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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가로등과 별: 사랑하는 소녀와 가면의 용병 1화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9 개
조회: 3075
추천: 18
2016-06-18 21:48:33
(이래뵈도 30분 걸린 잭스 면상)

챕터 1: 전장의 안개


#. 잭스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가 싶더니 잭스의 눈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돌로 만든 투박한 제단 곳곳에선 고대의 마법문자들이 형형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 멀리선 커다란 수정을 깎아 만든 듯한 억제기와 포탑들이 넥서스를 호위하듯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시간의 흐름 따윈 잊을 듯 느릿하게 돌고 있는 넥서스의 수정에 잠시 머물렀다가 하늘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였다.


 몸풀기엔 좋은 날씨군.


 잭스는 목을 이쪽저쪽으로 꺾으며 생각했다. 요즘들어 너무 낚시에만 집중하느라 움직이질 않아서인지 몸이 굳은 느낌이 들었는데, 협곡으로 소환되자마자 그는 몸이 가벼워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상 싸움꾼 체질이라 이건가-잭스는 가면 밖으로도 새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고선 왼손에 쥐고 있던 가로등을 가볍게 돌렸다. 단지 가벼운 동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황동제 가로등은 붕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다. 자칭, 타칭 무기의 달인이라 불리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한 한낱 황동으로 만든 가로등이라 해도 공성추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잭스?

 “아주 잘 들리오. 고맙소, 베사리아.”


 차분하고 청아한 느낌의 음성.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쟁 학회의 상임 의원 중 한 명인 베사리아 콜민예였다. 보통 그 정도-아니 그보다 훨씬 낮은 지위에 있는 소환사라도 거들먹거리는 꼴을, 잭스는 수도 없이 보고 때로는 직접 당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베사리아 콜민예 상임 의원은 그 지위에 걸맞는 격식과 교양을 지니고, 실력만큼이나 상냥하면서 빼어난 외모는 덤으로 가지고 있기로 유명했다.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엔 잭스에 대한 염려와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잭스. 원래대로라면 데마시아의 챔피언인 가렌이 소환될 예정이었습니다만, 챔피언 측에서 긴급한 용무가 생겼다고 출전을 취소했어요. 규정 상 챔피언의 개인적인 용무로 소환을 거부할 수는 없도록 되어있지만 자르반 황태자가 전쟁 학회로 직접 찾아와서 취소 요청을 해버리는 바람에…….

 “자르반? 그도 챔피언 아니었나?”

 -네. 하지만 ‘챔피언’으로서의 자르반 4세가 아니라 ‘데마시아의 황태자’인 자르반 4세로 전쟁 학회에 찾아왔다는 점이 문제였죠. ‘그는 챔피언이기 이전에 데마시아의 장군이오. 소환도 중요하지만 임무가 먼저지.’라니, 하!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하지만 황태자가 직접 왔는데 거절해서 돌려보내면, 데마시아에서 전쟁 학회의 평판이 안좋아지겠죠. 어쨌거나 가렌 경과 자르반 4세는 데마시아가 자랑하는 ‘정의의 아군’ 이니까요.


 어지간히도 쌓여있는게 많았던지 베사리아는 자르반 4세의 말투까지 흉내내어 가며 열변을 토했다. 그녀는 마음을 연 사람들에게만 평소의 고고한 모습과는 다른, 소위 ‘깨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잭스도 그녀가 마음을 연 몇 안되는 인물 중에 하나였다.


 -이번 리그에선 녹서스와 데마시아 간의 작은 분쟁 하나가 걸려있어서 다른 국가나 다른 도시 출신의 챔피언들은 미리 출전을 거부했어요. 괜히 앙숙 사이에 껴서 난감한 처지가 되기 싫다는 생각들이겠죠. 가렌 경이 소환을 거부한게 어떤 이유때문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잭스가 대신 소환된거에요. 당신은 소속된 집단이 없는 자유 용병이라는 신분이니까요.

 “놀랍군. 챔피언 소환 뒤에 그렇게 복잡한 사정이 숨어있을 줄이야.”

 -국가 대 국가의 분쟁이 걸린 리그는 항상 이래요…….


 잭스가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베사리아가 기운없이 대꾸했다. 그는 수정구를 앞에 두고 이마를 매만지며 골치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베사리아의 모습을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잭스는 문득 생각난 사실 하나를 베사리아에게 전했다.


 “그런데 당신 정도되는 실력자가 리그에 참여하면 형평성이 깨지는 것 아니오? 상임 의원이 리그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얘깃거리가 될텐데.”

 -녹서스 측에도 맨드레이크 상임 의원이 출전하니까 형평성 문제는 괜찮을 테지만……. 그래요, 잭스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최근 리그의 전장으로 쓰이는 뒤틀린 숲과 캘러멘다 광산 마을, 칼바람 나락에 여러 문제들이 생겨서 소환사들이 대거 투입되는 바람에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졌어요. 그래서 저희 상임 의원들까지 출전하게 된……. 아아! 이 얘기는 그만하죠, 잭스. 이 얘기만 하면 보고서 두루마리의 산 때문에 내려앉을 것만 같은 제 책상이 생각나거든요. 자, 이제 그만 리그에 집중해요. 우리는 파란색 진영이군요. 다른 챔피언들을 한 번 볼까요?


 ‘꼭 내가 방해했다는 듯이 들리는군’ 이라며 투덜대는 잭스의 고개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적응 안되는 느낌이긴 했지만, 소환사의 협곡에서 챔피언은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소환사에게 맡겨야하기 때문에 잭스는 거부하지 않고 힘을 뺐다. 이동하거나 장비를 사거나 기술을 쓰는 건 소환사의 몫이었지만, 무기를 휘두르는 등의 세세한 조작은 잭스 본인의 의지에 있었다. 그렇다 해도 직접 움직이는 것에 비해 영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베사리아 정도의 실력자가 자신의 소환사라는 것에 잭스는 어느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라면 멍청하기 그지없는 하급 소환사들처럼 상대 진영 다섯 명이 모여있는 곳으로 무작정 돌진하는 등의 멍청한 명령은 내리지 않을테니까. 그거 하나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가면 속에 숨겨진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하지만 정밀하고 날카롭게 챔피언들을 훑어봤다. 반인반룡이라 알려진 쉬바나, 크라운가드의 빛의 마법사 럭산나, 데마시아 귀족 출신의 쇼나 베인, 그리고-그녀가 있었다. 소나 부벨로. 발로란 대륙의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전설적인 음악가이자 아리따운 아가씨. 도깨비불같이 희미한 푸른빛이 흘러나오는 가면 아래에서, 잭스의 입가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뒤틀렸다.

 그는 소나 부벨로라는 챔피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톱만큼도.


 -어머, 소나 양이 리그에 출전한 건 오랜만이네요. 부벨로 부인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리그 출전 허락을 해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베사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잭스는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잭스는 그녀가 가녀린 소녀라서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다, 따위의 고루한 사상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전쟁터를 거치며 수라와도 같은 삶을 살아왔고, 적의 성별과 노소에 관계없이 잭스는 온 힘을 다해 상대를 때려눕히고 때때로는 죽여왔다. 전쟁터야말로 그에게 성과 나이에 차별을 둬선 안된다는 교훈을 가르쳐준 가장 의미깊은 곳이었다. 잭스가 타인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실력이었고, 그게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평가 기준에도 예외라는 항목은 존재했다. 잭스가 이 협곡에서 그녀를 만난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만날 때마다 소나는 에뜨왈이라는 악기의 현을 몇 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챔피언에게 활력을 불어넣는가 하면 매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마력의 칼날을 적에게 날리는 등 섬세하고도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 경우엔 문제는 그녀의 실력이 아니었다.


 잭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에게선 피냄새가 나질 않았다.


 소나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이, 심지어 아직 애송이 티를 채 벗지도 못한 크라운가드의 꼬마 숙녀마저도 손에 피를 묻혀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생명을 해한 적이 있는 자들은, 그로서 자신의 힘이 가진 무게를 실감한 자들은 그 눈빛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소나에게선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도 결의도 보이지 않았다. 잭스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언뜻언뜻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는 사람만큼 잭스가 경멸하는 대상도 없었다.


 -의외네요, 잭스. 당신이 다른 챔피언들에 대해 호불호를 가리는 경우도 있었나요? 그토록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대상이 여리디 여린 소나 양이라니, 참 당신은 알면 알수록 희안한 취향을 가지고 있네요.

 “…베사리아, 아무리 소환사와 챔피언이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는다고 해도 그런 세세한 감정까지 읽진 말아줬음 좋겠소. 나도 개인적인 견해라는게 있으니까.”


 자신의 감정을 읽혔다는 사실이 불쾌한지 잭스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베사리아는 잭스의 그런 태도가 재미있는지 빙글거리는 목소리로 더 박차를 가했다.


 -그야 좋은 감정이건 나쁜 감정이건 잭스가 여성분에게 관심을 보인다는게 너무 의외라서말이죠. 싸움과 낚시 외엔 관심이 하나도 없는 줄 알았거든요. 호호, 남자아이들은 좋은 감정이 있는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을 사려고 일부러 못되게 군다는데 혹시 잭스도 그런 타입인가요?

 “난 애가 아니오, 베사리아. 그런 취미는 더더욱 없고. 단지-”


 잭스는 못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선 미니언의 뒤를 따라 자신의 라인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면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푸른 불빛이 그의 뒤로 희미한 궤적을 그리며 사라졌다. 발걸음을 옮기며 잭스는 자신의 가면에서 흘러나오는 빛만큼이나 희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단지 난, 소나라는 소녀는 챔피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잭스는 소나의 청각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예민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떠나가는 그의 등에는-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는 소나의 시선이 머물러있었다. 오래도록. 그가 그녀의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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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 그린 정성 봐서라도 봐주시면 감사.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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