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이 지나고 로자레일이 출항하기로 정한 날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메데이로스의 모든 사람들이 로자레일을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로자레일이 비록 노예라는 신분을 없앴다고는 하나,
지난 몇년간 노예로 살아온 사람들이 한 순간에 평민처럼 행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해적들도 선장 이상의
존재로 로자레일을 대했다. 물론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여전히
로자레일을 경계했지만, 말론의 설득과 더불어 해적이 아닌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는 오히려 섬에 남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들도 섬으로 데려오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몸값을 받으려 데려온 귀족은 한 꼬마아이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울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해적들은 그런 귀족 가문의
아이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로자레일은 그 아이가 상당한 신분의
가문의 자제라고 생각했다. 10살 정도에 불과한 아이일지라도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다면 충분히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로자레일 선장, 출항 준비는 다 갖추어 졌네. 이제 출항만 하면
되지! 하하!"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로자레일은 들떠있는 말론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건낸다.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있겠나!
내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네!
분명 네뮬라다께서 축복하시어 자네를 이 섬으로 보내준 걸세!
하하하!"
지난 몇 일 동안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인 말론이지만, 막상
출항하는 날이 되니 실감이 나는 듯 하다.
"선장님! 모든 출항 준비가 마쳐졌습니다! 선장님께서 말하신데로
바람은 동쪽으로 불고 있습니다!"
"좋아, 점호!"
각이 잡힌 한스의 보고를 받은 로자레일이 점호를 실시하자,
한스 외의 다른 해적들도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번호를 외친다.
해군학교에서 받았던 교육을 토대로 바람을 계산해서 출항 날짜를
정한 로자레일은 출항일 전까지 해적들을 놀리지 않고 해군 훈련을
시켰다. 간단한 훈련이었으나, 이미 십 수년간 배를 탄 이들이었기에
단기간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물론 해적질을 하던 생활습관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었고, 고된 훈련은 이들의 불만을 살 수도
있었기에 앞으로 차근차근 꾸준히 단련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는
로자레일이었다.
"포로 4명 외, 5명 전원 이상 무! 점호 끝!"
해적들이 점호를 외치는 모습을 바라본 로자레일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의 출신이 해적이라고 해도 앞으로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본인이 선장이 라는 것에 스스로 만족한 것이다.
"좋아, 출항한다! 선원들은 모두 배에 오르도록! 그리고 저 분들을
앞으로 배의 손님으로 대한다! 무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라!"
"옙! 알겠습니다!"
로자레일이 포로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선원들은 아무런 불만없이
복명한다. 이번 항해에 동행하는 포로는 모두 4명이었다. 귀족 가의
자제로 보이는 듯한 아이 한명과 그의 늙은 시녀, 그리고 섬으로
가족들을 이주시키고 싶어하는 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외의 2명은
가족의 생사를 알 수없는 여자 노예들로, 그들은 섬에 머물고 싶어
했기에 남기로 했다. 몇 일 전의 전투로 인해 항해가 불가능하게 된
선원1명을 뺀 11명의 단촐한 일행이었다.
"좋아, 닻을 올리고 돛을 내려라!"
로자레일이 키를 잡고 외친다. 선원 중에는 전문적으로 조타를
배운 사람이 없었기에 빠른 항해를 위해 로자레일이 직접 키를
잡은 것이다.
"이보게, 로자레일! 블레야 제도에 들렸다가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블레야 제도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그곳의 설탕과 사탕수수는 상등품으로 유명하지!
블레야 제도에서 설탕과 사탕수수를 실어다가 세나콘에 팔면
수익이 짭잘할 걸세! 앞으로 계속 해적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그럼 목표를 블레야 제도로 하겠습니다!"
말론의 설명에 로자레일도 신이 난 듯 망설임 없이 답한다.
"목표는 블레야 제도다! 선원들은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로자레일이 키를 돌리며 크게 외친다. 상선에서 해적선으로, 그리고
다시 상선으로 거듭나려 하는 소형캐러밸이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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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로스 섬에서 5일을 항해하자 문명의 최 서단이라는 블레야
제도가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메데이로스 섬이 존재하는
한 더 이상 문명의 최 서단의 항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망망대해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항구를 찾으려 하는 사람은 없기에 일반인 들에게는
앞으로도 블레야 제도가 문명의 최서단으로 불릴 듯 하다.
3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블레야 제도에는 많은 항구와 도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블레야 섬에 있는 보아륀 항구가 가장 번성했기에 로자레일은
말론의 조언에 따라 보아륀 항구에 배를 정박시켰다.
"어디에서 오는 배입니까?"
치안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듯 로자레일 일행이 하선하자 마자
항구 관리가 다가와 묻는다.
"세나콘의 상선이올시다. 블레야 제도에서도 이 곳 보아륀의 설탕을
가장 높이 쳐준다기에 이곳으로 왔소이다, 허허."
말론이 부드럽게 받아넘긴다.
"상행 허가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오."
말론이 옷을 뒤적거리더니 앞섭에서 조그만 주머니를 꺼내든다.
그동안 섬에 갖혀있던 말론에게 상행 허가증이 있을리 만무하니,
아마도 적당한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인 듯 하다. 주머니를 받아든
항구관리가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 하더니 다시 주머니를
말론에게 건낸다.
"상행허가증이 없으면 입항을 허가할 수 없습니다. 보급은 가능하니,
필요한 물품을 적어주시면 배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어허, 딱딱하게 굴지 말고 좀 들여보내도록 해주시오. 다음에는 꼭
허가증을 받아올터이니 이번만 사정을 봐주시면 안되겠소?"
"안됩니다. 보급이 필요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십시오."
"사람이 정말 매정하구만.... 다음에는 꼭 허가증을 받아온다지 않소?"
약간의 뇌물이면 항구에 입항할 수 있다고 생각한 말론이었기에
항구관리의 입항할 수 없다는 말이 더욱 야속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말론과 항구관리의 실랑이가 계속 이어지자 선원들도 말다툼에 끼어들며
주먹질이 오가기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갑판에서 내다보는 포로 중 한 명의 눈빛이 어둡게 변할 때였다.
"무슨 일인가?"
말론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말단 항구관리 보다 높아 보이는 항구관리가
경비병들을 데리고 일행에게 다가온다.
"마르탱님, 허가증 없이 입항하려는 자들이 있어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얼른 돌려 보낼테니 걱정 마십시오."
"허가증이 없으면 입항하실 수 없습니다. 무력을 동원 하기 전에
돌아기십시오."
항구관리에게 마르탱이라 불린 자가 말한다. 큰 키는 아니지만 건장한
체격을 지닌 단단한 돌맹이 같은 자였다.
"허허, 이것 참! 사정 좀 봐줄 수 없겠소?"
말론이 마르탱에게 돈 주머니 2개를 내민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배까지 정중히 안내해드려라."
마르탱이 손짓하자 뒤에 기립해 있던 10명의 경비원이 일행에게
다가온다. 로자레일 일행이 경비원들에게 떠밀려 뒷걸음질치려 할때
마르탱과 로자레일의 눈이 마주친다.
"혹시... 퀘드리아 선배님이십니까?"
"뒤로스.....?"
긴가민가 하던 표정의 마르탱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지다가 살짝 굳어
지며, 주위를 살핀다.
"이분들의 입항을 허가하게."
"예? 하지만 허가증이....."
"어허! 내가 책임지고 이분들의 신분을 보장하겠네!"
"옙! 알겠습니다!"
마르탱이 엄포를 놓자 항구관리가 기립하며 복명 한다.
"오늘은 이만 해산한다. 푹쉬도록!"
마르탱이 경비병들에게 말하자 경비병들이 마르탱에게 경례를 하고는
각을 맞추어 돌아간다.
"퀘드리아 선배님 마침 일이 끝났으니,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괜히 나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이제 곧 일이 끝날 시간이었거든요."
"로자레일, 자네! 이런 빽은 언제 만들어 두었나! 우리가 선장은 잘
골랐구만! 허허!"
로자레일과 마르탱의 대화에 말론이 끼어든다.
"일행분들은 일을 보고 계셨으면 합니다. 퀘드리아 선배님과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중요한 일인가 보군. 알겠네. 우리는 항구 구경이나 하고 있지.
이 얼마 만의 도시 냄새인지 모르겠구만, 하하하! 그럼 이따가 배에서
보기로 하지! 하하!"
마르탱의 말에 당황한 듯한 말론이 억지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선원들과
포로들을 데리고 저잣거리로 향한다.
"선배님, 제가 잘 아는 주점이 있으니 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말론과 그 일행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고있던 마르탱이
말을 꺼낸다. 그는 해군학교에서 같은 방을 쓰던 룸메이트로, 로자레일보다는
1년 후배였다. 해군학교를 다니면서 상당히 아끼던 후배로 친동생처럼
여기던 후배였기에 로자레일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믿고 따라갔다.
로자레일이 생각하기에, 마르탱은 분명 우수한 성적으로 해군학교를
졸업하고 3등해군사관으로 임관했어야 할텐데, 보아륀이 번화했다고는
하나 자렐린 왕국에 비해 이런 촌구석의 항구에서 항구관리 일을 하고
있으니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항구를 빠져나가자, 가판을 놓고 물건을 팔고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에서 물건을 파는 소리와 그 물건을 놓고 흥정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물건들이 로자레일의 눈을 어지럽힌다.
"블레야 제도라면 상당히 낙후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상당히
번화한 곳이군."
"하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블레야 제도 사람들은
모두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 곳에서 그런 말은
삼가시는게 좋겠군요."
"자네 고향이....?"
"물론 블레야 출신입니다. 하하하! 상당히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제 고향도 모르시다니, 이거 섭섭합니다! 하하!"
"미안하구만..."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다왔습니다!"
마르탱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며 말한다. 로자레일이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보니 낡은 목재에 아무런 이름도 없이 술잔만 새겨져 있다.
"하하, 겉보기에는 이레 뵈도 쉐리 맛이 기가 막힙니다!"
"쉐리라... 좋지!"
마르탱과 로자레일이 웃으며 주점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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