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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13화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5 개
조회: 2259
추천: 12
2016-08-08 16:36:21

#. 소나
 
 
 감정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소나에게 있어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능력이었다. 물론 사람의 감정을 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능력 자체는 음악가인 소나에게 있어 대단히 매력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나가 성장하면서 더 많은 감정을 알게 됨에 따라 이 능력도 그에 비례해 성장해왔고, 사람들의 호의 밑에 깔린 어두운 욕망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되자 소나는 더 이상 이 능력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저주였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저주.
 
 그때부터 소나는 부벨르 부인과 그 외 극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고선 모든 인간관계를 끊었다. 챔피언 선정이나 콘서트의 일만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의 정원이나 외진 곳에 있는 별장에서 보냈다. 어느샌가 소나는 타인을 대할 때 한 발짝 물러서있는 태도로 주변 감정의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순수한 호의와 찬탄의 소리를 들려줬다. 소나는 그런 그들이 원하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소나 자신도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는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양어머니에게 어린애처럼 매달려 징징거리는건 그녀 쪽에서 사양하고픈 선택지였다. 더 이상 양어머니를 걱정시키기 싫었고, 또 언제까지나 양어머니만 바라보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소나는 침체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만난 잭스라는 존재는, 소나에게 있어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그에게선 여러 가지 의미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도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한 번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협곡이 폐쇄되고 쇼나 베인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아 도망칠 때 그녀를 구해주기도 했다. 자신의 철없는 어리광으로 에뜨왈을 되찾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나가 그에게 호의를 느낀 점은, 잭스는 소나에게 ‘평범한 대화’라는게 어떤 느낌인지 알려준 생애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점이었다.
 
 놀랍게도 잭스는 의도적으로 감정을 조절했기에 그에게서 들려오는 감정의 소리라곤 미약하게 딩딩거리는 소리 정도였다. 마치 예기를 갈무리한 명검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양어머니에게서조차도 때때론 부담스러울 정도로 감정의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잭스는 그런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와 협곡에서 하룻밤을 지샐 때, 소나는 거의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사람 앞에서 이토록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편안했기 때문일까, 소나는 그가 마법의 뒤틀림으로-사실 이유야 어찌되든 상관없었다-자신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고 했을 때 너무 기뻐서 그를 껴안기까지 했고, 몸을 살짝 보였을 땐 머리가 새하얗게 될 정도로 부끄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뺨을 찰싹(?) 때리기도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극소수의 인물들에게만 살짝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소나로서 그러한 행동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단시간에 열은 인물은 그녀 인생에 있어서 오직 잭스가 유일했다.
 
 어쨌든-협곡에서의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소나는 상당 부분 잭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계약도 계약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무뚝뚝하면서도 세세한 곳에서 신경써주는 그의 태도가 맘에 들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감정의 소리가 아닌 그저 보이는 태도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평가를 내린건 잭스가 처음이었다. 소나는 잭스가 자신을 지키고, 협곡 밖으로 꺼내주겠다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지킨다’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보라색 진영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도 소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소나는 눈을 떴다. 또 정신을 잃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본능적으로 주변을 더듬어 에뜨왈부터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도’ 에뜨왈은 그녀의 옆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릿속에 유리조각처럼 깨진 기억들의 파편이 어지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래, 우선 잭스와 챔피언들이 격돌했다. 가로등이 휘둘려지며 소름끼치는 바람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소나는 갑자기 뱃속에 얼음 덩어리가 하나 들어선 듯한 싸늘한 기분을 느끼며, 에뜨왈에서 시선을 떼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피, 그리고 피. 시체, 쓰러진 용과 산산조각 난 우르곳. 가슴이 함몰된 채 구석에 처박혀있는 사이온.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시체들. 붉은 카펫같은 피웅덩이 사이사이로 보이는 허여멀건 뇌수들. 코를 마비시켜버릴 정도의 짙은 피냄새, 그리고 마지막 순간 저들이 질렀던 단말마…….
 
 소나는 결국 웩 하고 구역질을 했다. 역한 냄새가 나는 샛노란 위액이 그녀의 입에서 뚝뚝 떨어졌다. 앞서 토한 적이 있는지 그녀 앞엔 이미 구역질의 흔적이 있었다. 소나는 목구멍이 타오를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할딱거렸다. 모두 잭스가 한 짓이었다.
 
 
 모두 잭스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짓이었다.
 
 
 저 녀석을 죽엿, 이라고 검은 남자가 외칠 때만 해도 소나는 막연히 잭스를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잭스가 슈퍼 미니언의 대군을 박살내며 전진할 때 ‘나름대로는’ 그를 도왔다고 생각했고, 그 짤막한 경험으로 인해 그녀는 어느 정도 싸움이라는 행위에 자신감을 가진 상태였다. 심지어 그녀는 이 상황에서 쓸모가 있을 법한 강력한 마법의 연주 몇 곡까지 생각해 놓은 상태였다. 그녀는 꽤 기세등등했다…잭스가 그에게 덤벼든 검은 무리 중 한 명의 머리를 가로등으로 짓뭉개는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퍽석, 하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케첩 병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같아-그 순간 소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 몸이, 눈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소나의 눈에 머릴 잃은 그 사람이 쓰러지는 장면이 비춰졌다. 그 짧은 순간이 소나에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가 죽음 직전에 느꼈던 공포가 예리한 화살처럼 그녀를 뚫고 지나갔다.
 
 잭스는 아주 효율적으로, 필요 최저한의 움직임으로 챔피언들의 공격을 교묘히 피해내며 검은 무리들부터 차근차근 죽여 나가고 있었다. 한 번 휘둘러 한 명씩. 그의 가로등이 한 번 휘둘러 질 때마다 여지없이 한 명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쳐 올랐다. 놀랄 정도로 예리하고 정확했다. 그건 거의 먹이를 사냥하는 야수의 움직임 그 자체였다. 잭스가 검은 무리들을 죽여나갈 때마다 소나는 그들이 마지막에 뱉어낸 끔찍한 감정의 소리들에 온 몸이 사정없이 꿰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나가 그 자리에 고꾸라져 기절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기절하길 세 번. 소나는 머리를 두 쪽으로 갈라놓는 듯한 두통을 간신히 참아가며 눈앞에 벌어진 참상을 마주했다. 세 번이나 기절해서인지 내성이 생겨서 또 기절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해서 눈앞의 참상이 덜 참혹해 보인다거나 그런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피와 죽음의 냄새가 끈적한 진흙처럼 소나의 전신에 달라붙어왔다. 소나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에뜨왈의 현을 어루만졌다. 몇 번이나 실패한 끝에 간신히 소나의 몸이 공중으로 살짝 떠올랐다. 주위에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은 없었다. 사방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했고, 협곡 저 너머에서는 동이 트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온 것이었다.
 
 소나는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잭스를 찾았다. 불안함과 초조함을 원동력으로 그녀의 가슴은 증기 기관 움직이듯 쿵쿵 뛰고 있었다. 날이 밝아지면서 더 확연히 드러나는 참상에 애써 고개를 돌리며, 소나는 익숙한 인물들을 찾을 수 있었다. 챔피언들, 그리고…쇼나 베인과 럭산나 크라운가드까지. 그녀들 역시 시체처럼 피웅덩이 속에 쓰러져있었다. 소나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당당한 모습과는 이질적일만큼 처참한 몰골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거야…….’
 
 소나가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순간 그녀의 예리한 청각이 발소리를 포착했다.
 
 저벅저벅
 
 발소리의 주인은 굳이 정체를 숨기려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몰래 다가온다기보단 지친 듯한 발소리였다. 땅을 꾹꾹 누르듯 걸으면서도 상당히 빠른 템포의 이 발걸음을 소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잭스의 발소리…소나는 지옥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어린 양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서둘러 에뜨왈을 다뤄 발소리가 나는 쪽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려다가…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기라도 한 듯 멈춰버렸다. 생각할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생기자 마지막까지 결국 도움따위는 되지 않았다는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왔고, 잭스의 모습이 소나에게 보이기까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죄송, 아니 정말 걱정했어요, 잭…….
 스 님, 이라는 그녀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깼소? 상태를 보러 오길 잘 했군.”
 
 잭스의 상태는 뭐라 말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가로등은 머리가 떨어져나간 채 형편없이 그을려 있었다. 가로등뿐만이 아니라, 잭스의 전신이 불구덩이 한 번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갈기갈기 찢긴 그의 소맷자락에선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카타리나 님과 탈론 님은…무사하신가요?
 
 소나 이 멍청한 것아,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니? 생각을 내뱉자마자 소나는 곧바로 후회하며 스스로를 질타했다. 차라리 그의 감정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좀 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었을텐데, 소나는 애꿎은 에뜨왈의 현만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 들리는 거라곤 약간의 바람소리와 잭스의 낮은 숨소리가 전부였다.
 
 “뭐 숨은 붙어있더군. 꽤 오래 침대 신세를 져야할 것 같긴 하지만 말이오.” 잭스는 묵묵히 말을 이었다. “이제 다 끝났소, 미스 부벨르. 곧 넥서스가 터질거요. 그럼 불완전하게 남아있는 소환 마법이 풀릴 것이고…그대는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
 -아…….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그녀의 머릿속을 헤매다 스러졌다. 기뻐해야 하는 일인지, 아니 물론 기뻐해야 하는 일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소나는 기쁘다기보단 얼떨떨하고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기절한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진행되어 있었다. 또 넥서스가 곧 터진다니, 그 말은 꼭 누군가가 대신 터뜨려준다는 말로 들리지 않는가. 소나의 마음속에 의문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걸 물어보고 싶었지만 선뜻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부상은 둘째 치더라도, 한 눈에 봐도 심각하게 지쳐있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도 하거니와…그리고 이건 소나의 느낌일 뿐이었지만 잭스에게선 은연중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오라가 풍겨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노파심에서 물어보는 건데, 최초로 소환에 응한 장소가 어디요?”
 -데마시아 왕립 마법원의 소환 대기실인데, 그건 왜……?
 “그럼 됐소. 이로서 전쟁학회 내부에서 소환된 챔피언은 나밖에 없다는 거로군.”
 
 잭스가 그걸 왜 물어보는지 소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걸 물어볼 새도 없이 콰광, 하는 거대한 폭음성과 함께 저 너머 보라색 넥서스 부근에서 보라색 빛이 하늘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넥서스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넥서스가 파괴됨에 따라 이상한 모양의 탑들도 부스러지듯 사라졌고 쓰러져있는 챔피언들의 몸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건 잭스와 소나도 마찬가지였다.
 
 새벽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마지막으로 소환되었던 장소로 돌아가리라-그 말은 잭스가 계약 내용을 지켰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소나는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말하질 않길 바랬다. 그가 너무 지쳐서 이대로 슬그머니 넘어갔으면 했다. 하지만…잭스는 소나의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줄 만큼 어설픈 인물이 아니었다.
 
 “난 계약을 완수했소, 미스 부벨르. 이제 그대가 대가를 줄 차례요.”
 
 시체와 폐허만이 남은 전쟁터만큼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소나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왜……?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왜 하필 그런 대가란 말인가, 도대체 왜? 소나는 이를 악물고 잭스를 노려봤다.
 
 -왜 하필 그런 대가죠?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나는 재차 말을 이었다.
 
 -왜죠? 왜…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가요? 내가 짐이라서? 같이 있는 내내 도움이라곤 전혀 안돼서 그런건가요?
 “그런 이유는 아니오.”
 -그럼 왜!
 
 소나가 소리를 빽 지르자 잭스가 잠시 비틀거렸다. 그에겐 아마 귀에 직접 대고 고함을 친 것과 똑같이 느껴지리라. 소나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소리는 지르고 난 뒤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넥서스의 빛은 사그라드는 반면 챔피언들에게서 나는 빛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잭스는 말없이 소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이루고픈 소망이 있소?”
 -당연히 없…….
 “너무 극단적이었나? 그럼 질문을 좀 바꾸지. 이 리그에 발을 들인 이유가 뭐요, 미스 부벨르?”
 -…….

 소나는 말문이 막혔다.

 잭스의 질문은 자신도 익히 아는 말이었다. 챔피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반드시 들어봤을, 리그의 심판 마지막에 소환사들이 흔히 물어보곤 하는 질문이었다. 소나 역시 그 질문을 받았고 분명히 그에 대한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했다고’ 소환사를 속였다.

 기실 심판의 방에서 소환사가 마지막에 하는 질문은 거의 의례적인 것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진짜 심판은 챔피언 후보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을 견디느냐 견디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소나는 그 당시 소환사의 질문을 짧은 프레이즈 몇 마디 연주하는 걸로 어물쩍 넘어갔었다. 왜냐하면, 정말로, 소나가 챔피언이 된 이유는 별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마시아는 새 챔피언으로 학회에서 발언권을 넓히고 싶어했고 레스타라 부인은 소나가 어떤 식으로든 콘서트 이외의 바깥 활동을 하길 원했다. 소나 자신은, 단순히 자기가 어린 시절 봤었던 그 챔피언과 대등한 위치에 서서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이 셋의 기묘한 의견일치를 통해 현의 명인이라는 챔피언이 탄생했던 것이었다.

 물론 소나도 에뜨왈에 숨겨진 비밀을 밝히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이나, 전쟁학회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의 손으로만 해야 할 일이었다.

 솔직히…소나는 에뜨왈을 경계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비밀을 열어젖히고 싶은 욕구만큼, ‘이 비밀을 알아서는 안된다’라는 무의식적인 반발감 역시 소나 안에 잠재되어 있었다. 에뜨왈의 새로운 힘을 십분 이용하는 연주회장으로 전장을 선택했다는 소문은 그저 전쟁학회가 일방적으로 퍼뜨린 대외적인 소문에 불과했다. ‘현의 명인’이라는 챔피언을 홍보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했다. 소나는 그렇게까지 호전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겠지. 그렇지 않소, 미스 부벨르?”

 잭스는 놀라울 정도로 소나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스 부벨르.” 잭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챔피언이라는 존재는, 챔피언이 되는 순간부터 이미 전쟁 학회의 어둠에 한 발을 담궈놓은거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소. 전쟁 학회가 겉으로는 대륙에서 룬 전쟁을 몰아내고 평화를 가져온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썩 깨끗한 곳은 아니오. 그저 전쟁이라는 독을 전쟁 학회라는 더 강력한 독으로 제거해 왔을 뿐이지. 이번에 우리가 겪은 사건은 전쟁 학회의 어두운 부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오. 뭐 굳이 차이점을 들자면 이번 사건에선 전쟁학회가 당하는 쪽의 입장이 된 거라는 거겠지.”

 소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있겠소?”
 -…….
 “감당할 수 있겠소?” 잭스는 재차 물었다. “전쟁학회와 챔피언이라는 계약까지 맺어가며 이루고픈 소망도 없고, 자신의 힘도 두려워하는 당신이 이 전쟁학회의 깊디깊은 어둠을 감당할 수 있겠소? 이제 협곡 밖으로 나간다 해서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이제 시작일 뿐이오. 그대는 여전히 저 정체불명의 놈들에게 노려지고 있고, 지금 우리가 이 협곡에서 본 저들의 세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오.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암투에서 챔피언들은 항상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거요. 어쩌면 오늘처럼 목숨이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소나는 그의 말에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했다. 자신을 내치는 잭스가 미웠고 그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발밑이 꺼지는 듯한 절망감이 그녀를 엄습하고 있었다. 잭스는 그런 소나의 기분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잔인하리만치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저기 쓰러져있는 챔피언들이나 내가 이런 사건에 휘말려 죽고 사는 문제엔 별로 관심이 없소. 물론 살아남을 가능성이 보이는 한 악착같이 살기 위해 노력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죽음은 언제든지 각오하고 있소, 미스 부벨르. 왜냐하면 지금껏 내가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생명을 이 손으로 죽여왔으니까. 전쟁이라는 이름의 업보…그건 리그에 속한 대부분의 챔피언들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오. 자신의 힘으로 생명을 해쳐 본 사람들은 그 눈빛부터가 다르지. 피냄새에 익숙한 사람들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눈빛을 하고 있단 말이오.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 해당하지 않소.” 잠시 이야기를 끊은 잭스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당신은 이 리그에 있기엔 너무 깨끗하오, 미스 부벨르. 전쟁의 더러움에 때묻지 않고 평화로운 인생을 살아온 당신같은 사람이 이 더러운 놀이판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은…내겐 너무나도 불쾌한 일이오.”

 소나는 잭스를 노려봤지만, 이내 에뜨왈을 찾기 전날 밤 계약을 맺을 때처럼 체념의 빛을 띠며 시선을 내렸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스쳐지나가듯 들렸던 그 소리, 그 메마른 슬픔의 소리가 잭스에게서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석처럼 굳어진 메마른 감정의 잔해, 회색빛으로 엉겨붙은 오래된 아교같은 소리……. 소나는 그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염려해서 그런 대가를 요구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의 말에 제대로 반박 하나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고 그걸 조목조목 지적하는 잭스가 야속하기도 했다. 결국 소나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녀의 패배였다. 소나가 고개를 떨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잭스의 머릿속에 처연한 소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 소나 부벨르는, 협곡을 나가는 즉시 챔피언에서 탈퇴하겠습니다.

 챔피언의 자리를 내놓는 것. 그것이 잭스가 그녀에게 요구한 대가였다. 결국 소나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또그르르 떨어졌다.

 -당신이 정말 미워요.
 “…….”

 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마음을 다잡기라도 한 건지, 소나는 더 이상 그의 감정을 들을 수 없었다. 소나는 이대로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헤어지고 싶지는 않은데, 안타깝게도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빛이 밝아졌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다고 느끼는 순간 소나는 소환을 받았던 왕립 소환실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뜨왈이 그녀 앞에서 흐느적거리며 부유하고 있었다. 소나는 몸을 으스러지게 꽉 껴안고선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돌아왔다는 실감보다 소중한 인연을 잘라냈다는 상실감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을 떨어뜨리던 소나는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짓이기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선 그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소리 없는 오열은 소환실에서 인기척을 느낀 관리자 한 명이 그녀를 발견하기 전까지, 사람들이 달려오기 전까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와의 질기고도 질긴 인연은…이 정도로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소나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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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인연이긴 하지만 그렇게 쉽게 이어줄 거라 생각하지 마렴 질긴거랑 이어지는 거랑은 다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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