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죽은자와 산자
아침은 늘 그렇듯 예고없이 찾아오는 불청객같은 존재였지만 티리스팔 숲에서는 무성한 나무들과 죽은 자들이 뿜어대는 기운 덕분에 그 존재감이 희미했다. 예로부터 이 숲에는 알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고들 했다. 그게 진실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적어도 포세이큰이라는 확실한 어둠의 기운은 존재했다. 어쩌면 먼 훗날 이 죽은자들도 다 사라지기 전에는 이 숲에서 맑은 하늘을 볼 수 없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 꿈틀대는 애벌레에서의 아침은 태양빛 대신 늙은 언데드의 구둣발소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만, 그 전부터 로즈는 깨어있었다. 어느순간 의식을 놓쳤던 것은 기억나는데, 그리 오래되지 않아 다시 정신이 든 듯 했다. 쉬고 싶었다. 이미 죽어버린 몸이 아니라 정신이 안식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의식을 놓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와 노크소리가 이어진 후, 친근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그렉입니다.”
잠을 깊게 이루지 못한 몸이 가까스로 움직였다. 몸은 피곤하지 않았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몽롱한 느낌이 들었다. 지쳐버린 의식이 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으으응, 네 일어났어요 그렉, 깨워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곧 나으리께서 데리러 오실껍니다. 옷은 바구니에 다시 넣어두었습니다. 식사가 준비 되었으니 내려오시지요.”
“네, 금방 내려갈께요. 잠시만요.”
발소리가 아래쪽으로 사라지고, 로즈는 빼꼼히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가 입고있던 옷, 사실 거의 누더기에 가까웠던 옷이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세탁이라기보다는 옷을 원래 헤어지기 전 상태로 복구시킨 듯 했다. 낡아보이던 모양새는 사라지고 깔끔하게 정돈된 거의 새 옷이 되어 있었다. 그렉이 무슨 마법이라도 쓴건가 싶었지만 일단 깨끗해진 새 옷을 보니 로즈는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옷을 입은 로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안녕 그렉,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입니다. 로즈 아가씨. 잘 쉬셨는지요?"
"음.. 사실 그렇게 잘 자지는 못했어요. 살짝 졸았다가 깬 기분이랄까. 아직 이 몸에 적응이 잘 되지 않은 것 같네요."
"그건 원래 그런거랍니다. 죽은 자로 사는데 적응을 하셔야죠.”
"무슨 말이죠?”
"어제 막 죽음에서 깨어나셨다죠? 나으리께서 어제 돌아가시면서 말해주셨습니다. 원래 언데드들은 잠을 자지 않는답니다. 이미 육체가 생명의 논리를 벗어났으니까요. 하지만 정신은 필멸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의식도 너무 오랫동안 살아있으면 지친답니다. 그래서 조금은 잠을 자는 것처럼 의식이 없는 상태로 들어갈 때가 있는데 그래 봤자 잠깐이죠."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의식이 지쳐 쓰러질때까지 깨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인가? 가끔씩 오래오래 잠들면서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잊어버릴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뭔가 몰아세우는 느낌, 추적당하는 이 기분이 로즈는 맘에 들지 않았다
"제가 그럼 잔게 아니고 잠깐 의식을 놓은거다… 그 말씀이신가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다들 그렇습니다. 이리 와서 앉으시죠. 먹을 것을 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먹을 것 좋죠!"
그러나 잠시 후 그렉이 음식을 가져왔을 때, 로즈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렉은 생전에 어느 귀족 집의 요리사라도 되었것처럼 식사를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지만, 그 내용물이라는 것은…
“음… 그렉?”
“네. 그런 반응, 예상했습니다. 사실 이정도도 막 깨어난 아가씨를 위해서 조정한겁니다.”
식탁에 차려진 것은 기본 구성은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식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 고급이라고 치면 고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빵은 반쯤 상해있는 듯이 보였고, 고기는 잘 정돈되어 접시에 올라가 있기는 했지만 날것처럼 보였다. 그마저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수프는 분명히 위험해보이는 녹색빛이 감돌고 있었고 야채들도 싱싱하기보다는 말라 비틀어져있는것이 훨씬 많아 보였다. 그나마 말쩡해보아는 것은 버섯요리 정도랄까. 검은 빛의 큰 버섯 요리만이 살아 있을 때 봤던 것과 비슷해보였다. 상 가운데 아름답게 놓여 있는 촛대와 은으로 만들어진 식기들에도 불구하고, 로즈는 음식을 먹고샆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 기분을 눈치채기라도 한듯이 그렉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지난 밤에 늦은 시간에 여관에 오셨죠? 추위같은것을 느끼셨나요?”
“네? 아니요… 그러고보니…”
“몸의 신경이 많이 죽어버려서 그렇습니다. 물론 다시 살아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조금은 느껴지실테지만 추위도, 아픔도, 모든 감각이 이전보다 덜 느껴지실겁니다. 맛도 물론이지요. 웬만한 음식의 맛으로는 맛이 느껴지지 않으실껍니다. 사실 혀가 붙어있지 않은 자들도 꽤 많죠.”
“그래서… 이 음식들이… 전부…”
“썩은거죠. 비위가 상하실까봐 그중에서도 초심자용으로 가져온거지만, 언데드 중에는 웬만큼 썩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않는 자들이 많답니다.”
이 삶이 괜찮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던 어제의 생각을 로즈는 후회했다. 일어난지 1시간도 되지 않아 잠드는 기쁨이 사라졌고, 이제 먹는 기쁨마저 사라졌다. 언데드들은 무슨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걸까? 하지만 곧 그런걸 생각하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로즈야말로 아무런 기쁨도 즐거움도, 어쩌면 이유도 없이 이십년 가까이 살아온 장본인이니까. 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이런 종류의 삶이 이어지다니… 내가 정말 죽기는 한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괴로우시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드시는게 좋은 겁니다. 물론 안먹는다고 굶어 죽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듣자하니 오늘부터 군사훈련을 받으신다면서요? 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힘을 사용하신다면 뭔갈 먹어두시는게 좋습니다. 우리를 살아나게한 강령술도 무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더군요."
로즈는 비위가 상한 얼굴로 위험해보이는 녹색 수프를 한 수저 떳다. 확실히 맛이 잘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희미하게 혀끝에 감도는 맛은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음식과도 달랐다. 앞으로는 이런 맛에 적응을 해야하는걸까. 이것저것 시도하다보니 다행히 못먹을정도의 끔찍한 음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나마 멀쩡한 버섯쪽으로 손이 많이 가는건 어쩔수 없었다. 그녀가 식사를 하는 동안 그렉이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포도주는 로즈가 받은 아침상에서 가장 먹을만했다. 어쩌면 맛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발효가 많이 되어 신맛이 많이 나게 만든 포도주였지만 그녀의 말라버린 미각을 자극하는데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렉은 보면 볼수록 참 신기한 언데드였다. 물론 썩어버린 살이나 튀어나온 뼈는 다른 언데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자체적으로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온화함은 그렉을 이 낯선 음식들로 이루어진 식사 중의 좋은 말상대로 만들어 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렉. 난 이렇게… 뭐랄까, 누가 술까지 따라주는 식사를 해보는건 처음이에요."
"별말씀을요. 다 제 일입니다."
"전 날때부터 빈민가에서 자랐거든요. 누가 제 부모인지도 기억이 잘 안나요. 항상 귀족들은 어떻건 먹을까, 어떤 곳에서 살까에 대해서 궁금했었는데 오늘 다 체험해보는것 같네요."
"물론 음식이 산자의 음식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하하, 맞아요. 언데드로 산다는건 사는 재미를 찾기가 참 어려운 것 같네요. 자는것도 먹는것도 이전과는 너무 다르니까요."
"그렇습니다. 죽은 자의 즐거움은 산 자들과는 확실히 다르죠. 정의하기에 따라서지만, 사실, 음… 즐거움이라는게 없는건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소리죠 그게?"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아, 여기까지 오시면서 마을을 둘러보셨겠죠. 마을이 어때 보이던가요?"
그녀는 다넬과 말을 타며 보았던 죽음의 종소리 마을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런 생기가 없는 표정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그건 마치…
"…다들 정말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뭔가… 즐거움이나, 그런게 없어 보였고, 심지어는 아무도 힘들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던 것 같네요. 마치… 감정이라고는 없는 것 같았어요."
"잘 보셨군요. 죽은 자로 살다보면 감정이라는게 거의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외부로부터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는 것이 다 죽어버리니까요."
그렉이 로즈의 술잔에 포도주를 다시 한번 따르며 말을 이어갔다.
"뭔가를 느낄 수 없다고 해서 감정이라는게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외부뿐만아니라 내부로부터도 생겨나니까요. 단지, 내부에서 생겨난 감정은 그 경향이 잘 변하지 않죠.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안으로 계속 곪아가는것처럼 말입니다. 보통은 그래서 죽기 직전이나 살아나자마나 느낀 감정, 또는 가장 강렬하게 느꼈던 감정들을 끝까지 가지고 간답니다. 그리고 거의 그 감정밖에는 느끼지 못하죠. "
"그럴수가… 그런건… 살아있는게 아니잖아요."
"당연하죠. 우린 살아있는게 아니랍니다. 그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죽은자들은 감성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이성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을 약간 남아있는 감정들이 뒷받쳐주죠. 보통은 분노, 배신감, 증오 같은 것들 말입니다."
로즈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렉이 말하고 있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로즈의 이야기였다. 나도 감정을 다 잃어버린채 목적만 따라가는 괴물이 되어가는걸까?
"그래서 죽은 자로 살아간다는 건 사실 정신적인 것에 가까워요. 보통은 그래서 한가지 감정이나, 목적에 거의 집착하다시피 살아간답니다. 그래서 그 밴시 여왕이라는 자가 그렇게 큰 세력을 끌어모을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목표가 달성이 되면 허무함에 자살하는 일도 그렇게 드물지 않죠."
그 말을 들으니 어디선가 그런 비슷한 옛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았다. 자기를 죽였던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시체로 살아난 여자의 이야기. 결국엔 복수는 성공하지만 허무함에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았다. 아니, 옛날 이야기가 맞았던가? 어디서 분명 들었던 내용인데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시 얼이 빠진 로즈의 모습을 보고 그렉이 작게 미소지었다.
"제가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갑자기 해드린것 같군요."
"아니요.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인데요."
어느새 그렉은 식기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찻주전자에 차를 내왔다. 어떤 차를 우려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찻잔에 따라낸 차는 형광빛 초록색을 띄고 있었다. 로즈는 이번에도 흠칫 놀랄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겪게 될 일을 미리 아는것은 현재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죠. 특별한 방법으로 우려낸 차입니다. 한번 드셔보시죠."
"이번에도 신기한 맛이 나겠네요."
다행히 예상을 뒤엎는 신기한 맛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하고, 따듯한 느낌이 온몸을 적셔주는 듯 했다. 초라하고 낡은 여관의 인상과는 반대의, 놀라울 정도의 안락함을 로즈는 느끼고 있었다.
"그렉은 참 신기한 분인것 같아요."
"그러신가요?"
"네. 아까 언데드는 감정을 잊어간다고 하셨는데 그렉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요."
"천만에요. 저도 그냥 평범한 시체에 불과한 자랍니다. 단지… 다른 언데드들이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붙들고 사는 반면 저는 조금 다른 감정을 붙들고 사는 것 뿐이랍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가씨가 참 신기한 분이시군요."
"제가요?"
"아까 말씀드렸죠? 언데드는 한가지 감정이나 목표에 집착하다시피 하며 살아간다고요. 그런데 아가씨는… 그런게 보이지 않는군요. 복수나 증오, 혹은 후회같은… 그런 감정들이 아가씨에게서는 보이지 않아요."
"글쎄요. 그건 그냥 제가 별 생각이 없어서 그런거 아닐까 싶은데… 그리고 저도 후회? 까지는 아니지만, 그리움정도는 느끼는 것 같아요."
"뭐 그럴수도 있곘죠. 자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시라거나, 그럴수도 있을 것 같군요. 어쩄든 다른 이들과는 풍기시는 분위기가 참 다르십니다. 그리움이라는것도, 지금 아가씨를 그렇게 휘두르고 있는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데요?"
"그건…"
그 때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넬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렉이 달려가 문을 열었다. 여전히 다넬은 위압감을 내뿜는 강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무서운 눈으로 그렉을 한번 쏘아본 다넬은 로즈에게로 다가왔다.
"그렉이 잘 챙겨줬는지는 모르겠군, 훈련을 받는 동안은 이곳에 계속 머무르면 될것 같아. 일단 나가자고. 사령부에는 이미 이야기해놨어. 훈련을 받아 봐야지."
"알았어요. 기다리고 있던 참이에요. 지금 바로 가죠."
어짜피 짐이 아무것도 없던 로즈는 그대로 맨몸으로 다넬을 따라 나갔다. 문밖을 나설때 뒤에서 그렉이 인사를 했다.
"잘 다녀오시지요. 아가씨."
"있다가 봐요. 그렉!"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넬은 여전히 역겹다는 눈초리로 집을 나섰다. 곧 두사람은 해골마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했다.
"그렉이 잘 챙겨줬나?"
"뭐 꼬투리라도 잡고 싶은건가요."
"그래. 잡아서 놈을 족쳐버리고 싶어."
"그렇다면 안됬네요. 정말 그렇게 잘해줄 수가 없을 정도 잘해주셨어요. 그렇게 좋은 분을 왜 미워하는거에요?"
"말했었잖아. 개인적인 이유라고. 그놈도 그렇게 좋은 놈이 못돼. 입만 살은 벌레 같은 놈이야."
"너무 아무사람이나 미워하는거 아니에요?"
"넌 너무 다른 사람을 쉽게 믿는군. 그게 좋은게 아니라는건 알고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그렉이나 모르도나 다들 좋아보이던데요, 뭘. 나도 믿어야 할 사람 못믿을 사람은 가릴 수 있다고요. 제일 나쁜 사람은 다넬인 것 같은데."
"아직 세상 사는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구만. 제일 뒤통수 맞기 좋은 놈들이 착해보이는 놈들이야."
로즈는 더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성격이 뒤틀린 남자였다니. 차라리 모르도가 찝적대는 짓은 좀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상대였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제 밤에 보았던 이상하게 생긴 어둠의 성당 앞에 두사람은 도착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말을 집어넣고 올테니."
"네, 빨리 오세요."
다넬이 성당 옆의 마굿간으로 잠시 사라진 동안 로즈는 성당 로비에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예배당은 2층에 있고 1층은 교인들의 모임장소로 사용되었던 모양이었다. 한때 목가적이고 신성한 분위기를 풍겼을 1층은 지금은 포세이큰 시체들에게 점령당해 그들의 선술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다들 음침한 분위기에서 술잔을 홀짝이고 있는 모습이 소름끼치는 광경을 그려내었다. 어쩌면 로즈도 그 그림의 한 조각이겠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넬이 돌아왔다.
"저 안쪽으로 들어가지. 저쪽에 집무실이 있거든."
선술집의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행정집무실'이라고 적힌 문이 보였다. 로즈는 다넬을 따라 그곳으로 들어갔다. 다 부스러진 책상에 낡은 양피지 서류들이 잔뜩 쌓여있고, 책상에는 언데드들이 앉아 뭔가를 계속해서 끄적이고 있었다. 그 중 한 언데드가 다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오, 다넬인가. 그쪽이 아까 말한 그 친군가 보구만."
눈알의 두배크기는 될 만큼 커다란 안경을 쓴 언데드였다. 머리가 다 벗겨진, 어쩌면 두피 자체가 날아가버린 듯 한 모양새의 머리를 한 모습과 남의 것을 이어붙인듯 군데군데 얼룩진 얼굴의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저것도 모르도의 솜씨일까?).
"네. 맞습니다. 필요한 부분을 처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리오도록 신병. 이름이?"
"어, 로즈라고 합니다."
"성은 없고 그냥 로즈인가?"
"네… 성까지 받지는 못해서. 그냥 로즈입니다."
"좋아. 여기 다넬이 말한 바에 따르면 암살자로서의 훈련을 받기 원한다고 하던데 맞나? 좋아, 좋아… 그럼 일단 이 서류를 좀 작성하고. 훈련소로 안내를 해 주면 될 것 같네."
"그런데 저는 글을 모르는데… 이걸 읽지도 못하겠어요."
"산골 무지렁이군. 그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고. 이름 로즈, 성별 여성, 출신지가?"
"로데론이요"
"그래. 그럼 죽기 전에 나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나?"
"19이요."
"일찍도 가셨구만. 그럼, 가족은? 내 말은 혹시 가족중에서도 포세이큰이 된 자가 있냐는 말이야. 스컬지는 의미 없어."
"아니요. 사실 가족… 비슷한게 있기는 헀지만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좋아, 좋아. 죽기전에 직업은 뭐였나? 모름지기 자기한테 익숙한 일을 해야 하는 법이지."
로즈는 순간 당황했다. 잠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로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딱히… 직업이라는게 없었어요…. 그냥 거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래? 직업, 거지."
만약 살아있는 몸이었다면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거지 취급을 받는게 나았지만, 죽어서까지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죽었다면, 새 인생을 시작헀다면, 적어도 이전 삶의 꼬리표들은 다 떼어 줘야 하는것 아닌가?
"그래. 거지였으면 그래도 도망치는거랑 어디 숨어드는건 잘 하겠군. 간만에 괜찮을 걸 데려왔는데, 다넬. 다음, 뭐 잘하는거 자신있는건 있나? 여기 항목이 있는데, 바느질, 요리, 글은 모른다고 했고, 대장일을 했다거나, 광산에서 일한 적이 있다거나, 혹은 무두장이 일을 해 봤다거나, 혹시 해당되는거 있나?"
"저기, 이 인원은 암살이나 첩보 쪽으로 보낼 계획인데…"
"나도 알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하는거야. 어느 쪽으로라든 써먹어야지."
"바느질은 자신 있어요. 꽤 많이 해봤거든요. 손수건 같은 걸 주으면, 거기에 수놓아진 서명을 떼서 장물아비에게 팔곤 했어요."
"거지주제에 아예 빌어먹기만 한건 아니로구만. 좋아. 바느질 특기."
그 외에도 온갖 시시콜콜한 조항들에 대답하고 나서야 로즈와 다넬은 암살교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암살교장은 언덕 아래의 남쪽 마을 입구 근처에 있었다. 말을 타고 가면서 다넬은 어지간히 지루했는지 따분한 티를 숨김없이 냈다.
“정말, 행정관이란 놈들은 왜 이렇게 쓸데없는것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어. 저놈들은 죽기 직전에 정리 못한 문서가 아까워서 되살아난게 분명해. 적어도 문서가 정리가 다 되어서 자살할 일은 없겠군.”
반면에 로즈는 따분하다기보다는 부끄러워 죽을 뻔 했다. 덕분에 다넬에게 자기는 부모도 뭣도 없는 할 줄 아는것도 없어 거리에서 빌어먹던 거지라고 광고해버린 꼴이 되었다. 싸울 줄 알면 싸울 줄 안다고, 잘 싸우냐 못싸우냐만 기록하면 되지 왜 남의 가족관계, 특기, 취미 같은걸 물어서 문서로 남겨놓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뾰루퉁해진걸 다넬이 눈치를 챘는지 그 큰손으로 로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사람들은 은근히 무관심하다고. 네가 뭘 했던, 거리에서 빌어먹거나 혹은 뭐 다른 걸 했던 상관없이 지금 스스로만 떳떳하면 되는거야.”
“고마워요. 그래도 참, 민망한건 어쩔 수 없네요.”
“털어버려. 저 서류가 저놈들 손 밖으로 나오겠어? 네가 저 내용을 생활에서 마주칠 일은 아마 없을꺼야.”
“그럼 다행이지만요.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네요. 소문은 금방금방 퍼지시 마련이잖아요. 여자들끼리는 하나가 알면 전체가 다 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요.”
“그래, 뭐 그럴지도. 하지만 난 여자가 아니잖아. 다른데 소문낼 사람도 없…”
그때 뭔가가 다넬을 향해서 빠르게 날아왔다. 다넬은 급하게 손으로 얼굴을 막았지만 팔에 큰 화살이 꽂히고 말았다.
“다넬!”
로즈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다넬은 황급히 칼과 방패를 들고 말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숨어라! 붉은 십자군이다! 죽음경비병들은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다넬의 사자후같은 외침이 온 마을에 울려퍼졌다. 그러자 사방에서 칼을 든 포세이큰의 병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보라빛 갑주를 온 몸에 두른, 죽음경비병들이었다. 맞은편 언덕아래에서는 붉은 빛 물결이 몰려오고 있었다. 붉은 빛 물결의 선두에 선 한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붉은 십자군 형제들이여! 저 저주받은 것들을 우리의 땅에서 몰아내라! 빛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죽음경비병의 숫자는 많았지만 붉은 십자군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 곧 양 군대는 마을 입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 아비규환속에서 다넬이 로즈에게 외쳤다.
“로즈! 당장 어디가서 숨어있어! 나중에 데리러 갈께!”
그러나 당황한 로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살아난 후 처음 보는 거친 살육의 현장이었다. 핏방울과 잘려진 머리, 흘러나온 내장들이 사방에서 휘날렸다. 그 잔혹하고 정신없는 광경에 로즈는 다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잠시 얼어붙고 말았다. 전쟁이라는 것. 내가 살기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잔혹한 선택의 순간. 도덕이나, 윤리는 사라지고 오직 살아남기 위한 생존만이 남아있는 현장이었다. 로즈는 그녀가 죽던 날을 떠올렸다. 피튀기는 광장, 도망치는 사람들, 난도질당하는 사람들, 울부짖는 목소리들, 산채로 사지가 뽑혀버린 알마, 찢겨진 배에서 내장이 흘러나온 도레, 그리고 올리버. 올리버의… 잘려나간 머리. 그 모든 영상들이 그녀의 머리로 순식간에 빨려들어왔다. 압도적인 공포감에 로즈는 주저앉고 말았다..
“로즈! 피해!”
다넬이 부르짖는 소리에 로즈는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녀의 바로 앞에, 긴 장검을 든 붉은 십자군이 달려오고 있었다. 칼은 바로 그녀의 머리로 향했다. 로즈는 간신히 칼을 피했지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 장검을 아래로 치켜들고있는 병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눈, 그 눈! 그 깔아보는 눈! 그 경멸하는 눈! 19년동안, 한순간도 그녀를 놓지 않고 뒤따르며 괴롭히던 그 시선! 아직도 나를 쫓는가? 죽음 너머에서까지 날 뒤따르며 괴롭히고 싶었는가? 그 눈에 로즈는 공포를 느꼈다. 도망치고 싶었다. 달아나고 싶었다. 병사의 시선은 숭고한 정의를 실현하는 듯 비장했다. 천천히 칼이 로즈의 가슴으로 찔러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로즈의 손에 뭔가 작은 것이 굴러들어오고 있었다. 치열한 전쟁터 한복판, 누군가의 품에서 굴러떨어졌을지 모르는 작은 단검 한자루, 거대한 장검에 닿기만 해도 부서질 듯 보이는 작은 날카로움이 그 손에 들어온 순간,
“크아아아악!”
그 손은 그 눈에 가 있었다. 눈을 붙잡고 바닥에 나뒹군 병사를 행해 로즈는 뛰어들었다. 뛰어들어 가슴팍을 작은 단도로 내리찍었다. 내리찍었다. 찍고 또 찍어내렸다. 수십번을 찍은 후에야 로즈는 정신을 차렸다. 방금 내가 뭘 한거지? 어떻게 그녀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는 느낄 수 있었다. 곧장 그녀는 칼을 들고 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움직여라. 찌르고 베어라. 죽여라! 끊임없는 목소리들이 로즈의 안에서 울려퍼졌다. 로즈는 몸의 통제권을 잃었다.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들에 정신을 맡겨버렸다. 아니, 빼았겨버렸다. 그녀의 몸을 느낄수가 없었다. 단도 하나를 들고 십자군 사이에서 춤을 추는 그녀의 존재만 순간순간 짧게 인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났을까. 로즈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시체의 산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붉은 십자군은 퇴각했다. 죽음경비병들도 많은 수가 죽었지만, 승자는 죽음경비병들이었다. 저 멀리 다넬이 역시 피투성이가 된 채로 로즈를 행해 걸어오고 있었다.
“로즈, 너…”
로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승리! 넘치는 병사들의 사기! 고양감!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고 두려운 감정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살아있는 자들을, 인간들을 칼로 베고 난도질했다. 알마를, 도레를, 올리버를…… 죽이고 칼로 찢어버렸다.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은 더이상 인간의 손이 아닌, 말라 비틀어진 뼈다귀였다. 그녀는 이제 그녀 기억속에서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괴물이었다.
“다...다넬… 나… 어떡하지….”
“로즈! 진정해!”
몸을 부들부들 떠는 로즈에게 다넬이 다가가고 있었다. 로즈는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향했다. 칼날이 목으로 파고드는 순간, 다넬의 팔이 로즈의 손목을 잡았다.
“이게 무슨짓이야! 또 죽을 셈이야?”
“다넬…. 다넬… 나 죽여버렸어…내가 어떻게 된거지?”
로즈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내가 죽였어… 내가 올리버를….”
“정신차려 이 멍청아!”
다넬이 로즈의 따귀를 때렸다. 그 커다란 손으로 맞은 로즈는 옆으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당연한거야! 당연한거라고! 죽은자와 산자가 서로를 죽이는 건 당연한 일이란 말이야! 넌 이미 죽었어! 아직도 인정못한거냐!”
계속 흐느끼고 있는 로즈를 향해서 다넬이 쏘아붙였다.
“네가 물었지. 왜 인간과 동맹을 맺지 않았느냐고. 이게 그 이유다. 그들이 우리를 증오했기 때문이야! 넌 남이 널 죽이러 달려오는데도 그렇게 벌벌 떨고만 있을꺼냐!”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그들을... 죽였어야 하는거야?”
로즈는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눈물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지만 격한 호흡과 딸꾹질이 말하고 숨쉬는 것 자체를 가로막고 있었다.
“정말… 이방법으로밖에 살… 수… 없는거야? 전쟁이라는게… 이렇게 잔혹… 한 거였어…? 왜 이런 죽고… 죽이는 짓을… 반복해야 하는건데?”
다넬이 로즈에게 다가왔다. 다넬의 표정은 증오를 품고 살아가는 언데드 답지 않게 슬픈 빛으로 가득했다. 로즈의 어깨를 부여잡은 다넬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그래… 이러지 않으면 좋지… 그보다 좋은게 어디있겠어. 하지만 이 긴 역사동안, 아제로스가 생겨난 이래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했어. 전쟁을 피할 방법은 정말 없는지도 몰라. 우리가 해야 할건, 그저 받아들이는 것 뿐이야… 우리의 죽음처럼.”
다넬은 그 말을 끝으로 로즈를 꼭 안아주었다. 로즈는 그 품에서 더욱 크게 엉엉 울었다.
“난 이런 삶… 감당하지 못하겠어…”
죽음경비병들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서서히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감정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이 두사람의 모습이 어떤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는지 아닌지는 그들 자신들도 알지 못했다. 때 마침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말라버린 눈물샘을 가진 로즈를 대신해서 빗물이 그녀의 뺨에 눈물을 뭍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