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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외전: 가로등과 태양(1)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5 개
조회: 2503
추천: 9
2016-09-12 10:39:47

타곤 산.


 발로란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굴지의 전투력을 지닌 라코어 인들의 고향. 타곤 산이라는 지명도 단순히 외부인의 관점에서 붙인 이름일 뿐,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타곤 산을 사 솔 쉬르(Sa`sol`shir)라고 불렀다. 라코어의 고대 방언으로 ‘태양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태양. 라코어 인들은 태양을 숭배하는 일족이었다.


 태양을 숭배하는 것은 라코어 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신앙이었으나 태양을 ‘모신’다는 것은 일족 극소수에게만 부여되는 혜택이자 영광이었다. 태양의 사제는 ‘솔라리(Solari)’라 불리었으며 산꼭대기에 있는 신전에서 기거했다. 모든 라코어 인들이 솔라리의 일원이 되기를 열망했으나 솔라리에서 새로운 일원을 뽑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솔라리로 뽑히는 기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것을 함부로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없었다. 솔라리는 태양을 섬기는 지고한 사제들이었으며 그들 신앙의 결정체였으므로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아니 의문을 가져선 안될 일이었다. 솔라리의 사제 선택에 의문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결정에 의혹을 품는 일이고, 그들의 결정에 의혹을 품는다는 것은 나아가 태양의 사제들과 태양신 자체를 모독하는 일이었으니까. 여명이 밝아올 때면 산꼭대기의 신전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라코어 인들은 그 신전을 향해 기도를 올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태양의 은혜에 따라 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그리고 만약 전투가 일어난다면 그 속에서 영예롭게 죽을 수 있기를 빌면서. 솔라리 사원은 그들에게 있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임과 동시에 신앙의 안식처였으며, 성소였다.


 “흡!”

 채챙!


 그런데 그 성소에서 때아닌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퍼억!

 “크악!”

 “좀 누워계시게나.”


 황금의 무구로 무장한 솔라리 사제들을 하나하나 쓰러트리면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자가 라코어 인도 솔라리 사제도 아닌 ‘외부인’이라는 걸 만약 그들이 알았다면 어떤 행동을 했을까. 낡아빠진 보랏빛 로브에 숭숭 구멍 뚫린 철판 같은 괴상한 가면, 인간이 아님이 분명한 세 개뿐인 손가락에 보랏빛 피부색. 심지어 솔라리 사제들을 쓰러뜨리는(말이 좋아 쓰러뜨린다는 거지 거의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정도로 후드려 패고 있었다) 데에 쓰이는 도구는 무기도 아닌 어디 길거리에서 쑥 뽑아온 듯 밑둥에 잔디까지 붙어 있는 황동 가로등이었다. 그 정체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과거가 베일에 싸인 정체불명의 용병 잭스였다.


 휘잉!

 “!”


 그가 왜 이런 오기도 힘든 곳에서 전투를 벌이는 지는 이 시점에서는 불분명했으나 싸움 실력 하나만큼은 투박하면서도 엄청나게 강했다. 덩치가 있어서 둔할 것만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칼과 창, 도끼 등등을 모조리 피하거나 교묘한 움직임으로 무기들이 얽히게 하는 식으로 공격을 무마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세가 약간이라도 흐트러지면 어김없이 잭스의 가로등이 그들이 급소를 후려치는 패턴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처음에 다수 대 한 명이라고 살살 하려고 했던 열두 명의 솔라리 사제들은 이제 정말로 잭스를 죽일 기세로 마구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마법 갑옷이 인체의 급소를 빈틈없이 가려주고 있었기에 잭스가 아무리 날카로운 공격을 해봤자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이미 치명상 여부를 떠나 자존심 문제였다. 열두 명 대 한 명이라는 압도적인 인원 차와 전설의 마법 무구와 가로등이라는 우월한 무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밀리고 있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솔라리 사제가 아닌 그 어떤 집단이라도 자존심에 생채기가 생길 상황이었다. 게다가…….


 퍼억!

 “커헉!”

 “이런, 이거 갈빗대 부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는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아무래도 인원수가 좀 많다 보니까 힘조절이 안돼서 그렇다네. 자네가 좀 이해를…이미 기절했군. 어이 이보게들, 갈 때 이 친구 좀 잘 운반하시게.”


 게다가 방금 옆구리에 성난 곰이 후려치듯 가로등이 쑤셔 박히고 나서 게거품을 문 채 쓰러져 바르르 떨고 있는 솔라리 사제까지 합하면, 도합 4명의 인원이 저 용병에게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나머지 여덟 명의 상태도 별로 좋지는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건 기본이요 온 몸 중에서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한 곳도 없었으니까. 그에 비해 괴물 같은  용병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짐 없이 평온했다.


 지칠 대로 지친 솔라리 사제들이었지만 투지마저 지친 것은 아니었다. 남은 체력으로 봐서 기회는 잘해야 한 번. 서로 재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은 탕, 하고 바닥 차는 소리와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기습은 그들의 성미에 맞지 않았으나 지금은 찬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습마저도, 용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채 무구들이 그의 옷깃에 닿기도 전에, 그의 가로등이 투포환처럼 사제 중 한 명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쾅 하는 섬뜩한 소리와 달려드는 속도 그대로 사제 한 명이 나가떨어졌다. 우그러진 면갑 사이로 흩날리는 핏방울은 다른 사제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졌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퍼퍼퍼퍽!


 진영이란 한 군데가 뚫리는 순간부터 방어의 기능을 상실하는 법. 한 곳의 공격이 텅 비게 되자 잭스의 공격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잭스는 뻗은 가로등을 그대로 횡으로 휘둘러 다시 한 명의 머리통을 강타했고, 그 후론 흡사 복날에 개 패듯 가로등을 들어 올렸다가 쾅쾅 내리찍었다. 다들 사이좋게 머리에 가로등 꿀밤 한 대씩 맞은 솔라리 사제들은 완전히 전의와 기력을 상실한 채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결국 자기 혼자만 서있게 되자 잭스는 가로등을 어깨에 걸치고 흥 콧바람을 불었다. 죽는 소릴 내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열두 명의 사람들과 느긋하게 서 있는 한 명의 용병. 피만 없지 완전히 전장의 한가운데 그 자체였다.


 “그만!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물러가서 상처를 돌보도록 하세요.”


 때맞춰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낭랑한 목소리가 대결의 끝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던 몇몇 사제들은 마음 놓고 기절해버렸고, 서둘러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사제들이 몰려와 패배자들을 수습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등 사원은 평소와는 다르게 상당히 북적였다. 이 모두가 잭스라는 용병 하나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가 어딘가로 걸어가면서 선망의 눈길(몇몇 여사제들은 남몰래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이나 정중한 인사를 받았으면 받을지언정 지탄을 받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초청한 것은 솔라리였고, 이 대련을 부탁한 것도 솔라리 쪽이었으니까.


 입장상 손님에 불과한 잭스였지만 솔라리에게 있어 그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장로를 비롯해 고위 사제들, 특히 대신관과 두터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은 사제들 내부의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물론 솔라리 내부에서만 알려진 사실일 뿐이었다. 아무리 리그의 챔피언이라 할지라도 리그에 출전하는 것만 제외하면 대외 활동이 극히 드문 잭스의 사생활을 ‘그나마’ 아는 사람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도 한 손으로 셀 수 정도였으니까. 그중에서도 그가 솔라리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실종된 레지널드 애쉬람을 제외하면 베사리아가 전부였다. 허나 오늘 그가 여기에 온 것은 그녀도 모르고 있었다. 솔라리가 그들만의 특수한 방법으로 그를 비밀스럽게 초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이 정중하고 비밀스럽게 초청하는데 그걸 남에게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입이 싼 용병이 아니었다.


 소란스러움을 등 뒤로 하고 사원의 내부로 들어간 잭스는 곧 자신을 정중하게 맞이하는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옷차림은 다른 사제들과 다를 바 없이 하얀색의 수수한 수행복이었으나, 가슴 부근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태양 모양의 목걸이와 황금이 상감된 머리 장식은 그녀의 지위가 솔라리 내부에서도 상당히 높다는 걸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헬레나 소피아리 솔라리움(Helena Sophiari Solarirum). 바로 이번 대의 솔라리 대신관이며, 여섯 장로들의 보좌를 받으며 솔라리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솔라리의 대표자였다. 타곤 산에 사는 라코어 인들 전부가 솔라리의 신도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녀는 거의 타곤 산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그러나 그 막중한 위치와 지금 잭스 앞에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행동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엔 빙글빙글한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그에 비해 잭스는 ‘또 귀찮게 되었군’이라고 말하는 듯 시큰둥한 표정이었고. 놀랍게도 그녀는 잭스가 한창 전장을 누비던 시절 인연을 맺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몇 안 되는 지인이었다. 덧붙여서 잭스 본인은 눈치채고 있지 않지만, 그녀는 가면 너머로 잭스의 얼굴이 대강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잭스는 저 빙글거리는 웃음기가 자신의 시큰둥한 태도 때문에 생긴 표정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응접실 비슷한 곳으로 안내하고선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잭스.”

 “별말씀을.”

 “군말 없이 사제들과 대련해 준 것도 고맙고요.”

 “…뭐,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소.”


 종종 들러서 식사를 대접 받는 등의 일을 염두에 둔 말이었으나, 헬레나는 킥킥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 그러지 말아요. 솔라리 중에서 아무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좀 더 자주 들르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니까요, 특히 여사제들 중에서. 당신에게 식사를 가져가는 일로 경쟁하는 여사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깜짝 놀랄걸요?”

 “…….”


 가면 속 잭스의 얼굴이 점점 찌그러지는 것과는 정반대로 헬레나의 얼굴엔 웃음기가 맴돌았다. 생긴 것만 보면 건강한 매력이 있는 미인인데 속은 시장통 아낙네만큼이나 억척스럽고 수다스러웠다. 베사리아가 엉뚱한 일로 잭스를 난감하게 한다면, 헬레나는 잭스를 쥐락펴락하며 가지고 놀아서 그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자신의 행동을 훤히 꿰뚫고 있으니 잭스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번에도 다짜고짜 불러서 며칠 잘 대접하고 갑자기 대련이나 시키고, 뭔가 또 분명히 귀찮은 일을 시킬 거라고 바짝 긴장하는 잭스였다. 어떻게든 좀 더 나은 보상을 받고 일을 떠맡기 위해서. 거절이나 피하겠다는 선택지는 포기한지 오래였다.


 “그래서 오늘 당신과 대련했던 남사제들이 더 열이 뻗쳐서 달려들었던 건지도 몰라요. 공격 한 번쯤은 허용해주지 그랬어요? 그럼 그 남사제의 주가가 확 치솟았을텐데.”

 “음, 공격을 허용해 줄 정도로 기량을 선보이는 자는 없었소. 다들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정직했거든.” 잭스는 후드 너머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솔라리 무술의 장점이자 단점은 너무 효율적이라는 거요.”

 “어휴, 솔라리 무술을 그렇게 평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때때로 다른 국가들에게 솔라리 무술을 시연할 기회가 있으면 다들 입이 헤벌어져서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 바쁜데.”


 헬레나가 슬쩍 맞받아치자 잭스는 완전히 대화에 집중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잭스의 모습에 승리의 미소를 짓는 쪽은 헬레나였다. 그를 원하던 주제로 끌어들이는 데에 반쯤은 성공했으니까. 관심 있는 주제가 나오면 말이 많아지는 잭스였다. 특히 무술 전반이나 전략 등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지식과 응용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게 경험과 어우러져 그만의 전략이나 철학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솔라리 역시 그 기반은 무를 숭상하는 라코어 부족. 그와 무리(武理)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물론, 은근히 눈치가 없는 잭스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라코어 인들도 그렇지만, 특히 솔라리에선 온갖 무기로 온갖 병장술을 다 쓸 수 있도록 훈련받지. 그리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절제된 동작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이게 고만고만한 수준의 전쟁, 기본적으로 병사들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적을 상대로는 엄청난 효율을 자랑한다는 건 내 익히 알고 있소. 녹서스의 몇 천에 달하는 군사들이 불과 몇 백 정도의 라코어 전사들에게 전멸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음……. 나나 다른 실력자들, 특정 무술이나 무기에 대해 거의 정점에 다다른 자들을 상대론 솔라리 무술은 그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오. 너무 효율성을 중시한 탓에 응용력이 상당히 떨어지거든. 실제로 싸움 좀 한다하는 자들의 싸움을 보면 불필요한 허초 속에 진짜 공격을 숨기는 경우가 허다하다오. 솔라리 무술엔 그게 없어.”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하면서도 그의 의견에서 무시할 부분은 과감히 무시했다. 잭스 입장에서 ‘싸움 좀 하는’ 범주에 속하는 자들은 자신을 포함해 마스터 이나 그에 준하는 실력자들이었으니까. 잭스는 다 좋은데 평가 기준을 턱없이 높게 잡는다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럼 그들 중에서 솔라리를 대표할 정도의 실력자는 없었단 말인가요?”

 “음? 당신이 솔라리 대표자이면서 새삼 그런걸 왜 물어보시오? 벌써 은퇴라도 하려는거요?”

 “실은…….”


 헬레나는 이 대목에서 시원스럽게 말하려고 하다가 멈칫 했다. 이제 그를 여기로 부른 진짜 목적을 말할 차례였으나 막상 말을 꺼내려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고 흘러갔고, 잭스가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슬쩍 기울이는 것을 참지 못한 그녀는…결국 그 말을 뱉고야 말았다.


 “실은 이번에, 솔라리…아니 사 솔 쉬르도 리그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라코어 인들 중에서 한 명, 그리고 솔라리에서 한 명. 그래서 말인데, 그에 따른 챔피언 선정에 당신이 관여해 줬으면 싶…….”


 쾅!


 잭스가 숨을 훅 들이킬 때부터 헬레나의 머릿속엔 ‘망했다’라는 생각이 즉각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잭스의 주먹이 테이블을 내려쳤고, 손도 대지 않은(잭스는 남 앞에서 무얼 먹거나 마시는 법이 없었다) 다기가 들썩 하더니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쨍그랑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지만 그 소음마저도 잭스와 헬레나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걷어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가면 사이로 흘러나오는 잭스의 목소리는 평소의 털털하고 시원한 목소리가 아니라,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기어코 전쟁학회가 주관하는 더러운 싸움판에 발을 들이려 하는군. 내 경고 했을텐데. 전쟁학회의 어둠을 절대 만만히 보지 말라고.”

 “네, 잘 알고 있죠. 그리고 당신이 진심으로 우릴 위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잭스, 이 불안한 평화 속에서 우리 민족을 지킬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어요. 과거, 우리가 외부의 침략과 비열한 녹서스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들의 땅을 무사히 지키내긴 했어요, 하지만, 아이오니아의 전례를 보세요. 그들의 마법도, 무술도 녹서스의 무력과 자운의 과학 기술이 합쳐진 군대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전 그때의 아이오니아를 잊을 수가 없어요. 아무런 우방도 없이, 쓸쓸하게 혼자서 저항하다가 끝내 녹서스의 발아래 비참하게 짓밟히던 그들의 모습을……. 전 절대 사 솔 쉬르가 그런 처지에 놓이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절대로.”

 “…….”


 잭스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 분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타곤 산은 대륙 정중앙에 있는 최상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라코어 인들이 전투 민족이 된 것도 오랜 옛날부터 외세의 침략에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항상 전투에 노출되어 있었고, 전투에서 죽는 것을 영예롭게 알았다. 하지만 영예가 밥 먹여 주던가? 적군이 쳐들어 올 때 죽은 자의 영예를 기려서 침략을 멈추는 경우도 있던가? 전쟁은 전쟁일 뿐이었다. 단순한 힘의 논리. 죽은 자는 죽은 자에 불과했고 그것은 전력의 감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고통은 고스란히 산 자의 몫이 될 터였다.


 “…미안하오. 너무 주제넘게 참견했던 것 같군.”


 한참 뒤 씁쓸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잭스는 어디까지나 이들의 손님에 불과했고 결정은 이들의 몫이었다. 잭스는 이들의 결정에 토를 달 권리도 권한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조언자에 불과할 뿐……. 아니 조언자의 위치에 있는 것만 해도 용한 일이었다. 하지만 솔라리마저 전쟁학회에 가입한다니, 잭스로서는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전쟁학회가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는 그곳에서 가장 챔피언 생활을 오래 한, 그리고 그들의 더러운 일에 제일 많이 관여한 잭스가 잘 알고 있었다. 진흙탕에 발을 담그는 자는 자신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자신의 친구까지 이런…….


 잭스가 의기소침해지자 헬레나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수습에 나섰다. 한 몇 주 더 묵을 예정인 잭스가 오늘 갑자기 떠나버리거나 아니면 저녁 식사 때까지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여사제들이 보기라도 한다면…비난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돌아올 터였다. 물론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일이야 물론 없겠지만, 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미묘한 공기의 변화, 뭐라 말할 수 없는 불편함 등등 그런 것들은 성격 털털한 헬레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걸 떠나서라도 잭스가 이렇게 풀이 죽어있어야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챔피언 선정을 잭스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니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솔라리에서 차지하는 그의 입지는 결코 낮지 않았다. 막강한 무력과 뛰어난 전략, 나설 때 나서고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아는 두터운 인품과 그것을 받쳐주는 상당한 양의 지식. 그리고 명예욕이나 금전에 전혀 굴하지 않는 초탈한 모습까지. 전 대륙을 뒤져도 이런 걸 모두 갖춘 인재는 손에 꼽았다. 아니, 그냥 없었다. 헬레나나 장로들 모두 그를 준 장로급이나 그 이상으로 봤으면 봤지 결코 그 이하로는 보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풀죽지 말아요, 잭스! 당신에게는 정말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당신이 그동안 전쟁 학회의 어둠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신중하게 가입을 결정하진 못했을 거예요. 혹시 또 모르죠, 정말로 꼭두각시처럼 휘둘렸을지도. 당신의 조언이 있었기에 신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어요. 이 자리에서, 대신관의 이름에 걸고 약속합니다. 비록 전쟁학회의 한 세력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절대로 그들의 어둠에 깊이 관여하지 않겠다고. 절대 태양의 빛에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어, 음……. 알겠소. 고맙소,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줘서.”

 “그럼 이제 기분 풀린건가요?”

 “풀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부끄러울 따름이라오.”


 잭스가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괜시래 헛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헬레나는 그제서야 잭스의 손을 놓으며 물러났다. 부지불식 중에 잡은 손이었다. 세상에 저 가느다란 팔뚝에서 무슨 힘이 나오는건지……. 잭스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슬쩍 헬레나에게 잡혔던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솔직히 말해 손이 아플 정도였다.


 일단 헬레나 쪽에서는 뒷일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확 해버렸으니 다음엔 뭘 말할지 우물거리고 있었고, 잭스도 어린애처럼 화를 내서 머쓱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헬레나만큼이나 싫어하는 잭스가 머리를 풀 회전시켜서 재빨리 다음 주제로 넘어가버렸다.


 “그래, 내게 리그에 나갈 챔피언 선정을 맡기고 싶다 이말이오?”

 “아, 네! 맞아요 그거. 내 정신 좀 봐. 잠깐만요, 누구 좀 데리고 올게요.”


 헬레나 역시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듯 과장스럽게 일어나서 나갔다. 잠시 뒤 그녀는 또 한 명의 여사제를 데리고 들어왔다. 어린 아이였다. 잘 봐줘도 십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아이라 잭스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꽤 어리군. 솔라리에 이렇게까지 어린 아이가 있다는 건 몰랐는데.”

 “그야 당연하죠. 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니까. 자 레오나, 인사하렴. 솔라리의 아쉬로(귀한 손님이라는 뜻의 라코어 방언)이신 잭스 님이란다. 이제부터 널 가르쳐 주실거야.”


 노을을 연상케하는 주홍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잭스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깨에 힘이 좀 과도하게 들어가 있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좋은 재목이 될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아이였다.


 “…레오나입니다.”

 “음, 그래. 반갑구나. 근데 갑자기 이 아이는 왜 소개시켜 주는거요? 챔피언 선정 선정 노래를 부르더만.”

 “어머, 정말 여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정말 눈치가 없네요.” 헬레나가 허리를 굽혀 레오나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씩 웃었다. “이 아이가 바로 솔라리에서 챔피언 후보로 선정한 사제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당신의 제자가 될 아이기도 하고요.”


 제자라는 말에 입이 쩍 벌어진 잭스였다. 좋아서가 아니라 기가 막혀서.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원칙적으로 솔라리 이외의 일원과 사제지간을 맺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아쉬로인 잭스 님이라면 괜찮을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좋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이봐 헬레나! 설마 선정이란게…….”

 “고마워요, 역시 당신이라면 흔쾌히 승낙해 줄거라 생각했어요. 점심 아직 안 먹었죠? 일단 레오나랑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계획을 짜보세요. 그럼 전 대신관의 엄무가 좀 남아서 이만…잘해보세요, 호호!”


 재빨리 빠져나가는 헬레나를 보며 잭스는 속으로 이를 득득 갈았다. 살짝 윙크를 하는 헬레나의 모습을 보며 당했다고 생각하는 잭스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냥 후보가 있고 거기서 선택하는게 아니라 후보를 ‘성장’시켜야 한다니. 어마어마하게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까 헬레나에게 소리 친 미안함과 책임감, 그리고 자신의 말만 기다리며 목석같이 서 있는 레오나까지……. 잭스는 도저히 안하고 싶으니까 가서 헬레나를 불러 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잘 먹은 밥도 체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체념하고 말았다. 진지할 때는 진지하게 대응해서 굴복시키고 어물쩍 웃어넘길 수 있을 때는 농담조로 굴복시키고, 헬레나는 정말이지 잭스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잭스는 한숨을 푹 쉬며 구석에 세워둔 가로등을 집어들었다.


 “가자,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꾸나.”

 “네, 스승님.”


 레오나는 방을 나서는 잭스의 반걸음 뒤에서 따라나오며 정중하게 말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만 같은 딱딱함. 잭스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난과 풍요(?)로 점철된 솔라리에서의 나날들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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