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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14화(후)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7 개
조회: 2467
추천: 14
2016-08-09 22:39:05

***


 “꽤 괜찮은 계획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르블랑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소환 마법이 해제된 챔피언들을 지배해서 이쪽으로 불러 모은 다음, 당신을 이용해 다른 챔피언들을 모두 죽이고 소나를 내 손에 넣으려고 했어요. 그럼 리그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졌을테고, 당신은 타 국가의 챔피언들을 살해한 죄로 멋들어지게 처형당했을테고……. 난 소나를 가지고 놀면서 그 장면을 느긋하게 관람했겠죠.”
 “…….”
 “그런데 계획이 이 정도로 어긋날 줄은 솔직히 예상 못했어요. 물론 여기 있는 제 수족은 당신에 비해 여러 가지 의미로 낮은 한계치를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그걸 보완해주기 위해 협곡을 습격하는 부대의 전권을 줬어요. 그리고 당신이 도망친 카타리나나 배에 바람구멍 뚫린 탈론 따위로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 무능한 수족은 슈퍼 미니언 수백 대와 수많은 마법사들, 완전히 정신을 장악한 챔피언 여섯 명과 넥서스를 필두로 한 협곡의 방어 시설까지 손에 넣은 상태였죠. 그런데도…당신에게 졌어요. 뭐가 문제였을까요? 당신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한 내 탓이었을까요, 아니면 이 무능한 수족을 너무 과대평가한 내 잘못이었을까요? 이런, 어느 쪽으로 하던지 결국 내 부덕함이 문제였군요.”

 르블랑은 뭐가 재밌는지 쿡쿡 웃었다. 하지만 잭스는 그 온화한 목소리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뿌리 깊은 증오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칼보다 품속에 감춘 칼이 더 무서운 것처럼, 비록 르블랑이 미소를 띄고 있기는 했으나 눈은 시퍼렇게 살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눈빛을 가진 자가 진짜 르블랑이 아닌 르블랑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누군가라고 생각하자 더더욱 소름이 끼칠 일이었다.

 “뭐 좋아요.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잭스. 난 지금 싸우러 나온게 아니니까. 그래요…말하자면 나는 지금 변덕스러운 관용을 부리고 있는 거랍니다. 당신은 이 르블랑과 두 개의 타워를 뚫고 넥서스를 부술 만한 힘이 없고, 나 역시 당신에게 관용을 베풀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더 움직일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어서 무기를 거두세요……. 내 변덕스러운 관용이 말라버리기 전에 말이죠. 물론 미래에 당신을 더 깊디깊은 절망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넣을 생각이긴 합니다만, 지금 여기서 내 관용을 받아들여 거래를 해보는 것도 당신에겐 딱히 해 될 일은 아니잖아요?”

 르블랑은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꽃을 거두세요.”
 “…….”

 잠시 망설이던 잭스는 결국 마력을 갈무리해서 불꽃을 사그라뜨렸다. 르블랑의 말대로 지금 자신에겐 이 상황을 타계할만한 힘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한 번 ‘푸른 횃불’이 되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애초에 수지타산이 맞는 방법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지금 르블랑인지 르블랑인 척 하는 건지 모르겠는 미확정 인물까지 나온 마당이라 그 수는 선택할 수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불확정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잭스는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 정도로 우둔한 인물도 아니었다.

 “아주 좋아요. 그럼 거래를 시작해 볼까요?”
 “…그 전에, 넌 누구지?”
 “내가 누구냐고요? 설마 진심으로 물어보는 건가요? 아하, 아하하하! 잭스, 이제 보니 당신 꽤 유머 감각이 있군요. 제가 정체를 밝힐 생각이 있었으면 이렇게 르블랑을 통해 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을까요? 당신도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 가면을 쓰고 다니는 주제에 남의 정체를 캐물으려하다니, 당신의 얼굴 가죽은 그 철가면만큼이나 두꺼운가보군요.”

 르블랑이 유쾌하다는 듯이 고개까지 젖히며 깔깔거리자 그녀의 몸 곳곳에 박혀 있는 수정이 살을 태우며 치직거리는 스파크를 뿜어냈다. 자아마저 상실한 채 꼭두각시로 놀아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아하하…하지만 기왕 제가 먼저 호의를 베풀기로 했으니 작은 힌트는 드리도록 하죠. 몇몇 인상 깊은 지명과 연도부터 말해보는 걸로 할까요?”

 사이하게 빛나는 르블랑의 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녹서스 북동쪽, 어둠숲. CLE 3년.”
 “……!”

 잭스가 눈에 띄게 동요하자 르블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파이론 평원의 ‘천 개 눈동자의 땅', 마찬가지로 CLE 3년. 그 외에도 켈러도운 북쪽의 어느 이름 없는 협곡, 이케시아의 잿빛 안개 땅, 역병 정글의 수은 늪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오니아의…바람노래 협곡.”

 르블랑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의 그녀의 눈은……거의 독기에 가까운 살기를 줄줄이 뿜어내고 있었다.

 "바람노래 협곡."

 르블랑은 그 단어를 음미하듯 다시 말했다.

 "나도 거기 있었어요."
 "……."

 잭스는 침음성을 삼켰다.

 애초에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던 잭스가 입을 다물고, 르블랑이 그런 잭스를 아무 말 없이 살기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자 침묵은 또다시 손쉽게 찾아왔다. 그녀의 눈엔 분노와 증오가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건 그냥 미소가 아니었다. 이 상황을 즐기는 데에서 나온 것도 잭스의 꼴을 보고 비웃는 미소도 아니었다. 몰래 복수의 칼날을 갈며 하루하루 증오로 자기 몸을 불태우던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분노가 극에 달해 마음을 새까맣다 못해 새하얗게 태워버린 자들만이 지을 수 있는…증오의 미소였다.

 “……유감이군.” 잭스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만은 생존자가 없길 바랐어. 네가 잔당들을 끌어 모은건가?”
 “끌어 모았다는 표현은 거북하군요. 마치 내가 행상인처럼 이리저리 발품이라도 판 것처럼 들리잖아요. 잭스, 이제 난 ‘제국’의 유일무이한 정통 계승자예요. 황제는 움직이지 않아요. 그들이…내게로 온 거죠.” 
 “그 더러운 ‘능력’을 이용해서 말이군.”
 “말조심하세요. 이건 우리가, 내가 이 대륙의 유일무이한 지배자라는 확실한 힘이에요.”

 잭스가 이를 갈며 씹어뱉듯 말하자 르블랑이 코웃음을 쳤다.

 내 휘하에 모은 자들의 목적은 물론 전쟁학회를 향한 복수죠. 뭐 그 중에는 이렇게 한 번 쓰고 버릴만한 쓰레기도 있지만,” 르블랑은 죽은 남자의 머리를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꽤 쓸만한 실력자들도 있거든요. 그리고 그 중 몇 명이 전쟁학회에 가 있죠. 후후, 거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쳤군. 전쟁학회가 무슨 어중이떠중이들의 집합소인 줄 아나?”
 “세월은 영혼을 녹슬게 하는 법이죠.” 르블랑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예리한 검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정교한 예술 작품이라 해도 결국 세월이 지나면 녹슬고 빛이 바래서 스러지는 법. 지금의 전쟁학회가 당신이 기억하는 그 예전의 전쟁학회인 줄 아시나요? 이만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오시죠, 잭스. 전쟁학회는 부패했어요. 과거의 영광과 자신의 업적에 도취해서 스러져가는 늙은이에 불과하죠. 그리고 우리는…증오와 복수로 벼려진 군세입니다.”
 “큭, 네놈……!”

 잭스가 번개처럼 르블랑의 목에 부러진 가로등을 갖다 대었다. 가로등을 부여잡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려한대로 전쟁학회 역시 위험에 빠진게 분명했다. 어쩌면 여기보다도 훨씬 더……. 잭스는 이를 갈았다. 여기서 르블랑을 위협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르블랑을 조종하고 있는 자 역시, 그것을 잘 아는 듯 여유로운 모습을 거두지 않았다.

 “어머, 죽이시려고요? 그럼 그러세요. 난 아쉬울 거 없어요. 하지만 이걸 죽이면 내 관용과 함께 모처럼 내가 제안할 거래 역시 끝난다는 걸 알아두세요.”

 가면 너머로 잭스와 르블랑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녀의 말대로 잭스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결국 잭스는 가로등을 내렸다. 르블랑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내용을 말해봐라.”
 “후후, 좋아요. 이 정도 반항은 해 줘야 저도 당신을 가지고 노는 보람이 있죠. 아…그럼 내 쪽에서 말해 볼까요? 우선 당신과 이 협곡 내부에 있는 챔피언들을 모두 역소환 할 수 있도록 해드리죠. 멀쩡한 꼴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 쓰러져있는 것보다야 살 확률이 대폭 늘어나지 않을까요?”
 “마치 이쪽으로 향한 탈론과 카타리나를 죽이지 않기라도 했다는 말투로군.”
 “아, 죽이진 않았어요. 마침 타워가 카타리나를 공격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르블랑의 지배권을 이 덜떨어진 놈에게서 가져왔거든요. 지금 이 르블랑은 뭐랄까, 타워와 넥서스에 강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걸 이용하면 타워도 조종할 수 있답니다. 이렇게요.”

 콰광!

 르블랑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쌍둥이 타워의 동력원 수정이 동시에 터졌다. 넥서스를 감싸고 있던 최종 보호막이 아침 안개처럼 스러지자 넥서스가 그 자태를 오롯히 드러냈다. 카타리나와 탈론은 그 넥서스 바로 아래에 있었다. 탈론은 결국 배의 상처가 벌어졌는지 옷을 피로 물들이며 죽은 듯 쓰러져 있었고, 카타리나는……. 잭스는 으득 이를 갈았다. 카타리나의 두 다리는 처참하게 그을려 있었다. 르블랑은 카타리나를 힐끗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카타리나를 향해 타워가 마력의 탄환을 발사한 건 맞지만, 제가 좀 궤도를 비틀었죠. 제가 지배권을 가져오기 전 르블랑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 다리만 맞도록요. 근데 카타리나는 정말 뼛속까지 녹서스 사람이더군요. 이 단검 보이죠? 탄환에 맞기 직전 그녀가 내게…아니 이 르블랑에게 던진 거예요. 비실비실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긴 했지만, 솔직히 그 정신력 하나만큼은 대단했어요. 어머 잡담이 길었군요. 어쨌든 내 쪽에서 내걸은 것은 이거에요. 어때요, 지금 당신에게 놀랄 정도로 좋은 요구 조건이죠?” 

 르블랑이 남자를 찌를 때 썼던 바로 그 단검을 휙휙 돌리면서 말했다.

 “그럼 내게서 뭘 바라지?”
 “내 충성스런 꼭두각시 하나가 전쟁학회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소환실의 수정구 하나를 폭탄으로 바꿔놨습니다. 전쟁학회를 달까지 날려 보낼 정도로 강력한 걸로 말이죠.” 
 “뭐, 뭐라고……?!”
 “후후, 끝까지 들어봐요. 당신, 소환되기 전 대기했던 곳이 전쟁학회 내부의 대기실이었죠? 그 폭탄의 카운트는 정확히 당신이 역소환 되는 순간부터 시작할 거예요. 제한 시간은 30분. 그 안에 찾아서 그 수정구의 술식을 풀면 됩니다. 술식을 푸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당신의 그 ‘푸른 불꽃’……. 그걸 수정구에 넣으면 된답니다. 물론 충분할 때까지 말이죠. 당신의 목숨이…간당간당할 때까지요.”

 말을 마친 르블랑이 가슴에 박혀 있던 커다란 수정 조각 하나를 쑥 뽑아냈다. 찌지직거리며 살점이 수정 조각에 딸려 나왔지만, 르블랑은 전혀 통각을 느끼지 않는 듯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았다. 곧이어 르블랑의 손에 들린 그것은 콰직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그와 동시에 넥서스의 수정에 투둑거리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넥서스가 터지고 있었다. 카타리나와 탈론이 희미한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건 르블랑도, 그리고 잭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협곡에서 한 쪽의 넥서스가 터짐에 따라 챔피언들의 역소환이 시작된 것이었다. 르블랑이 가슴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잭스를 돌아봤다.

 “한 가지 더, 만약 그 수정구에 불꽃을 주입하다가 도중에 멈추거나하면 당신의 불꽃까지 머금은 수정구는 원래 위력보다 배는 더 크게 폭발할지도 몰라요. 그러니 부디 온 몸을 태우는 그 순간까지도 불꽃의 주입을 멈추지 마시길.” 
 “…….”
 “말했죠? 절대 당신을 곱게 죽이지 않겠다고. 만약 당신이 살아남는다 해도…당신이 폭탄을 막고 전쟁학회 내부에서 이번 소동을 겨우 막는다 하더라도, 전쟁학회는 내외부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 테고 한계까지 불꽃을 남용한 당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겠죠. 지금은 그거로도 충분해요. 절대 곱게 끝낼 순 없죠, 아무렴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아붙이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의 구렁텅이 밑바닥으로 처넣은 뒤에, 당신 눈앞에서 전쟁학회를 불사르며 당신의 처형식을 거행할 거에요.”
 “네 포부 따윈 내 알 바 아니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나?”
 “후후, 얼마든지요.”
 “넌 이번 습격에서 나뿐만이 아니라 미스 부벨르까지 노렸다. 왜지? 네 말대로 전쟁학회와 나는 네 복수의 대상이겠지만, 미스 부벨르…아니, 소나라는 소녀는 네게 있어 전혀 상관도 없는 인물일텐데 말이야.”
 “…….”

 이번엔 르블랑 쪽에서 입을 닫았다. 그녀의 표정은…뭐라 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잭스의 그 말 한마디로, 처음으로 그녀의 표정에 증오 이외의 감정이 서렸다. 증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슬퍼보이는 그런 기묘한 표정이었다. 그래, 말하자면…잭스와 마주하고서 처음으로 그녀가 지은 ‘인간다운’ 표정이었다.

 “…글쎄요.”

 르블랑은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잭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처럼, 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허공을 향해 있었다.
 “다른 건 전부 답해드릴 수 있어도 그것만큼은 답해드리지 못하겠군요.” 그녀가 너무 속삭이듯 말해서, 마지막 말은 잭스의 귀에 닿지 않았다. “지금은 말이죠.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아직은…….”
 “뭐라고?”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소나 부벨르를 수중에 넣으려는 건 그냥 제 개인적인 용무라고 해두죠.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두세요. 지금은 그녀도 놔 드리죠. 전 모두를 놔주겠다고 했고, 한 입으로 두 말할 정도로 격이 없는 자가 아니니까요.”

 르블랑은 그렇게 말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아니 그녀를 조종하고 있는 자가 왜 쓴웃음을 짓는지, 왜 소나의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그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을 짓는지 잭스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한순간 뿐, 다시 그녀가 잭스를 바라봤을 때엔 그 기묘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예의 그 고압적인 미소만 입가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작별의 시간이로군요, 잭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건강’챙기시길.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말이죠!”

 말을 마친 르블랑은 깔깔거리며 소름끼칠 정도로 유쾌하게 웃어재꼈다. 꼭두각시 신세로 입에서 피를 토해내면서도 깔깔거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카타리나나 탈론보다도 더. 유쾌한 듯이 웃던 르블랑은 결국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고 그렇게 실 끊어진 인형처럼 아무렇게나 엎어졌다. 그리고 그녀도 움직임을 멈춘 채, 폭풍이 한바탕 할퀴고 지나간 전쟁터 속의 풍경으로 동화되어버렸다. 이제 잭스만이 이 폐허 속에서 서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모두가 쓰러지고 자신만 서 있는 광경. 잭스에게 있어서 이 광경은, 지긋지긋한 그 옛날의 전쟁터를 떠올리게 했다.

 순간 무릎에서 힘이 쭉 빠지는 걸, 잭스는 사력을 다해 가로등을 땅에 꽂으며 버텼다. 아직 쓰러질 수 없었다. 아직, 아직은……. 그는 잇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며 걸음을 옮겼다. 소나가 있는 곳으로, 그녀와의 계약을 완수하기 위해.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

 
 툭, 하고 돌조각 떨어지는 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하자 잭스는 스르르 눈을 떴다.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진, 단조롭고 어두침침한 방. 틀림없이 전쟁학회의 챔피언 대기실이었다. 그는 쇳덩어리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역소환이 성공한 것이었다.

 “쿨럭.”

 목울대를 넘어 피가 넘어오자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면을 슬쩍 들었다. 그는 조용히 피를 토했다. 피는 마치 묵직한 수은처럼 그의 입을 넘어 주르륵 떨어졌다. 피맛이 느껴지질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미각까지 맛이 가버린게 분명했다. 이러다 정말 죽겠는걸, 잭스는 한쪽 손으로 입가를 스윽 닦으며 투덜거렸다.

 잭스는 벽에 기댄 채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르블랑의 말대로라면 이미 카운트는 시작되었을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여기서 소환실까지 어떻게 가는지 대강이나마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쟁학회가 만들어지기 전 얼마동안 레지널드 애쉬람과 어울리고, 전쟁학회 설립 후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챔피언을 하며 겪었던 온갖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피들스틱 사건으로 폐쇠된 소환실 하나는 논외로 치고 사용하는 소환실은 총 다섯 개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베사리아가 말한 대로 국가 간의 이익 다툼으로 벌어지는 리그에 사용될만한 곳은…동쪽 2구역의 소환실 두 개 뿐이었다. 서둘러야했다. 그의 원래 걸음대로라면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지금 속도로 봐선 20분이 걸려도 도착할까 말까했다. 그리고 르블랑은 두 소환실 중 어느 하나에 폭탄이 있다고 꼭 찝어 말해주지 않았다…….

 “…확률은 동전 던지기라 이건가. 예전부터 이런건 베사리아가 전문이었는데 말이지.”

 그는 실없는 농담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실없는 농담에 반응하기로 한 듯…….

 [잭스? 설마…당신이에요?]

 그의 머릿속에 오랜 악우이자, 술친구이자, 그리고 이 상황에선…마치 한 줄기 희망의 빛과도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사리아의 목소리였다. 
















잡담

0. 입벌려 14화 들어간다아ㅏㅏㅏㅏ

1. 당분간 소나는 턴 엔드고 베사리아의 매력에 빠져보세요

2. 페이지 게시글 제한이 2개에서 4개로 늘어서 기쁘네요.

3. 13화랑 연계해서 보면 재밌을지도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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