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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외전: 가로등과 검(2)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11 개
조회: 3363
추천: 23
2016-09-06 10:37:04

***


 “자세를 갖춰라, 잭스.”


 피오라가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뽑아들며 입을 열었다. 고양이가 가르랑거리듯, 사르릉 소리를 내며 뽑혀나온 검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검신엔 이 빠진 흔적은커녕 작은 실금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소유주인 피오라가 검을 얼마나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으나…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자세와 기세, 눈빛을 보고 있자면 그녀가 절대로 무기만 번드르르하게 찬 어중이떠중이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고작해야 20살도 안된, 심지어 여자이기까지 한 피오라였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그것 못지않았다.


 대낮같이 환한 연무장 중앙에 서 있는 잭스와 피오라의 모습은 거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낮에 입었던 가죽 갑옷 위에 가문의 문양이 잘 세공된 흉갑과 각반, 팔목 보호대 등을 착용한 피오라는 우아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비스듬히 옆을 향하고 있었고 칼끝은 정확히 그녀의 시선 앞에 놓여져 있었다. 펜싱과 실전 검술을 조합해 만들었다는 로렌트 가문만의 독특한 기본자세-피오라는 자로 잰 듯 그 자세를 정확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반면에 잭스의 모습은 차림새부터 자세까지 불량하기 그지없었다.


 끝자락이 다 해진 망토나 기묘한 문양이 그려진 도복에 어디로 보는건지(그 전에 앞이 보이긴 하는지) 의심스러운 괴상한 가면까지, 그의 모습은 낮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자세는 또 어떤가. 가로등을 품에 안은 채 비딱하게 서 있는 잭스의 모습에선 아예 투지의 건덕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피오라의 입가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조금 씰룩였다. 잭스는 저녁식사 때도 따로 방에서 식사하더니, 심지어 일부러 갈아입으라고 준비해 둔 깨끗한 도복까지 입고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무인으로서 대련에 대한 자부심이 (약간 지나치게)강한 피오라에게 잭스의 태도는 상당히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례하군. 내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모자라, 무인으로서의 예절도 갖추지 않다니.”

 “누구 말처럼 막 굴러먹은 용병이라서 말이지, 귀족 나으리들의 호의는 분에 넘쳐 받을 수가 없더군.”


 구태여 반말이나 찍찍 내뱉는 피오라의 태도 때문이 아니더라도 잭스는 이미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기분이 나빠져 있었기에, 당연히 그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 잭스의 태도에 피오라는 이를 으득하고 갈았지만 애써 노기를 억누르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상대의 태도가 어떻든 신성한 대련의 장이었다. 그녀는 남에게 엄격한만큼 자신에겐 더욱 더 엄격했고, 한때의 감정에 휘둘려 대련을 망칠 정도로 마음의 수양이 얕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세를 가다듬고선 심호흠을 했다.


 “내 쪽에서 가겠다.”

 “그러시던지.”


 잭스의 시큰둥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오라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에서 잡스러운 생각을 모두 지워버리고 오직 눈앞의 상대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지금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오직 잭스의 일거수일투족 뿐. 그를 해부하듯 노려보는 피오라의 암록색 눈동자가 한없이 깊어지는 그 순간-


 피오라의 신형이, 탕 하고 튕기듯 쏘아졌다.


 마치 화살과도 같은 일련의 움직임이었다. 피오라의 검이 잭스의 가슴팍으로 성난 황소처럼 돌진했다. 잭스는 피하는 것보다는 방어를 선택했는지, 슬쩍 발을 뒤로 빼며 가로등을 약간 움직여 칼을 막아냈다. 이제 물러서겠지, 잭스는 대강 그 다음 동작을 예상하며 가로등을 고쳐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피오라는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검을 횡으로 홱 그어버렸고, 그 모습에 잭스는 어이가 없어 픽 코웃음을 치면서 휙 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게 진짜 싸움이라면 그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녀의 얇디얇은 레이피어는 휘두르기에는 좋은 검이 아니었고, 너무 날카로워서 칼날이 금세 상할게 뻔한 무기였다. 그가 물러난 이유는 단지 비싼 무기 날 망가뜨려서 괜한 소리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잭스가 뒤로 물러난게 자신의 기세에 눌렸다고 단단히 착각했는지, 신나서 몰아닥치는 파도처럼 공격을 연거푸 퍼붓기 시작했다. 빠르기도, 정확도도 그리고 검에 실린 무게도-전부 같은 또래에 비한다면야 압도적일 정도로 강했지만 잭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시도였다. 과거 호위 의뢰를 하던 도중 가끔 귀족 나부랭이들의 여흥거리로 대련을 하던 때의 경험을 살려서 그는 적당히 막고, 적당히 피해주며 피오라의 상대를 했다. 그리고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피오라가 다시 한 번 검을 찔러왔다. 물론 그는 가볍게 피했지만,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하압!”

 “……!”


 잭스의 예상과는 달리 피오라는 그 상황에서 다시 한 번 검을 찔러왔다. 도약하는 듯한 연속 찌르기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첫 번째 찌르기 직후 그 불안정한 자세를 단번에 수습하고, 즉시 두 번째 찌르기를 감행하다니. 하지만 그 두 번째 찌르기 역시 잭스는 몸을 슬쩍 비트는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찌르기를 하느라 지나치게 몸을 숙인 피오라의 머리가 바로 잭스 앞에 있었다. 그 순간-그 순간이 마치 그에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죽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대로 왼손의 가로등을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내려치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찰랑이는 검은 머릿결, 자기가 죽을 자리에 머리통을 디밀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여전히 투지를 머금은 암록색 눈동자……그런 피오라의 모습은 잭스에겐 마치 철없는 어린 양처럼 보일 뿐이었다. 갑자기 수레 위에서 꿨던 꿈의 풍경이 잭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코를 마비시킬 듯한 피 냄새, 끔찍하게 죽어 널브러져있던 시체들의 모습이. 다음 순간 그는 피오라가 그 병사들처럼 처참하게 뒤틀리고 부서진 채 피웅덩이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순간 그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 차려라, 잭스. 이건 그냥 어린이 장난에 어울려 주는 것뿐이야-


 “정확하게!”

 카가각!

 “큭!”


 잠깐의 생각은 마치 족쇄처럼 그의 몸을 꽉 붙들었고, 피오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냅다 검을 그어버렸다. 늦게나마 잭스가 고개를 뒤로 젖혔기에 망정이었지 아니었으면 쳐올리는 피오라의 검에 가면이 날아갈 뻔 했다. 잭스가 한 손으로 가면을 잡으며 뒤로 물러서자 피오라는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방금 반응은 뭐냐? 리그 최고의 전사라는 자가 겨우 이 정도인가?”

 “검을 꽤 잘 다루는군. 방금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네.”

 “날 우롱하지마라.” 피오라는 이를 갈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딴생각에 빠져있었으면서 잘도 그렇게 둘러대는군.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군. 왜 돈이나, 아니면 그 알량한 술 한병이라도 쥐어줘야 싸울 생각이 들겠나?”

 “…….”


 잭스는 받아치지 않았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했더라도 피오라의 이죽거림 정도는 코웃음을 치며 되받아쳤을 터였다. 피오라의 이죽거림, 독설은 그를 짜증나게는 할 수 있어도 화나게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지금은 아니었다. 왜 갑자기 그 꿈의 광경에서 봤던 죽은 병사들의 모습이 피오라와 겹쳐 보이는지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때껏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던 베사리아가 잭스의 낌새가 이상한걸 눈치채고 중재하기 위해 둘에게 걸어왔지만, 피오라의 말은 베사리아의 발걸음보다 빨랐다.


 “그래, 그깟 돈 따위야 이 대련이 끝나면 얼마든지 지불하도록 하지. 아니면 그 잘난 술병으로든, 뭐로든 말이야. 자 그럼 의뢰를 하겠다, 용병. 진심으로 싸워라. 전쟁터에서의 싸움을 내게 보여주란 말이다. 내가 잘못 생각했었어, 처음부터 네놈을 한 명의 무인으로 대하는게 아니었거늘. 어차피 네놈은 결국 피 묻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던 용병이었을 뿐이야.”

 “…….”

 “피오라 양, 잭스가 좀 성격이 거칠긴 해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건 아니었을 거예요. 잠깐 휴식시간을 가지는게 어때요? 둘의 대련은 굉장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두분 다 약간 흥분하신 것 같네요.”


 베사리아가 서둘러서 둘 사이로 걸어 들어오며 중재를 시도했지만, 이미 머리에 열이 뻗칠 대로 뻗쳐있는 둘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시도였다.


 아까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이 불편한 기분에 대해 고민하던 잭스는 마침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왜 피오라의 모습이 꿈에 나왔던 죽은 병사들과 겹쳐보였는지도. 그래, 그녀는 전쟁을 몰랐던 것이었다. 한번도 목숨을 건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을 터였다. 한마디로 그녀는 전쟁터에 나가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듯이 돌격하다가 눈먼 마법에 맞아죽기 딱 좋은 예시였다. 그렇기에 그렇게 자신만만한 검술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고, 그토록 자신의 검술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의 검술은 오직 안전이 보장되거나, 아니면 1대 1 결투에서나 유리할 법한 검술이었다. 전쟁터에선 적합한 검술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레이피어라는 무기가 전쟁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기였다. 한마디로 잭스 입장에선 그녀의 행동과 그녀의 검술 모두 어린애 소꿉장난이나 아니면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그것도 아주 야비한 종류의 위선. 자신의 목숨을 걸 전장에 뛰어들 생각따윈 하지도 않고, 안전이 보장된 결투에서 칼싸움이나 해서 이기는 것이 그녀의 검의 목표라면, 자신이 그 목표에 일조해야 한다는 것은 잭스에겐 지독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괜찮소, 콜민예 의원. 뒤로 물러나시오.” 잭스가 슥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여전히 피오라는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잭스는 그런 피오라를 향해 낮게 말했다.

 “전쟁터라 이거지.”

 “그렇다, 용병.”

 “좋아, 그럼 진심으로 하지.”


 잭스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일변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압도적은 기세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농도 짙은 살기와 투지가 피오라의 전신에 화살비가 되어 쏟아졌다. 마치 한 마리 야수를 눈앞에 둔 것 같은 느낌-피오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숨이 턱턱 막힌다’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온 몸으로 체감했다.


 “잘 막아보거라. 뭐 운이 좋으면 팔다리 하나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겠지.”


 잭스의 가면에서 뿜어져나오는 푸른 안개가 흔들렸다-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피오라는 공중을 날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과감없이 말해서 정말로 공중을 날고 있었다. 정확히는 ‘얻어맞아서’ 날아가고 있었다.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움직이는 것조차 보이질 않았는데 피할게 무어란 말인가? 영원과도 같은 찰나, 피오라의 가녀린 몸이 연무장 바닥에 볼썽사납게 콰당 하고 떨어졌다.


 “콜록-”


 피오라는 어디선가 아련하게 잭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머리가 핑핑 돌았다. 손아귀가 찢어져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검은 어느새 손에서 없어진지 오래였다. 아프다기보다는 토할 것 같았다.


 “아직 안 끝났다.”


 뭔가 쿵 하고 자신의 위로 떨어진다고 느낀 순간, 피오라는 자신의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움켜쥐는 거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기괴한 철가면에서 괴기스럽게 피어오르는 새파란 불꽃, 그녀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높이 들어올려진, 마치 불꽃과도 같은 마력을 뿜어내는 가로등도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피가 타버릴 듯한 공포가 그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대련도 뭣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감정은 오직 공포-그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 바로 그것이었다.


 “어떠냐, 전쟁의 체험판을 맛본 감상은? 칼 좀 다룰 줄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네놈이 하는 짓거리는 그냥 소꿉장난이다. 칼을 가지고 논다는게 좀 다를 뿐이지. 자만심과 오만함으로만 가득 차있고, 허울 좋은 긍지로만 똘똘 뭉친 검술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네 검은 실패작이야.”

 “너……! 나를, 내 가문을, 감히 내 검을 모욕, 콜록…….”

 “네 검과 가문이 그리 잘났으면 어디 한 번 말해보거라. 넌 뭘 위해서 강해지려고 하지?”


 피오라는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충격을 받은 눈으로 잭스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수많은 검사들을 꺾고, 명성을 얻고 강해지려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로렌트 가문의 검술이 최고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하지만 그녀가 말문이 막힌 이유는, 그것은 그녀 개인의 소망이 아니라, 로렌트 가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검술 가문에서 공통되는 목적이었다. 정작 자신이 강해지려는 이유를 파고들어가면, 거기엔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만 있지 자신의 소망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데, 분해서 뭐라도 말해서 되받아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그녀는 분한 듯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패배였다.


 “네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 대련이 아니라, 검을 배우려는 네 목적부터 찾는 것이다.” 잭스가 그녀의 목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넌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았고, 죽음에 근접한 위기를 겪어보지도 않았어. 물론 그런 것들을 일부러 겪어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정한 강해지려는 목표 정도는 확실해야 네 검에 실린 무게의 무거움을 깨달을 수 있을게다.”


 피오라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가는귀가 먹은건 아니니까 적당히 알아들었겠지, 대강 그렇게 생각한 잭스는 가로등을 어깨에 걸치고 휘적휘적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베사리아가 등 뒤에서 치졸하다느니 속 좁다느니, 피오라를 부축하면서 온갖 소리를 궁시렁거렸지만 잭스는 싹 무시했다. 그의 얼굴가죽이 가면만큼이나 두꺼워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우가 어찌되었든지 20살도 안된 풋내기를 살짝 진심으로 박살내려고 하질 않나, 괜히 되도 않는 충고를 해주질 않나……. 잭스는 머쓱함에 애꿎은 머리만 벅벅 긁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이렇게 되었으니 포도주는 물 건너갔군.’


 잭스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아쉬워했다. 뭐 피오라에게 미운털이 박힐 짓을 했으면 했지 점수를 딸 짓은 한 적이 없었기에, 포도주는 고사하고 당장 오늘 밤에라도 쫓겨나지 않는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길고 피곤한 하루였다. 그리고 오늘 일을 계기로 잭스는 정말 ‘두 번 다시는’ 데마시아에 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에 어떤 사건을 계기로 만난 소녀와의 인연으로, 다시 이 도시에 발을 들이게 될거란 사실을 이때의 그가 알 리가 없었다.



***



 의외로 잭스는 그날 밤 쫓겨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어제와 다름없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자신에 대한 관심도 놀랄만큼이나 빨리 수그러들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저택에 눌러앉았다. 베사리아도 잭스와 피오라를 핑계로 거의 매일 와서 저녁을 축내곤 했다. 몰래 순간이동용 포탈까지 설치한 걸 보면 아예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로렌트 저택 요리사의 요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거나.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사흘이 지난 저녁, 마침내 피오라에게서 호출을 받은 잭스는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니 그냥 적당히 맞춰서 싸워주고 나올걸 그랬다는 후회감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잭스는 또다시 애꿎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연무장의 풍경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꽤 달랐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 대신 은은하게 빛나는 마법석들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연무장 한가운데엔 웬 하얀 천으로 덮힌 조그마한 식탁이 놓여져 있었다. 더불어 베사리아와 피오라도 함께. 잭스의 좋은 시력을 빌려 묘사해보자면 베사리아는 웃겨 죽겠다는 듯이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었고(잭스의 경험상 허벅지라도 꼬집으며 웃음을 참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그에 반해 피오라는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어머, 어서와요 잭스. 여기, 이리 와서 앉는게 어때요?”

 “…이게 다 뭐요? 식탁은 또 뭐고.”

 “후후, 일단 앉아봐요. 숙녀를 기다리게 하면 안되죠.”


 누가 숙녀라고,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오는 잭스였지만 꾹 눌러 참고 자리에 앉았다. 모든걸 떠나서 제일 의외의 모습을 보이는게 바로 피오라였다. 그녀는 어디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어깨가 훤하게 드러나보이는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것이었다. 머리색에 맞춘 듯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드레스에 붉은 장미 모양 브로치를 단 그녀의 모습은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원체 몸매가 검술과 운동으로 워낙에 잘 다져져 있던 터라 피오라는 드레스의 멋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녀가 평소의 그 날카로운 표정과는 달리 귓불까지 새빨갛게 변할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도 그 아름다움에 한몫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시선에 국한된 감상이었고, 잭스는 피오라가 발가벗지만 않는다면 무슨 옷을 입던지 별 상관이 없었다.


 “며칠만에 만나는 피오라 양인데 어때요?”

 “보아하니 어디 파티에라도 갔다 온 것같이 보이는데, 거 참 미안하게 되었군. 최대한 살살 친다고 친게 그 모양이었어.”

 “잭스! 그런걸 물어보는게 아니잖아요!”

 “…베사리아, 내가 늘 말하지만, 내게 그 소위 ‘여성의 언어’를 이해하도록 강요하지 마시오. 원하는 대답을 받고 싶으면 질문을 구체적으로 하던가. 그나저나 미스 로렌트, 상처는 좀 어떻소?”

 “그거라면 걱정 말아요. 부러진 갈빗대 붙지는 정도야 일도 아니었죠.”

 “아하, 어쩐지 자주 들락날락 하더니만 그에 대한 보답을 핑계로 저녁 먹으러 왔던 거요?”

 “…잭스, 말이라도 좀 예쁘게 할 수 없나요?”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소.”


 잭스는 퉁명스럽게 말하고선 피오라를 바라봤다. 어쨌든 그녀의 호출로 온거니 뭔가 말할게 있지 않겠는가. 잭스가 베사리아의 질문에 대답할 때 왠지 모르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던 그녀는, 뭔가 결심을 굳힌 얼굴로 잭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지,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잭스.”


 …사과했다. 그것도 놀랄 정도로 공손한 목소리로. 잭스는 순간 너무 얼떨떨해서 입을 쩍 벌렸지만, 그게 피오라나 베사리아에게 보일 리가 없었다.


 “미스 로렌트, 내가 그날 당신 머리를 가격한 기억은 없는 걸로 아는데.”

 “아닙니다. 그게, 그러니까…….” 피오라는 뭔가 쓴 약이라도 삼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당신이 제게 말해줬던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강해지려 하는 이유에 대해서요.”

 “…흠, 그래서?”

 “죄송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피오라가 부끄러워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정말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전 아직 경험도 부족하고, 제 오만 때문에 많은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라고 말을 끊은 피오라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잭스를 향해 가슴을 손으로 가리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래서, 당신이 제 스승이 되어줬으면 합니다.”



 “싫소.”

 “감사합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무례를 사과드리며, 앞으로 아무리 힘든 가르침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물론 스승에게 보이는 성의도……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느냐?”


 피오라가 팍 고개를 치켜들며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말투도 평소처럼 그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였다.


 “싫소. 정 스승이 필요하다면 마스터 이나 찾아가보시오. 그 친구도 칼 좀 쓰는 친구니까. 근데 그 친구 성격상 처음 몇 년은 칼이 어쩌고 자연이 어쩌고 하면서 개똥철학만 줄줄이 늘어놓을텐데……. 흠, 뭐 어련히 알아서 하리라 믿소.”

 “아니, 잠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피오라는 베사리아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콜민예 의원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 이, 이렇게만 하면 이 자가 절 제자로 맞아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풉, 아하하하하하! 아니, 피오라 양. 도중에 말해주려고 했는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요! 아니 정말로 설마 그럴 줄은, 아하하하하!”


 테이블을 두드리며 박장대소를 하는 베사리아를 보고 잭스는 대강 사건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나마나 베사리아가 말도 안되는 헛소리로 애 하나 골려먹은게 틀림없었다. 자기보고 치졸하다고 한게 엊그젠데 이런 식으로 애를 놀려먹기나 하고……. 이런 식의 장난은 베사리아가 어느 정도 친한 사람에게만 하는 (의외의)짓궂은 장난이었지만 피오라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걸 알 리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쪽으론 내성이 없는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피오라는 결국 그 공격의 화살을 잭스에게로 돌렸다.


 “네, 네놈! 이 파렴치한 놈 같으니! 숙녀가 고개 숙여 부탁하는데 어찌 그리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아니 그럼 싫다는 걸 싫다고 하지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이오?”

 “크으으, 역시 이런 옷 따윈 입는게 아니었어! 이런 무례하고 저질스러운 남자에게 맨살을 보이다니! 이런 소름끼치는 말투를 쓰다니! 아버님에게도 쓴 적 없는 말투인데!”


 아무래도 피오라에게 예의바른 말투는 소름끼치는 말투로 인식되어지고 있던게 틀림없었다.


 “내게 어쩌다가 저질스럽다는 꼬리표까지 달리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충고 하나 해두자면 베사리아가 웃으면서 해주는 충고는 믿지 않는 편이 좋소. 그게 사근사근한 웃음일수록 더욱 더. 뭐, 덕분에 베사리아만 좋은 꼴 보고 있구려.”

 “아하하, 아하하하하하!”


 말은 안해도 베사리아는 피오라를 이렇게 꾸미기까지의 ‘설득’ 과정에서 어지간히도 웃음을 참았던건지 그야말로 테이블을 쿵쿵 두드리며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웃고나서야 만족한 모양인지 베사리아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테이블 밑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아하하…자, 그럼 잭스와 피오라 양의 화해 기념으로 건배하죠!”


 베사리아에 손에 들린건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붉은 달의 아리아’였다. 아직 미련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었는 듯, 시큰둥하던 잭스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갑자기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호오.”

 “콜민예 의원님! 그건 무효입니다! 전 이 자가 제 스승이 되어준다고 했을 때 그 병을 따려고 했지,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습니다.”

 “어머, 좋은게 좋은거죠. 그리고 잭스가 말은 저렇게 해도, 이렇게 자기가 마시고 싶었던 포도주까지 맛보게 해주는데 설마 피오라 양이 조언을 구하면 모른척 하겠어요? 호호.”

 “베사리아, 누누이 말하지만 당신의 그 낭비벽만 없었어도 이런 사태는…….”

 “어머, 좋은게 좋은거죠~”


 베사리아가 눈을 찡긋하며 말하자 피오라는 난감해 하면서도 ‘안된다’라고 딱 잘라 말하질 못했고, 그 기회를 놓칠 베사리아가 아니었다. 포도주의 코르크마개는 칼집에서 칼 뽑히는 것 마냥 시원스럽게 퐁 소리를 내며 뽑혔고, 어느샌가 세 사람의 잔에는 포도주가 알맞게 따라져 있었다. 이미 딴 병. 피오라는 별 수 없다는 듯 피식하고 웃었다. 요 며칠 베사리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잭스가 술을 모은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녀였고, 베사리아의 말마따나 빚을 지워두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생각 같았다.


 “좋은 술에 좋은 안주가 빠질 순 없겠죠. 하인을 시켜 치즈 몇 종류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잭스!”

 “왜 그러시오?”

 “첫 번째가 있으면 두 번째도 있는 법. 다음에 내가 스승이 되어달라고 할 때는 지금과 많이 다를거다. 방금 내가 강해지려는 이유 중 하나를 정했으니까. 언젠가는 네가 내게 제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날이 오게 하고야 말겠어.”

 “꿈도 크시군. 포도주는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을거요.”

 “여장부는 꿈을 크게 가져야하는 법이지.”


 피오라는 기분 좋게 눈을 찡긋 하며 하인을 시켜 안주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 그날 밤, 로렌트 저택의 연무장에선 작고 화려한 시음회가 열렸다. 포도주는 맛있었고, 데마시아의 최고급 치즈 중 하나인 ‘산의 치즈’ 시리즈는 별미 중의 별미가 아닐 수 없었다. 베사리아는 연신 포도주에 대해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며 극찬을 했고 피오라도 그런 베사리아에게 맞장구치며 포도주를 마셨다. 시음회의 백미는 의외로 잭스였다. 놀랍게도 그는 가면을 쓴 채로 포도주를 마셨는데,그 방법이 바로 가면에 난 구멍 사이로 빨대를 꽂아 마시는거라 상당히 엉뚱하기 그지없었다.


 이 날을 계기로 셋의 정기적인 포도주 시음회가 열릴 거라는 것을 아직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시음회에 소나 부벨르라는, 이때엔 전혀 짐작조차 하지 않았던 새 멤버가 들어올 거라는 사실 역시 아직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또한 이 날을 계기로 피오라가 챔피언이 되겠다는 조그마한 결심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결심이 잭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잭스가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몇 년 후, 피오라 로렌트는 94번째 챔피언으로서 전쟁학회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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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0. 피오라의 컨셉은 '서투름', '무모함'


1. 애니 등지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아가씨+싸우는 여성+자존심 덩어리+의외로 순수함 등을 대강 섞어서 만들었음


2. 외전 캐릭터니까 깊게 생각 안하고 대강대강


3. 다음편은 가로등과 달과 파도, 나미 편


4. 리멬 전 피오라의 2단 찌르기 등을 글 속에 녹여봤음


5. 리멬 후에 이걸 썼다면 좀 더 박진감 있는 전투가 되었을지도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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