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I.C.E. 서밋(미국의 유명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의 공기는 언제나 무겁습니다. 업계의 거물들이 모여 지표(Metrics)를 따지고, 수익화(Monetization) 모델을 논하며, 개발 트렌드의 풍향을 읽어내느라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올해, 엄숙했던 컨퍼런스 홀의 분위기는 샌드폴 인터랙티브(Sandfall Interactive)의 리드 라이터 제니퍼 스베드버그-옌(Jennifer Svedberg-Yen)의 등장과 함께 사뭇 달라졌습니다.
그녀가 꺼낸 첫 마디는 거창한 비즈니스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뜻밖에도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소재였습니다. 바로 '팬케이크'입니다.
개발자 스포트라이트 세션의 일환으로 진행된 강연, '엑스페디션 3x3(Expedition 3x3)'은 그녀가 바닥에 편안하게 앉은 채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자유분방한 태도에 강연장 분위기는 더욱 색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녀가 제시한 서사의 템플릿은 간단하게 보였습니다. 창의성을 지탱하는 3가지 요소와 이를 뒷받침하는 3가지 실전 기술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의 무게감은 어려운 용어, 복잡한 시장 전망에 익숙했던 청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스베드버그-옌은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Clair Obscur: Expedition 33)’의 기록적인 성공과 함께 주목받은 차세대 스토리텔러입니다. 이 게임은 스토리텔링, 아트 디렉션, 연기, 그리고 OST까지 모든 면에서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받았습니다. 지난 연말까지 5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더 게임 어워드(TGA) 올해의 게임(GOTY)을 포함해 9관왕을 휩쓸며 연말 결산 리스트를 도배하다시피 했죠.
단, 이날 강연의 주제는 화려한 수상 실적이 아니라 '성장'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창작의 세 가지 요소: 취향, 실행력, 그리고 "하고 싶은 말"

그녀의 '3x3' 모델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핵심은 취향(Taste), 실행력(Execution), 그리고 할 말(Something to say)에서 시작됩니다.
스베드버그-옌에 따르면, '취향'은 비전입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에 대해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죠. 반면 '실행력'은 그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능력인데, 여기서 필연적으로 좌절스러운 격차가 발생합니다. 많은 창작자가 무너지는 지점이 바로 이 둘 사이의 긴장감 속입니다.
"우리의 안목(Taste)은 언제나 실력(Execution)보다 빠르게 진화합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불안감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초보 시절에는 실력과 기대치가 함께 자랍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 안목은 저만치 앞서가 버리고, 창작자는 자신의 비루한 결과물을 마주하게 됩니다. 스베드버그-옌은 그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더 나아지기 위해선, 먼저 엉망진창이 되어봐야 합니다(You’ve got to suck first before you can get better)."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런 산업 서밋 현장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솔직한 발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날 강연의 정점이자 컨퍼런스 기간 내내 회자된 그 유명한 비유가 등장했습니다.
"첫 번째 팬케이크는 '제물'로 바치세요."
모양은 찌그러지고, 두께는 들쭉날쭉하고, 심지어 타버리기도 하는 첫 번째 팬케이크. 하지만 그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녀의 프레임 안에서 실패는 '재능 부족의 증거'가 아니라, '나아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망친 팬케이크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그 다음 장을 구워내는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란?” 대체 불가능한 당신만의 시점
취향과 실행력이 성장의 메커니즘을 설명한다면, 세 번째 기둥인 "할 말(Something to say)"은 철학의 영역입니다. 기술은 공부할 수 있고, 영감은 흡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관점(Perspective)'만큼은 지독하게 개인적입니다.
한 사람의 가진 경험, 편견, 집착, 그리고 감정은 그 누구와도 같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취향을 베낄 수는 있습니다. 당신의 기술을 흉내 낼 수도 있죠. 하지만 당신이 살아온 인생 그 자체를 따라할 수는 없습니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명확한 메시지였습니다. 생성형 AI가 매혹과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시대, 스베드버그-옌은 논점을 '경쟁'에서 '정체성'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도구(AI)는 패턴을 복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의미의 원천은 오직 살아있는 경험에서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정서적, 주제적, 심리적 '진정성(Authenticity)'이 명작을 가르는 기준이 된 내러티브 디자인 분야에서 강렬한 울림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창작을 위한 두 번째 3요소, 호기심, 공감, 그리고 논리
창의성의 내부 설계를 마친 스베드버그-옌은 시선을 밖으로 돌렸습니다. 더 나은 스토리텔링은 키보드 앞이 아닌, 그 너머의 삶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글쓰기 바깥의 삶이 풍요로울수록, 당신의 글도 풍요로워집니다."
흔한 조언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녀는 이를 실전의 영역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일상의 모든 것이 아이디어를 위한 '비옥한 토양'이 됩니다. 관찰, 대화, 좌절, 관계… 이 모든 것은 창작의 방해물이 아니라 원재료입니다. 여기서 그녀가 제시한 두 번째 3요소, 호기심(Curiosity), 공감(Empathy), 논리(Logic)가 등장합니다.
호기심이란? 양파의 껍질을 벗겨라

그녀에게 호기심은 서사의 깊이를 만드는 엔진입니다. 끊임없이 "왜(Why)"를 묻는 습관이죠. 시스템은 왜 이렇게 작동하는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반응하는가? 세상은 왜 이런 모습인가?
호기심은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인 심문(Interrogation)입니다. 스토리텔러에게 이런 사고방식은 평범한 관찰을 서사적 뼈대로 탈바꿈시킵니다. 스쳐 지나가는 상호작용은 캐릭터 연구가 되고, 사회적 갈등은 주제 의식이 되며,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은 세계관의 질감(Texture)이 됩니다.
그녀는 호기심이 잡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어디서든 이야기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감각을 기르는 일'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공감이란? 모든 캐릭터를 변호해라
호기심이 탐구를 이끈다면, 공감은 묘사를 지배합니다. 스베드버그-옌은 캐릭터 집필을 '인형 놀이'가 아닌 '변호(Advocacy)'라고 표현했습니다. 악역이라 할지라도 내적 정합성을 갖춰야 합니다. 외부에서 볼 때 아무리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동기일지라도, 그들의 세계관 내부에서는 감정적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하지만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는, 우리 중 누군가는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악당'이 되기도 하죠."
따라서 공감은 입체성을 만드는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캐릭터는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욕망과 두려움, 자기합리화를 가진 심리적 실체로 거듭납니다. 이는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가 주제적 뉘앙스와 정서적 성숙함으로 극찬받았던 이유를 잘 설명해줍니다.
논리란? 세계관을 유지해주는 기둥
의외로 가장 강조한 부분은 논리였습니다. 그녀는 이를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저평가 받는 요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게임이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주인공의 모험에 몰입합니다. 이것을 '불신의 유예'라고 부르죠. 하지만 이 몰입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게임 속 세상이 자기만의 규칙을 일관되게 지키는 것입니다. 마법이 나오는 세상이라도 그 안에서 정해진 규칙이 무너지면, 유저들은 금세 "말도 안 돼"라며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결국, 탄탄한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플레이어는 비로소 안심하고 그 가짜 세상에 푹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녀가 지적한 '나쁜 서사'는 화면 밖으로 나가면 존재가 증발해 버리는 캐릭터, 동기가 아니라 '플롯의 편의'에 의해 움직이는 행동, 오로지 설명만 하는 대사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녀는 좋은 서사 구조란 "이 일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저 일이 일어난다(and then)"의 나열이 아니라고 역설했습니다. 핵심은 인과관계입니다. "이 일이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Therefore)' 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But)' 이번엔 이런 일이 닥친다…."
미묘하지만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논리는 창의성을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라, 몰입을 가능케 하는 안전장치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아

이 세션이 특별했던 건 개념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그 명료함 때문이었습니다. 호기심은 이해를 깊게 하고, 공감은 관점을 인간적으로 만들며, 논리는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개발자들이 직관적으로는 알지만 형식화하기 어려워했던 원칙들입니다. 이들이 합쳐질 때 관객들은 비로소 '영혼(Soul)'이 있다고 느낍니다.
강연의 마지막 메시지는 다시 '팬케이크'의 정서로 돌아왔습니다. 안목이 실력보다 빨리 자라는 탓에, 창작자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가장 가혹한 비평가가 되곤 합니다. 자기 의심(Self-doubt)은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라,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느끼는 감정입니다.
"자신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세요. 멈추지만 않으면 됩니다."
D.I.C.E.를 새롭게 만든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강연은 이번 서밋의 달라진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습니다. 기술적 심층 분석과 비즈니스 분석이 주가 되는 무대에서, 창작의 정체성, 작가주의, 정서적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니퍼 스베드버그-옌의 존재, 그리고 ‘33원정대’의 성공은 내러티브 크래프트(Narrative Craft)가 더 이상 보조적인 역할이 아니라, 현대 게임 개발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니퍼 스베드버그-옌은 이날 실패에 대한 분석을 이야기 하지 않았고, 성공에 대한 경험담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겸손과 관찰, 끈기에 기반한 창작 철학을 공유했습니다.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는 올해 가장 많은 상을 받은 게임일지 모릅니다. 그런 게임의 리드 라이터가 주는 메시지는 놀라울 만큼 꾸밈 없었습니다.
망한 팬케이크를 구워라. 왜 망했는지 배워라. 그리고 다시 구워라.
"최첨단 기술과 미래를 논하는 화려한 무대였지만, 그녀는 결국 모든 위대한 진보가 '가장 서툴고 두려운 첫걸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었습니다."
바로 '시도(Trying)'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