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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숨을 몰아쉬며 한 남자가 달빛도 스미지 않는 어둠 속을 걷는다. 그 머릿속에 멤도는 잡념들은
그의 발걸음에 실려 쉽지않아 보이는 그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지체시킨다. 절뚝이는 걸음을 한참
토록 옮기던 그가 멈춰선 곳은 이제는 도시의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는 교외의 초로한 의자였다.
「… ….」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그가 의자에 털썩 몸을 앉힌다. 등 기댈 곳도 없어 자연히 몸은 앞으로 구부러
졌지만 절름걸음으로 힘겹게 걸을때 보다야 훨씬 편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한없는 칠흑만을 찾
아 헤매던 그의 검은 인영이 비로서 은은한 달빛 아래서 흔들렸다. 회색에 검은 색이 드문 정리 되지
않은 긴 장발에 입주변과 턱에 차라난 마찮가지로 탁한 색의 짧은 수염들. 다소 굽은 허리에, 박력이
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쳐진 어깨. 역시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듯 힘 없이 꺾여있는 왼쪽 발목과
허름한 옷 소매 끝으로 나와있는 앙상한 팔목. 그리고 거의 다 빈 럼주병을 쥐고있는 주름진 손은 굳
이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적잖은 나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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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몸을 웅크린채 미동도 않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진 탓일까. 그는 지긋히 눈을 감으며 럼주의
주둥이에 입을 맞춘 뒤 무리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얼마 남지도 않은 갈 주황빛의 독함이 남김 없이
병안에서 사라지고, 더이상 밀려오는 차가움이 없자 그는 울렁이던 목젖을 멈추며 다시 고개를 털썩
숙였다.
초점없는 그의 갈색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린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것은 자신의 그림자가 덮은
차가운 회색 땅바닥이 아닌 지금에서 조금더 거슬러 올라간, 그의 의식을 잠식하는 잡념이란 이름의
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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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빛이 세상을 빚추는 때. 그러나, 그 빛보다 더욱 밝은 열화가 그 곳을 빚추고 있었다. 붉은 빛과
노란 빛이 한데 어우러져 타오르던 곳은 비정하고 악랄한 해적들에게 당해 한줌 재가 되어가고 있는
불운한 도시였다. 터전을 잃은 것에 대한 절규와, 인생의 여정 길을 함께 해온 이들의 생기를 앗아간
불한당들에 대한 분노섞인 비통한 울부짖음 들을 뒤로한채 의기양양하면서도 재빠르게 도시의 성문
을 빠져나가는 한 무리가 있었다.
「으하하핫!」
그들이 등진 비참한 현실과는 대조되는 호쾌한 웃음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들
의 어깨 위에는 저마다 노략한 갖은 노획물들과 때로는 앙칼진 여인의 울먹이는 음성이 들려오는 가
죽보도 있었다. 해적들이라 불리우는 이 약탈자들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수 없는 흡족함과 승
리감에 심취한채 섬 외각에 정박해놓은 자신들의 배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갔을까, 굽이진 길과 우거진 숲풀을 가로질러 한참을 향한끝에 비로서 그들의 경쾌한 행보는
수북한 모래 속으로 빠진다. 좌우로 끝없이 펼쳐진 백 사장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 그 너머로는 좌우
에 펼쳐진 모래사장과는 감히 견줄 수도 없는 광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었다.
「저기다!」
숲을 빠져나가 모래사장에 발을 들인 해적들중 하나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바다 한 가운데에 떠있
는 불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흐흐! 어서 가자고!」
다시금 해적들의 걸음이 분주히 움직인다. 그들은 바다쪽으로 한참을 더 달려 해변까지 타고온 작은
배들에 노획물들을 먼저 던지듯 실어놓은뒤 몸을 담았다. 일초의 지체도 없이 능숙하고 빠르게 배에
오른 해적들은 노를 저으며 서서히 해변에서 멀어져갔다.
해적들의 작은 배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불빛을 향해갔고 그 불빛에 가까워질수록 거대한 검은
형상이 보다 뚜렷해졌다.
「선장님! 애들이 돌아왔습니다!」
불빛은 거대한 범선에 달려있는 램프들. 그 갑판위에는 멀리서 노를 저으며 가까워지는 동료들의 힘
찬 귀환을 알리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하나둘씩 선박의 난간에 몸을 밀착하며 귀환하는 동료들을 목
이 빠져라 기다리는 와중에도 검은 코트를 걸친채 선루에 앉아있는 한 남자는 과묵히 그들의 귀환을
눈으로 응시할 뿐이였다.
「와하하! 이것보라고! 진주야!」
범선과 쪽배의 거리가 한뼘 차이로 좁혀지자 아래에서 호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암흑 때문에 보이
지는 않았지만 그 말소리만 들어도 이미 갑판 위의 해적들은 부자가 된것마냥 입꼬리를 올렸다.
「사다리 내려!」
갑판위 또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줄 사다리가 내려가고 비로서 쪽배의 해적들이 노획물을 웅
큼 짊어진채 의기양양히 승선한다. 언제봐도 질릴법한 그 얼굴들이 이 순간만큼은 그토록 반가울 수
가 없었다. 돌아온 이들, 기다린 이들 모두 서로의 손바닥을 맞추며 승리를 환호했고 노획물 들은 돛
대 근처에 쌓이기 시작했다.
「젠장! 뭔데 이렇게 무거워?」
갑판 위의 해적들이 내려가 쪽배의 노획물들을 짊어지고 올라온다. 게중에 하나가 어깨에 가죽 끈으
로 입구를 동여맨 크고 묵직한 천포대를 짊어지고 나타났는데,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궁시렁
거리자 마악 쪽배에서 올라온 체격 좋은 해적 하나가 그를 향해 언성을 높혔다.
「어이, 조심하라고! 그건 선장한테 상납할 특품이라고!」
「…특품?」
어느정도 노획물의 수주가 끝나고, 쪽배를 끌어 올리는 때가 되자 해적들은 노획물들중 제법 값어치
나가는 몇가지를 엄선하여 여전히 선루에 앉아있는 검은 코트의 남자에게로 가져갔다.
「빨리 돌아왔군… 말대로던가?」
「예! 해군 놈들, 어디로 갔는지 한놈도 보이질 않더군요! 덕분에 쌀한톨 남기지 깔끔하게 모조리 털
어왔습니다!」
남자가 선루에서 일어서자, 이제껏 말을 주고받던 거구의 해적이 건네받아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천
포대를 남자의 앞에 툭하니 던진다. 요란스럽게 떨어진 그 천포대 속에서 다시금 비명이 터져나오더
니 정신없이 천포대가 들썩거렸다.
「풀어!」
거구의 해적이 옆에 있던 말단의 어깨를 툭 건들자, 그는 나아가 허리춤의 단검으로 가죽끈을 끊었다.
포대가 풀어지는 그 순간 하나의 가는 손이 섬칫 튀어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안나오고 뭘 꾸물거려!」
포대의 끝을 쥔채 들어 올리자, 비로서 손의 주인공이 비명을 지르며 요란스럽게 갑판 위에 떨어진다.
여자였다. 포대 안에서 어떻게 있었는지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지만, 그사이로 보이는 갸름한 턱선
과 뽀얀 피부는 그 헝클어진 모습마저도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떨어진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헤헤!」
거구의 해적은 흡족한 미소를 띄며 선장에게 시선을 준다. 그러나 이미 검은코트 남자의 시선은 여인
에게 집중 되있는 상황이였다. 그렇게 한동안 찬찬히 여인을 훑던 검은코트 남자가 문득 자리에 몸을
낮추었다. 고개를 떨군채 어찌할바 모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함인지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는 자
신의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녀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러나 이마저 여의치 않은 탓인지 다시 몸을 꼿꼿히핀 검은코트 남자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양뺨을 손
끝으로 붙잡은채 완강히 들어올렸다. 그제서야 거구의 해적이 말하던 ‘특품’ 의 가치가 보이는 순간이
였다.
「… ….」
길게 늘어진 흑색의 장발, 그 사이로 보이는 논밭에서 일한 아낙들의 거무 죽죽한 피부와는 상반되는
젊고 뽀얗은 탱탱한 피부. 검은코트 남자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은, 서서히 여인의 목선을 타고 올라
가 여인의 얼굴로 향했다. 검은 눈동자는 가늘던가 쳐짐없이 동그랗고 컷으며 코는 작고 오똑했고 입
술은 남자의 손끝이 양뺨을 잡고 있는 탓인지 오무려졌었지만 매혹적이였다.
「어떻습니까, 선장!」
겉봐도 젊다 못해 어려보이기까지 하는 여인이였다. 들려오는 말 소리 따위에는 신경도 안 쓰는듯 남
자는 무언가를 좀더 확인하듯 이번에는 그녀의 고개를 좌우로 돌리기도 하고, 위로 들기도 하며 여기
저기 살핀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비로서 결정이난듯 여인의 여린 피부에 거친 손을 뗀 남
자는 드디어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을 열었다.
「귀족이군….」
좌중을 압도하는 남자의 굵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귀, 귀족?」
그러고보니 입고 있는 옷 부터가 여느 평민이 있는 천 쪼가리와는 사뭇 다른 재질이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듯한데, 이 계집은 빈민가에서 잡아온 계집입니다!」
「…빈민가에 있던 귀족이라…」
「이 계집이 귀족따위일리가 없소!」
그의 언성을 더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검은코트의 남자는 우선 그녀의 팔목을 잡아
남자에게 보였다.
「…손을 봐라. 굳은 살이 하나도 없어.」
두번째로 남자는 그녀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올렸다.
「목에는 목걸이를 했던 자국이 있지. 자국으로 봐서는 제법 큰 목걸이를 하고 다닌모
양이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득, 그의 손이 내려가더니 여인의 허벅다리 안쪽으로 슬며시 들어간다.
━짝!
그 순간, 정적을 깨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개가 돌아가있다. 여인은 뒤늦게 후회하며
그의 뺨을 힘껏 친 자신의 손을 가슴으로 가져오며 경직했다.
「이, 이 계집이!」
그 상황을 넋이나가 지켜보던 거구의 해적이 비로서 정신을 차리며 여인에게 손찌검을
하려들기 무섭게 검은코트의 남자가 지긋히 손을 올리며 그를 만류한다.그런뒤 나지막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 알면서도 보이는 이 고고함은 그녀가 지체높으신 귀족
이시란것을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
여인의 허벅다리를 파고들던 손을 어느덧 뺨맞은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 긁적거리며 남
자는 쐐기를 묻는다.
「안그런가… 귀족?」
여인이 말문을 닫은채 어쩔줄 몰라하며 고개를 떨구자 검은코트의 남자는 더이상 지체
할 필요 없다는듯 자리에 일어서며 거구의 해적에게 말한다.
「갖다버려.」
그의 단호한 말마디에 거구의 해적이 놀란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되묻는다.
「예?」
검은코트의 남자는 노획물을 쌓아놓은 돛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목소리를 높혔다.
「버리란 말 안들리나.」
「하, 하지만 선장!」
거구의 해적이 반박하려 들자, 문득 검은코트 남자의 걸음이 멈춘다. 그에게서 뿜어져
져 나오는 싸한공기를 느낀탓일까 모두가 숨소리를 죽이자 거구의 해적 또한 말머리를
급히 자르며 여인의 팔목을 낚아챈다.
「뭣해? 선장의 명이시다! 배 밖으로 던져버려!」
「예? 아, 예!」
━꺄악!
이번에는 배 밖으로 끌려나가는 여인의 절규가 들린다. 안간힘을 쓰며 바둥거려보지만
건장한 남성 둘의 팔힘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였다. 원하는 데로 일이 진행되자 다시금
검은코트 남자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냥 버리는건 시시한데… 우리 식으로 해버리죠!」
여인을 난간까지 끌고 간 두 해적중 하나가 고개를 돌리며 거구의 해적에게 묻자 그 또
한 반사하듯 검은코트 남자의 등을 바라본다. 잠시후, 여인에 대한 처분이 떨어졌다.
「…그건…」
어깨너머로 그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향한다.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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