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어 주도성'이 빚어낸 게임과 영화 내러티브 작법의 차이

게임뉴스 | 윤서호, John Popko 기자 | 댓글: 1개 |



GDC와 더불어 대표적인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로 손꼽히는 D.I.C.E. 서밋이 현지 시각으로 12일 라스베가스에서 진행됐다. 올해 최다 GOTY 수상작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의 개발사 샌드폴 인터랙티브를 비롯해 세계 각지의 개발사와 업계인들이 집결한 가운데, 사이키델릭한 락 밴드 기타리스트 출신의 게임 디렉터 '조니 갈바트론'이 D.I.C.E. 서밋 무대로 올랐다.

첫 작품 '더 아트풀 이스케이프'로 BAFTA 어워드 2022 아트 부문에서 수상한 그는 2026년 또다른 신작 '믹스테이프'를 준비하고 있다. '믹스테이프'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세 친구가 함께 여정을 떠나는 과정을 그려낸 어드벤처 게임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악과 에피소드 그리고 청춘의 상상을 담아낸 것이 특징이다.

스토리 중심의 어드벤쳐를 내세운 그는 이번 D.I.C.E 서밋에서 '캐릭터 아크: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 무너지는 이유'라는 도발적인 주제로 연단에 나섰다.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이 왜 인터랙티브 캐릭터에 적용할 때 실패하게 되는지,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발표에 나섰다.


록 무대에서 서사 시스템으로


조니 갈바트론이 게임 개발을 하게 된 계기는 비선형적이었다. 게임 개발사 '베토벤&다이너소어'를 설립하기 전, 그는 호주의 록 밴드 '더 갈바트론스'의 리더였다. 워너 브라더스와 10년 가까이 계약을 맺었으며, 투어 공연을 할 정도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게임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작은 인터랙티브 프로젝트를 만지작거리면서 글과 기획을 다듬어갔다.

이후 그는 밴드를 나와 '베토벤&다이너소어' 설립 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정체성과 예술적 재발명을 다룬 글램 록 오디세이, '더 아트풀 이스케이프'를 2021년 출시한다. 이 작품은 10개 이상의 시상식 후보에 올랐으며, 게임에서 보기 드문 노골적인 감상주의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차기작 '믹스테이프'도 그 궤적을 잇는다. 세 친구의 고등학교 졸업 전날 밤을 배경으로 한 이 게임은 교외 거리를 스케이트보드로 누비고, 폐쇄된 테마파크에 숨어들고, 차를 타고 불꽃놀이를 보는 등 일상과 약간의 일탈 사이를 오간다. 그 사이사이 향수, 온기, 그리고 목적 없는 장난기 같은 분위기가 일관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것이 핵심이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수동적인 관찰자지만, 게임에서는 상호작용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영화와 게임의 내러티브가 달라지고, 전통적인 스토리 전개에 문제가 생긴다고 보았다.


플레이어의 폭주





갈바트론은 자신의 논점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학도라면 익숙할 세 가지 캐릭터 아크를 제시했다. 긍정적 변화 아크(성장), 부정적 변화 아크(타락), 그리고 플랫 아크(불변)다.

긍정적 변화 아크는 설명이 필요 없다. 결함 있는 캐릭터가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고군분투 끝에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레이디 버드'부터 '록키'까지 모든 작품의 토대가 되는 구조다. 관객이 주인공의 실패를 견뎌내야만 카타르시스가 찾아오기에 드라마적으로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관객이 아니다. 갈바트론은 무대를 거닐며 "문제는 항상 똑같다. 바로 플레이어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보드카와 미덕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게임에서 그 선택은 종종 버튼 입력이 된다. 고뇌는 이진법적인 선택으로 허물어진다. 주인공이 결함 있게 설계되어 있어도, 플레이어는 본능적으로 그 결함을 즉시 수정하려 든다. 긴 호흡의 반성은 없고, 오직 최적화만 존재할 뿐이다.

갈바트론은 첫 플레이에서 '악 성향'을 선택하는 플레이어는 3~5%에 불과하다는 데이터를 인용했다. 압도적인 다수는 긍정적인 결과를 원한다. 그들은 돕고 싶어 하고, 무언가를 고치고 싶어 한다. 이는 곧 주인공의 결함마저 고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인 아크는 캐릭터의 무력함에 의존하지만, 게임은 개입할 권능을 부여한다.


플랫 아크(Flat Arc)를 위한 변론





갈바트론이 제안한 해결책은 서사의 복잡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 서사를 이끌어갈지 재고하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주인공에게 강제로 변화를 강요하는 대신, 그는 이른바 '플랫 아크' 캐릭터를 옹호했다.

플랫 아크 주인공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아주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세상을 자신에 맞춰 변화시킨다. 그는 그 예로 영화 '페리스의 해방(1986)' 속 주인고 페리스 뷸러가 친구 캐머런의 반항을 이끌어내는 과정과, '패딩턴 베어'가 그 다정함으로 냉소적인 런던 사람들을 변화시켜가는 과정을 들었다. 이 캐릭터들은 닻이자 촉매제이며 관찰자다.

갈바트론은 이 모델이 플레이어 심리와 자연스럽게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플레이어는 이미 도덕적 우월감과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플랫 아크 주인공은 처음부터 온전하기 때문에 '수정'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안정성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렌즈가 된다.

중요한 것은 플랫 아크 캐릭터가 백지 상태나 목소리 없는 아바타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들은 텅 빈 그릇이 아니다.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타락에 저항한다. 그들의 반항은 성장이 아니라 '일관성'에서 나온다.

이러한 구분은 플레이어가 정의하는 RPG 주인공이 주류인 시대에 특히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커스터마이징 가능한 영웅은 자유를 주지만, 작가의 관점을 희석하곤 한다. 갈바트론의 플랫 아크는 정반대다. 캐릭터가 너무나 뚜렷하게 정의되어 있어서, 그 존재만으로도 세상과 마찰을 일으킨다.


디자인 철학으로서의 향수





갈바트론에게 있어 '더 아트풀 이스케이프'가 자기 재발명에 관한 것이었다면, '믹스테이프'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기억은 본질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10대 시절을 바꿀 수는 없다. 그저 다시 방문할 뿐이다.

그래서 '믹스테이프'에서는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진화를 그리는 대신, 플레이어를 큐레이팅된 순간들 속으로 초대한다. 부드럽고, 사색적이며, 장난기 넘치는 캐릭터의 세계관이 중심을 잡는다. 플레이어는 사춘기를 '수정'하는 게 아니라 다시 체험한다.

조이 디비전부터 이기 팝에 이르는 라이선스 음악의 강조도 이를 뒷받침한다. 향수를 자극하는 트랙들은 플레이어에게 역사를 새로 쓰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분위기를 조성하고 감정의 맥락을 짚어줄 뿐이다.

갈바트론의 게임은 기계적인 숙련도보다는 감정적인 질감을 다룬다. '믹스테이프'의 설명조차 특징 목록이라기보다 일기장처럼 읽힌다. '어울려 놀기, 몰래 빠져나가기, 키스하기, 법망 피하기' 같은 식이다. 이런 명령조의 톤은 D.I.C.E.에서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게임은 영화적 아크를 흉내 내지 않고도 충분히 체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용한 반란


D.I.C.E. 서밋의 세션들은 보통 AI, 수익화, 라이브 서비스 파이프라인 같은 기술적인 주제를 다루는 반면, 갈바트론은 스토리텔링과 구조 그리고 영화에서 빌려온 문법이 인터랙티브 매체에 유효한지를 되물었다. 그에 대해 그는 "플랫 아크를 고려해 보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만약 게임에 영화적인 감정적 가설대가 필요 없다면 어떨까? 플레이어의 주도성이 서사의 장애물이 아니라 실마리라면 어떨까?

업계의 역사는 도덕성 시스템부터 정교하게 짜인 스크립트의 대작들까지, 작가 중심의 스토리텔링 실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가장 영화적인 게임들조차 갈바트론이 묘사한 긴장감과 싸우고 있다. 플레이어는 영화 주인공처럼 고통받도록 강요받을 수 없다. 그들은 불러오기를 하고, 다시 시도하고, 설정을 덮어쓴다.

갈바트론의 관점에서 플랫 아크 주인공은 이러한 현실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선택이었다.


무대를 내려오며





발표를 마치면서 그는 AI가 나타나 작가가 필요 없다고 알려주는 상상 속의 상황을 연출했다. 최근 개발자 사이에서 공유되는 불안감뿐만 아니라, 게임 디렉터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고민을 보여줬다. 영화 감독은 관점을 지휘하지만, 디렉터는 그 관점을 향해 협상해나간다. 캐릭터가 변화하는 아크의 힘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 아크 역시도 도구라는 점도 상기시켰다. 즉 게임이라는 인터랙티브한 매체에서, 때로는 도구나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갈바트론은 이러한 실험을 '더 아트풀 이스케이프'에 이어 올해 출시할 신작 '믹스테이프'에서도 이어나갈 예정이다. 스토리텔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서로 돕고 치유하며 나아가려는 플레이어 본연의 욕구를 토대로 이야기의 무대를 제시하고 플레이어 중심으로 구부려뜨려가는 방식으로 또다른 체험을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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