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진은 트롤답게 "교활한" 면모가 있음.
대표적으로 죽은척 하기 스킬로 가로쉬를 몰아내는 쿠데타를 일으킨 판다리아의 시나리오에서 그 면모가 잘 드러남.
군단 확장팩이 열리고, 바리안은 비록 도를 넘게 끔찍한 최후를 맞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무척이나 치밀하고 짜임새 있었음. 시네마틱에서 아들에게 쓰는 편지(=유언), 호드와의 협력, 호드가 제 역할을 다해내지 못해 무너지고 연쇄적으로 얼라이언스의 군세도 무너짐, 생존병력들을 구출하기 위해 단신으로 적진에 남음, 무쌍난무, 적의 조롱 앞에 의연한 모습, 그리고 최후.
하지만 볼진은? 판다때 대체 왜 띄워준건가 싶을 정도로 분량 없음(나 얘 드군때 1 번 봄. 주둔지 3 렙 업글때...)은 둘째치고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후방에 적이 왔는데 대체 왜 측면을 사수하다가 대체 왜 정면에서 찔렸나?"
근데 아래 약빨았음님의 글을 보니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밍기적거리던 헛된 희망이 내 낭심을 살살 어루만지네?
우선 지옥창병의 죽창에 맞은 볼진은 오그리마로 돌아가서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각 종족 수장들과 플레이어, 역병나스 앞에서 유언을 말하고 숨짐.
다른 수장들이 볼진을 들것에 실어 내갈때, 실바나스는 대족장의 자리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음.
여기서 내 행복회로가 풀가동됨. 플레이어와 실바나스는 다소 늦게 대족장방에 들어옴.
근데 이 때 다른 종족들 수장들이 하는 말이 의외로 어색하게 느껴졌음.
타우렌의 바인 : "당장 치료를 해야합니다!" = 여태 치료조차 하지 않았다? ㅅㅂ 사제가 어디 한둘임? 주술사는? 고블린 사제한테 단돈 2 실버만 내면 부활까지 걸어줄텐데?
블러드엘프의 로리마 테론고르 : "키린 토가 다시 블러드엘프를 받아준다 카더라." = 그건 잘 된 일이든 아니든 나중에 뚜껑 까봐야 알겠지만, 지금은 전후 피해상황을 보고하거나 볼진한테 위로라도 해야하지 않겠니?
고블린의 갤리윅스. 겔리웍스였나? : "악마가 설쳐대니 돈 생길 구석이 없다." = 이 새1끼들은 진짜 돈에 미친 싸이코패스지만, 그래도 이건 죽어가는 양반 앞에서 너무 뜬금없는 멘트임.
판다렌의 아이사 남친 : "불타는 군단을 몰아내겠습니다. 약속합니다!" = 이건 사실 가장 평범한 반응인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까 가장 의미심장한 멘트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음. "당신이 없어도 불타는 군단과 싸워 이겨내겠습니다." 라는 의미니까, 이걸 조금만 다르게 보면,
"당신이 죽어도/당신이 잠시 자리를 비워도 우리는 불타는 군단과 싸우겠다." = "어디든 잠시 몰래 다녀와도 된다. 우리가 싸워서 이겨내겠다." 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지 않음?
대부분의 멘트들이 호드의(몇몇은 자기 종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처럼 교묘히 위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또 다르게 보면,
마치 뒷담화까던 대상이 들어오자 화제를 급히 전환하기 위해 어설픈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함. 그냥 생각 나는대로 내뱉는 모양새로 보였음.
그리고 만약 위에 쓴 것처럼, 실바나스와 플레이어가 들어오기 전, 그들끼리만의 다른 "대화"가 있었다고 상상해보면,
볼진은 죽지 않고 자리를 비우기 위해 위장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음.
이미 판다리아때의 전례도 있고 말이지.
볼진의 시신은 화장하지 않았냐고? 그거 실바나스는 볼진 시체 옮기는거 본 적이 없음. 하루 종일 대족장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지. 실바나스를 제외한 "다른" 종족 수장들이 옮긴거고.
만약 이 때 볼진은 실바나스나 다른 호드 구성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멀쩡히 일어나서 제 갈길 가고, 화장된 것은 다른 시체였다면? 부서진 섬 전투에서 죽어나간 트롤이 어디 한둘이겠음? 바꿔치기할 시체는 많았을테고. 그리고 실바나스가 화장할때 쓸 나무를 직접 쌓았겠음? 미리 비밀리에 명령을 받은 아랫것들이 입 싹 다물고 쌓았을 수 있지 않음?
이 상상을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가설이, 바로 스랄이 들고 있던 볼진이라는 유골함. 블리자드에선 중요한 캐릭터의 죽음을 이렇게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희화화한 적이 없음. 정말 볼진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면, 최소한 그걸 조롱하듯 저렇고 있으면 안 됨. 정말 죽은게 맞다면 저런 생각 못 함. 근데 반대로 죽지 않았다면, 유저들에게 볼진이 죽었다고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해(오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저렇게 과장된 강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음.
그럼 이제 남은 문제가 되는게 뭐냐면,
"왜 하필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임시적)대족장 자리를 실바나스에게?" 라는 것이 나올텐데,
이건 지극히 당연히 실바나스에게 주는 것이 맞음.
다른 호드의 수장들 중엔 실바나스를 컨트롤할 수 있는 존재가 없으니까.
호드의 대족장이 불타는 군단과 싸우는 동안, 뒤에서 실바나스가 헛수작부리는 꼴을 원천배제하기 위해 일부러 실바나스에게 대족장 자리를 준거라고 하면 전부 다 말이 됨. 모든 호드의 눈이 전부 실바나스를 향해있는데 지가 뭘 어쩔껀데? 물론, 이 것은 볼진이 실바나스를 과소평가한 경향이 좀 있음.
실바나스는 대족장 자리에 올라서도 포세이큰의 세력확장을 위해 헬리아와 뒷거래하고 에이르를 귀갑묶을 정도로 천방지축이라는걸 볼진은 몰랐겠지.
그래도 어느 정도 볼진의 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 소설 속 실바나스의 심리묘사에 드러나있음.
"난 대족장 자리를 원치 않았다. 저주 받을 볼진과 그의 로아 같으니."
그러면서 소설 속에선 포세이큰은 포세이큰대로, 다른 호드 구성원들은 그들대로 실바나스에게 불만을 가진다는 묘사가 나옴.
결국 볼진이 자신의 죽음을 위장한 동안, 실바나스는 (임시)대족장으로서 호드 내에서의 입지가 더 깎여나가고, 자신에게 절대충성하던 포세이큰들의 불만을 샀으며, 모든 호드의 구성원들에 의해 헛수작 못 부리도록 감시 당하는 결과까지 나타나게 됨.
이제 격아에서 실바나스가 역병호드와 패드립의 선두주자로서 선봉에 서서 작정하고 사고를 치니, 볼진의 "계획"이 격아 스토리 중후반 쯤 그 실체를 드러낼 것 같음.
한줄요약 : 상상에 맞춰 스토리를 재설계하는 행복회로가 불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