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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외전: 가로등과 달과 파도(1)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7 개
조회: 3115
추천: 19
2016-09-10 03:31:44

#.잭스


 빌지워터 섬.


 무법자들과 범법자들의 천국, 대륙의 온갖 내로라하는 뒷세계의 검은 손들이 모이는 집결지, 흉악 범죄가 밥먹듯이 일어나는 곳…그게 세간 사람들의 인식이고,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워낙에 땅거죽 위에서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악명이 높아서인지, 의외로 섬 자체의 풍경이 황홀하리만치 아름답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하긴 주목해봤자 뭐하겠나, 보통 사람들이 관광 올 만한 곳은 아닌데. 만약 섬의 악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순히 경치를 즐기러 올 사람이 있다면, 장담컨대 그 사람은 섬에 발을 들이고 채 하루가 안되어 항만 으슥한 구석에 변사체로 발견되거나 변사체가 되기 직전인 상태로 발견될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이 섬은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약한 것들의 시체를 발판삼아, 양분삼아 하루하루의 삶을 연명해가는 사람들의 집합소, 썩은 시체들로 부글거리는 늪과도 같은 곳…….


 잭스는 그 역겹고도 친숙한 냄새를 맡으며, 복작이는 인파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빌지워터 섬이 무법자들의 천국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뿌리 속까지 썩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란게 일단 모이면 먹고 살 궁리를 하는 동물이라 이 섬에도 자경단 비스무리한 위원회라는 것들이 있었고, 섬의 이익을 대변하는 빌지워터 출신 챔피언들이 있었으며, 온갖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또한 있었다. 잭스는 그 시장 중에서도 가장 겉으로 드러나 있고 가장 '평범한' 시장인 '무법항 시장'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정확히는 실낱같이 있긴 했지만, 없어진지 오래였다. 최근에 몇 년 전에 술상자들을 싣고 좌초된 난파선을 끌어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그 술들을 구할 수 없을까…그런 일말의 기대를 품고 여기로 온 잭스였지만 이미 늦었는지 아니면 매물이 아예 없는건지 난파선의 술은 코르크 마개 끄트머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껏 찾은 것들도 죄다 가짜였고. 그래서 완전히 김이 새버린 잭스는 세라 포츈의 선술집인 '술취한 요들'에 들러 브랜디를 사발로 퍼 마시고도 모자라 가장 독한 술 한 병을 싸들고 휘적휘적 시장으로 나온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미련이 있어서 나온게 아니라, 이 시장 거리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섬 주변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이 꽤 으슥해졌는데도 시장 거리에는 온갖 곳에 꽂힌 횃불들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인파는 오히려 낮에 비해 두 배는 불어나있었다. 어떻게 밤만 되면 낮에는 털끝도 보이지 않던 술꾼들이 땅에 솟아나기라도 한 듯 스르르 나타나는지, 여러 번 이 섬에 발을 들인 적이 있는 잭스에게도 그 현상은 정말 미스터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술이 있고 사람이 많아지면 왁자지껄한 소음은 기본이요, 주먹다짐도 심심찮게 일어나는게 이 동네였기 때문에 잭스는 시장에 발을 들이고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뭔가 와장창 박살나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미치는 일 따윈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얼굴(정확히는 가면)이 팔릴 대로 팔린 챔피언이었고, 그 이전에 자타가 공인하는 무지막지한 싸움꾼이었으니까. 멋모르고 그에게 떼거지로 덤벼들었다가 떼거지로 박살난 어떤 암흑가의 조직 이야기는 섬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의 행적이었다. 빌지워터에서 내로라하는 싸움꾼들이 양이라면 잭스는 호랑이였다. 아니면 사자거나. 한마디로 그는 빌지워터 사람들이 볼 때는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조용히 몸을 웅크린 채로 있는 맹수였고, 아무리 막나가는 범법자라 할지라도 잭스를 상대로 시비를 거는 얼간이는 그 사건 이후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그의 소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을 때 잭스의 머릿속에 처음 드는 생각은, '도대체 어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다 못해 대륙으로 이민을 간 녀석이 내게 시비를 거나'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내린 그의 눈에 들어온 범인은 고작해야 예닐곱 살밖에 되지 않았을 법한 꼬맹이였다. 땟국물이 질질 흐르는 얼굴에 한쪽 콧구멍에 대롱대롱 매달린 싯누런 콧물, 그 콧물을 닦느라 반들반들하다 못해 윤이 나는 한쪽 소매까지. 영락없이 전형적인, 섬의 시장통에서 길거리에 늘어선 벽돌만큼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부랑아였다.


 "헤헤."

 "……."


 남자앤지 여자앤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 꼬마애는 조개껍질이나 병뚜껑 따위로 만든 목걸이며 팔찌 따위를 한쪽 팔에 주렁주렁 매달고선 그를 향해 스윽 내밀고 있었다. 가끔씩, 정말로 가끔씩 빌지워터 섬 정부 관리 하에(즉, 안전이 보장된)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관광객에게나 팔릴 법한 물건이었다. 물론 여기 사람들은 줘도 안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수틀린다고 두들겨 패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잭스 역시 두들겨 패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이런 걸 사고 싶은 마음은 겨자씨만큼도 없었다. 꼬마는 한번도 정의의 전장 경기를 본 적이 없는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하게(?) 그에게 접근할 리가 없었으니까.


 "헤헤 아저씨, 하나만 사주세요."

 "…너, 따르는 형이나 아저씨는 있느냐?"

 "아뇨! 헤헤, 형이랑 아저씨는 다 뺏어가요. 집에 아픈 엄마가 있어요. 헤헤, 하나만 사주세요."


 …어떻게 해야할까. 잭스는 '아뇨'까지만 듣고 나머진 흘려들으면서 아이를 바라봤다. 부모님이 아프다는거야 이 바닥 부랑아들이 곧잘 써먹는 일종의 관용어구나 마찬가지인 사연이었기 때문이었다. 형이나 아저씨는 명목상의 보호자들을 뜻하는 은어였다. 그놈들 아래에서 구걸하는 부랑아들은 하루 수익을 왕창 뜯기긴 해도 안전을 어느 정도는 보장받긴 했지만, 이렇게 혼자서 돌아다니는 부랑아는 얄짤없는게 이 바닥 생리였다.


 일단 이 꼬마 눈에 자신이 호구처럼 비친 것 같다는 기분 더러운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잭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호구 같은) 관광객들이야 불쌍하다고 돈 몇 푼 쥐어주며 적선하는 셈치고 몇 개 사들였겠지만 뒷골목 생태를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만큼이나 잘 아는 잭스는 이런 꼬마의 손에 쥐어진 동전 몇 푼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행동거지가 한두번 이런 짓을 해본 건 아닌 솜씨였는데, 솔직히 말해 잭스 입장에선 이 아이가 여태껏 살아있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때 별 생각 없이 시선을 향한 아이의 잡다한 장신구 중에서 유독 잭스의 눈길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앗, 아저씨. 그거 특별한건데. 헤헤,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손님!"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호객용 아부까지 해가며 눈을 빛내는 꼬마였지만, 잭스의 시선은 아이의 땟국 절은 팔에 달린 조그마한 팔찌에 머물러있었다. 자그마한 조약돌을 얼기설기 이어서 만든 듯한 조잡하기 그지없는 팔찌. 그 팔찌의 조약돌 몇 개가, 놀랍게도 '빛나고' 있었다. 잭스는 그 빛을 잘 알았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베사리아가 으레 보석을 사고 나면 보석에서 나는 마력의 광채 좀 보라며 그의 눈앞에 들이민게 수십 번인데. 그때만큼 환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것은 마력에 의한 빛이 틀림없었다. 조약돌들은 아주 조금이라도 보석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일 터이고. 그 말은…이 아이는 작은 크든 마력에 재능이 있다는 뜻이었고, 즉 소환사의 자질이 있다는 뜻이었다.


 "너, 이 빛나는 조약돌들은 어디서 구했느냐?"

 "앗, 이거 영업 비밀이에요!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아요!"


 잭스는 이 아이에게 '기회를 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요즘 소환사가 될만한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징징거리는 베사리아의 투정도 있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적어도 그 능력을 적합하게 쓸 기회 정도는 줘야 한다는게 그의 신조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눈에 잡히는 사람 한정에서였다. 잭스는 빌어먹을 성인군자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품을 뒤져 황금 동전 몇 닢을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어찌나 아이가 눈을 크게 떴던지, 동전의 광채가 아이의 눈에 비칠 정도였다.


 "넌 이 조약돌들을 빛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 잭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 조약돌들을 찾은 장소에서, 똑같이 빛나게 해보거라. 그럼 이 돈들을 다 주마."


 잭스는 다시 동전을 품에 넣었다. 아이는 팔에서 장신구들이 후두둑 떨어지며 짤그랑 소리를 내는 것도 모른 채, 멍하니 팔을 늘어뜨리고 그를 올려다봤다. 잭스는 술병 매단 가로등을 품에 껴안으며 조용히 아이의 결정을 기다렸다. 자신은 기회를 줬다. 선택은 아이의 몫이었다.


 "정말 그 돈들 다 줄거에요?"

 "그래."

 "집에 아픈 엄마가 있어요. 저…나쁜 곳으로 데려가는 건 아니죠?"

 "…그래."


 아무래도 아이는 잭스가 챔피언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잭스도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아이에게 주는 기회였지만,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다. 자신이 챔피언이라는 사실은, 이 아이가 소환사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한 뒤에 밝혀도 상관없는 요소였다.


 "갈게요. 따라오세요."


 마침내 아이는 결심한 듯, 그 조막만한 손으로 잭스의 한쪽 소매를 붙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머지 장신구들은 다 길거리에 버려두고, 아이의 손에는 잭스가 지목했던 팔찌 하나만 들려있었다.


 팔찌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희미하게.



***



 별들이 쏟아질 듯 박힌 하늘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려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과 하늘의 색이 너무 닮아서 밤하늘과 바다가 이어진 것만 같았다. 어느 곳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파도가 해변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철썩였고, 그때마다 바다로 돌아가려는 게 무리들이 꼼지락거리며 움직였다.


 환상적인 경치에 안주까지 눈앞에 있다니.


 잭스가 입맛을 다셨다. 저놈의 게를 몇 마리 잡아 삶아놓고, 밤하늘의 별들과 밀려오는 파도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술이나 마실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에이 아저씨, 좀만 더 비춰봐요. 여기, 여기. 아이참 거기 말고 여기요.”

 “…….”


 왜 여기서 이름도 모르는 꼬맹이에게 가로등이나 비춰주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잭스는 정말 쓸데없는 선행을 베풀었다고 속으로 열 번은 더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가로등은 참으로 오랜만에 주위를 밝게 한다는 제 기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찾았다!”

 “…….”


 영업 비밀이라고 숨길 땐 언제고, 막상 해변으로 나오니 아이는 낯선 사람과 단둘이 있다는 데에 불안감도 느끼지 않는가본지 제가 흥이 나서 열정적으로 조약돌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잭스가 힐끗 보기엔 그냥 반질반질한 조약돌 한주먹일 뿐이었다. 그로서는 도대체 이 아이가 어떤 기준으로 돌들을 선별하고 있는지 감도 못잡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두 주먹 가득 돌을 주은 아이는 뭔가 중얼중얼하면서 돌들을 골라내더니, 그 많던 돌들을 죄다 버리고 딱 두 개만 손에 쥔 채 잭스 쪽으로 돌아섰다.


 “그냥이라면 이거 다 쓰는데요, 아저씨한텐 확실하게 보여드리려고 특별히 강한 거 두 개만 골랐어요!”

 “강한 거라니?”


 잭스가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 음, 그러니까……. 슈도? 수도? 손도가 높은 거요.”

 “…순도 말이냐?”

 “네 순도! 막 말하려고 했는데, 에헤헤. 봐봐요, 이렇게 하면…….”


 아이는 양 손에 하나씩 조약돌을 잡더니 두 손을 모아 이리저리 공기놀이 하는 것처럼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인적이라곤 쥐똥만큼도 없는 해변에서 돌 가지고 장난치는 아이와 가로등으로 그짓을 비춰주는 용병이라……. 잭스는 약간 멍청한 기분을 느끼며 아이의 행동을 지켜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멍청하게 서있는 탓인지 시간은 더럽게 느리게 가고 있었다. 마침내 길디길었던 몇 분이 지나자 스르르 이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이변은 돌에서가 아니라 아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흐음.”


 달빛이 아이의 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챌 수 없겠지만, 달빛을 받은 아이의 피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돌을 굴리는 아이의 손가락에서 안개처럼 ‘달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조약돌 속으로 스르르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베사리아나 멘드레이크같이 마법적 지식이 무진장 풍부한 사람들은 이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어떤 주문도 도구도 쓰지 않고 빛을, 그것도 특정한 종류의 빛을 다룬다니. 빛을 다루는 마법사가 드문 건 아니었다. 당장 리그에만 봐도 럭산나 크라운가드라는 빛의 마법사가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럭산나의 마법은 ‘빛 그 자체를 다루는’ 마법이라기보단 ‘빛의 성질을 띈’ 마법이라 보는게 옳았다. 그런 마법사들은 전혀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그 마법사가 다루는 속성이 빛의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일 뿐이니까. 하지만 아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일반적인 마법의 발현 수순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요, 좀 더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마력으로 빛을 만드는게 아니라 빛으로 마력을 만드는 행동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현상인데 아이는 심지어 그렇게 만들어낸 마력을 별다른 장치의 도움 없이 다른 사물에 저장하는 행동까지 동시에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아이의 행동은 현 마법계에 있어 이단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잭스는 베사리아도 멘드레이크도 아니었고 마법이라면 여러 가지 이유(베사리아의 민폐 행위+a) 때문에 치를 떨며 싫어했기에 이런 쪽으로는 완전히 맹탕이었고, 이 신비하기 그지없는 현상은 그에게 아이의 행위가 마법 비스무리한 거라는 느낌만 줄 뿐 그 이상의 감흥을 주진 않았다.


 “다 됐다! 이거 봐요 아저씨!”


 …그래서 아이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그에게 환하게 빛나는 조약돌 두 개를 내밀 때도 잭스는 별다른 감흥 없이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어느새 조약돌은 아이의 손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은은한 달빛과 너무나도 흡사했기에, 마치 아이가 작은 달 두 개를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음, 어, 그래.” 잭스가 가면 밑에서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멋지구나.”

 “우와, 멋지다고요? 정말로요? 이거 해서 멋지다는 소리 들은 건 처음이에요! 정말 예쁜데, 엄마는 제가 이걸 만들어서 가져가면 싫어하셨거든요. 참 이상해요. 예쁜데, 아무도 안사요……. 어쨌든 약속 지켰으니 돈 주세요 아저씨!”


 아이는 잔뜩 기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애초에 약속을 깰 생각도 없었거니와 이건 일종의 테스트였기에 잭스는 시원시원하게 품속에서 돈을 꺼내 아이의 손에 쥐어줬다. 돈을 바라보는 아이의 입가에 함지박만한 미소가 걸리는 걸 보고, 잭스의 마음속에는 아이의 어깨에 얹힌 가난의 무게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린 나이의 순수함에 대한 기특함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방금 한 건 마법이라는 것일 게다.”

 “마법이요? 그거…막 빛이 번쩍번쩍 하는거요? 지팡이 휘리릭 휘두르면 호박이 마차로 변하는거요?”

 “…네 머릿속에 마법이 어떤 식으로 들어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네가 방금 보여준 건 이상한 재주가 아니라 마법이다. 즉 네겐 재능이 있다는 말이지. 자 이제 선택할 시간이다. 여기서 그 금화를 내게 다시 준다면, 네 재능을 전쟁학회에 보고하기 위한 통신용 수정구슬 이용비로 쓰마. 하지만 거부한다면…그냥 그 금화를 가지고 떠나라. 꽤 큰돈이니까 1년 정도는 먹고사는 데에 문제는 없을게다.”

 “거짓말!” 아이가 금화를 얼른 등 뒤로 숨기며 소리쳤다. “주니까 아까운거죠? 아저씨도 이게 별거 아닌 재주라고 생각하는거죠?”

 “정말 네게 준 돈이 아까웠다면 주지도 않았단다, 꼬맹아. 아니면 줬다가 강제로 뺏었겠지.”


 잭스가 가로등을 툭툭 치며 으스스하게 말하자 아이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사실 잭스는 약간 취기가 돌아서 목소리가 좀 가라앉은 것일 뿐, 기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면에 가려진 그의 표정을 아이가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얼굴을 가린 괴상한 가면이며 분명히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세 개뿐인 손가락과 보라색 피부는 아이에게 뒤늦은 공포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통 속에 있을 때야 느끼지 못했지만, 막상 바라던 돈을 받고 빛나는 돌을 만드는 데에 흥미도 식자 그제서야 잭스가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데서 기인한 두려움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뭉클거리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거기엔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 엄청나다는 전쟁학회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거지?’ 라는 아이의 의심도 한몫하고 있었다. 잭스가 일부러 자신의 이름과 챔피언이라는 신분을 감춘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시, 싫어요!”


 결국 아이는 의심 서린 눈길을 잭스에게 보내며 거절했다. 제 딴에는 들키지 않으려는 듯 살살 뒷걸음치더니,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하자 이내 후다닥 달아났다.


 “그건 아저씨 가지세요! 금화 고마워요!”


 아이는 크게 소리치고선 빠르게 도망갔다. 잭스는 쫒지 않았다. 쫒고 싶지도 않았고 쫒을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안을 했고, 아이는 거절했다. 그게 남겨진 사실 전부였다. 그는 허리를 굽혀 발밑에 내동댕이쳐진 두 개의 돌을 주워들었다. 돌은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묵묵히 돌을 쳐다보던 잭스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항구 쪽이 아니라 좀 더 운치 있고 사람 없는 곳으로. 아이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게 그가 베사리아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베사리아에게 알려주면 그녀가 알아서 결정하겠지, 아쉬운 쪽은 그녀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면을 슬쩍 들고 가로등에 걸쳐뒀던 술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죽여주는 술맛이었다.


 물론, 가는 길에 게 몇 마리 잡는 것 또한 그는 잊지 않았다. 술과 안주에 관해서라면 아무리 취했어도 챙길 건 챙기는 잭스였으니까.



***


 술과 모닥불에 구운 게 몇 마리와 환상적인 밤바다의 풍경, 거기에 딱 좋게 불어오는 선선한 바닷바람까지. 상상만 해도 술꾼들이라면 극락이 따로 없을 법한 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혼자서 자작하면 무슨 재미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잭스에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 가면을 벗지 않는 그에게 이렇게 탁 트인 환경에서 빨대가 아닌 맨입으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는다는 기회는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한 2분 전까지는.


 “정말 죄송해요!”


 지금 그의 앞엔 방금 전까지 경쾌하게 따닥이던 모닥불 대신에 불이 있었다는 걸 간신히 알려주는 거무스름한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불가에 꽂아놨던 게들은 물론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기분이 동해서 일부러 켜둔 가로등의 불 역시 ‘내가 언제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듯 픽 꺼져 있었다. 술병? 말할 것도 없었다. 재수 없이 쓸려온 돌에라도 맞았는지 딱 잭스가 잡고 있는 부분 빼고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최악인데 잭스는 해초와 불가사리 따위에 뒤덮힌 채 막 가면을 슬쩍 들고 술병을 입가로 가져가는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술 대신 그의 입에 들어간 건 짭짤한 바닷물과 해초 쪼가리였다. 소금물에 푹 담갔다 꺼낸 양털처럼 그 역시 한군데도 남김없이 푹 젖어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운반자님! 아직 제가 파도 다루는 덴 미숙해서, 아니, 실은 이번이 육지에 올라온게 처음이라서…….”


 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어이가 탈출한 상태였다. 세상에 잔잔하던 바다 저편에서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더니 피하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이 자신을 덮쳤다고 한다면, 세상 그 어느 누구가 믿어주겠는가? 잭스 그 자신도 지금 이 상황에 전혀 적응을 못하고 있는데.


 취기는 이미 싹 가신 상태였다. 아무렴 집채만한 파도를 눈앞에서 맞았는데 취기가 남아있는게 이상한 일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오며 아는 술 종류만큼이나 술 깨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는 잭스였지만, 가로등에 맹세코 이렇게 술이 깨보긴 또 처음이었다. 게다가…….


 “파도를 다루는 거야말로 파도 소환사의 기본 소양인데, 우우……. 정말 전 파도 소환사의 자격이 없는걸까요?”


 게다가 이 파도의 원흉으로 짐작되는 이 괴상한 생명체는 또 뭐란 말인가. 커다랗고 새파란 보석으로 장식한 헤드기어로 매끄럽게 넘긴 황금빛 머리카락(…지느러미? 잭스는 그 판단을 미루기로 했다.)과 깜짝 놀랄만큼 아름다운 얼굴, 흰자일 부분이 새까맣긴 해도 순진무구함을 가득 담고 있는 홍옥같이 붉은 눈동자만 본다면 분명히 아름다운 미소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하반신까지 시선을 내린다면 발이 있어야 할 부분엔 발 대신에 커다란 지느러미가 달린 채 비늘로 뒤덮힌 물고기의 꼬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의 있는 상식 없는 상식을 총동원해서 추측해보자면, 이 생명체는 아마 저 바다 밑에서 산다는 인어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침내 그는 말문을 열었다.


 “살다살다 밀려온 파도에 습격당하긴 또 처음이로군. 좋은 경험이었소, 아가씨.”

 “앗, 얼굴이 전혀 변하지 않으신데 말을 하시네요! 어머나 신기해라. 육지 분들은 우리들과 많이 다르다고 하던데, 정말 많이 다르군요! 다리라는게 두 개, 손가락은 세 개. 눈은 여섯 개!”

 “…이건 가면이라오. 그리고 난 인간이 아니고.”

 “어머나 그러신가요! 이번 대의 운반자님은 특이하시네요!”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를 전혀 눈치채지도 못하고 연신 ‘어머나’를 연발하며 방긋방긋 웃는 인어를 보자 잭스는 비꼬길 포기했다. 기분이 다른 의미로 정말 더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렇게 비꼬는 투도 못 알아듣는 상대에겐 화를 내 봤자 별 소용이 없었다. 보나마나 이쪽이 화를 내면 저 인어는 어쩔 줄 몰라하며 펑펑 울어대기만 할 거고, 결국 죄책감으로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잭스 자신일 터였다.


 “…그래서, 아가씨는 대체 누구요?”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인어는 ‘어머 내 정신 좀 봐’라고 하는 듯 입을 살짝 가리더니 예의 그 방긋방긋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녀가 들고 있는 보석 박힌 지팡이 덕분인지 아니면 뭣 때문인지 바닷물이 마치 풀장처럼 그녀 아래쪽에 머물러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육지에 올라와 있으면서도 전혀 무리 없이 ‘헤엄칠’ 수 있었다. 그녀의 지느러미가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전 마라이의 딸, 나미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이번 대의 파도 소환사를 맡게 되었어요…아, 방금 전은 정말 죄송했어요! 어머 이럴 때가 아니지. 자 운반자님, 이번 대의 교환을 시작하죠. 빨리요! 저 밑에서 자매들이 새로운 월석을 기다리고 있어요!”


 수줍게 살랑이는 지느러미와는 대조적으로 나미의 입은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선 옆구리에 매고 있던 해초로 만든 듯한 가방에서 아기 머리통만한 진주를 쑥 빼서 잭스의 코앞에 들이미는데, 그 일련의 행동에 잭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런 홍두깨가 없었다. 느긋하게 술 마시려는 찰나에 집채만한 파도에 습격을 당하질 않나, 또 그 파도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인어는 일면식도 없는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며 다짜고짜 교환을 하자며 진주를 내밀지 않나! 잭스는 숙취와는 다른 의미로 골치가 딱딱 아파지기 시작했다.


 “잠깐만, 인어…아니 나미 양. 일단 진정하고 좀 앉아보시오.”

 “앉아요? 앉는다는게 뭐죠? 가만히 떠 있는걸 말하시는 건가요?”


 나미는 지느러미를 살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얘기를 나눠보자 이 말이오. 우선 난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도 않을뿐더러, 도대체 그 운반자라는게 뭔지도 모르겠거든.”


 잭스가 툴툴거리며 말하자 나미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가셨다. 그제서야 일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나미는 밀어닥치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는 듯 허둥거렸다.


 “네, 네? 하지만 운반자님에게서 월석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요. 비록 약속의 해안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계서서 찾는데 좀 고생을 하긴 했지만요. 그래도 보름달이 뜨는 날, 해변에 불을 피워놓고 기다리는 신호는 정확하게 알고 계셨잖아요?”


 나미가 꺼져버린 모닥불을 가리키며 허둥지둥 말하자 잭스의 머릿속에 잠시 잊고 있었던 술과 안주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 떠올랐다. 잘 구운 게와 미스 포츈의 특별주……. 그는 쓰라림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불을 피운건 그냥 게 몇 마리 구워먹으려고 했던 거였소.”

 “그, 그럴리가! 그치만, 그치만 분명히 월석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요!”


 나미가 점점 더 당황하자 그녀 주변에 떠 있던 물이 점점 더 불안정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도대체 월석이 뭘까 골똘히 생각하던 잭스는 이내 품속에서 예의 그 빛나는 조약돌을 꺼내들었다. 은은한 빛을 뿌리는 조약돌은 마치 달빛을 머금은 은처럼 빛나고 있었다. 가능성이라고 하면 이것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대강 때려 맞춘 것이 맞았나본지 나미는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월석!”


 거의 잭스의 품에 파고들 기세로 다가온 나미는 그의 손을(정확히는 월석을) 덥석 쥐며 외쳤다.


 “네, 맞아요. 바로 이거에요! 하지만, 하지만…왜 이렇게 작죠? 분명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월석은 이 진주보다도 크고 더 찬란한 빛을 뿜어냈는데! 안돼요, 이걸로는 너무 부족해요. 다음 약속의 시간까지 이 월석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요!”


 이 나미라는 인어는 경험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서 그런지 당황해서 잭스는 전혀 모르는 사실만 속사포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대화가 계속될 수 없는게 눈에 빤하게 보였기에 잭스는 그녀가 또 말을 하려는걸 가로막았다. 그리고선 서둘러 자신이 여기 온 경위와 예의 그 빛나는 조약돌을 만드는 아이와 만난 일, 그리고 그 아이와 헤어지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이미 잭스가 말을 하기 전부터 잔뜩 불안에 젖어있던 나미는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이마를 짚으며 휘청했다. 집중력이 완전히 흐트러졌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를 감싸고 불안정하게 일렁이던 물들이 후두둑 떨어지며 나미는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또다시 짜디짠 바닷물을 한바가지 뒤집어쓰게 된 잭스였다. 그러나 대놓고 짜증을 내기엔 나미 주변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다.


 “아아, 이럴 수가…….” 나미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저희 마라이의 자매들은 달빛도 햇빛도 닿지 않는 깊은 바다 속에서 살아간답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라이에게 빛은 너무나도 중요해요. 빛은 우리의 영역을 나타내줄 뿐만 아니라 심해의 괴물들이 우리의 영역으로 침범하는 것도 막아주는 역할을 해요. 그 빛을 지금까지 제공해 준 것이 바로 월석이고요. 월석은 꼭 100년 주기로 육지의 운반자라는 분에게서 새로 받아오는데, 그 운반자님께 드릴 진주를 구해오는 것과 그 진주와 월석을 교환해서 새로운 월석을 가져오는게 바로 파도 소환사의 사명이랍니다. 하지만…….”


 진주같은 눈물이 나미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뭍으로 나가보고 싶은건 제 일생의 소원이었어요. 그래서 파도 소환사에 자청했고 마침내 뭍으로 올라왔죠. 해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전까지만 해도 전 훌륭하게 교환을 마쳐서, 자랑스럽게 자매들에게 귀환을 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어요. 하지만 약속의 만에는 아무도 없었죠.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그 누구도 오지 않았어요. 전 불안했어요, 너무나도……. 의지할 건 오직 이 진주뿐이었죠. 이 진주는 월석과 가까이에 있으면 우리들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파장을 뿜어내거든요. 뭍에 있는 모든 해안을 얼마나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녔는지 모르겠어요.”


 나미의 꼬리지느러미가 힘없이 모래사장을 탁탁 쳤다. 그제서야 잭스는 그녀의 지느러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벌레먹은 나뭇잎처럼 여기저기 찢어진 채 만신창이가 된 지느러미와 둥둥 떠 있던 바닷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자잘한 상처들……. 그녀는 죽을 것처럼 힘든 와중에 애써 밝은 척을 했던 것이었다. 아마도 파도로 잭스를 덮쳤던 것도 조종이 미숙해서가 아니라 그걸 조종할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리라. 잭스의 고개가 자신의 지느러미 쪽으로 가있는 걸 눈치 챈 나미는 부끄러운 듯 손으로 지느러미를 가렸다.

 

 “파도 소환사는 운반자님 앞에선 절대 힘든 내색을 하면 안되고, 당당하고 활기차야 한다고 장로님께 단단히 주의 받았었거든요. 파도 소환사는 유일하게 뭍으로 올라가는 마라이의 대표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럼 여기까지 오는 데에 대체 얼마나 걸렸던 거요?”

 “달이 열 번 떠오르고 해가 열 번 떠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헤엄쳤어요. 그리고 열한 번째 달을 마지막으로 그 뒤론 세지 않았어요. 너무 힘들었거든요.”


 잭스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열흘 이상이나 헤엄쳤다는게 아닌가! 인어고 뭐고 탈진으로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용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제가 힘든 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어요. 이건 제가 자청해서 맡은 역할이니까요. 하지만 저 밑에서 꺼져가는 월석을 보며 두려움에 떨 자매들을 생각하면…….” 나미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어떻게 찾아낸 월석인데, 이렇게 조그맣고 희미하다니…전, 전 일족을 어둠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어요, 파도 소환사 실격이에요……. 저같은 인어가 파도 소환사라는 막중한 역할을 맡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잭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왜인지 일이 점점 꼬이는 느낌이었다. 분위기상 아무래도 도와줘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이긴 한데 남 곤란한 일 떠맡아주는 건 잭스가 제일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아 사람 잘못 찾았으니 알아서 더 찾아보시오 라고 매몰차게 내치기엔 이쪽 일에 관련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차라리 아까 아이가 이 월석이라는 걸 만들어 줄 때 이 인어가 왔었다면 일이 훨씬 일이 수월하게 끝날 수도 있었으련만……. 정말 여자랑 엮이면 뭔가 자꾸 일이 꼬이는 것만 같다고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잭스는 결국 한숨을 푹 쉬고선 입을 열었다.


 “나미 양의 일에 아주 관련이 없는 건 아니니 내가 힘닿는 곳까진 도와주겠소. 아는 소환…아니 지인에게도 도움을 청해보고, 이 월석이란 걸 만든 아이…아니 그 운반자인지 뭔지도 찾아보리다. 며칠만 기다려주시오.”

 “며칠요?” 나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바다 밑 깊은 곳에서 자매들이 어둠과 싸우고 있어요. 전, 전…….”


나미의 눈에서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자, 잭스는 어째 선의를 베푸는 쪽은 분명 자신일진데 독촉 받는 것만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틀 안에 어떻게든…….”

 “흑, 어둠 속에서 어린 자매들이 상어에게라도 습격당한다면…아아, 전 미쳐버리고 말거에요!”

 “…내일까지 어떻게든 해볼테니 기다리시오.”

 “아아, 감사합니다 운반자님. 아니 운반자님이 아니고, 멋진 수컷님!”


 나미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잭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혹자는 아리따운 여인(상반신 한정이지만, 어쨌든)이 스스로 품에 안겨준 기분 좋은 상황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잭스는 전혀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가면 밑 잭스의 얼굴은 소태라도 씹은 듯 와지직 구겨져있었다. 생각해보라, 취미 생활을 방해받는 것도 모자라 그 방해자를 도와주기 위해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생고생을 해야 한다니! 내일까지 그 아이를 찾고 베사리아에게 연락해서 이쪽으로 와달라는 말을 하려면 당장 지금부터 다시 시내로 돌아가야 했다. 그말인즉슨 오늘 잠은 다 잤다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밤새 걸어서 시내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다가 나미가 안긴 촉감이 기분 좋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소금기로 끈적거리는 건 둘째 치더라도 나미의 몸은 미끌미끌하고 차가워서 잭스는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거의 최악이었다.


 “일단 이 근처에서 쉬고 있으시오, 내일 점심 때 즈음해서 여기로 다시 올테니.”

 “점심? 아아, 뭍에 사는 분들은 식사를 세 번 한다고 들었어요. 해가 하늘 가운데에 뜰 때를 말하시는거군요. 걱정 마세요! 나미는 여기 바닷가 근처에서 쉬고 있을게요.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멋진 수컷님!”

 “내 이름은 멋진 수컷이 아니라 잭스요.”

 “네, 멋진 잭스 님!”

 “‘멋진’은 빼줬으면 좋겠소만.”

 “네, 다음부턴 그럴게요. 멋진 잭스님!”

 “…관둡시다.”


 나미는 잭스의 허리를 꽉 껴안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내 나미의 꼬리 지느러미가 부드럽게 살랑거리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미와는 반대로 잭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 여자가 엮이면 일진이 사나워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나미붐은 일어날 거시다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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