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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외전: 가로등과 검(1)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5 개
조회: 3136
추천: 9
2016-09-05 11:49:40

#. 잭스


 

 멀리서 아련하게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하늘은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었고, 가죽 샌들을 통해 느껴지는 땅의 감촉은 단단하고 거칠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모래먼지가 일었다. 주변에 생명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심지어 작은 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그는 홀로 서 있었다.

 

 꿈이군, 잭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꿈을 그리 자주 꾸는 편은 아니었다. 용병 시절에도 잠은 그저 체력 회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꿈이 뭔지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어떤 낭만이나 환상 따위는 겨자씨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룬 전쟁이 끝나고 챔피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생 꿀 수도, 꿀 생각도 없었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만큼 자신의 신경도 많이 무뎌진 것이다, 라고 좋게좋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꿈이란 것이, 죄다 악몽에 가까웠으니까.

 

 

 그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땐, 더 이상 황야는 텅 빈 공간이 아니었다.

 

 

 쇠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칼이 휘둘러지고 누군가의 몸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와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실실 웃는 소리가 어지럽게 섞여 그의 고막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가면에 난 구멍 사이로 잭스에게 보이는 풍경은, 그저 시체만으로 뒤덮인 광야일 뿐이었다. 수천수만의 시체 가운데, 그만이 홀로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피로 목욕이라도 한 것 마냥 잭스의 온 몸은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참상에 대해 눈을 감지도 않았다. 그저…조용히 견딜 뿐이었다. 그는 이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그와 가까이 있던 시체 하나가 전기라도 통한 듯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쓰러져 있던 시체들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우뚝 서 있는 잭스만을 제외하고, 온 천지가 지진이라도 난 듯 부르르 떨었다. 천천히, 하나 둘 쓰러져 있던 시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배에 구멍이 뻥 뚫려 내장이 죄 쏟아진 시체부터, 한쪽 팔이 무딘 칼로 여러 번 내리친 듯 뜯겨져나간 시체, 머리가 반쯤 함몰된 시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사자의 대군이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잭스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피할 마음도 없었지만 사방에서 다가오는 통에 피할 구멍도 없었다. 피 냄새, 피에 절어 녹이 슨 칼의 냄새, 시체 냄새가 한데 뒤섞여 그의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얼굴이 반쯤 날아간 병사 하나가 잔뜩 녹슨 칼을 그를 향해 겨눴다. 그리고 그의 심장을 향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내리 찌르는 순간-

 

 

 펑 하고 공기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어느샌가 황야는 새파란 불꽃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 세상에 연옥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풍경일까. 

 

 시체도, 땅도, 하늘도, 모두 새파란 불꽃에 삼켜져 스러져가는 세상. 그 가운데 오직 잭스만이 홀로 서 있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이런 풍경을 봤다면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추위에 몸을 으스러지듯 끌어안았을 것이다. 온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모든 것이 불타며, 살아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이 홀로 남아있는 세상……. 그것은 분명 누구라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외로움에 휩싸여 타오르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잭스는 여전히 그 광경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고, 그 괴로움을 받아들이며 이 꿈이 끝날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이 광경을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할 권리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업보였으니까.

 

 

 

***

 

 

 

 “이보슈, 용병 양반! 다 왔수다.”

 

 가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귓전을 때리는 늙은 농부의 갈라진 목소리를 느끼며 잭스는 눈을 떴다. 꿈이란 것들이 으레 그렇듯, 그가 눈을 뜬 순간부터 꿈에 대한 기억은 아침 안개가 스러지듯 스르르 사라져가고 있었다. 약간 남아있는 상념-잭스는 꿈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머리를 한 번 흔들고선 짚단이 가득 든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손엔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해빠진 황동 가로등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세월의 파도가 굽이치듯 주름이 깊게 진 농부는 한쪽 손을 들어 왼쪽의 돌담길을 가리켰다.

 

 “여기서 저쪽 길 따라서 죽 가면, 늦어도 점심 때 즈음해서 데마시아에 도착할 거유.”

 “고맙소 노인장. 이건 사례요.”

 

 잭스는 품속에서 구리 동전 몇 닢을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지만 늙은 농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선 말머리를 돌렸다.

 

 “일 없수, 용병의 피 묻은 돈 따윈 안 받는 주의라.” 늙은 농부는 눈곱 낀 눈으로 잭스를 힐끗 쳐다보고선 말을 이었다. “그나마 당신네가 정의의 전장인지 개똥인지 하는 데에서 뭐라던가, 전쟁이 안 일어나도록 몸 좀 굴리고 있다고 해서 특별히 선심 쓴 거요. 빌어먹을 아들내미 덕분에 보기도 싫은 그 정의의 전장이란 영상을 억지로 몇 번 본 적이 있었거든.”

 “…….”

 “그럼 살펴 가슈.”

 

 노인은 그렇게 떠났고, 잭스는 두 갈래길 사이에 남겨졌다. 멀어져가는 짚을 한가득 실은 수레를 보며 그는 손에 들린 동전 몇 닢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피 묻은 돈이라…….”

 

 그는 품속에 다시 동전을 쑤셔넣고는, 가로등을 어깨에 걸치고선 천천히 돌담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 나무들 사이로 우뚝 솟은 데마시아의 성곽이 보이고 있었다.

 

 

 

***

 

 

 잭스의 인간관계는 극히 협소했다. 술친구인 그라가스와 그나마 자주 교류하는 오랜 악연인 베사리아, 멘드레이크를 제외한다면 실상 이 대륙에서 그가 ‘친구’라고 부르는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리그의 챔피언으로서 움직일 때를 제외하고는 쇠가시 산맥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으며, 가끔씩 사적인 일로 나온다 해도 가까운 마을에 들러서 설탕이나 칫솔 등 꼭 필요한 생필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전부였다. 그런 그가 데마시아같은 큰 도시국가에 일부러 발을 들인다는 일은, 그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흥밋거릴 찾아 헤매는 호사가들인 데마시아의 귀족들에게나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좀처럼 실제로 볼 수 없는 챔피언을 보게 되는 기회를 그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챔피언 님! 저희 아르망스 가문에 오시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무슨 소릴! 저희 핀툭 가문에서…….”

 “…………….”

 

 그의 입장에선 최대한 조용히 왔다고 자부했건만(심지어 데마시아에 도착해 여관을 고를 때도 제일 구석지에 있는 여관을 골랐다),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데마시아 상류층의 내로라하는 가문들의 하인 떼가 여관 앞에서 농성하다시피 진을 치고 있었다. 모든 챔피언들이 이렇게 열렬한 대접을 받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잭스라는 챔피언은 리그의 최초 17인 원로 챔피언 중 한 명이면서도 챔피언이 된 경위, 과거, 진짜 얼굴, 사생활 등 거의 대부분의 신상이 베일에 싸여있는 미지의 챔피언인지라 그 자체로 귀족들의 살롱에서 엄청나게 흥미있는 이야깃거리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잭스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주인장, 저들 좀 쫒아낼 수 없소? 이거 원 식사를 못하겠군.”

 “아이고, 저 지체 높으신 귀족 나으리들의 하인 분들을 어떻게 제가…차라리 저들을 따라가시는게 어떠실런지요? 아무래도 이런 누추한 여관보다야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결국 참다못한 잭스가 방에서 먹던 조잡한 식사를 내팽개치고 다시 가면과 두건을 쓴 채 아래층까지 내려왔건만, 수수깡처럼 빼빼마른 주인장에게서 들려오는 건 비굴한 대답뿐이었다. 그나마 저들이 여관 내로 우르르 몰려와서 잭스의 방문 앞에서 고함을 지르지 않는 이유는, 실제로 그 용감한 짓을 감행한 하인 하나를 잭스가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서 여관 밖으로 내동댕이쳤기 때문이었다. 잭스는 저들을 따라갈 생각 따윈 결코 없었다. 그 잘난 귀족 나으리들의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질문 공세와 자신을 무슨 신기한 동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쳐다보는 시선이 딸려오는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잭스가 정말로 저들을 전부 반쯤 죽여놔야 사태가 정리되려나, 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갑자기 밖에서 시끄럽게 들려오던 아우성이 뚝 하고 멈추더니, 그가 ‘한결 낫군’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낡아빠진 여관 문이 쾅 소리를 내며 힘껏 열렸다.

 

 “널 로렌트 가문으로 초대하겠다, 잭스.”

 

 잭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목소리의 주인공의 외모에 넋이 빠졌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쉽게도’ 아니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와 자신을 둘러싸는 한 무리의 기사들이 일으키는 먼지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예의 따윈 좁쌀만큼도 차리지 않으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고고하고 자신만만한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세상에, 설마설마 했는데 쪽수로 밀어붙이는 놈들까지 있을 줄이야. 잭스는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초대? 왜, 거절이라도 하면 칼이라도 뽑으려고 그러시나?”

 “설마, 이정도 인원으로 네놈을 제압하겠다는 생각 따윈 애초에 없었다. 물러서라, 내가 안 보이지 않느냐.”

 

 몇몇의 기사들이 한쪽으로 빠지자 그제서야 잭스의 눈에 그곳에 서있는 소녀 한 명이 들어왔다. 나이는 많아봐야 십대 후반 정도.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듯한 새까만 흑발에 특이하게도 앞머리 일부분만 불사조 깃털이 내려앉은 듯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암록색 눈동자는 마치 매의 눈과 같이 날카로웠는데, 오만함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눈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나긋나긋 하다기보단 날렵한 몸의 곡선에서부터 그 몸의 굴곡을 드러낼 정도로 딱 맞춰 입은 검은 가죽 갑옷, 소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손질 잘 된 레이피어로 가면 속에서 잭스의 시선이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자세를 훑어본 잭스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칼 좀 만져본 꼬맹이로군.

 

 “나는 한사코 혼자 가겠다고 했는데 가문의 어른들이라는게 말이지, 이렇게 혹을 붙여주시더군.” 어린 그녀의 입에서 예의 그 고압적이고 유려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쨌든, 다시 한 번 말하지. 널 로렌트 가문으로 초대하겠다.”

 

 로렌트 가문이라, 잭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로렌트 가문은 데마시아의 대귀족임과 동시에 검의 명가로 이름이 자자한 곳이었다. 특히나 그 가문 막내딸은 검술에 환장을 해서 데마시아에서 칼 좀 쓰는 사람치고 그녀와 겨뤄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어쩐지 귀족치고 칼 좀 만져본 것 같더라니, 잭스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 소녀의 이름은…….

 

 “설마 네 녀석이 피오라 로렌트냐?”

 “네 녀석이라는 말이 좀 거슬리지만, 어쨌든 그러하다.”

 

 피오라는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정작 자신이 훨씬 나이많은 잭스를 하대하고 있다는 생각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난 너와 겨뤄보고 싶다. 전쟁학회에서 공인한 ‘최강’이 도대체 뭔지 궁금해서 좀이 쑤실 지경이라서 말이지. 아, 물론 초대에 응한다면 로렌트 가문에 걸맞는 최상의 대우를 약속하겠다. 쓸데없이 네놈을 처음 보는 동물 취급하며 이것저것 물어보지도 않을거야……. 어때, 밖에 있는 저 어중이떠중이들이 내세운 조건에 비하면 내 쪽이 훨씬 더 좋을텐데? 부디 후회할만한 선택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피오라는 무슨 대단한 선심이라도 써주는 것처럼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잭스에겐 그 나물에 그 밥처럼 피오라도 밖의 하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으리으리한 대우 따위가 아니라 그냥 여기서 할 일을 마칠 때까지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피오라 특유의 고압적이고 오만한 태도가 그의 신경을 툭툭 건드리고 있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어오며 닳고 닳은 용병인 잭스라 할지라도, 한참이나 어린애에게 네놈네놈 소리를 듣는 것은 그다지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기분 좋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노련한(또는 영악한) 용병답게 잭스는 이 귀찮은 꼬맹이를 떼어버릴 묘안을 생각해냈다.

 

 “보아하니 날 초대하는 것보다 겨루고 싶은게 목적인 듯싶은데. 그럼 이렇게 하는게 어떠냐? 내일 볼일을 마치면, 내가 내 집까지의 약도를 그려서 네 가문의 하인에게 주도록 하지. 아니면 약속 날짜를 정하면 그날 네 가문을 방문하는 방법도 있다. 그때는 정말 원없이 싸워주지.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

 “흥, 그렇게 해서 빠져나갈 생각인데 어림도 없다, 잭스.” 피오라가 눈을 차갑게 번득이며 말했다. “애초에 네놈의 집은 쇠가시 산맥 쪽이 아니더냐. 네가 약도를 제대로 그려준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설사 그려준다 한들 내가 네놈 집을 친히 방문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더냐? 명예를 건 약속도 마찬가지지. 네놈, 명예를 건다는 약속은 절대 안 지킨다고 들었다.”

 

 “의심도 많…….” 잭스는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받아치려하다가, 기묘한 위화감에 말을 딱 끊었다. “잠깐, 그 얘기는 어디서 들은거냐?”

 

 당연히 보이지 않을 터이지만 가면 속 잭스의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잭스는 챔피언으로서 모든 신상정보를 전쟁학회에 비공개로 등록해 놓은 상태였다. 근데 한낱 도시 국가의 귀족 어린애가 자신의 집 위치라던지, 심지어 자신의 세세한 버릇까지 어찌 속속들이 알고 있단 말인가? 살아온 환경이 환경인지라 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거주지가 밝혀진다는 일은 매우 예민한 문제였다. 수상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귀찮음이 조금 다신 대신에 경계심이 뭉클뭉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후회할만한 선택은 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네놈에 대해선 속속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 네놈이 무엇 때문에 데마시아에 왔는지도 말이야.”

 

 그의 의중이 변한 것도 모른 채 피오라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 미소를 씨익 지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제 목을 죄고 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지금 피오라가 잭스의 계획-즉 여기 있는 놈들을 다 때려잡고 그녀를 납치해서, 어디서 자신의 신상 정보를 얻었냐고 심문하는 계획에 대해 약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만 있었다면…그리 여유만만한 미소는 짓지 못했을 터이다.

 

 하지만 잭스의 그 의심과 계획은, 서 있는 기사들 뒤에서 조심조심 고개를 내미는 익숙한 지인(또는 지독한 악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지도 말았다. 더불어 잭스는 지금 이 소란에 대한 원인도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행히도, 그리 기분 좋은 예감은 아니었다. 어쨌든…불안감을 억누르며 잭스는 그 ‘지인’ 에게 말을 걸었다.

 

 “…베사리아? 여긴 어쩐 일이오?”

 “어쩐 일이긴요, 당연히 당신이 부탁한 ‘그 일’ 때문이죠.”

 “그건 알고 있소. 내 말은 당신이 여기 ‘왜’ 있냐는 거요. 지금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호호, 그건 여기 로렌트 양이 설명해주실 거예요.”

 

 베사리아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품위 있게 ‘호호’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차라리 귀신의 눈을 속이랴, 그녀와 좋든 싫든 10년 이상의 세월을 알고 지낸 잭스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품위 있고 정숙한 귀부인의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잭스의 눈으로 보자면 지금 베사리아는 ‘엄청’ 당황하고 ‘무진장’ 난감해하고 있었다. 피오라는 베사리아가 마치 든든한 아군이라도 되는 것 마냥 미소를 보내고선 말했다.

 

 “콜민예 상임의원님과는 왕실 직속 경매장에서 우연히 마주쳤지. 때마침 흥미 있는 물건이 왕실에서 매물로 나와서 말이야. 그런데…우연인지 모르게 지인에게 부탁 받은 물품이라고, 내가 노리던 매물을 상임의원님이 아주 관심 있어 하시더군. 그 지인이 잭스 네놈이란 걸 알았을 땐…그제서야 네놈이 데마시아에 발을 들였단 소문이 이해가 가더군.”

 

 피오라가 옆을 향해 살짝 고갯짓을 하자 시종 하나가 그녀에게 길쭉한 나무 상자 하나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조금 낡고, 갈겨 쓴 듯한 필체의 글씨가 적인 누런 종이 쪼가리 하나가 붙어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아무런 특징도 찾을 수 없는 상자였다. 그러나 그 상자를 본 순간 잭스는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하며 숨을 훅 들이켰다. 피오라가 상자 뚜껑을 비틀어 열자, 거기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술병 하나가 지푸라기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그건 설마……!”

 “그래. 포도주의 명가 브루마블 가문에서 10년에 단 두 병씩만 왕실에 헌납한다는 명주 ‘붉은 달의 아리아’, 그 중에서도 무려 룬 전쟁이 한창이던 CLE 7년도에 만들어진 걸작 중의 걸작이지. 그때 당시 우연히 포도밭 토지에 마력이 깃들어서 전무후무한 최상급의 포도가 열렸다고 했지 아마? 그 최상급의 포도로, 최상급의 장인들이 담가 무려 10년이 넘도록 숙성시킨 포도주라……. 정말 병을 딸 때가 기다려지는군.”

 “………베사리아, 내가 듣기엔 미스 로렌트가 저 술이 마치 제 것인 마냥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 귀가 혹시 잘못된거요?”

 

 잭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조용조용하고 낮았지만 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꽉 쥔 그의 주먹은 지금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이동 등의 면에서 훨씬 용이한 베사리아에게 대리 입찰을 맡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리 낙찰 예상가의 배 이상을 웃도는 돈을 베사리아에게 맡긴 상태였고, 그 돈이라면 저 술을 충분히 낙찰 받고도 남았다. 하지만 지금 꼴이 뭔가. 매물을 뺏긴 걸 보아하니 분명히 또 그 낭비벽이 도져서 딴 데 돈을 썼음이 분명했고 그것도 모자라 저 빌어먹을 꼬맹이에게 자신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았음이 분명했다.

 

 “네 귀가 잘못된게 아니라, 사실이다.” 피오라는 상자를 다시 하인 편에 보내며 말했다. “네놈, 상임의원님을 대리 경매 시키는 것도 모자라 돈까지 제대로 맡기지 않다니 정말 예의라고는 반푼어치도 없구나. 낙찰 예상가가 200만 골드인 물품에 고작 50만 골드밖에 맡기질 않다니…….”

 “하아, 정말 술 한 병이 이렇게 비쌀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의원님 잘못이 아닙니다. 애초에 명주의 가치는 명주를 마셔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법, 애초에 저런 용병의 혀로는…….”

 

 50만 골드, 그 금액을 듣는 순간 잭스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맡긴 돈은 무려 400만 골드였다, 400만 골드! 정황으로 추측컨대, 그렇다면 베사리아는 나머지 350만 골드를 어딘가에 날렸단 뜻밖에 되질 않았다. 저번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어서 엄중하게 주의를 줬는데, 설마 이번에도 또 이럴 줄이야……! 잭스는 정말 이때만큼은 자신의 예감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경매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피오라의 설명에 연신 ‘어머’를 연발하는 베사리아의 모습을 보자니 잭스는 그야말로 배알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원체 고대의 유물이나 보물을 볼 기회가 많은 상임의원이기에, 그녀는 경매에서 물건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거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베사리아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는 격이었다.

 

 “보아하니 이 술을 상당히 염두에 두고 있던 모양인데…어떠냐? 순순히 초대에 응한다면 한 모금 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허락해 줄 수도 있다.”

 “흠, 아쉽긴 하군. 그래, 네 말대로 그 술 때문에 이곳에 온 건 맞다.” 잭스가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술 한 병. ‘무언가 착오가 있어서’ 낙찰 받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괘씸해서라도 술 따위로 네놈과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잭스는 특히 ‘무언가 착오가 있어서’ 부분을 강조해 말하며 베사리아를 노려봤다. 베사리아는 살짝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지만 속으로는 대체 뭐라고 변명을 해야할지 그 좋은 머리로 온갖 변명거리를 지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잭스에겐 그런 베사리아의 머릿속이 유리구슬 들여다보듯 훤하기 그지없었다.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녀의 좋은 꼴 나쁜 꼴 전부 봐온 잭스는 애쉬람을 제외하고선, 그야말로 현존하는 베사리아의 유일한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흐응~그런가? 정말 유감이군. 좋아, 전원,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이건 명령이다.”

 

 하지만 일단 베사리아에게 화내는 건 나중 일이고…피오라의 손에 들린 포도주를 보자 잭스는 다시금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꼈다.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런 명주를 눈앞에서 놓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까운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피오라가 콧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잭스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가로등에 맹세코 절대 호의적인 미소는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악마, 장난꾸러기 악동과도 같은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잭스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피오라가 그대로 술병을 허공이 집어던졌으니까.

 

 

 찰나의 그 순간, 마치 잭스는 시간이 느려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전원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에 멍청한 기사놈들은 정말로 움직이지 않았고 베사리아도 피오라의 갑작스런 행동에 넋이 나간 듯(더불어 잭스에게 할 변명거릴 지어내느라)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돌발 행동에, 잭스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오직 그 술병 하나를 안전하게 받아내기 위해 몸을 날린 것이었다.

 

 

 쿵!

 

 

 “흐음, 과연.” 잭스의 머리 위로 피오라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말하는 ‘고작해야’의 가치를 아주 잘 알았다.”

 “제길…….”

 

 이게 무슨 추태인가, 잭스는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소중하게 술병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빙글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피오라를 보자, 순간 잭스는 이 빌어먹을 꼬맹이를 박살낼 수만 있다면 황금 한 수레를 준다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 좋다. 빌어먹을, 그 잘난 초대에 응하도록 하지.”

 “후후, 이제야 맘에 드는 대답을 하는구나. 좋아, 마차는 이미 밖에서 대기 중이다.” 피오라는 휙 등을 돌려 걸어가다가 슥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원한다면 그 술병은 안고 타도 좋다. 후후, 정말 재미있는 구경거릴 보여주는구나, 네놈은.”

 

 피오라가 킥킥대며 문을 나가자 잭스는 속으로 이를 득득 갈았다.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꼬맹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밑천을 까보인 이상 이쪽의 완벽한 패배라, 그는 별 수 없이 가로등을 가지러 위층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으나…이미 건장한 기사 하나가 그의 가로등을 가지고 나가고 있었다. 무장해제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기분이군, 그는 쿵쾅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사리아를 슬쩍 스치는 순간, 그는 베사리아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낮고 이갈리는 소리를 토해냈다.

 

 “콜민예, 이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나랑 아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봅시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리 베사리아라 할지라도 온화한 가면을 벗고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콜민예…잭스는 정말로 화가 나지 않는 이상 그녀를 성으로 부르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베사리아는 잭스와 같은 마차에 탈 수밖에 없었고, 로렌트 저택까지 가는 내내 잭스의 숨막힐 듯한 무언의 분노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

 

 

 “그래, 도대체 뭘 하느라 350만 골드나 써버렸는지 어디 얘기나 한번 들어봅시다.”

 

 로렌트 저택에 도착해서 저녁식사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던 잭스는, 가문의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베사리아와 단 둘만 남았을 때 비로소 그 입을 열었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지만 연무장 주변을 둘러싸듯 피워놓은 횃불 덕분에 연무장만큼은 대낮같이 환했다. 멀리서 작게 들리는 풀벌레 소리, 잠깐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제외한다면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물론 이 상황은, 절대로 베사리아가 의도한게 아니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피오라는 그녀에게 대련의 참관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고, 저녁까지 융숭하게 대접받은 마당이라 베사리아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게 지금 이 휑뎅그렁한 공터 한가운데에서 잭스와 단 둘이 어색하게 서 있는 이유였다.

 

 “…….”

 

 베사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끝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하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써버린건 써버린건데. 다행스럽게도 잭스가 버럭버럭 소리지르는 사태가 일어나진 않았지만 이건 이거대로 불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그의 친구였던 베사리아의 감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 잭스는 엄청나게 의기소침해져 있는 상태였다. 차라리 잭스가 화라도 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자 베사리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정정하자, 차라리 이게 나았다. 화난 잭스는 정말로 무서우니까.

 

 “미안해요 잭스. 돈은 다음달 연구비가 나오면 꼭 갚을게요.”

 “이미 내가 원하던 것은 물건너갔으니까 돈은 언제 갚든 별 상관없소.” 가면 사이로 잭스의 맥없는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그냥 뭐에 썼나 궁금해서 그러오. 솔직히 말해서 이젠 궁금증이 분노를 앞서버렸거든.”

 

 잭스는 이미 화를 내는 걸 초월해서 맥이 빠질 대로 빠진 모습이었다. 사실 이 술 수집은 잭스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사치스런 취미였다. 그는 술을 수집할 뿐만 아니라 그라가스에게 배운 양조 기술로 직접 술을 빚기도 했고, 때때로 대륙 곳곳에 숨어있는 명주를 찾아 여행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발품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술도 있었으니, 그게 ‘붉은 달의 아리아’ 같은 술이었다. 데마시아 왕실에만 한정적으로 제공되는 술이었기에 그로서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 왕실 경매에서 이 술이 물품으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흥분했으면 베사리아에게 제발 대리 경매 좀 해달라고 애걸복걸할 정도였다. 그 무뚝뚝한 잭스가 말이다! 소위 ‘높으신 분’들만 참여할 수 있는 왕실 경매가 아니었다면 일주일 전부터 경매장에서 노숙이라도 할 기세라 베사리아는 잭스가 보여준 의외의 일면에 선뜻 부탁을 들어줬다. 잭스에겐 여러모로 신세진 일도 많았거니와 낙찰한 하면 그 귀한 술 한 잔 정도는 줄 수 있다는데 그녀가 거절할 리가 없었다. 베사리아 역시 잭스의 영향을 받아 어지간한 애주가였던 것이다.

 

 때문에 잭스가 얼마나 실망해 있는지 잘 알기에, 베사리아는 자기가 뭣 때문에 350만 골드라는 거금을 날렸는지 선뜻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말을 안한다고 사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에 그녀는 조심조심 잭스의 눈치를 보며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걸 산거요?”

 “……네.”

 

 그녀에 손에 올려져있는 것은 다이아몬드였다. 그것도 보석의 왕이라 불리는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희귀하기로 이름난 핑크 다이아몬드. 갓난아이 손톱만한 보석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보석은 빛을 내고 있었다. 횃불의 빛 때문도 아니요 어스름한 달빛 때문도 아니었다. 베사리아의 마력에 반응해서 보석이 저절로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 이걸 발견한 건 행운이었어요. 세상에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 순도를 가진 다이아몬드, 그 중에서도 핑크 다이아몬드가 겨우 350만 골드밖에 하지 않는다니!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번 달 연구비가 동이 나버렸고……아아, 결국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었어요.”

 

 거기까지만 했어도 최악의 사태는 면했으련만. 베사리아는 ‘고작’ 350만 골드밖에 안하는 다이아몬드를 보자 제풀에 흥분했는지 쓸데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잭스가 아무 말도 안하고 묵묵히 있는 이유가 솟구치는 혈압을 못이겨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점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녀의 두 번째 불행이었다.

 

 “도대체 이 안에 어느 정도의 마력이 들어있는지 벌써부터 확인해보고 싶어서 좀이 쑤실 지경이에요. 잭스, 당신도 알다시피 보석에 쌓인 마력원소를 추출하면 대륙의 과거 생태도 어느 정도 예측…….”

 

 

 

 “크으으으으……콜민예에에에! 내가 보석 살 땐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내 돈만큼은 쓰지 말라고 했지 않았소!”

 

 

 활화산이 터져나가는 기세로 잭스가 고함을 지르자 베사리아가 한 대 걷어차인 강아지마냥 목을 콱 움츠렸다. 어찌나 그 고함소리가 커다랬는지 공터 전체를 울리고도 남아 저택까지 닿을 기세였지만, (멘드레이크의 표현을 빌리자면)유독 쓰잘데기 없는 곳에서 철저한 베사리아가 미리 주변에 깔아둔 방음의 마법진 덕분에 저택 사람들이 몽땅 다 튀어나오는 대참사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베사리아 입장에서의 대참사였지 지금 잭스에게 그따위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잭스의 심정은 베사리아가 여자만 아니었어도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패고픈 심정이었다. 그의 주먹이 오늘 두 번째로 소름끼치는 까드득 소리를 내며 푸들푸들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베사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궁금증이 분노를 앞섰다면서요?”

 “그건 뭘 하느라 350만 골드를 썼는지 몰랐을 때 이야기고! 내가 두 번 다시 내 돈으로 보석 따윈 사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당신이 돈 모아서 사란 말이오, 당신 돈으로!”

 “제가 뭐 안 갚은 적 있나요?”

 “갚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규모없게 한번에 왕창 써버리니까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 아니오!”

 

 잭스의 핵심을 찌르는 지적에 베사리아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전쟁학회의 ‘상임의원’으로 있을 때의 베사리아와 ‘일하는 상태가 아닌’ 베사리아는 거의 이중인격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생활상의 차가 심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완벽한 일처리, 절대로 무너지는 법 없는 부드러운 미소에 품격있는 언행 등등이 상임의원으로서의 그녀라면 그 반대급부라도 되는 듯 베사리아의 사생활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이를테면 돈 문제. 요컨대 그녀는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앞뒤 잴 것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사버리는……이른바 ‘충동구매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헤픈 씀씀이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잭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베사리아가 기댈 수 있는 제일 만만한 상대이자 의외로 마음이 약해서 입으로는 궁시렁거려도 결국엔 도와주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저번엔 내게 돈까지 빌려가며 뭘 하나 했더니 평생 입을 옷을 한 번에 사겠다고 옷만 100만 골드 어치를 사질 않나, 한번은 식료품 사러 나가기 귀찮다고 식재료만 산더미처럼 사놓고 시간 동결로 보존한다고 박박 우기다가 결국엔 실패해서 죄 버리질 않나! 거기다 보석, 그래 그놈의 보석! 차라리 그걸 장신구로 쓰려고 사는거면 천만 보 양보해서 용인해 줄 수도 있소. 하지만 그놈의 마력 추출인지 뭔지만 하고 다음날 쓰레기통에 버리는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이오!”

 

 “잭스! 마력을 다 뽑아낸 보석은 껍데기에 불과해요. 그런걸 몸에 걸치고 다니라니, 그건 깡통을 몸에 걸치고 다니란 말과 똑같은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럼 버리지 말고 되팔기라도 하란 말이오!”

 “싫어요! 사람이 양심이 있지 어떻게 다 쓴걸 되팔아요?!”

 “양심?! 지금 내 앞에서 양심이라는 단어가 잘도 입에서 튀어나오나보오?”

 

 베사리아는 (잭스 입장에서 보면 가증스러울 정도로 뻔뻔스럽게)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잭스에게 따지고 들었다. 보석에 대한 입장 차이만큼은 둘 사이의 영원한 대립 중 하나였는데, 베사리아 입장에선 보석은 그저 마력의 저장고에 불과했다. 반대로 잭스 입장에선 무슨 껌이라도 씹는 것처럼 마력만 쪽 뽑아내고 보석을 내팽개치는 베사리아의 모습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이번엔 더 불쾌했다. 귀중한 술을 놓치게 만든 저 조막만한 보석을 베사리아가 마력만 뽑아내고 쓰레기통에 처넣을 것을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엔 나죽었소하고 엎드려 빌어도 모자를 판인 베사리아가 악의에 굴하지 않는 투사라도 되는 것 마냥 당당하게 자신에게 대들고 있다는 사실도 한몫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치솟는 화를 주체할 수 없던 것인지, 그의 입에서 그만 해선 안될 소리가 튀어나와버리고 말았다.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어째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잇값을 전혀 못…….”

 

 “나이요? 아니 지금 나이 얘기가 왜 나와요! 나잇값이란 단어는 당신같은 늙다리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라고요! 저 아직 시집도 안 간 꽃다운 처녀인데 왜 사람 기분 나쁘게 나잇값이라고 해요, 나잇값이라고! 지금 나 애인도 없다고 놀리는거에요 뭐에요? 아니 막말로 내가 뭐 능력이 부족해요 미모가 부족해요! 다 이 갈아마실 상임의원직 때문에 맨날맨날 나만 고생하고! 스트레스 풀려고 쇼핑 좀 하면 또 당신이 으르렁거리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정말 지긋지긋해요! 도대체 애쉬람 그 사람하고 일을 시작한 뒤로 내 인생에서 제대로 되는게…흐흑, 하나도 없어…….”

 

 베사리아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잭스는 속으로 신음성을 삼키며 가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로 베사리아 앞에서 꺼내지 말아야하는 주제 중 하나가 ‘나이’였는데, 그녀와 처음 만났던 10년 전과 비교하면 나이에 대한 얘기는 이미 농담으로 꺼낼만한 주제에서 아득히 벗어나있었다. 현재 그녀의 나이 3X살. 나이 얘기만 나오면 그 자리에서 온갖 불평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결국 분한 듯이 눈물까지 흘리는 이 현상은, 멘드레이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했다. 

 

 여기까지 오면 이미 그녀와의 정상적인 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거기다 어떤 식으로든 달래주지 않으면 아예 토라져서 말도 섞으려고 하질 않고……정신까지 흐트러졌는지 그녀가 쳐놓은 차음 마법진도 해제되고 있었다. 잭스 입장으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돈은 돈대로 날렸지, 가지고 싶은 물건은 가지지도 못했지, 베사리아는 토라졌지, 잘못이라곤 말실수밖에 없는데 이제 그녀를 달래주려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한다. 게다가…….

 

 “숙녀를 울리다니 정말 네놈은 저 녹서스 열성분자들만도 못한 저열한 놈이구나. 이거 혀만이 아니라 귀부인을 대하는 태도마저 글러먹었군. 한심하기 그지없구나.”

 

 게다가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꼭 베사리아가 울면서 주저앉는 순간 연무장에 나타나서는, 또 사람 신경 득득 긁어놓는 피오라인지 뭔지 하는 꼬꼬마까지 상대해야하다니.

 

 “인생이 꼬인건 오히려 이쪽일지도 모르겠소, 베사리아…….”

 

 

 

 

 그의 가면 사이로 오늘 몇 번째인지도 모를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깊디깊게 새어나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밤하늘이 아름다웠다. 마치 그의 처참한 기분을 비웃기라도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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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0. 본편 이전의 일을 그리는 외전입니다. 시즌 1 끝나서 올립니다.


1. 외전은 이번 편인 가로등과 검, 나미 편인 가로등과 달과 파도, 레오나 편인 가로등과 태양, 베사리아 편인 첫만남이 있습니다.


2. 시즌 2 시작하기 전에 외전부터 올리고 할게요.


3. 피오라 일러가 왜 옛날꺼냐면 난 저게 더 맘에 들기 때문


4. 개인적으로 내용적으론 외전 중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외전


5. 표현이나 문체로 따지면 첫 번째로 좋아함


6. 봐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7. 감상 써주심 감사.


8. 그럼 이만 총총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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