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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로스 섬의 산채 중앙에 말론과 한스와 5명의 해적들과
14명의 노예들이 모여있다. 노예들 중 여자 2명이 울고 있고
다른 노예들이 그들을 위로하고 있다. 몇일 전에 잡혀와 포로가 된
6명의 남녀노소도 구석에 몰려있다.
"저들은 왜 울고 있습니까?"
여자 노예들이 우는 모습이 의아한 로자레일이 말론에게 묻는다.
"저들은 이번에 죽은 선원의 아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지..."
말론도 선원들의 죽음에 숙연해진 듯 목소리가 가라앉아있다.
그를 바라보던 로자레일이 간이로 만들어진 단상 위로 올라간다.
"앞으로 이 메데이로스 섬을 관리할 로자레일입니다. 제가 선장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인정할 수 없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끝인가?"
메데이로스 섬의 모든 사람을 모아달라고 하기에 무언가 그럴듯한
연설을 기대한 말론은 로자레일이 짧게 말하자,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묻는다. 로자레일이 말주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떠밀리 듯 선장이 되는 것이 탐탁치 않았기에 간단히 필요한 말만
한 것이다.
"그럼 이의가 없는 것으로..."
"저..."
로자레일이 말을 마치려 할 때, 한스가 손을 들었다. 로자레일의
시선이 한스에게 머문다.
"두목님이라고 부르면 안될까요? 그게 편해서..."
"호칭은 선장으로 통일 합니다."
로자레일의 말에 한스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이 섬은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섬입니다."
본인이 생각해도 앞의 연설은 너무 성의가 없었고, 이 메데이로스
섬이 문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이 섬이 대륙에 있는
땅이었다면 귀족이나 부호가 소유한 장원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자
내심 욕심이 나기에 다시 말을 꺼낸다.
"앞으로 이 섬에 노예라는 계급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평민입니다. 그리고..."
"정말입니까?"
"참말인 감요?"
로자레일이 말을 끝마치지도 않았는데 여기 저기서 질문을 하며
소란스러워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것에 비하면
대도시의 시장만큼 시끄러워진 듯 하다. 그 모습에 말론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다.
"괜찮은 생각이군. 일단 더 들어보도록 함세."
말론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다.
"앞으로 이 곳에 노예라는 말이 사라지도록 하겠습니다.
이 것은 제 목숨이 다할때까지 지켜질 것입니다."
로자레일이 단검을 들어 손바닥을 긋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손을
높이 치켜든다. 붉은 피가 땅을 적신다.
"신께 맹세합니다! 이 말을 어긴다면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유령이
되어 신의 땅에서 안식을 얻지 못 할 것입니다! 바다의 신이신
네뮬레다이시여! 여기 이 제물을 받으소서! 이 맹세에 축복을 내려
주소서!"
로자레일은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영웅서사시의 한 구절을 읊었다.
그 영웅서사시에서는 영웅과 부하가 신께 충성을 맹세하며 외치지만,
지금 상황에서도 어울리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르신, 술과 대접을 준비해주십시요."
"응? 술과 대접 말인가? 알겠네."
말론이 얼른 오두막 안으로 가서 럼을 한 병과 큰 나무 그릇을
가지고 나온다. 로자레일이 그 것을 받아 그릇에 럼을 콸콸 따른다.
그리고는 손바닥에서 떨어지는 피를 럼이 가득 차 있는 그릇에 떨군다.
"맹약의 술입니다. 충성을 맹세하지 않을 사람은 마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한 사람씩 앞으로 나오십시오."
로자레일이 말을 마치자 한스가 얼른 앞으로 나선다.
"어허, 혼자 다 마실 셈인가?"
한스가 꿀꺽꿀꺽, 몇 모금을 마시고도 더 마시려 하자 옆에 있던
다른 해적이 제지한다. 차례차례 모든 해적이 술을 마신다.
"이 것으로 맹약은 성립되었다! 나는 선장 로자레일이다!
나를 따르는 이에게는 영광이 함께할 것이고 나를 가로막는 자는
맹약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와아아!"
"선장님 만세!"
"노예들도 모두 평민이 되어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와아아! 로자레일님 만세!"
포로 6 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한다.
벤쿠르마가 딱히 못되게 군 것은 아니었지만, 벤쿠르마는 신분의
고하를 중요시 했고, 공포로 다스렸기에 이렇듯 기뻐하는 것이다.
설사 기쁘지 않더라도 그런 티를 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저리들 기뻐하니, 저들을 다루느라 애를 먹지는 않겠구만!"
말론이 만족스럽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포로들은 어쩔텐가?"
"고향으로 돌려 보내야지요. 저들이 이 곳에서 적응 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보아하니 높은 신분의 사람도 몇 명 있는 것 같네.
자비심을 베푸려다가 되려 당하는 수도 있어."
말론의 말에 로자레일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은 돌려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들의 목을 베어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자네 말이 맞네. 죄없는 이들의 목숨을 취할 수야 없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론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 잡혀온
이들 중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꼬마가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벤쿠르마가 몸값을 받으려 데려온 모양인데, 지금에서 와서는
샹황이 바뀌어, 로자레일은 몸값을 받아 낼 생각이 전혀 없고 단지
고향으로 되돌려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다른 포로들도
마찬가지로 돌려 보낼 생각이지만, 평민들과는 다르게 귀족의 경우는
문제가 될 여지가 충분히 남아있었다. 그것은 비록 머리가 바뀌어
로자레일이 더이상 해적질을 하지 않을 속셈이더라도 그 밑의 선원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강탈한 해적임은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 뜻에 따라야지. 이제는 자네가 이 섬의
주인이 아닌가?"
"탐나지 않는 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저보다는 어르신이 선장이 되시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어허, 이 사람도 참! 선원들이 모두 자네를 인정하고 있네!
게다가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네를 인정하는 분위기야! 이래도
안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참으로 답답하이!"
말론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친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가슴을 치던 말론이 눈을 빛내며 말을 꺼낸다.
"자네가 나를 고향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면, 뱃삭으로 그 배를 주는
것으로 하겠네! 선원들도 다 자네 부하이고 나 혼자 힘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조차 못내는 참이니, 정당한 거래일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르신을 고향까지 모셔다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허! 자네가 맺고 끊음이 그렇게 분명하니, 나도 그 식에
따르겠다는 걸세!
그 말에 로자레일이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
"또 무슨 생각을 하나! 이건 정당한 거래래도!"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 일은 그렇게 해결하는 것으로 하겠네. 허허,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구걸을 하는 꼴이구만. 그리고 포로들 일은 내게 맞겨보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로자레일이 말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
보니, 여전히 대화를 나누며 기뻐하고 있었다. 해적들과 노예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마치 가족들 같이 보였다. 죽은 해적들
외에도 젊은 여자 노예들과 가정을 이룬 해적이 더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로자레일의 선언이 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듯 하다.
그들의 만면에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