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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주]The Line of Battle 3.전술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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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14
2007-01-23 09:58:08



* 네이버블로그의 석모도주님이 올려주신 글입니다.
* 원 글에 대한 개제 허가를 받은 상태이며 제가 직접 원본 글과 이미지를 받아 올립니다.
* 좋은 글을 올려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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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설명한 전열전술은 영국 함대가 포격 거리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대승리는 아니라도 최소한의 승리는 보장해 주었다. 양 함대가 서로 전열을 유지하고
타격전을 벌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함대원의 훈련과 기율이었다.


당시의 주조방식으로 만든 활강식 전장포는 그 위력 면에서 제법상의 한계가 있었고
포탄 또한 작렬탄 등 목조함에 치명적인 포탄이 아직 개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둥근 주조포탄을 사용할 뿐이었다.


반면 전열함의 경우 일정 수준의 덩치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전열함을
함포사격만으로 침몰시키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전열함끼리의 싸움은
거듭되는 포격으로 발생한 파편효과로 승무원의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부상해서
함선의 기동이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이어졌다.


지근거리에서 서로 함포사격을 해대는 일은 상당히 혹독한 일이었다. 목조 선체가 포탄에 의해
터져 나가면서 발생한 나무 파편은 갑판을 휩쓸어서 지옥 같은 풍경을 연출하곤 했다.


이런 포격을 몇 시간씩 주고받을 때 승패를 가늠하는 것은 끊임없는 훈련과 가혹한 기율로
승무원들이 반사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이런 면에서 영국 해군은
다른 유럽 제국에게 항상 우위에 있었다.


따라서 영국 해군은 승리의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전열전술을 예하 함대에게 강력하게 강요하였다.
전투는 반드시 전열을 이루어 행해야만 했고 일단 전열을 이루어 전투에 돌입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전열을 이탈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각 함의 함장 뿐 아니라 함대의 지휘관에게도 엄격한
전투규범을 준수하도록 함으로서 최후까지 전투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전열전술에 관한 기동에 대한 규범을 확실하게 지킨다고 해도
풍상에 위치한 함대가 변덕스러운 바람에 의지하여 풍하에 위치한 함대에게
전열을 이루어 접근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자칫 성급히 공격을 결정하게 되면 전열을 이룬 함대 중 선두 전대나 중앙 전대만이
전투에 돌입하여 각개격파의 위험성이 커지게 되고 반대로 전열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보면 공격 타이밍을 놓치고 적 함대에게 도주를 허용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었다.


1744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중에 발생한 툴롱 해전은
이런 상황에 대한 영국 해군의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 스페인 함정으로 이루어진 연합함대는 28척의 함선을 이끌고
툴롱 항을 출항하였는 바 이를 감시하고 있던 영국 함대 사령관 매튜스Mathews는
60문 이상 전열함 28척, 50문 전함 9척, 40문 이하 소형선과
화공선 12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요격에 나섰다.


영국 함대는 규범대로 풍상의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교전 거리까지 전열을 이루며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예하 함장과 전대장의 나태함으로 고통 받던 매튜스는 더 이상 머뭇거리면
적이 도피할까 두려워 후미 전대가 미처 따라오지 못한 상황에서 그대로 전투에 돌입하였다.


매튜스에게 악의를 갖고 있던 후미 전대장 레스토크Lestock는
뒤미쳐 매튜스와 합류하기는 하였지만 기함에서 ‘전열을 유지하라’ 라는 명령과
‘전투에 돌입하라’ 라는 신호가 동시에 올랐을 때 전열전술에 관한 전투 규범대로
‘전열’ 유지를 우선하여 전투에 돌입하지 않고 전열을 유지하며 방관만 했다.





[ 툴롱 해전도 ]




연합함대의 도주를 우려한 매튜스는 미쳐 전열을 갖추지 못한 채
자신의 중앙전대만으로 연합함대와 전투에 돌입했다.


후미전대 전대장 레스토크는 전열을 유지하기 위해 전투에 돌입하지 않았고
선두전대의 함선들은 전투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전투 후
매튜스와 레스토크 외 11명의 함장이 무더기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무더기 군법회의는 유리한 상황에도 소극적인 전투를 행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연합함대도 전투에 소극적이어서 매튜스는 자신의 중앙전대만으로 스페인 군함
2척을 격파, 포획했지만 전투 후 매튜스와 레스토크, 그 외 전투함 함장 29명 중 11명이
군법회의에 기소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프랑스와 스페인도 상황은 비슷했다).


매튜스는 전열을 깨트렸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레스토크는 규범대로 전열을
끝까지 유지하였으므로 무죄. 11명의 함장 중 1명은 전사, 1명은 실종, 7명은 해임되거나
휴직되었고 2명만이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로 영국의 전열전술은
감히 깨트릴 수 없는 타부로 영국 함대의 사령관들 머리속에 굳게 자리잡게 된다.




영국 해군이 전열전술에 의한 정공법을 고집한데는 이런 해군당국의 입장 외에도
당시의 신호체계에도 일부 기인했다. 전열을 이룬 함대의 전투 지휘는 오로지 깃발신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17세기 말 영국 해군에는 32개의 깃발 신호문만이 정해져 있어
급변하는 전투상황에 맞춘 정교한 전투지휘를 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신호체계가 1778년에는 켐펜펠트Kempenfelt에 의해 1~16까지의 번호로 불리우는
16개의 신호기 두 개를 결합하여 256종의 신호문을 만드는 체계로 발전하였고
1782년 하우Howe는 9개의 깃발을 3개 결합하여 729개의 신호문을 고안하였다.





[ 켐펜펠트의 16개 깃발신호체계 ]




하지만 이 정도로도 신호기에 의한 ‘자유로운 대화’는 불가능 하였다.
이것이 어느정도 해결된 것은 1803년 폽햄Popham이 A~Z까지 대응하는 25개의 신호기
(알파벳 I와 J는 같은 깃발을 사용함)를 지정하여 이를 결합하여 영어 문장을
그대로 옮기도록 한 후였다.


물론 이 경우 너무 많은 기를 계양해야 했으므로
중요 단어 1,000개를 선정하여 이를 3종류의 기를 결합하여 표현토록 했다.






[ 영국 해군의 전열전술 외의 다양한 함대전술 ]



보다시피 반드시 전열을 유지하지 않아도 상황에 따라 함대를 결집시킨다던가
(제일 위 '밀집법') 협공을 가한다던가(가운데 '협공법') 적의 전열을 차단하는 등
(맨 아래 '차단법') 다양한 형태의 전술이 연구되었으나 패배를 두려워한
영국 해군 당국의 전열전술 신봉과 그에따른 해군 지휘관들의 소극적인 태도,
신호체계의 미비등으로 이런 전술은 1700년대 후반에 가서야 서서히 시도되었다.



◈ 관련 글 보기 ◈


[석모도주]The Line of Battle 2.전술변경 보기 [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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