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D.I.C.E. 서밋에서 엠바크 스튜디오의 디자인 디렉터 버질 왓킨스는 무대에 올라, ‘내어줌’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여기서 말하는 내어줌이란, 어떤 게임이든 그 안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재구성된다는 전제 아래, 그들에게 통제권을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설계하기 – 소셜 플레이의 직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번 세션에서 왓킨스는 아크 레이더스를 관통하는 개발 철학을 짚으며, 게임에서 가장 강력한 순간은 대본이 아니라 인간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나온다고 확신했다.
세션은 포스트모템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엠바크 스튜디오가 시스템적 혼돈, 플레이어 주도성, 그리고 창발적 스토리텔링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드러내는 사례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다. 왓킨스는 개발자의 전능함을 말하지 않았으며, 불확실성을 위험 요소가 아닌 설계의 기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개발자가 쓰지 않은 이야기를 위한 무대 마련
왓킨스는 하나의 단순한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플레이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순간은, 어떤 디자이너도 사전에 설계할 수 없었던 순간이라는 점이다. 경쟁 슈터에서의 결정적인 콜아웃, 아늑한 건설 게임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진 건축 협업, 혹은 PvP 서바이벌 게임에서 벌어진 매복 작전과 그 실패까지, 이 모든 순간은 플레이어들 스스로가 함께 엮어낸 개인적 서사의 가지들을 이룬다.
그는 이러한 순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요소로 ‘다른 인간의 존재’를 꼽았다. 다른 인간이 존재함으로서 어떤 시스템이든 변동성이 생기고, 결과를 개발자의 완전한 통제 밖에 영원히 머물게 만든다는 것이다. 왓킨스는 “플레이어가 무엇을 할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아름다움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아크 레이더스’에서 팀이 추구한 것은 경험을 대본처럼 써 내려가는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러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서로를 그리고 개발자들마저 놀라게 할 수 있도록, 도구와 제약, 그리고 기회로 가득한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이었다.
‘만약에?’라는 사고방식
왓킨스 강연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주제 중 하나는, 그가 농담처럼 표현한 “거절하기엔 우리가 너무 멍청해서”라는 엠바크 스튜디오의 태도였다. 웃음을 자아내는 표현이었지만, 그 이면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했다. 시스템 단위의 실험은, 보기 좋게 실패할 수도 있는 아이디어까지 기꺼이 밀어붙일 의지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왓킨스는 초기 프로토타입 단계에서 던졌던 질문들을 소개했다. 적 유형을 전면적인 물리 시뮬레이션 기반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전투 도중 사지를 잃더라도 상황에 맞게 행동을 바꾸도록 만들 수 있을지, 나아가 플레이어가 그 위에 올라타거나 매달려 이동하고, 심지어 거대한 기계를 유도해 맵 곳곳을 뛰어다니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이 논의됐다.
대부분의 스튜디오라면 이러한 발상은 브레인스토밍 문서 속에 머물다 사라지기 쉽다. 그러나 엠바크 스튜디오에서는 실제 플레이 가능한 빌드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때로는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큰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팀이 다시 정리해야 할 혼란을 낳기도 한다는 점도 함께 언급됐다. 이 같은 접근이 예측 불가능성을 동반한다는 사실 역시 숨기지 않았다. 적이 바위에 걸려 넘어지고, 문에 끼이며, 벽에 튕겨 나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로봇이 스스로를 허공 밖으로 날려 보내버리는 장면도 연출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스템이 ‘엇나가도록’ 두는 태도야말로, 창발적 플레이가 자라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낸다고 강조됐다.
정해진 방법이 아닌 플레이어 주도성을 위한 설계
왓킨스는 ‘아크 레이더스’의 핵심 설계 가치 중 하나로 플레이어의 선택과 주도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개발팀이 플레이어가 전투 상황이나 다른 플레이어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미리 규정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서로 싸우라고 직접 지시하지 않으며, PvP 역시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동기에서 비롯되는 형태로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레벨 디자인과 기상 조건, 적 구성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상황 자체는 설계하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풀어낼지에 대한 해답까지 규정하지는 않는 구조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설계 방향은 특히 플레이어 간 상호작용이 경험의 핵심을 이루는 멀티플레이 환경에서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왓킨스는 설명했다. 등반, 슬라이딩, 다이빙, 근접 음성 채팅, 물리 기반 이동과 같은 요소들은 플레이어가 자신만의 접근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고 그는 짚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스템은 결과가 아니라 규칙의 측면에서 예측 가능하게 맞물려 작동하며, 이를 통해 플레이어 스스로 또 다른 ‘만약에?’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철학은 스튜디오 전반의 작업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시스템이 ‘가차 없는 결과’를 허용할 때, 플레이어는 협력적이든 대립적이든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혼돈이 자신의 관객을 만날 때
엠바크 스튜디오의 목표가 대본 없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면, 실제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그들이 가장 낙관적으로 기대했던 수준마저 넘어섰다고 왓킨스는 설명했다. 그는 ‘아크 레이더스’에서 실제로 벌어진 여러 플레이어 주도 사건들을 사례로 소개했는데, 그 하나하나가 점점 더 믿기 어려운 방향으로 확장됐다고 강조했다.
커뮤니티에서는 근접 무기만으로 진행된 서버 단위 보스 토벌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고, 자발적으로 탈출을 돕는 가이드 활동이 조직되기도 했으며, 수다스러운 한 ‘땅콩’을 계기로 촉발된 대규모 세력 간 교전까지 벌어졌다고 전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사전에 계획된 순간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모두 ‘아크 레이더스’를 규정하는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고 왓킨스는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사건들을 자부심과 놀라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소개했다. 개발팀에게 이 사례들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향후 시스템 설계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일종의 피드백 신호로 받아들여졌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 혼돈과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줬습니다”라고 왓킨스는 말하며, “그리고 다행히도, 그 대가로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표현의 도구를 확장하다
왓킨스는 창발적으로 나타난 플레이어 행동에 대해, 엠바크 스튜디오가 종종 ‘더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플레이 가능한 플루트 같은 요소를 플레이어들이 좋아했다면, 개발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아예 하나의 앙상블을 추가해보는 건 어떨까?”라는 식의 발상을 이어갔다고 전했다.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재미 요소로 작용했다면, 번개 낙하나 혹한의 폭풍이 실제로 플레이어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이 된다면 어떤 경험이 만들어질지도 고민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아크 드론을 둘러싼 플레이어들의 호기심이 확산되자, 개발팀은 점프하고, 폭발하며,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문까지 열 수 있는 드론 실험으로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철학은 ‘아크 레이더스’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일방적 비전이 아니라, 커뮤니티와의 공동 창작을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방향으로 이끈다고 왓킨스는 설명했다. 성장과 제작 같은 시스템 역시 게임의 핵심이라기보다는, 플레이어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장 매력적이고도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을 떠받치는 구조적 기반으로 기능하도록 설계돼 있다고 강조했다.
“만약에?”라는 질문 위에 세워진 스튜디오 문화
강연 전반에 걸쳐 왓킨스는 엠바크 스튜디오가 이처럼 야심 차고 때로는 혼돈에 가까운 발상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조직 문화의 가치들을 거듭 언급했다. 팀 내부의 신뢰, 비정형적 해법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개인의 열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태도가 개발 과정 전반을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아크 레이더스’의 핵심 축으로 여겨지는 일부 기능, 핑 시스템, 근접 음성 채팅, ARC 드론 역시 개별 개발자의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그는 밝혔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 한 명의 개발자가 아이디어 구상부터 실제 구현까지 밀어붙인 사례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내부적 자유도는 특정 프로젝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도 언급됐다. 왓킨스는 엠바크 스튜디오가 지향하는 더 큰 방향성으로 파괴 가능한 환경, 물리 기반 상호작용, 나아가 게임쇼 형식에 가까운 구조까지 짧게 짚었다. 어떤 발상도 지나치게 기이하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는 설명이다.
“만약 모든 것을 11까지 끌어올린다면 어떨까요?”라고 그는 반문했다.
모든 것의 중심에 놓인 인간이라는 요소
기술적 실험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크 레이더스’는 본질적으로 사람에 관한 게임이라고 왓킨스는 강조했다. 동맹을 맺고, 그것을 깨뜨리거나, 고무 오리를 찾다 “정말 별난 그 사람”을 마주치는 순간까지 이 모든 경험의 중심에는 인간 간 상호작용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플레이어는 상황에 맞춰 적응하고, 배신하고, 협력하며,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함께 어울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들은 개발자가 결코 써낼 수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왓킨스는 설명했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그는 방대한 플레이어 반응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한편, 이러한 대본 없는 서사를 앞으로도 계속 확장해 나가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중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우리가 플레이어가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와 서로를 위해 더 많은 도구와 선택지를 제공한다면 어떨까요?”
소셜 플레이의 미래를 비추는 시선
왓킨스의 강연은 단순히 ‘아크 레이더스’를 조명하는 자리에 그치지 않고, 업계 전반을 향한 하나의 메시지로도 제시됐다. 그는 소셜 플레이를 설계한다는 것은 결국 통제의 일부를 내려놓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의미 있는 멀티플레이 경험의 미래는 치밀하게 각본화된 순간보다는, 플레이어가 서로를 놀라게 할 수 있는 자유와 도구를 제공하는 데 더 크게 좌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엠바크 스튜디오와 같은 개발사에게 이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다소 엉뚱해 보이는 발상까지 추적하며,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디어의 문을 닫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때로는 작동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시스템이야말로, 플레이어 커뮤니티가 수년간 회자하는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설명이다.
또한 플레이어가 진정성과 연결감을 갈망하는 환경 속에서,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인간 주도의 순간들이야말로 게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크 레이더스’가 보여주는 사례를 보면, 예측 불가능성은 관리해야 할 위협이 아니라 소셜 플레이를 구성하는 직물 그 자체에 가깝다고 말하며, 왓킨스는 강연을 마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