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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28화(에필로그3-시즌 1 완결)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4 개
조회: 2185
추천: 6
2016-09-03 23:35:40

#. ???

 한 남자가 어느 폐허 안에 있는 회랑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딘가 먼 곳에서 급하게 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태도엔 피로감이 덕지덕지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눈만은 예외였다. 깊숙이 눌러쓴 두건의 밑으로 보이는 한 쌍의 눈은, 마치 전갈 꼬리의 끝에 매달린 한 방울의 독액처럼 번득이며 빛나고 있었다.

 폐허는 고요했다. 다 부서져 내린 벽화와 군데군데 널린 돌더미만이 이 폐허가 도시의 모습을 지닌 적이 있었다는 증거물이었다. 세 번에 걸친 룬 전쟁은 발로란 대륙 곳곳에 이런 폐허를 수도 없이 낳았다. 주요 도시국가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룬 전쟁의 여파가 하나 둘 일반인의 눈에서 사라지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이런 외딴 곳에 있는 폐허까지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러져가는 이런 돌과 먼지투성이 회랑에 대체 무슨 경외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무슨 신에게 나아가는 종교인마냥 남자의 태도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어떤 문양이 그려진 곳까지 오자, 남자는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 정중히 절을 하고 고개를 수그린 채 꿇어앉았다. 앞으로 내민 그의 손에는 가죽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한 마리 용의 그르렁거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꺼내보아라.

 목소리는 마치 심연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처럼 진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가죽 꾸러미의 매듭을 풀었다. 그 속에는 시뻘건 빛을 뿜어내는 마법석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 속에선 무언가 역겨운 것이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있었고, 내뿜은 붉은 빛은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남자가 꺼내든 마법석은 바로 얼마 전 전쟁학회에서 소나 부벨르의 실패한 ‘봄’의 연주를 녹음한 마법석이었다. 주위의 생명을 포악하게 빨아들이던 그 끔찍한 저주의 산물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층 그 힘이 강해졌는지 어쨌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마법석이 발하는 붉은 빛은 종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 있었다. 단순히 빛만 강해진 것이 아닌 듯했다. 마법석을 꺼내들자 남자의 입가에선 가느다란 선혈 한 줄기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마법석에게 생명력을 갈취당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남자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그것을 버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세마저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손에서 마법석을 가져가지 않기라도 한다면 그 자세 그대로 죽기라도 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의 손에서 마법석은 빠져나갔다.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법석은 허공을 가르며 휭 하고 날아가 누군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그 누군가가 그것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뜯어보는 듯 마법석이 좌우로 살짝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의 반응과는 달리 마법석에게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것 같은 그 모습에선, 일견 여유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좋아. 나쁘지 않구나, 전갈 장로. 허나 겨우 이 정도 마법석으로 이 강력한 선율을 여기까지 가져온 것은 의문이구나.
 “전갈의 전사 몇 명이 기꺼이 자신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과연, 정기적으로 생명을 공급해 선율이 사라지지 않도록 했다 이건가? 재미있군. 재치 있는 해결책이야.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자못 유쾌하다는 듯 음산하게 웃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마법석을 가져오는 데에 몇 명이나 산 채로 생명력이 빨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의 목소리엔 염려 따위는 조금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남자의 표정은 가면처럼 변화가 없었다.

 -넌 내가 내린 명령을 잘 수행했다, 전갈의 장로여. 그리고 재치 있는 방법으로 이것을 가져와 나를 즐겁게 만들어주기도 했지. 그런 네게 두 가지 상을 내리겠다. 

 목소리는 마법석이 마치 지휘봉이라도 되는 것 마냥 휘두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네 자리로 가 앉아라. 할 이야기가 있다. 너희 모두에게 말이야.
 “예, 폐하.”
 목소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일어서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가 일어섬과 동시에 시꺼먼 어둠에 물들어있었던 회랑 곳곳에서 저절로 횃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화륵

 어둠이 걷히자 회랑의 전경이 드러났다. 그가 있던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육중한 대리석 원탁이 놓여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 쓴 열한 명의 인물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을 구별할 유일한 방법은 로브 자락과 그들이 앉은 의자 등받이에 장식된 문양뿐이었다. 양 모양의 문양부터 시작해 황소와 사자, 천칭, 활을 쏘는 사람, 쌍둥이 등 다양한 문양이 있었다. 남자는 전갈의 문양이 새겨진 자리에 가 앉았다. 그가 앉음으로서 그들은 열두 명이 되었다. 모두 에스트렐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인, 열두 일족의 지도자들이었다. 

 한때는 그들도 ‘왕’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썼다. 언젠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영광을 이 발로란 대륙에 다시 새길 것을 꿈꾸며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불쑥 나타난 한 명의 인물로 인해 그들의 칭호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들은 더 이상 왕으로 불리지 않았다. 그 호칭으로 불릴 자격을 갖춘 자는 그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앉아 있는, 한 인물뿐이었다. 그는 에스트렐 왕가의 일족이 은둔해있다고 전해지는 아이오니아 바람노래 협곡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정확히는 마지막 생존자라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왕가의 정통성을 증명할 방법 따위가 겨우 에스트렐의 명맥만 잇고 있는 장로들 따위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중요한 건 그들의 위치가 장로로 격하되었다는 사실과, 에스트렐의 왕가마저도 전쟁학회의 발아래 짓밟혔다는 사실뿐이었다.

 전갈의 장로라 불린 사내가 들어온 뒤로 그 말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참담한 침묵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패배했던 것이다. 전쟁학회와의 싸움에서.

 그리고, 이 ‘폐하’와의 싸움에서.

 -너희들은 내가 나타났을 때부터 날 너희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지. 심지어 내가 너희의 무례를 눌러 참으며 에스트렐 왕족의 증표라 할 수 있는 고대의 멜로디를 재현해냈음에도 말이야. 마치 어릿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모욕감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지. 
 “…….”

 그들은 침묵했다. 

 -결국에 네놈들은 날 왕으로 인정하긴 했다만, 에스트렐의 왕족을 능멸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설마 내가 네놈들의 감정과 생각 따윌 모를 줄 알았느냐? 네놈들의 머릿속은 유리알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간단했다. 너희들 대부분 날 진정한 왕이라 여기지 않았지. 그저 조금 강력한 능력을 지닌 에스트렐 일족 정도로만  생각했어. 적당히 이용해먹다가 단물 다 빠지면 제거할 생각을 가진 놈도 있었지. 솔직히, 불쾌한 것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더군.
 “…….”

 그들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동요가 파문처럼 일고 있었다. 물론 공공연히 ‘폐하’라는 자를 업신여겼던 사람들이 그 진원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애초에 모든 것이 내 허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축에 속했다. 만약 내 형제들이 내 대신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애초에 너희들의 의사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터였다. 왕족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너희 속에 흐르는 에스트렐의 피가 절대 복종을 외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너희는 그러지 않았지. 그건 내가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

 그들은 침묵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 중 몇몇은 ‘모욕감’이니 ‘어릿광대’니 ‘제거’라는 말이 나온 뒤부터 눈에 띌 정도로 와들와들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인물은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정당한 왕가의 일족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러 하는 장로들과, 전쟁학회에게 각개격파당해 옛 영광을 되찾기는커녕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든 12성좌의 일족들……. 복수를 다짐하며 일족들을 불러 모았지만,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너희 장로들부터가 내 적이었지. 심지어 네놈들 중 몇몇은 날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들려줬던 왕가의 노래를 멋대로 편곡해 제 맘대로 써버렸고 말이야. 그 늙은 고위 소환사…맨드레이크라 했던가? 조악한 가락으로 그 늙은이를 홀린 뒤에, 너희는 성전(聖戰)이니 뭐니 하며 거창한 소리를 지껄였지.   
 “컥…….”
 “끄륵…….”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소름끼치는 살의가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신에 직접 울리며 살의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다. 귀를 막는다 해서, 고막을 터뜨린다 해서 들을 수 없게 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벌써 심신이 약한 자들은 게거품을 물며 다 죽어가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대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갈의 장로를 포함해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그 인물은 말을 그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는 내 고집을 꺾기로 결심했다. 네놈들이 너무나 자신감에 차 있었기에, 나는 분명히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너희들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어쩌면 왕가의 눈이 닿지 않을 동안 너희들 나름대로의 발전을 이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우리 에스트렐의 불구대천의 원수 잭스를 죽이라 명했고, 또 내 계획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인 소나 부벨르를 생포해오라 시켰다. 그리고 전갈의 장로에겐…모종의 임무를 내려뒀었지. 사자의 장로에게도 말이야. 둘은 내가 내린 임무를 그럭저럭 훌륭히 수행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네놈들은…아니었어. 네놈들은 그 용병 놈도 죽이지 못했고, 전쟁학회에 제대로 된 타격도 입히지 못했으며, 도시국가들에게는 한 술 더 떠서 친절하게 경각심까지 심어줬다! 이제 두 번 다시 같은 수는 안 통하겠지. 네놈들의 그 같잖은 명예욕과 오만함이 단 한 번 있을 기회를 영영 걷어 차버린 것이다!

 ‘폐하’가 한 마디 한 마디에 더 힘을 줘서 말할 때마다 장로들 중 몇몇이 보이지 않는 손에 목이라도 졸리는 듯 버둥거리며 컥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미 침묵은 깨진지 오래였다. 네 명의 장로는 땅바닥에 날개를 잡아 뜯긴 벌레마냥 버둥거리고 있었고, 나머지는 체면이고 뭐고 다 잊은 채 벌떡 일어나 그 광경을 보고 몸서리치고 있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는 자는 전갈과 사자의 문양이 그려진 자리에 앉아 있는 장로들 단 두 명뿐이었다.

 “용서를, 컥, 폐하! 제발 자비를…자비를!”
 -아, 친애하는 게 장로. 네 아들의 활약상은 정말 인상 깊었다. 일족의 마법사들을 총동원해서 협곡의 모든 시설의 통제권을 점거하고, 반 이상의 챔피언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었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었어. 다 죽어가는 암살자 둘과 용병 하나, 그리고 악기 좀 만지는 계집애를 상대로 말이야. 네 아들놈 역시 거기서 죽어서 기분이 좀 낫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넌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죽었을 게다.
 “전, 저는 몰랐습니다! 그 용병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 용병이, 켁, 챔피언 중 하나를 대신해 나올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냐. 네가 몰랐다고 해서 이 결과가 바뀌기라도 하느냐? 너는 그저 네 일족의 대부분을 사지로 밀어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네놈들이 제창했던 성전의 첫 발자국부터 시원하게 뒤집어엎어버렸을 뿐이다. 네 행동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넌 실패자다. 그리고…나는 내 발목을 잡는 자들에게 그리 자비로운 군주는 아니다.

 우드득

 “끅, 끄아아아악…!”

 게 장로라 불린 사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더니, 마치 천천히 종이를 구기는 것처럼 온 몸이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우드득하고 뼈가 터지고 부러지는 소리가 회랑 안을 끔찍하게 울리고 있었다. 성대가 터져버린 것처럼 그의 목에선 새된 비명 대신에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고 있었다. 허나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지는 구태여 비명이 아니라 해도 알 수 있었다. 게 장로에게 동조해 병력을 제공했던 나머지 장로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처참하게 죽었고,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또렷한 맨정신을 유지하며 죽어갔다. 잠시 뒤 그들이 있던 자리엔 다진 고깃덩어리 꼴이 된 세 장로의 시체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역시 공중으로 둥 뜨더니, 그대로 투포환처럼 회랑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그들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쓸 곳도 없는 쓰레기들이었군. 일어서있는 장로들은 들어라. 아직도 날 너희들의 왕으로 의심하지 않을 셈이냐?
 “아, 아닙니다! 저희가 얼마나 무지한 자들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폐하! 용서해주십시오! 저희 사수자리 일족은 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저희 양자리 일족 역시 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제발……!”

 끔찍한 죽음을 두 눈으로 목도한 탓인지, 일어서있던 장로들은 어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땅에 파고들 기세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폐하’는 그들에게서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공포심과 경외심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걸렸다. 먼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마침내 진정으로 그들 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그의 입가에 소름끼치는 미소가 걸렸다.

 -나는 쓰레기들에게는 가차 없다. 하지만 상벌은 확실히 구분하는 편이지. 전갈 장로와 사자 장로, 그대들은 날 처음부터 믿고 따랐다. 특히 전갈 장로는 직접 적지인 전쟁학회에 잠입하는 놀라운 저력까지 보여줬고 말이야. 너희는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우선 지금 숙청한 네 일족의 소유권을 너희 둘에게 주도록 하겠다. 그들을 너희의 두 일족에 집어넣든, 아니면 노예로 부리든 네놈들의 자유다. 허나 목숨은 붙여놓도록. 이 이상의 전력 감소는 원치 않는다.
 “예!”

 왕의 목소리는 냉정했고, 그 내용 역시 목소리만큼이나 차갑기 그지없었다. 두 장로 역시 왕의 처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같은 일족끼리 너무 잔인하다 생각하면, 그건 이들 에스트렐의 인간들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이들은 열두 별자리를 상징으로 하는 파벌과 그들 위에 군림하는 왕가로 나뉜 복잡한 일족이었다. 그리고 각 파벌의 사이는 나쁘면 나빴지 좋을 일은 없었다. 같은 일족이고 뭐고 약하면 잡아먹을 뿐이었다. 왕의 시선이 우선 사자의 장로에게로 향했다.

 -사자 장로. 너도 내가 내린 임무를 잘 수행했다. 어떻게 했느냐?
 “예, 우선 양자리 일족의 마법사들 중 하나로 변장해 그들 무리에 숨어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리그 시스템을 장악한 뒤에 베인을 조종해 소나 부벨르의 신변을 확보하려 했으나 그녀가 너무 빨리 눈치 채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즉시 폐하께서 내려주신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곡’으로 녹서스로 날아간 뒤 다리우스의 정신을 오염시켰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스웨인이 우리가 조종하고 있는 고위 소환사 맨드레이크에게 의심을 품는 순간, 그를 습격해 폐하께서 말씀하신 생각을 심은 뒤 복귀했습니다. 흔적을 철저히 지웠으니 꼬리 잡힐 염려도 없습니다.”
 -좋군, 수고했다. 네 용기를 높이 사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폐하.”
 -사자 장로의 상은 두 세력의 소유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전갈 장로의 공을 이것으로 치하하기엔 조금 부족하다. 그래서 전갈 장로에겐 두 번째 상을 내리노라. 두 번째 상은 바로 이것이다.

 어둠 속에서 몇 장의 양피지가 미끄러지듯 날아와 전갈 장로의 앞에 떨어졌다. 악보였다. 그러나 평범한 악보가 아니었다. 악보 위에 새겨진 모든 글자가, 자줏빛 광채를 내며 번득이고 있었다.

 “오오, 이것은…….”
 “이것이 오직 왕가의 피를 이으신 분만이 만들 수 있다는 ‘마력 깃든 음악’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별 반응이 없던 전갈 장로도 이번만은 눈에 띄게 동요하며 악보를 집어들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 명을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네 일족의 전사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소중히 간직하도록. 그들의 혼은 그 곡에 깃들어, 그 곡을 연주할 때마다 너희 전갈 일족을 위해 용맹하게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 곡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들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정말, 정말로 분에 넘칠 정도로 과분한 영광입니다. 전갈자리의 일족은 앞으로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폐하의 충실한 수족을 자처할 것입니다!”

 전갈 장로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마력이 깃든 곡은 아무나 작곡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에스트렐 왕족만의 권한이자 힘이었다. 그들로서는 꿈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으며, 거의 일종의 전설로 취급되는 것이었다. 진혼곡은 에스트렐 일족에게 있어 일종의 묘비였다. 그런데 한낱 이름 없는 전사들을 위해 왕족이 직접 진혼곡을 작성해주다니? 보통 사람들의 관점으로 비유하자면 백성의 장례에 왕족이 와 머리를 숙인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곡에 깃든 이 막대한 마력은 무어란 말인가? 명예로운 것도 명예로운 것이었지만, 곡 자체도 강력한 힘의 산물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유능한 인재를 원한다. 그러니 내 총애를 받고 싶거든 너희들의 가치를 증명해보여라. 난 반드시 저 악마 같은 전쟁학회를 무너뜨릴 것이다. 불타는 전쟁학회 앞에서 그 씹어 죽일 용병 놈을 처형해 그간의 한을 풀 것이다. 나아가 이 발로란 대륙을 에스트렐의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반드시!

 왕의 목소리에선 거의 광기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감정이 격해지는지 한참을 분을 삭이던 왕은, 이만 장로 회의를 마친다는 짤막한 소리와 함께 의자 뒤에 있던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남은 장로들은 오늘 왕이 보여준 모습에 떨면서도 전갈과 사자의 장로에게 은연중 시샘과 질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자줏빛 악보를 든 전갈 장로에겐 그 시선의 강도가 한층 더 심했다. 왕이 자리를 뜨자 더 이상 볼 일 없다는 듯 전갈 장로 역시 자리를 떴다. 그 뒤를 사자 장로가 따라 밖으로 나갔고, 나머지 장로들도 하나 둘 회랑의 밖으로 나갔다.

 빈 회랑에 다시 고요와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크기의 복도를 따라 에스트렐의 왕은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는 다시 문이 있었고, 그곳은 왕의 사실(私室)이었다. 넌덜머리나는 장로들과의 신경전을 마치고 그만의 쉼터로 돌아온 것이었다.

 방은 왕이니 뭐니 불렸던 사람의 거처치고는 소박했다. 아니, 소박하다는 건 너무 조심스러운 표현이고 살풍경이라는 표현이 좀 더 들어맞는 분위기였다. 창문이 몇 개 있기는 했지만 죄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막혀있었고 하나 있는 발코니라곤 반쯤 부서져 갈 곳이 못 되었다. 벽이나 바닥이나 뭔가 꾸미려 한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그나마 침대가 비교적 깨끗하다는 것과 방 한쪽에 있는 조그마한 탁자 위에 먹다 남은 식사며 악보며 빈  종이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품들이 널려있다는 게 사람의 흔적이라 할 수 있었다. 

 왕의 모습도 방의 풍경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로브는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든 것이었지만 특별히 이렇다 할 장식이나 자수 따위도 없는 평범한 물건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입가를 제외한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과, 그 가면에는 눈구멍이 없다는 점이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왕의 모습에 대해선 전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맨살이 드러난 부분은 입 주위와 손 정도였다. 성별도, 나이도 불명이었다.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듯한 인물이었다.

 [네게서 공포와 절망의 소리가 들린다, 주인이여. 하지만 네 감정은 아니야. 누군가를 죽인 건가?]

 갑자기 허공에서 낮은 백파이프 소리 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왕은 당황하지 않고 답변을 했다. 그의 목소리 역시 입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방 전체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걸리적거리던 몇 놈을 해치우고 오는 길이지. 거슬리나?
 [조금은. 하지만 네가 이 감정들을 내게 녹여내어 연주해준다면 훨씬 나아지겠지.]

 왕의 입가에 픽 하고 미소가 걸렸다. 장로들 앞에서 보여줬던 조소 따위가 아닌, 마치 떼쟁이 동생을 보는 듯 따스한 미소였다. 

 -결국은 연주해달라 이건가? 정말이지 어린애 같군. 사계절 급의 노래라면 조금쯤은 진중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나는 겨울을 노래한 곡이다. 내가 너희들 인간처럼 말하고 생각한다 해도 그 본질은 곡. 곡은 연주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는 날 가장 훌륭하게 연주할 능력을 지닌 자이다. 그러니 난 네 곁에 있는다. 적어도 네가 날 연주해 줄 의향이 있는 한, 난 네 곁에 머물며 얼마든지 내 힘을 빌려줄 것이다.]
 -좋아, 연주해주지.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우선 할 일이 있으니까.
 [무슨 할 일이 있다는 거냐?]
 -내 할 일이 아니라, 네게 시킬 일이다.

 왕은 그렇게 말하며 안주머니에서 예의 그 마법석을 꺼내들었다. 불길한 붉은 빛을 내뿜은 마법석은 마치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꺼내들자 허공에서 울리던 목소리에 변화가 찾아왔다. 목소리가 울부짖었다. 그것은 눈보라같이 매서웠고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별로 따뜻하지도 않던 방에 한기가 확 하고 끼쳤다. 왕의 검은 로브에서 서리가 별가루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좀 전까지 아무 것도 없던 방의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거대한 것이 네 발로 걸어오고 있었다. 

 늑대였다. 그것도 곰처럼 거대한 늑대. 설원을 연상시키는 하얗고 하얀 털, 겨울 하늘과도 같은 새파란 눈. 그 눈은 왕을 향해있었다. 정확히는 왕의 손에 들린 그 마법석을 향해있었다. 늑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브릴의 노래로군. 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인가? 그럼 에트왈도?]
 늑대가 그르렁거렸다.
 -그래. 에트왈의 이번 대의 주인은 소나 부벨르라는 소녀다.
 [주인의 이름 따윈 어찌 되든 좋다. 내가 원하는 건 나를 연주할 실력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뿐이야. 하지만 네가 가져온 걸 보니 적어도 내가 네 곁을 떠날지 말지 고민은 할 필요가 없겠군. 이번 대의 주인은 풋내기에 애송이야. 겨우 아브릴 하나 제대로 연주 못한 채 이따위 실패작이나 만들어 내다니. 나라면 당장에 그 주인 놈의 목을 물어뜯고 그 자릴 내가 차지했을 거야.]
 -널 그녀와 대면시키지 못해 유감이로군. 아쉽게도 그녀와 만나는 건 좀 더 나중 일이 될 것이다. 멍청한 부하 놈들에게 그녀를 내게 데려오라고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았건만, 여봐란 듯이 실패했거든.
 [왜 저따위 놈들에게 의지하는 거냐?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내 힘을 무시하는 거냐, 아니면 네 힘을 과소평가하는 거냐? 네가 날 연주한다면 인간들의 조그마한 도시 따윈 단숨에 얼음 부스러기로 만들 수 있다! 이 에트왈의 주인 놈 하나를 죽이는 것 정도야 일도 아냐!]
 -그녀가 에트왈의 주인이란 걸 잊은 거냐? 에트왈이 널 막을 거다.
 [관리자 따위는 날 막을 수  없다! 나는 이베르(Hiver, 겨울). 겨울의 혹한을 관장하는 곡이다! 나보다 강한 힘을 가진 곡 따윈 없어!]

 늑대가 분한 듯 땅을 벅벅 긁으며 마구 성을 냈다. 가뜩이나 볼품없는 방에 새로운 흉터 하나가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베르, 나의 겨울 늑대여, 미안하지만 난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다. 행여나 죽인다 해도 그건 그녀에 대한 내 용무를 끝마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물론 내가 전면에 나선다면야 일이 쉬워지겠지. 나라고 해서 왜 직접 나서고 싶은 생각이 없겠나?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저런 놈들에게 의지해야하는 판국이지.

 왕은 늑대를 달래듯 말했지만, 그것만으로 늑대의 분노를 식힐 수는 없었다. 

 [왜? 뭐가 두려운 것이냐? 그 용병이냐? 저주의 불꽃을 품은 그 용병이 두려운 게냐?]
 -두렵지. 하지만 두려운 이유가 그의 불꽃 때문만은 아니야. 그는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 싸운다. 하지만 자신이 영웅 따위가 아니란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는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환호성을 받지도 못한다. 그저 더러운 방식으로 더러운 일만 처리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평 하나 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달(榮達)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오직 평화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걸어간다. 그 길이 쇠꼬챙이로 무수한 가시밭길일지라도 말이야. 그는 자신이 상처 입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뒤틀려있다. 르블랑을 통해 그를 만나면서 확신할 수 있었지. 정말 적으로 삼기 두려운 유형의 적이야. 
 [겁쟁이!]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늑대여. 우리의 세력은 작고, 적은 많으니. 하지만 난 겁쟁이는 아니다. 겁쟁이는 도망치지만 난 그 용병 놈과 전쟁학회에게 반드시 복수할 테니까. 이건 그걸 위한 마법석이다. 이게 내 복수의 첫걸음이 되리니. 자, 이걸 가져가라.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그 실패작을 내게 들이밀지 마라!]

 그러면서 왕은 그 마법석을 늑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늑대는 마치 더러운 오물 덩어리라도 보는 듯 질색하며 물러났다.

 -이 마법석에 기록된 선율의 이름은 ‘죽음’이다. 소나 부벨르의 잘못된 연주로 봄의 어두운 일면이 튀어나온 것이지. 난 이것으로 새로운 선율을 만들려고 생각 중이다. 그 용병의 불꽃도 우습게 사그라뜨릴 정도의 강력한 선율을 말이야. 그러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하다. 부디 이 마법석에 새겨진 선율을 받아들여다오.

 늑내는 왕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어찌나 그 으르렁거림에 실린 살기가 강하던지 왕은 두꺼운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갗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늑대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후회라는 감정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그 감정이 뭔지 느낄 수 있는 것 같군. 얼마든지 내 힘을 빌려주겠다고 말한 게 후회가 된다.]

 늑대는 내키지 않는 듯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힘은 빌려주겠다.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말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날 이용하는 건 이번만으로 해줬으면 좋겠군.]
 -명심하지.
 […믿겠다.]

 말을 마치자 늑대는 한 줄기 희디 흰 빛으로 변해 마법석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법석이 다시 크게 요동치더니, 달군 숯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길 반복했다. 붉고 흰 기운이 마법석 안에서 폭풍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곧 마법석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 속은 희고 푸른빛으로 차갑게 빛나고 있었지만, 겉은 붉은 빛으로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것만 같이 불안정했던 이전과는 달리 훨씬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

 왕은 말없이 마법석의 표면을 쓰다듬다 이내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늑대가 지나간 자리엔 싸늘한 냉기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두 팔로 자신을 감쌌다. 그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큭큭거리며, 그는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보여줬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너무 연약해보였다.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릴 것처럼……. 그는 계속해서 웃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미소를 짓고서. 자신을 으스러져라 꽉 껴안고서. 그렇게 이름 없는 왕은 흐느끼듯 웃으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처럼.



 이제, 시작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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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완결입니다.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지금까지 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봐주세요(아직 많이 남았어요...)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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