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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일지] #2. 먼 바다의 여정 - 4

아이콘 앙리에트
댓글: 1 개
조회: 335
2007-01-22 12:07:03


#4. 거미줄

팔마는 발렌시아 남단의, 발레아레스 제도의 진입로에 인접해있는 섬 위에 세워진 작은 도시였다. 퍼플 세이렌은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 되서야 팔마의 항구에 기항할 수 있었다. 항구관리를 찾음과 동시에 도시의 치안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발레아레스 해적의 두목과 잔당들을 넘겼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길레스는 안도한듯 한숨을 내쉬었다.


앙리에트는 그 후 반나절 정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상처는 에밀리오에 의해 치료되었지만 그 상처가 흉터를 남길정도로 깊은 상처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얼굴 반신을 붕대로 감은 앙리에트는 기항할 무렵쯤 되어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갑판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무리를 하는게 눈에 보임에도 그녀는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눈치 빠른 선원들도 그 모습을 알아차리고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근해에서 상선들을 약탈해대서 골치였는데, 이렇게 소탕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해적들을 인솔하던 군인 한명이 앙리에트와 길레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앙리에트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당신의 공적에 대해서는 큰 도시에 보고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부디 팔마에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군인들과 잔당들을 배웅하고 앙리에트는 선원들에게 하루 푹 쉬도록 명한 후 주점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용하군."

"늦은 시각이니까요."

"아니, 자네가 말야."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틀어 길레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복잡한 낯으로 앙리에트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선장이 다치는 일이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놀랄만한 일이었나?"

"......"

"괜찮아. 꼴불견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얼굴에 그까짓 상처 하나 입었다고해서 인생이 무너지는 것도 아냐. 군인이라면 오히려 영예로울 상처겠지. 눈을 다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으음."

"자네는 잔걱정이 많아서 탈이라니까. 허긴 그런 꼼꼼한 면이 자네를 일항사가 되도록 만들었을지 모르겠지만. 후후."


낮게 목을 울리며 웃은 앙리에트가 아직도 복잡한 기운을 지우지 못하는 길레스의 팔을 가볍게 다독였다.


"따라오지 않아도 돼. 돌아가서 선원들에게 술을 가져다 주게나. 무엇보다 수고한 이들은 그들이니까. 나 때문에 기쁨에 도취될 틈도 없었을테니. 비뚤어지게 마시게 하고 내일 아침 늦즈막히 출발하도록 하세."

"예......"

"그럼 좋은 밤 되게, 길."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의연히 걸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주점 건물로 들어가고서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정신을 차린것은 뒤에서 누군가가 길레스의 어깨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핫, 하고 정신이 들어 뒤를 돌아보자 에밀리오가 시큰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뭐하나, 일항사. 선장님이 뭐 지시하지 않았어?"

"아아. 선원들에게 술을 가져다 주라고 했었다."

"그럼 그렇게 하자구. 옮기는건 도와줄테니. 역시 밤이 좋구만."


배로 돌아가 창고에서 술이 담긴 상자 두 통을 꺼내어 선원들에게 돌렸다. 에밀리오는 옷 주머니와 벨트에 술을 몇병씩 끼고서 마스트 위로 엉금엉금 기어올라갔다. 에밀리오의 부추김에 길레스도 내키진 않지만 마스트 위로 올라갔다.


"술에 취해서 떨어지지나 말게나."

"괜찮아, 난 어지간하면 안취하거든."

"술이 센가보군."

"선장 만큼은 아니지. 마셔."


거절하기도 전에 병을 던져주는지라 별 수 없이 받아서 뚜껑을 땄다. 에밀리오는 마스트 손잡이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고는 물이나 음료수 마시듯이 꿀꺽꿀꺽 마셔댔다.


상식에 벗어나는 인물은 여러모로 부담스럽다. 길레스의 입장에서는 앙리에트나 에밀리오나 둘 다 자신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어도 한참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에게 페이스를 잃어버리는건 당연했다.


"선의는 왜 이 배에 탔나."

"나? 그녀가 배에 탈 선의를 필요로했기 때문이었지."

"그것 뿐인가?"

"뭐 앙리와 알고 지낸건 대략 10년쯤 됐으니까. 그녀가 여급으로 일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알고 지냈었지. 나는 초짜 의사였고, 선의 조수로 일하고 있던 시절이니. 이야 오래도 됐구만. 여튼 이런저런 일로 그녀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그 때부터 늘 '나는 군인이 돼서 내 배를 가질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 그녀에게 언젠가 그 날이 오면 선의가 돼 주겠다고 약속했었지. 진짜로 될 줄은 몰랐지만."


자신이래도 믿지 못할것이다. 여급들은 지친 뱃사람들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작게나마 힘이 되어주는 존재였기에 위로나 농담삼아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었다. 헌데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정말로 군인이 되고 선장이 되었다면?


"늘 농담으로만 말할 줄 알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대꾸했는데 말야. 진심을 알아주지 못한 채로 10년이나 흘러버렸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라도 내가 했던 말을 지키고 싶었달까. 남자의 명예라는것도 있으니까 말야."

"남자의 명예?"

"다른 말로는 오기라고도 하지."


껄껄대며 반쯤 남은 술병을 비워버린다. 장난삼아 한 약속이래도, 상대방이 장난이 아니게 만들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에 따라준다는 오기. 길레스는 이해했다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대가 여자라면 더하다. 남자의 체면이었고 뱃사람의 외고집이었다.

"뱃놈들이 다 그렇지 뭐. 나도 뱃놈이니까 별 수 없는거야. 그래도 그 뿐만은 아니야. 실제로 재미있어보이기도 했고. 앙리가 얼마나 해낼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

"그녀의 과거도 알고 있겠군."

"뭐어. 10년은 짧은 시간은 아니니까. 그래도 만만케 볼 상대가 아니라구. 10년동안 여급으로 지내면서 수 많은 뱃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의 인맥을 착실히 쌓아올렸으니까. 시간은 걸렸지만 천천히 준비를 했었다는 이야기지. 어찌보면 그녀가 쳐둔 거미줄에 단단히 매여진 걸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에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길레스가 에밀리오의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에밀리오는 곧 이죽대며 길레스를 돌아보았다.


"자네도 거미줄에 걸린거야, 불쌍하게도."

"......"

"사랑에 빠진거랑 비슷한 기분이랄까, 정신없이 허우적 대다가 어느순간 돌아보면 정교하게 단단하게 짜여진 거미줄 위에 꼼짝없이 매여진걸 알게되지.

뭐 자네의 기분이 이해가 안가는건 아냐. 여자란 동물들이 배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던 때가 있었다는게 신기한 기분이 들 정도지. 아직도 그걸 지키는 배들도 있긴 하지만. 그게 선원이건 선장이건 여자란 동물은 만만하게 볼게 못된다 이거야."

"이미 늦었다는 건가?"

"뭐 자네는 아직. 고민할 여지가 남아있다면 당장에라도 내려서 어디론가 잠적해버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진심어린 충고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길레스의 상식을 벗어나는 이 남자는 그저 자신의 고민과 번뇌가 그저 즐겁게 보이는걸지도 몰랐다. 조금 거북한 느낌으로 술 한병을 다 비우고 마냥 흥겨운 에밀리오를 뒤로한 채 마스트에서 내려왔다. 선원들이 시끌시끌하게 모여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들도 거미줄에 걸린 것일까. 어딘지 속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에밀리오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간의 대화나 행동등을 미루어 보면 이미 늦었다. 있는대로 말려버렸는데 늦지 않기는 뭐가 늦지 않았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길레스는 억울한 마음으로 빈 병을 바다에 힘있게 던져버렸다.



"아- 정말! 생각해보니 또 길이라고 불렀군!"


오갈데 없는 분풀이를 해대며 히스테릭하게 발을 구르는 길레스를 마스트 위에서 내려다 보던 에밀리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맘 여린 일항사는 '일항사의 명예'에 스스로 짊어지지 않아도 될 '남자의 명예'도 혼자 지고 끙끙대고 있었다. 자괴하고 자폭하고 자멸한 후 다시 자가회복하는 과정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누구보다 즐겁게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앙리에트 본인일 것이다.


다음날 길레스가 이름으로 앙리에트에게 삐친듯 항의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20051021 ra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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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대해로의 한걸음으로 이어집니다.^^ 즐감하셨길-
천천히 잡고 놀다보니 느릿느릿하네요.;
기뢰랭작은 언제하고 군렙 올린다지 ㄱ-;

- 앙리에트

Lv4 앙리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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