된단다. 우리는 늘 너를 환영해 줄테니"
메르시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꼭 건강하게 잘 지낼 거예요."
그렇게 짧지만 따뜻한 인사를 나눈 뒤, 요한과 메르시는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마을을 뒤로하고, 그들은 엘리니아에 있는 대륙 이동 정거장을 향해 나아갔다.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이 두 사람의 앞길을 부드럽게 감싸며 지나갔다. 이제 그들의 진짜 여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엘리니아 대륙 이동 정거장 탑승 게이트
"자자, 표를 사세요! 표가 없으신 분은 탑승하지 못하십니다!"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승무원의 큰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메르시는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비행선의 정거장에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다란 나무 위에 자리한 정거장은 상공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요한이 메르시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흐, 확실히 정거장이 꼭대기에 있어서 그런지 바람이 꽤 차갑구나. 기다리는 동안 따뜻한 거라도 마실까?"
메르시는 반가운 듯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저는 핫초코요!"
둘은 정거장 내에 마련된 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카페에는 벌써 비행선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지만, 운 좋게 창가 쪽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요한은 커피를, 메르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초코를 손에 쥐고 의자에 앉았다.
"메르시, 비행선은 처음이지?"
메르시는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신 뒤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사실 마을 밖을 나선 것도 처음이라서 그런지… 모든 게 다 신기해요."
요한은 그녀의 반응이 귀여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지만 벌써부터 신기해하면 안 돼. 오르비스는 훨씬 더 크고 대단한 곳이거든. 네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이 가득할 거야."
그의 말에 메르시는 더욱 기대에 차올라 눈을 반짝였다.
"오르비스… 어떤 곳일까요? 꼭 보고 싶어요."
요한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오르비스는 여신교의 중앙 교회가 있는 곳이야. 그래서 일단 그곳에서 너를 정식으로 여신교의 신도로 임명할 생각이란다."
메르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뿐만 아니라, 오르비스는 메이플 월드의 모든 대륙과 이어진 교두보 같은 곳이거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편리하지.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여행의 시작점이라고 보면 돼."
"여행의 시작점…" 메르시는 마음속으로 그 단어를 되뇌었다.
이제 정말로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지만, 요한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잠시 후,
뿌우-
경쾌한 경적 소리와 함께 비행선이 도착하자, 두 사람은 서둘러 짐을 챙겼다.
"서둘러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출발 1분 전에는 표를 받지 않습니다!"
표를 내밀고 비행선에 탑승하자, 안에는 이미 다양한 복장의 모험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로 비행선 안은 흡사 시장 한복판 같았다.
"이봐 친구 어디까지 가? "
"그 장비는 좀 낡았는데 금방 교체해야겠네."
"내가 말야 이따만한 버섯을 봤는데 말이야"
메르시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요한은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곧 한 무리의 모험가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사제님이신 것 같은데, 혹시 파티는 있으신가요?"
그들의 모습은 전사, 궁수, 도적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파티였다.
비행선 안 유일한 사제였던 요한은 금세 스카우트를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아이를 돌봐야 해서 파티를 맺기는 힘들겠군요."
요한의 정중한 거절에도 모험가들은 웃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런.. 아쉽군요, 그럼 즐거운 여행 되세요!"
"모험가님들도 안전한 여정 되시길."
그렇게 그들은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 자자, 손님들 곧 오르비스행 비행선이 출발할 예정입니다. 위험하니 자리에 앉아서 대기해주세요 "
승무원이 마지막 손님을 받고 문을 닫은 뒤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메르시와 요한 또한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 즐거운 얘기를 나누며 여행을 준비하였다.
출발 30분 후
비행선이 출발한 지 30분쯤 지나자, 요한은 옆자리에 반쯤 쓰러진 메르시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멀미가 그렇게 심할 줄은 몰랐는데…"
메르시는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 괜찮아요. 이 정도쯤이야… 윽."
요한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바람이라도 좀 쐬자꾸나."
메르시를 부축해 비행선 하층에 마련된 테라스로 나가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휘감았다.
"어때, 좀 낫지?"
메르시는 헬쓱한 얼굴로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금 나아졌어요."
두 사람은 함께 담요를 덮고 바깥바람을 맞이하였다.
그때였다.
휙!
갑작스러운 돌풍이 불며 덮고 있던 담요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다.
요한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광경이었다.
어둠 속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는 존재—날카로운 뿔이 솟은 투구, 붉게 이글거리는 눈동자, 짐승과 악마를 합쳐놓은 듯한 흉측한 형체.
"…크림슨 발록."
요한의 얼굴이 굳었다. 그곳에 있을 리 없는 대형 몬스터의 출현에 그의 머릿속은 일순간 멈췄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메르시를 끌어안고 비행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으로 들어선 비행선은 이미 크림슨 발록의 출현으로 인한 모험가들의 패닉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이런 젠장! 어째서 빅토리아 아일랜드 근처에 저런 몬스터가 있는거야! "
" 어떡해! 이러다 우리 다 죽는거 아니야? "
" 웃기는 소리 하지마! 다 같이 싸우면 될거 아니야?! 고작 몬스터 한 마리라고! "
" 그 몬스터가 크림슨 발록이잖아! 어떻게 싸우란거야! "
모험가들의 절망과 분노가 뒤섞이며 상황은 점점 통제 불능으로 치닫고 있었다. 요한은 그런 혼란을 뒤로하고 떨고 있는 메르시를 꼭 안아주었다.
" 걱정말거라 메르시, 아저씨가 꼭 지켜줄테니까 "
요한은 메르시를 꼭 끌어안아주었고 이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손목에 떨고있는 작은 손이 느껴졌다.
" 가지마요... "
메르시였다. 그녀는 떨고있는 채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놓지않았다.
" 메르시.. "
"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아저씨가 가지 않으면 이 비행선은 추락하고 말거야 "
요한은 애써 그녀를 달래주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 그러다 아저씨도 우리 엄마 아빠처럼 죽으면요? "
" 또 저만 두고 가지마요, 네? 또 저 혼자 남게 하지말라구요!"
메르시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절규하듯 그에게 소리쳤다.
그 말에 요한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걱정마렴 메르시, 이곳에는 많은 모험가 언니 오빠들이 계시고 아저씨 또한 약한 사람이 아니니까."
" 그런 소리가 아니..! "
그렇게 소리칠려는 메르시의 말을 끊으며 요한은 말했다.
" 무엇보다 이건 메르시 너를 지키기 위한 일이란다. "
알고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는것쯤은 얼마든지 알고있다. 자신의 부모님 또한 그러셨으니까.
" 다녀오마 "
" 아저씨..! "
그렇게 메르시의 곁을 떠난 요한은 한 쪽에 모여있는 모험가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 싸웁시다. "
갑작스런 사제의 등장에 사람들은 그에게 이목을 집중하였다.
" 어차피 여기서 버텨봤자 죽을텐데 차라리 나가서 싸우는게 나을겁니다. "
틀린말은 아니지만 패닉에 빠진 모험가들을 움직이기에는 무리였다.
" 하.. 하지만 상대는 크림슨 발록이라고요! 우리가 싸운들 이길수나 있겠어요? "
한 모험가가 겁에 빠져 그에게 소리쳤다.
" 못이깁니다. "
그런 그의 단호한 말에 사람들은 모두 말을 멈추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살 방법이 없는것은 아니죠, 자 승무원씨? "
그렇게 말하는 그는 승무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네, 네? "
당황한 승무원에게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 오르비스에 구조요청을 보내세요, 출항한지 시간이 꽤 됐으니 금방 도착할 수 있을겁니다. "
그의 말대로였다. 비행선이 오르비스에 도착하기까지는 대략 30분이 남은 상황이었고 오르비스에서 구조대가 출발하여 중간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앞으로 10~20분 정도면 구조대가 합류할 수 있을것이였다.
그리고 그 뜻은
" 10분, 길면 20분만 버티면 됩니다. 굳이 발록을 처치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여러 상급 모험가들도 계시니 충분히 버틸 수 있을겁니다. "
모험가들은 그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 다른 의견이 없다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
" 그럼 작전을 지시할테니 각 직업별로 모여주십시오. "
그의 말에 따라 모험가들은 각자의 직업에 따라 대열을 정비하였다.
작전은 간단했다. 마법사의 방어 마법으로 버티고, 나머지 직업들은 적의 접근을 막거나 견제하는 데 집중하는 방식이었다.
"마법사들은 마법 공격을 방어하고, 전사들은 근접 공격을 맡아 주세요. 궁수들은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도적들은 부상자를 신속히 구조해 주세요."
엉성한 작전이었지만 시간이 없었기에, 모험가들은 각자의 역할을 빠르게 숙지하고 비행선 갑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그들을 바라보는 크림슨 발록이 있었다.
크림슨 발록은 전방에 있던 모험가들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전사분들, 가드하세요!"
요한의 외침에 전사들이 몸을 던지며 가드를 시도했지만, 대부분이 나가 떨어졌다. 다행히 마법사들의 보조와 전사들의 가드 덕분에 그 공격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공격에 전열이 붕괴되었고, 이어지는 크림슨 발록의 마법 공격을 막을 인원이 없었다.
"매직 가드!"
그 순간, 요한이 나서서 매직 가드를 시전했다. 발록의 강력한 마법을 정면에서 맞받아친 그는, 그 충격에 휘청이며 큰 피해를 입었다.
"크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그에게 벌어준 시간 덕분에 모험가들은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에로우 봄!"
"콜드 빔!"
"포이즌 브레스!"
모험가들은 상태 이상에 집중한 스킬들로 크림슨 발록을 공격했다. 그들의 목표는 발록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크림슨 발록은 이를 막기 위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요한은 잠시 힐을 사용하여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크윽... 이 버러지들이..."
크림슨 발록은 반격을 받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전투를 이어갔다.
"그럼 어디, 이것도 막아보거라!"
그리고 크림슨 발록은 하늘로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메테오!"
그의 외침과 함께 붉은 마법진이 하늘에 펼쳐지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운석들이 떨어져 나왔다.
"크하하핫! 어디, 이것도 견딜 수 있으면 견뎌 보거라!"
그의 외침에 비행선 위의 모험가들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아아..."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요한이 다시 걸어나왔다.
"후… 아까는 기습에 당했지만, 두 번이나 망신을 당할 순 없죠."
요한은 고개를 쳐들고, 한 손을 들어 마법을 준비했다.
"홀리 매직 쉘!"
그의 주문과 함께 거대한 마법진이 그의 주위를 감싸며 나타났다.
콰앙-! 펑-!
크림슨 발록의 거대한 메테오가 요한이 펼친 마법진에 닿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모든 파괴적인 힘이 마법진에 흡수되어 사라진 것이다.
"어... 어떻게 한낱 사제 따위가 내 마법을 막을 수 있지?"
발록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 그 거대한 몸이 움찔하는 모습은 이 악마조차도 놀라움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발록은 곧 요한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이질감을 눈치챘다.
"그런가... 네 놈, 사제(클레릭)가 아니었군. 설마 이곳에 추기경(비숍)이 있었을 줄이야..."
"추기경."
그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근처에 있던 모험가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여신교의 핵심 인물. 메이플 월드에서 단 300명만 존재하는 자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요한이 바로 그 중 하나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요한은 담담하게 발록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정체를 알았으니, 그냥 물러나시는 게 어떻습니까? 솔직히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처치할 자신은 없지만..."
그는 말을 잠시 끊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곧 오르비스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 무사하지 못할 쪽은 당신일 테니까요."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100레벨의 보스 몬스터라 하더라도, 성속성에 취약한 크림슨 발록에게 지금 이곳에 있는 모험가들은 위협적이었다. 무엇보다 요한이 사용하는 성속성의 방어 마법은 그의 힘으로 쉽게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발록은 그 말을 듣고 쉽게 물러날 존재가 아니었다.
강력한 악마인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요한의 말에 내면 깊숙한 분노가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요한 또한 발록이 이대로 물러날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뭐, 위대하신 보스 몬스터께서 이렇게 도망치시는 것도... 퍽 우습긴 하겠군요."
요한의 말에 발록의 눈이 번쩍였다.
"그 건방진 입을 찢어주마!"
발록이 요란한 포효와 함께 요한에게 매섭게 돌진했다.
그러나 그의 발톱이 요한의 방어막에 부딪히는 순간,
채잉—!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록의 맹렬한 공격은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모험가들이 협공을 시작했다.
"크윽!"
수많은 공격이 연달아 몰아치며 발록의 거대한 몸을 밀어냈다.
모험가들이 무수히 날리는 마법과 화살은 그의 체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모험가들의 눈에 희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악마가 후퇴하는 모습에,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하지만, 오직 요한만은 달랐다.
'큰일이군...'
요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모험가들과 달리 그는 크림슨 발록의 태도 변화에서 미묘한 이상함을 감지했다.
발록은 더 이상 무턱대고 덤벼들지 않았다.
그는 냉철한 눈빛으로 전장을 훑고 있었다. 모험가들을 단순한 사냥감이 아닌, 진정한 적수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하, 발록도 별거 아닌걸?"
"그러게요! 이 정도면 충분히 이길 수 있겠어요!"
들뜬 모험가들의 말이 전장을 메웠다.
그러나 요한은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계획이 어긋나고 있다...'
요한의 계획은 간단했다.
적의 관심을 모두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
그의 직업, 비숍은 방어에 특화되어 있었고, 성속성 마법을 다루는 그는 발록과의 상성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지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이었다.
비행선의 후미와 아래층에 피신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방어막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모험가들까지.
그들 모두를 지킬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미끼로 삼아 도발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발록이 이렇게 신중하게 전장을 지켜보는 것은 그의 계획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요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가다간...'
그는 이미 다음 계획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록의 태도 변화는, 전투의 흐름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메테오!"
발록은 다시 자신의 궁극 마법을 펼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아까보다 위력은 약하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아!’
요한은 하늘에 펼쳐진 마법진을 보며 당황했다. 이전 메테오보다 공격 하나하나의 위력은 약했지만, 문제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홀리 매직 쉘!"
요한은 다시 한 번 비행선 전체를 감싸는 보호막을 펼쳤다. 하지만 이번 메테오는 배 전역에 걸쳐 골고루 피해를 입혔고, 보호막이 얇게 펼쳐진 곳에서는 충격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콰콰아아앙—!
배의 좌현이 순식간에 파괴되었고, 그 충격으로 모험가들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진형이 무너진 순간을 노련한 발록은 놓치지 않았다. 발록은 순식간에 배의 우현으로 날아가, 거대한 이빨과 발톱으로 우현 날개마저 파괴해버렸다.
"으아아악!"
양쪽 날개를 잃은 비행선은 급격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마나 웨이브!"
요한은 재빨리 마법진을 만들어 비행선이 추락하지 않도록 받쳐주었다.
비행선은 간신히 동력을 되찾아 날아오르기 시작했지만, 선실에서 달려온 승무원의 얼굴은 창백했다.
"비상 마법 동력으로 동력을 회복했지만, 한 번만 더 이런 공격을 받으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요!"
요한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방어를 유지하면, 자신과 함께 싸우는 모험가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배 후미나 선실에 피신한 승객들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자신의 소중한 아이도 있었다.
반대로 공격으로 전환하면, 모험가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했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뿐이지.’
요한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잠시만요, 사제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모험가들이 말리려 했지만, 요한은 그들을 지나쳐 발록에게 달려갔다. 요한의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바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
"제네시스!"
그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서 신성한 빛의 기둥이 내려와 발록을 강타했다.
"크윽!"
발록은 괴로워하며 배 밖으로 튕겨 나갔다. 원래라면 요한은 여기서 전열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텔레포트."
요한은 순간이동으로 발록에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이어진 맹렬한 공격.
"엔젤레이!"
발록의 눈앞에 성스러운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그곳에서 빛의 화살이 쏟아져 나와 발록을 직격했다.
"허억..."
발록은 연속된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요한은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이다! 빅뱅!"
요한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신성한 폭발이 일어났다. 강력한 빛과 폭발에 휩싸인 발록은 중심을 잃고 아래로 추락했다. 요한 또한 지나치게 힘을 소모한 나머지 추락했지만, 모험가들이 합심하여 그를 간신히 받아냈다.
"헉... 헉... 발록은...? 어떻게 되었나요...?"
요한은 힘겹게 물었다.
"지상으로 떨어졌어요! 다 사제님 덕분이에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험가들은 모두 요한을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요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힘겹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순간.
"어... 어째서..."
한 모험가의 절규에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직도 날고 있는 발록이 있었다.
상처 입고, 투구는 산산조각났지만, 여전히 살아남아 공중에 떠 있는 발록의 모습이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크윽!"
요한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마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위대한 모험가여... 네 놈은 내가 지금껏 만난 자들 중 가장 강했다. 이 크림슨 발록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구나."
발록의 목소리는 지쳤지만, 그 안에는 강렬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발록 역시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너희와 함께 끝을 맞이하겠다."
발록은 양팔로 비행선을 꽉 끌어안았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자폭 마법?!"
발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본 모험가들은 경악했다. 요한 역시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자폭 마법은 일반적으로 3~5분 내에 폭발한다. 그 전에 어떻게든 발록을 떼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요한은 이미 방금 전의 연속 공격으로 탈진한 상태였다. 강력한 마법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주문 하나조차 펼치기 어려웠다. 모험가들 역시 지금의 상태로는 큰 타격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요한의 머릿속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발록을 텔레포트로 비행선 밖으로 끌어낼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발록이 다시 날아오르기만 하면 끝이었다. 게다가 텔레포트 몇 번으로 폭발 반경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도 불가능했다. 자신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요한의 시야에 선실로 향하는 열린 문이 들어왔다. 문 안쪽에는 작은 몸이 떨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르시.
요한의 소중한 아이가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무엇을 망설이는 것이냐. 나는...’
요한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자신은 사제다. 그리고 한 아이의 보호자였다.
사제로서,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요한은 결의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향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저씨!"
메르시는 문 밖으로 뛰쳐나오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요한은 뒤돌아** 않았다.
그는 발록에게 다가가 손을 얹고 차분히 주문을 외웠다.
"텔레포트."
순간, 요한과 발록의 모습이 사라졌다.
비행선에서 약 5미터 정도 떨어진 공중에 나타난 그는 다시 주문을 외쳤다.
"텔레포트."
"텔레포트."
"텔레... 크윽!"
이미 바닥난 마력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고통을 견디던 요한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저곳에는 메르시가 있었다.
소중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선 멈춰서는 안 됐다.
"텔레포트!"
요한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메르시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폭발의 위험이 비행선과 멀어질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콰콰아아앙—!
거대한 섬광과 함께 엄청난 폭발이 하늘을 뒤덮었다. 모험가들은 강력한 빛과 바람때문에 잠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잠시 뒤 눈을 뜬 이들 중 한명이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저기! 무언가 떨어지고 있어요!"
한 모험가가 공포와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인간 형상이 서서히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모험가들이 힘을 합쳐 구해낸 것은 다름 아닌 요한이었다.
그의 몸은 온통 화상과 상처투성이였다. 몇몇 신체 부위는 소실된 상태였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최후의 힘으로 방어막을 펼친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한계를 넘어섰기에 그것은 그저 시간벌기에 불과했다.
요한은 마지막 힘을 다해 메르시를 불렀다.
"메르시..."
울고 있는 소녀는 그의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미안하구나... 꼭 돌아오기로 했는데..."
요한은 하나 남은 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지 마요, 아저씨... 나만 두고 가지 마요..."
메르시는 흐느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저씨가 항상 말했잖니... 우린 언제나 이어주고 이어받는 존재라고.
이건 그저 그런 과정일 뿐이란다..."
요한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난 아저씨만 있으면 된다구요!"
메르시는 눈물을 쏟으며 외쳤다.
"제발 일어나요, 아저씨. 언제나 곁에 있어 준다 했잖아요.
착한 아이가 될 테니까... 훌륭한 사제가 될 테니까... 제발 일어나요!"
소녀의 울음소리가 갑판 위를 가득 채웠다.
요한은 희미해져 가는 시야로 메르시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는 따뜻했지만, 그 속엔 깊은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착한 아이구나... 이 아저씨는 약속 하나도 못 지키는 못난 어른인데..."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마지막 힘을 다해 말했다.
"앞으로의 삶에서 너도 분명 믿음을 시험받는 일들이 생길 거야.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너만은 사람들을 믿어주렴.
너만은... 다른 이들의 축복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럴게요... 그렇게 할 테니까... 제발, 일어나요. 아저씨..."
메르시는 흐느낌 속에서도 요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요한은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메르시에게 말을 건넸다.
"잊지 말거라, 메르시... 우린 모두 단풍의 의지를 잇는 모험가들.
이어주고, 이어받는 존재들이다.
비록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겠지만... 너는 나의 이야기를 이어줄 수 있겠니?"
메르시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그럴게요."
요한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메르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고맙구나.. 네 앞의 모든길에 행복이 가득하길.."
그렇게 요한은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
메르시는 하늘을 향해 절규하며 요한의 이름을 불렀다.
그 울음소리는 갑판 위 모든 이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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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발록 습격 사건]
사망자: 1명
경상자: 12명
중상자: 3명
요한은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그의 희생은 많은 이들을 살렸고,
그의 이야기는 한 소녀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이어졌다.
"그 뒤, 오르비스에서 온 구조대가 도착했어요. 그리고 요한 아저씨의 지인이었던 사제님께서 저를 여신교로 안내해 주셨죠."
메르시는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아까 그 옷도 여신교에 입단하면서 받은 거예요. 사제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요한 아저씨가 저를 위해 선물로 준비한 거라고요. 결국, 아저씨가 아닌 다른 분께 받게 되었지만요."
"그랬군요..."
"많이... 많이 힘들었겠어요."
아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위로하자, 메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힘들었어요.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죠. 아저씨가 원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아무리 힘들고 슬퍼도, 아저씨를 생각하며 노력했어요."
아리는 메르시의 말에서 느껴지는 의지와 결단력에 감탄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겨우 10대 후반에 불과한 그녀가 클레릭을 넘어 프리스트의 위치까지 올랐다는 건, 재능과 함께 엄청난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너무 무겁진 않았나요?"
아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성숙해 보여도 메르시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다.
그 어린 나이에 이런 현실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결국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어요."
아리의 말에 메르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손을 꽉 쥐며, 잠시 망설이다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저에게 멈출 자격이 있을까요?"
"저를 위해 희생한 분이 세 분이나 계신데... 어떻게 제가 멈출 수 있겠어요..!
그분들이 저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저 또한 그들의 희생이 가치 있는 일이었다는 걸 증명해야 해요!"
메르시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아리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부모도 친척도 없다고 놀림받을 때에도...
행여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로 주임 사제님께 들킬까 봐 언제나 구석에서 혼자 울음을 참았어요."
메르시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고작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은 이보다 더 힘들었을 테니까... 꾹 참고 견뎠어요."
그녀의 말은 슬픔과 결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리는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자신을 다잡으며 버텨온 과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과연 당신이 그렇게 힘들게 살기를 바랄까요?"
아리는 메르시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닐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는 아리에게 메르시는 되몰아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걸 장담할 수 있죠? 당신은 그들을 정말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맞아요, 저는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없어요.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잖아요?"
"그게 뭐죠?"
"당신이 살기를 바랬다는 것, 그리고 행복하기를 바랬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의지였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그들의 의지를 온전히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메르시는 그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살아있지만, 그들이 원한 삶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도 모르죠. 저는 그분들처럼 어른이 아니니까요."
메르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아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죠. 웃기게도, 저도 고아거든요."
메르시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또래의 여자아이와의 공통점이 고작 '고아'라는 것이었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런 특별한 공통점 덕분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언제든지 하소연해요. 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메르시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목욕을 마친 뒤, 그들은 각자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메르시는 창밖에서 비쳐오는 달빛을 불빛 삼아 가방에서 낡은 가죽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의 첫 페이지에는 오래된 단풍잎 한 조각이 붙어 있었다. 이제는 조금 찢어지고 바스락거리는 잎이었지만,
그 붉은빛은 여전히 선명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가고 싶은 길을 걷는다면, 그것이 그들이 원했던 길이라고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